제7장. 레온 프라메트 1세
1
사내가, 아니 콘 왕국을 다스리는 레온 프라메트 1세는 습관처럼 자신의 손가락에 걸려 있는 마령환을 쓰다듬고 있었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하는 버릇이었다.
사내의 안색이 많이 좋지 않아 보였다.
심적인 고통이라도 있었던가. 피부도 푸석하고, 볼도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런 레온 프라메트 1세를 한 노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멈췄던 비명을 5일 전부터 다시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악몽을 다시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주군….”
레온 프라메트 1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주문처럼 떠도는 누군가의 외침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서 썩어라! 그리고 흩어져라!’
‘사죄하라! 사죄하라!’
‘저주 받은 몸의 죄를 영혼으로 갚아라!’
‘내놓아라! 내놓아라!’
‘너의 몸을 내놓아라!’
‘영혼을 바쳐라!’
‘죄의 값을 치러라!’
‘죽어라! 죽고, 또 죽어라!’
‘정화하라!’
‘죽음으로 정화하라!’
저 외침은 자신의 꿈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들려오는 소리였다.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꿈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 느낌. 그 기분. 그 절망감 하나하나.
죽고, 또 죽는다.
항상 죽는 방식은 다르지만, 고통의 끝에서 죽는 것은 동일했다. 잠에서 깨어나도 전신이 구석구석이 아려 올 정도로 근육통이 밀려왔다.
‘근육통이라니….’
지금 자신의 위치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경지는 수화불침(水火不侵)을 넘어서 오기조원(五氣朝元)을 이루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다.
물론 육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정신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꿈에서 죽는 것이라지만, 그 충격은 일어나서도 잔상이 남을 정도로 컸다.
정신이 메마른 사막처럼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입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마령환 때문인가?”
지쳤음에도 지금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상태임에도 레온 프라메트 1세의 강렬한 눈빛은 가시지 않았다.
곰곰이 따져 보니 그런 것도 같다는 생각이 일었다.
자신이 처음 마령환을 끼고 천마신공을 익히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이 악몽을 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이 익히고 있는 천마신공의 단계가 높아지고 강해질수록 서서히 악몽이 사라져 갔었다. 그런데 9성을 넘어서고 다시 이런 악몽이 찾아온 것이다.
이대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며 수련을 계속해 나가다간 주화입마에 빠질지도 몰랐다.
레온 프라메트 1세가 비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정녕 나의 육신을 노리는 것이냐?”
물론 반지가 대답할 리 없었다.
“밀턴.”
“예, 주군.”
“혹시 마령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
밀턴이라 불린 노인이 입을 다물었다.
레온 프라메트 1세의 눈동자에 이채가 흘렀다.
“본 좌의 나약함이 불러온 악몽일 뿐인가?”
다시 질문을 하자 밀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본 노는 아는 바가 없….”
“자네는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로군.”
레온 프라메트 1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밀턴이 오체투지하여 외쳤다.
“소, 송구하옵나이다!”
“말해보거라. 이 악몽의 정체가 무엇이냐? 무엇보다 마령환이 이토록 무거워진 이유가 무엇이냐?”
“….”
“본 좌는 처음에 본신이 지쳐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아니 확신 중이다. 정말 이 마령환이 무거워진 것이리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직도 오체투지하여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던 밀턴이 마른침을 삼켰다.
“어서 말을 해보거라!”
“본 노를 죽여주옵소서!”
“아직도 그딴 소리나 하는 것이냐! 정녕 목이 떨어지고 난 후에 후회할 것이냐!”
“….”
“….”
한참 후, 밀턴이 입을 열었다.
“본 노도 아는 바가 확실치 않습니다.”
“아는 것이 있다면 모두 고하라.”
레온 프라메트 1세는 물 먹은 솜처럼 무겁게 몸을 움직여서는 왕좌에 기대었다.
그제야 밀턴이 고개를 들었다.
“천마신공은 마기를 끌어들여 내공을 쌓는 것입니다. 마령환은 마기로 뭉쳐진 반지로, 마기를 끌어들이는 천마신공과는 상성의 관계를 가진 물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강력한 마기 자체가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그 부작용이 악몽이라는 것이냐?”
“그렇다고 보입니다.”
