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절대지존
1
안드레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책을 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 물건이 어떻게 시중에 돌고 있는 거지?”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구시렁거리며 한숨을 토하는 중이었다.
안드레이가 보는 책은 바로 그가 과거에 연구했던 자료집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고심할 만도 했다.
놀랍게도 지금 안드레이가 보고 있는 내용은 단약을 만드는 레시피 같은 것이었다.
바로 마하역혼환을 만드는 레시피 말이다!
안드레이는 자신이 아웃 마켓서 구입한 마하역혼환을 들고 한참을 노려보았다.
“대체 누가…? 왜?”
머리가 지끈거리는 안드레이였다.
이것을 만들어낸 공식이 자신의 공식과 비슷, 아니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것을 가져다가 만들었다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자신이 이 물건을 만든 이유가 그들의 의뢰 때문이긴 했지만, 완성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넘기지 않았다.
부작용이 너무 심했던 탓이다.
한 번 먹고 나면 엄청난 마나를 얻을 수 있지만, 약효가 떨어짐과 동시에 폐인이 되어버리는 부작용이었다.
물론 이것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할 소스들을 ‘그쪽’에서 제공하긴 했으니, 자신 아닌 누군가도 이 의뢰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만들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안드레이는 알 수 없었다. 이 약이 원래 그런 약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맞아. 확실해. 이 약은 내 연구로 완성된 것과 일치해. 그렇다면 지금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나와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안드레이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접혔다.
2
“정말 당신이 검황이라 불리는 남궁용민이 맞단 말이오?”
바이널의 물음에 앤디가 대답했다.
“검황?”
앤디는 처음 듣는 호칭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이곳에 자리하고 있던 얀을 비롯한 부선장들도 함께 의문을 표했다.
“동명이인인가?”
바이널의 말에 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런 능력을 가진 존재가 둘이나 존재한다니 믿어지지도 않을뿐더러 낭중지추라 했지. 그런 능력을 가진 존재가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 믿을 수가 없어. 무엇보다 난 이해가 가는 게 고금제일인이며, 검황이라는 칭호는 그가 등선한 후에 지어진 명호로 그가 모를 수도 있는 일이지.”
그 말에 앤디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 검황이라.”
“….”
“내가 죽은 다음에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후후훗! 우후후후후훗!”
앤디의 가벼운 웃음에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들이 존경하는 검황 남궁용민이 저런 자라고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앤디에게 곱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케산이 퉁명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정말 검지의 주인 남궁용민이 맞단 말이오?”
“본 좌가 확실하지.”
“으윽….”
왠지 분한 표정을 짓는 케산과 부선장들이었다.
하지만 곧 그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존경과 경외로 말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자신들이 우상과도 같은 검황의 본신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본신의 능력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과거 어떤 능력을 지녔다 한들 이곳에 환생하면 모든 능력이 지워진 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지식이 있다 한들 과거의 힘을 잃은 상실감에 조금 수련한 후 자포자기하여 타락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여기 있는 모든 이들도 그 상황을 겪었고 말이다.
힘이 있던 자들이 힘을 잃어버리면 그 상실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음을 잡고 수련을 한다 해도 과거의 힘과 지금의 힘이 비교되며 더욱 지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에 강했던 자일수록 더욱 타락하기 쉽다는 말이다.
그런데 검황 남궁용민은 검황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본신의 힘을 거의 다 찾은 듯했기 때문이다.
힘이라는 것은 노력하는 만큼 얻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힘이 얼마였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 온 이상 평등하다.
그러니 지금 이런 힘을 얻었다는 것은 상식 이상의 노력을 해서 얻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깨달음을 갈구하고 수련하며 얻었다는 말이다.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검황이라. 좋긴 하지만, 뭐 지금은 그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그 한마디에 모두들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이 자신의 이름에 대한 자부심과 욕심이 얼마나 큰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란 바로 사람들의 시선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평가해주는 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이름을 만들기 위해 어떤 추잡한 짓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앤디는 그 이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담담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처음에 잠시 헤벌쭉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그 정도는 애교라고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지금 앤디의 입장이라면 펄쩍 뛰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앤디에게 급격히 호감이 상승하는 그들이었다.
자연스레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럼 뭐가 중요합니까?”
바이널의 물음에 앤디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지금이 중요하지 않겠소?”
앤디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음을 말이다.
오는 말이 좋은데 가는 말이 좋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지금이요?”
“그렇소. 과거의, 그것도 전생의 부산물을 가지고 혼자 들떠서 좋을 것이 뭐가 있겠소. 그때의 나도 나지만, 지금의 내가 나인 것을 말이오. 나 혼자 그 사실을 안다고 떠들어봤자 누가 수긍이나 하겠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아무도 말이 없자 앤디가 말을 이어나갔다.
“과거는 받아들이되 지금을 발전시켜 다시 그 이름을 찾은 후에 기뻐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아!”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감탄사를 내뱉었다. 얀도 고개를 끄덕이며 앤디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단합니다.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에도 순식간에 그 마음을 갈무리하여 이 상황까지 정리를 했다니, 역시 검황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군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대였다.