“단순히 악몽으로 끝나는 것이냐?”
밀턴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령환은 마기의 집합체입니다. 마기를 이겨 내지 못하여 악몽이 시작되는 것일 겁니다.”
“처음에는 악몽을 꾸었으나, 한동안 꾸지 않았었다. 그런데 9성에 오르고 나서부터 악몽이 꿔진다. 그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느냐?”
“그동안은 마기를 꾸준히 흡수가 가능한 상황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럼 지금은?”
“단계에 오르면서 그 이상의 진전을 이끌어내지 못하자, 지금까지 흡수되어지던 마기의 양이 저하되어 뇌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레온 프라메트 1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말이 안 된다. 9성에 올랐다는 것은 마기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마기를 다스리는 내가 마기를 흡수하지 못하여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본 좌의 천마신공은 지금도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본 노의 모자란 추측입니다만….”
“사설은 빼거라.”
“주군께서 9성의 단계에 오르시면서 마기에 대한 오성이 확장되어 더 많은 마기를 받아들이시면서 생긴 부작용이거나, 또는….”
“또는?”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기운을 느끼는 기관이 열린 듯합니다.”
“또 다른 기운? 예를 들면?”
“더 촘촘하고 치밀한 마기라고 사료되옵니다.”
레온 프라메트 1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
“그렇다면 더 많은 마기를 받아들이거나, 다른 기운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생긴 부작용이다, 이것인가?”
“본 노의 짧은 소견일 뿐입니다.”
“흐음….”
밀턴이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을 덧붙이자면….”
“괜찮다. 말해보거라.”
“악몽은 단순한 악몽이 아닐 것입니다.”
“단순한 악몽이 아니다?”
레온 프라메트 1세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긍정의 빛을 드러내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단순한 악몽으로 치부하기에는 본신의 상태가 너무나도 피폐해졌다.
마치 흡혈귀가 새벽녘에 찾아와 피를 빨아 마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중이었다.
밀턴이 한참 고심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일종의 경고인 것 같습니다.”
“경고?”
“예, 주군. 바로 마성이 주군의 뇌리에 어리고 있음을 무의식이 경고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안색이 굳어졌다.
“마성이 뇌리에 어린다….”
그가 이를 으득 갈았다.
“이 상황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찌 되는 것이냐?”
“주화입마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화입마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큰일이 생긴다는 것이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일이라니, 그것이 무엇이냐?”
“아마 희대의 악마가 세상에 강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희대의 악마?”
“그렇습니다.”
“설마 그 악마가 본 좌를 지칭하는 것이냐?”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언성이 높아지자 밀튼이 몸을 오체투지하여 대답했다.
“본 노가 어찌 그런 망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시끄럽다! 어서 본론을 말하라! 본 좌가 악마가 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니, 무슨 뜻이냐!”
오체투지하던 밀턴이 깊은 한숨을 조심스럽게 토하며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그 마성에 눌리신다면 단계적으로 마성을 취하는 천마신공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옵니다.”
“더 쉽게 설명하라.”
“천마신공이란 이성을 유지하며, 강대한 힘을 지닌 마성을 본신의 힘 아래 다스리는 신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데, 마성으로 장악된 육신이라면 그런 단계의 흡수가 필요 없습니다. 무한대로 양껏 마기를 끌어들이게 되겠지요. 이미 9성의 단계까지 오르시면서 발달되어진 육신의 그릇은 마성에 먹힌 마귀에게는 최고의 양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레온 프라메트 1세의 눈썹 사이로 깊은 주름이 어렸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오싹하지 않는가.
이 저주 받은 반지를 빼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12성에 이르고 나서야 마령환을 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밀턴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내가 어찌하면 되겠느냐?”
“우선 최대한 연공을 하시어 10성의 벽을 넘어서시는 것만이 답이라 사료되옵니다.”
“10성이라. 이토록 불안정한 상태에서 너무 과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레온 프라메트 1세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밀턴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나, 작금의 상황으로서는 그것밖에 답이….”
“후후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송구하옵니다, 주군.”
“큭큭큭! 악마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밀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레온 프라메트 1세가 말했다.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악마가 된다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 원해서 악마가 될 테니까. 나 외의 존재 따위에게 눌려서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다.”
“그 말씀은?”
“연공에 들어간다. 당장 준비하라.”
“명을 받겠습니다.”
2
“이 집인가?”
“확실해?”
흉악하게 생긴 열댓 명의 사내들이 담벼락에 붙어 두런거리며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손목이 없는 사내가 양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내가 내 손목을 자른 녀석의 얼굴도 헛갈릴 것 같습니까! 그 자식이 이곳에서 나온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니까요!”
그는 바로 엘리를 구타했던 거렁뱅이였다.
빈 소매로 보이는 팔목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눈과 얼굴은 원한과 독기로 물들어 있었다.
거렁뱅이는 호쿠라는 녀석으로, 고아들을 잡아들여 앵벌이를 시키는 협잡꾼으로 유명했다.
그자의 말에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튼 계산은 깨끗하길 바라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자식만 죽이면 확실하게 처리할 테니.”
거렁뱅이의 말에 한 사내가 입술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우리를 못 믿나?”
그 말에 호쿠가 실실거렸다.
“제가 어찌 브리어트 강도단을 못 믿겠습니까? 브리어트 강도단을 믿지 못하느니, 밀가루로 푸딩을 만든다는 말을 믿지.”
“흐흐흐흐!”
모두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브리어트 강도단이라고 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고 알려진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인신매매에서 마약, 살인, 강도 등등.
이 도시의 범죄는 브리어트 강도단에서 시작하여 브리어트 강도단으로 끝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럼 언제쯤 해결을 볼 수 있을까요?”
“뭐, 오늘 밤 안에 해결을 봐야지. 꼴을 보니 명색이 귀족인데, 어느 정도 귀족인지는 파악해야 되지 않겠어?”
“혹시 귀족이라고 피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큭큭! 죽고 싶나?”
살기를 드러내며 눈을 부릅뜨는 부두목 보텡과 강도단들.
호쿠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캑캑! 제, 제가 겨, 경솔했습니다.”
“흥!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지.”
“쿨럭! 쿨럭!”
호쿠가 자신의 목에서 검이 떨어지자 목에 문제가 없는지를 손으로 확인하고는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고, 고맙습니다….”
“걱정 따위는 하지 마. 우리는 맡은 일은 확실하게 하는 사람들이니까.”
“무, 물론입죠.”
그때 수하들이 두런두런 대화하기 시작했다.
“부두목, 사실 요즘 우리가 조용하긴 했지.”
“조금 난동을 부려서 겁 좀 줘야 하지 않겠수?”
수하들의 말에 부두목 보텡이 턱밑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필요성도 있지. 요즘 우리를 우습게 보는 세력들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맞다구, 부두목. 지금 우리는 과거의 초심을 잃었다니까.”
“맞아, 맞아. 그때는 보이는 족족 다 죽이고 다녔잖아. 그것 때문인지 우리만 봐도 모두 고개를 땅에 처박느라 정신없었고 말이야.”
“캬! 그러고 보니 그러던 때가 있었지. 킬킬킬!”
“자, 과거의 영광은 차후 천천히 돌려도 되니, 우선은 지금 일에 집중하도록 하자.”
히죽거리는 강도단의 부두목 보텡의 말에 수하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강도라지만, 자신들은 프로였다. 돈을 받고 의뢰를 맡은 이상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역시 브리어트 강도단이라는 생각에 호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저택을 훔쳐보던 부두목 보텡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희한하군.”
“뭐가 말입니까?”
“이곳에 귀족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부두목 보텡이 수하들을 돌아보며 의문을 표하자, 수하들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부두목 보텡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사를 왔을 수도 있지. 아니면 별장으로 하나 구입해서 놀러왔을 수도….”
“그렇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보초를 서는 경비병이 하나도 없지?”
그것은 조금 이상했다. 어느 귀족이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병을 들이기 때문이다.
정원 안쪽에서 애완견으로 보이는 개 한 마리가 혓바닥을 길게 빼놓고 헥헥거리며 지나가다가, 정원수에 오줌을 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두목, 이대로 그냥 들이닥쳐도 될 것 같은데요?”
하지만 부두목 보텡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너무너무 이상해. 경비가 이렇게 허술할 수도 있나?”