앤디가 웃었다.
“후후! 과찬이오.”
“아닙니다. 우리, 아니 저 같은 경우만 해도 과거의 이름을 지우는 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말이죠.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뭐, 좋게 봐주니 그것까지 아니라 할 수는 없고. 고맙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얀이 앤디에게 질문했다.
“만일 마교가 일어난다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아직은 모르겠소. 지켜볼 생각이오.”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왜들 그런 표정이오? 문제 있소?”
앤디의 물음에 얀이 대답했다.
“문제라니요. 그런 게 아니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조금 당황했을 뿐입니다.”
앤디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내가 무조건 그들을 막아설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구려.”
“분명히 그리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무조건이란 없소. 그들의 길과 내 길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지.”
“그들의 길과 내 길….”
“그렇소.”
“과거 당신의 손에 마교의 계획이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그때의 이유가 있어서였을 뿐이오.”
“그럼 지금은 아닙니까?”
“난 이런 생각을 해봤소.”
“무슨 생각 말입니까?”
“마교라고 무조건 나쁜가?”
“그게 무슨 말이오!”
순간, 사람들이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앤디는 그들의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조용히 대답해주었다.
“물론 그들이 사람들에게 해악을 많이 끼친 것은 사실이오. 그렇다고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단 말이지. 몇몇 사람들은 올바른 생각을 지녔고 말이오.”
“그들을 옹호하는 것이오?”
모든 이들의 인상이 약간 구겨졌다. 그러자 앤디가 대답 대신 말을 이었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막는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그들을 막는단 말인가. 내가 막는다고 그들을 막을 수는 있는가? 마교니까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져야 한다? 내가 그들을 혼내거나, 이리 해야 한다 정정해줄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사람인가?”
“….”
앤디의 말에 모두가 신음과도 같은 침음성을 흘렸다.
얀은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는 나쁘다?
과거, 아니 정확히는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마교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앤디의 말은 가시가 있었다. 뼈가 있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았는가 싶었다.
지금 자신은 옳은 삶을 살고 있는가 싶었다.
아니다. 지금 자신과 자신이 머릿속에 담고 있는 마교는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고 살기 위해 해적질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부끄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떳떳하지도 않다. 누군가의 피 위에서 자신들이 행복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가 말했다.
“물론 마교가 발발하여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면 그 사이에 끼어들 것이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나로서는 그 어떤 행동도 조심할 수밖에 없다오.”
“마하역혼환을 보고도 말입니까?”
“그렇소.”
“그게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앤디가 한숨을 흘렸다.
“물론 나도 추측은 하고 있소. 세상을 어지럽히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오. 하지만 그 추측은 추측일 뿐이라오.”
“이미 세상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힘을 사용하는 것은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지, 마교가 아니지 않소.”
앤디의 단호한 대답에 더 이상의 이야기를 금했다.
얀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검황의 일대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대륙, 그 광활한 대지.
수천 년의 장구한 세월을 바탕으로 황실은 천하의 패자로 군림을 했다.
그 거대한 세상을 무너트린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 세상 속에 또 하나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무림.
자긍심과 한 자루의 검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
그들은 법과 또 다른 체계의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많은 이들이 무림을 대표한다며 정권과 손을 잡아 사욕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세상이 삐뚤어졌다.
물론 아직도 진정한 무인들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모든 물욕을 지우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켰다. 무림이 더 이상 무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은거 기인들의 세상을 무림이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검을 들었다고 모두 무인이라 할 수도 없고 말이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세상에 판을 치고 무림인, 아니 무공을 익힌 사람들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의 개가 되어 수하를 들여 방파를 만들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이슬처럼 목숨을 잃어버리는 권력가들 때문이었다.
아무리 허접하다 해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들조차 무서운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황실 또한 그 아귀다툼에서 안전하다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천자라 한들 찔리면 아프고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니 말이다.
세상은 썩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썩은 세상을 향해 어떤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세상에 밝은 빛을 내리겠다며 일어선 일월신교, 즉 마교였다.
그들이 처음부터 마교의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불행한 자들을 돕고, 힘없는 자들에게 손을 뻗으며 없는 자들을 일으켰던 것이다.
세상은 혼탁했고, 많은 평민들이 자신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일월신교를 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 그들이 외쳤다.
천자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자신들을 이끄는 교의 진리를 지닌 자, 태양과 달의 아들인 교주만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지닌 신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민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에 위기감을 느낀 것은 황실도 황실이지만, 그들을 등에 업고 살던 무림인들이었다.
무림인들은 자신의 구역을 지키기 위해 황실보다 더 앞장서서 그들을 비하하기 시작했다.
그때 사이한 교리를 가르치며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해서 마교라 명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후세에 암천이라 불리게 된 피로 물든 시간이 말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각자 자신들이 섬기는 존재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더 악화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은 가능했다.
뭐,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사람들이 입고 있는 피해를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떵떵거리며 큰소리치던 무림의 수좌들은 모두 강력하기 그지없는 마교의 힘과 행보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권력의 맛에 물들어 나태해진 그들이 독기를 품고 있는 마교의 검을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교는 자신들 앞을 가로막는 이들에게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시체가 쌓이고, 사방에서 통곡이 끊이지 않았다.