“없죠.”
“그렇지? 나도 마음 같아선 너희 말대로 그냥 들이닥치고 싶은데 왠지 불안하군.”
“쓸데없는 걱정이우.”
수하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부두목 보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아닌 것 같아.”
“경비가 소홀한 게 걸려서 못 들어가겠다니, 그게 말이나 되우?”
“내부에 대한 파악은 됐나?”
“안에 하녀 셋과 집사 하나가 있는 것 말이우?”
“정말 그것뿐인가?”
수하들이 혀를 찼다.
“부두목, 걱정도 팔자유. 젠장! 소문이 아니라 정말 우리들 문제가 있었구만. 다들 이렇게 몸을 사리니 밑에 놈들이 치고 오는 것 아니겠수.”
그 말에 부두목 보텡이 언성을 높였다.
“이 자식이! 감히 누구한테 그딴 소리를 내뱉는 거냐!”
“그럼 과거의 모습 좀 봅시다.”
“흥! 좋다!”
바로 그때였다. 뭔가 눈앞에서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두목 보텡이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눈앞에 손에 닿으면 베일 것같이 날카로운 얼음 화살이 벽에 꽂힌 채, 보텡에게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보텡만이 아니었다. 다른 수하들 몇몇에게도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얼음 화살이 발아래 박혀 있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브리어트 강도단과 호쿠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 비명을 토했다.
“으힉!”
부두목 보텡이 외쳤다.
“자, 작전상 후퇴다!”
부두목 보텡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하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어머나! 이것도 잘 어울리고, 이것도 잘 어울리네.”
하녀는 옷을 고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엘리에게 입히며 즐거워했다.
벌써 30여 벌의 옷을 입고 벗던 엘리는 지쳐 녹초가 되었지만, 하녀는 아직도 쌩쌩했다.
“이것도 입어볼래?”
엘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게 엘리는 신이 난 하녀의 인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레몬색 드레스를 입은 엘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거울 앞에 섰다.
“그게 마음에 드니?”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어주었다. 귀찮긴 하지만 좋은 사람이란 사실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녀는 엘리가 입은 옷에 맞춰서 목걸이와 머리 리본, 그리고 빨간 구두를 세팅해주었다.
그 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엘리는 움찔했다. 눈빛이 정말로 깨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번에 깨물렸던 볼이 아직도 얼얼하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물릴 수는 없었다.
엘리는 종종걸음으로 하녀의 주위를 벗어나서 문밖으로 나갔다. 하녀는 그런 엘리가 더욱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 하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밖에 개들이 너무 짖어대는군. 시끄럽게시리….”
처음부터 미소 따위는 없었다는 듯 살기가 어렸다.
하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리곤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손가락을 쭈욱 뻗어 밖을 가리켰다.
“차가운 얼음이여, 적의 심장을 서늘하게 얼려라. 아이스 에로우!”
그러자 놀랍게도 하녀의 손끝에서 하얀 기류가 형성되더니, 기다란 얼음 덩어리가 뭉치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콰광!
굉음과 동시에 밖의 분위기를 살피던 하녀는 곧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리고는, 살랑거리는 발걸음으로 엘리의 뒤를 쫓아 걸어 나갔다.
“엘리이이! 이것도 마저 해야지이이!”
3
“뭐, 뭐지?”
“허억! 허억! 대체 뭐가 우리를 공격한 거지?”
부두목 보텡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들도 뭐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화살이 날아왔지!”
“화살? 그럼 지붕 위에 보초병이 서 있는 건가?”
수하들의 말에 부두목 보텡이 살을 붙여 설명했다.
“얼음….”
“얼음?”
“…얼음 화살.”
부두목 보텡의 말에 수하들이 한마디씩 내뱉었다.
“엥? 부두목님, 무슨 소립니까? 얼음이 어떻게 화살이 돼요?”
“말도 안 돼요. 현실성이 없잖아요.”
“분명히 부두목이 잘못 봤을 거라고요.”
모두들 화살 공격을 받은 기억은 있었지만, 날이 저물어가던 와중인지라 그것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눈앞에서 화살을 본 부두목 보텡만이 그것의 정체가 얼음으로 된 화살임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부인하자 부두목 보텡마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부두목 보텡과 수하들을 호쿠가 불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불편한 심기를 입으로 드러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렇게 호쿠가 입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부두목 보텡과 수하들의 생각이 정리가 된 듯했다.
“역시 그렇게 경비가 허술해 보이는 이유가 있었어. 내 감은 틀리지 않는다니까.”
부두목 보텡의 투덜거림에 수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 어린 눈빛을 보내기에 정신없었다.
“부두목은 대단하십니다.”
“우리는 부두목님의 깊은 심기도 모르고 미련하게 무작정 파고들어갈 생각만 했는데 말입니다. 역시 부두목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수하들의 끊이지 않는 찬사에 부두목 보텡의 어깨가 으쓱여졌다.
“여하튼 저곳이 보이는 것만큼 허술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어떻게 할까?”
“아마도 지붕 위에서 화살을 쏘는 것이겠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일 테니 그게 말이 되겠지?”
“저녁에 가면 시야가 흐릿하니, 건물 그림자에 포개어 숨어 들어가면 안 걸리지 않을까요?”
한 수하의 말에 부두목과 다른 수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지원은 필요 없을까요?”
“지금 우리 수가 열두 명이다. 이 정도의 수로 기습을 한다면 떡을 치고도 남지. 걱정 없다.”
호쿠가 말했다.
“그래도 몇 분을 더 불러서 가시는 것이….”
부두목 보텡이 은근한 시선으로 호쿠를 주시했다.
“사람이 추가되면 추가 비용이 생길 거요. 상관없소?”
“헐! 그 돈으로도 모자랍니까?”
“모자라진 않지만, 많은 것도 아니지. 흠흠!”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상부에 고하지 않고 돈을 떼어먹기 위해서였다.
지금 있는 녀석들은 모두 보텡 자신의 심복들로 살살 구슬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여기서 다른 녀석들이 추가되면 자신이 돈을 빼돌렸다는 사실이 상부에 걸릴 수가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누구 밑에서 밑 닦아주고 살 수는 없잖아. 나도 내 사업을 해야지.’
“그래서 추가 비용을 더 내겠다고?”
호쿠가 양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하하! 아닙니다. 어련히 잘해주시겠지요.”
바로 그때였다. 허공에서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고가 너무 약했나 보지?”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급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 누구!”
“누구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 너희 목숨보다 더?”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누구냐! 썩 나와라!”
부두목 보텡이 불안한 시선으로 소리쳤다.
고오오오오!
허공에서 둥그런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어둠의 장막이 걷어지며 허공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의 형태가 서서히 뚜렷해지고 있었다.
목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지만, 눈으로 봐도 확실한 여인이었다.
지금 빛은 여인의 손바닥 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하녀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메이드?”
순간, 녀석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의문을 떠올렸다. 평범한 메이드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빛도 만들어내던가?
그러던 찰나, 부두목 보텡의 고막 속으로 수하 녀석들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갔다.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뭔데?”
“메이드는 원래 하늘을 날 수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냐! 병신아!”
부두목 보텡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하녀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눈앞, 아니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하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대체 뭐하는 년이지?’
부두목 보텡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쯤 하녀의 몸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착지한 후 입을 열었다.
“대충 정리하고 해산하면 봐주려고 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네년은 누구냐!”
순간, 하녀의 눈빛에 살기가 맺혔다.
“네년?”
오싹!
모두의 몸에 한기와 소름이 오르며 전신이 떨려 왔다.
“지금 네년이라고 했냐?”
하녀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꼴깍!
그 말을 한 수하 녀석의 입이 본드라도 붙은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 보고도 몰라?”
“예?”
“하녀다.”
너무나도 자긍 어린 목소리로 하녀라는 말을 외치는 그녀로 인해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하녀가 굉장하게 대단한 직업으로 느껴지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하녀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내가 하녀인 게 불만이냐?”
그때, 수하들의 손에 등이 떠밀린 부두목 보텡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문을 열었다.
“그, 그까짓 사, 사술 하나 부리고 가, 감히 우리 대브브, 브리어트 강도단에게 덤비다니! 간덩이가 밖으로 튀어나, 나왔구나!”
행동과 목소리는 별개 문제였지만 말이다.
용기가 부족하다는 수하들의 말이 떠올라 나름 강단을 부려 본 것인데 오히려 역효과만 일어났다.
하녀가 피식 웃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이구! 무서워라.”
전혀 무서워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한 부두목 보텡은 수하들을 향해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기가 막혔지만, 누구도 뭐라 말하지 않았다.
그런 브리어트 강도단의 모습을 보며 호쿠는 괜히 돈만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바보들과 함께 어울리다니, 자신도 바보가 되는 듯했다.
반면에 저 하녀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는 대체 누구이기에 자신들의 앞을 막아서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문을 하녀가 직접 풀어주었다.
“네 녀석.”
“….”
호쿠가 손목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하녀가 대답했다.
“그래, 너 말이다. 주인님께서 모가지 대신 손목을 자른 것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면 그냥 조용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번거롭게 일을 만들어서 나를 귀찮게 이곳까지 나오게 만들어?”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저 여인의 정체는 지금 자신들이 쳐들어가려고 하는 귀족 집의 하녀였던 것이다.
모두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놈의 집구석이기에 일개 하녀가 이렇게 설치는 것인지 말이다.
뭐,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일개 하녀라고 하긴 뭐하지만….
“우리가 언제 네년보고 밖으로 나오라고 했느냐!”
호쿠의 호기에 하녀가 기특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냉소를 지어 던졌다.
“너희가 우리 저택에 쳐들어온다며?”
“여기 계신 영웅 분들께서 지금 네년의 목을 베고 바로 쳐들어갈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요, 부두목님과 영웅 분들!”
부두목 보텡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무, 물론이지.”
말과 달리 표정은 하기 싫은 대답을 억지로 한 티가 잔뜩 드러난 상태였다.
하녀가 말했다.
“그것 봐. 그래서 내가 나왔다니까. 집 안에서 시체 치우기 귀찮아서.”
“뭐? 무슨 개소리냐?”
“너희가 감히 집 안까지 들어와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마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집사님의 독문 병기에 전신이 토막 나서 사방에 흩뿌려질걸?”
수하들이 웅성거렸다.
“집사라면 그 비리비리하고, 슈트 입은 나이 먹은 할아범 이야기하는 거 아냐?”
“언제부터 집사가 워리어나 토막 살인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지?”
“그것도 독문 병기를 들고 설친다잖아.”
모든 이야기를 총 정리한 호쿠가 다시 앞에 나서서 외쳤다.
“개소리 마라!”
“집사님 성격이 조금 지랄, 아니 다혈질이셔서 너희 같은 놈들이 발을 들이는 꼴을 못 보시거든. 못 믿겠으면 직접 만나보라고 하고 싶은데… 에효! 어쩌겠니. 너희가 만나면 집 안이 피투성이가 될 테고, 그걸 치우는 것은 내가 될 텐데. 내가 이 나이 먹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피나 닦아야 되겠니? 너희가 집 안 청소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모르지?”
너무나 담담하게 썰을 내뱉는 하녀를 보며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호쿠 역시 속사포처럼 쏘아지는 투덜거림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나온 거야. 찾아오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찾아오려 한다면 집 안에서 처리하기 전에 밖에서 정리하는 게 편하잖아.”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의 의아한 두려움도 잊고 분노로 물들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팔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하녀가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년은 단칼에 뒈지고 난 후에야 지금의 시건방을 후회하겠구나!”
부두목 보텡의 외침에 하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후훗! 하긴 네 녀석들이 내 말을 곱게 들어 처먹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지.”
“시끄럽다! 단칼에 죽여주마!”
부두목 보텡과 수하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때, 하녀의 손바닥이 합쳐지더니 양손에서 화르륵! 하며 불꽃이 일었다.
하녀의 한쪽 손바닥이 머리 위로 반원을 그리며 벌어지자, 그 손바닥 사이로 거대한 부채와도 같은 불길이 형성되었다.
화르르르르륵!
하녀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와라. 모두 통구이로 만들어주마.”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부두목 보텡과 수하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신들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꼴깍.
그리곤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시도했다.
하녀가 히쭉 웃으며 말했다.
“늦었어.”
하녀의 신형이 앞으로 쭈욱 쏘아지며 녀석들을 향해 불주먹을 내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