비릿한 혈향이 세상을 덮었다.
군림천하! 일월지세!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더욱 대담해지고, 더욱 잔혹해졌다.
이제 마성에 사로잡힌 그들은 평민들도, 여인들도, 아이들조차도 거침없이 죽였다.
이유도 마땅치 않았다. 그들의 앞에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마교의 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이들의 앞을 막아서기 전까지 이 현세의 지옥은 지속될 것이 분명했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남궁용민! 후세에 검황이라 불리는 자!
그가 한 자루의 검을 들고 마교 앞에 섰고, 그들의 행보를 막아냈다.
거침없이 휘둘러진 검. 그것은 빛이라고밖에 표현이 불가능했다.
마교의 마인들은 그 빛 속에 스러져 갔다. 누구도 그 빛을 막을 수 없었다.
태양을 손으로 막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 태양을 우러러 많은 무림의 무인들이 모였고, 은거 기인들이 칩거를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남궁용민의 힘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정확히 30일이 지났다. 마교가 와해되기까지 말이다.
모두가 남궁용민을 칭송했다.
절세신인(絶世神人)!
더 이상 마교는 마교가 아니었다.
물론 잔당이 어딘가 살아남아 숨어들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전의 힘을 되찾는 것은 100년이 지나도 불가능할 것이다.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입었거니와 백성들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이들이 마교에 대해 공포와 분노, 그리고 증오를 가슴에 묻어두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그 누구도 마교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검황이 내디딘 발걸음의 서막에 불과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마교는 확실히 악이다.
그런데 검황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그들이라고 무조건 나쁘지 않다고 오히려 변호를 한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는 모양이군.’
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밝혀지지 못한 사실이 숨어 있는 법이다.
자신이 사건의 장본인도 아닌데 어찌 그 사실을 모두 알 수 있겠는가.
얀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모두 물었습니까?”
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사실 겁니까?”
“어떻게 살 거란 게 있겠소?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야지. 그 사실을 알았다 한들 변하는 것은 없소.”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 수긍하며 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전생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난 앤디라는 사람이오. 나에게는 부모와 가족, 그리고 친구와 동료가 있소.”
“이해합니다.”
얀은 진심으로 앤디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을 빼고 전생의 기억에 목을 맨다면 나는 남궁용민도 아니고, 앤디도 아니게 될 것이오. 허깨비가 되겠지. 세상에 있으나 없는 존재 말이오.”
“….”
“나는 과거의 기억은 과거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오.”
앤디의 말은 모두의 가슴에 뭔가를 남겼다.
“마교가 다시 악행을 자행한다면 어쩌실 것입니까?”
“다시 막을 것이오. 마교든 무엇이든 내 삶을 방해하고, 내 주위의 평화를 깨는 존재들이 있다면 주위를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오.”
해적의 섬에서 나온 앤디는 해적들이 몰고 있는 배의 갑판에 서서 넓은 대양을 주시했다.
복잡한 머리가 많이 정리된 것인지 눈빛이 맑은 빛을 뿜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선장 중 한 명인 패르스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조금만 가면 홀린드 섬입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수고하게.”
패르스는 앤디에게 읍을 한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앤디는 패르스가 해적들에게 소리치며 배를 모는 모습을 돌아보고는 다시 대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홀린드 섬의 끝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일들이 자신의 어깨를 누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3
홀린드 섬은 정말이지 낙원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저번 하이네스 왕국의 바닷가도 좋았지만, 이곳은 정말 최고였던 것이다.
찰싹! 찰싹!
뜨거운 백사장을 촉촉이 적셔 주는 파도.
매끈한 여자 다리처럼 쭉쭉 뻗어 올라간 야자수와 티 없이 청명한 맑은 하늘.
산호초가 비치는 투명한 바닷가.
시선을 돌리는 곳 어디 하나 그림이 아닌 곳이 없었다.
이건 하늘이 내린 작품이었다.
그 작품 한가운데, 물가에서 뛰노는 사람들.
첨벙첨벙!
“꺄하하하하! 나 잡아봐라!”
“아하하하하! 잡히면 죽여 버릴 거야!”
“진짜?”
여자의 물음에 남자가 피를 토하며 외쳤다.
“정말로!”
입에서 불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여자가 도망쳤다.
“꺄르르륵!”
첨벙! 첨벙! 첨벙! 첨벙! 첨벙!
레오나 공주는 살벌한 살기를 풍기며 도망치고 잡으려 드는 쉐리와 클라우저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둘은 정말이지 미친 듯이 달리는 중이었다.
사랑이 가득한 표정과 달리 쉐리는 스릴 만점인 표정이었고, 클라우저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레오나 공주에게는 그것조차 배부른 애정 행각으로 보였다.
“쳇! 재밌나 보구나.”
그러자 그 옆에서 비키니를 입고 누워서, 오렌지 주스 잔에 꼬부랑 빨대를 꼽은 채 빨아 마시고 있던 렐리가 말했다.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응?”
“아니에요.”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는 렐리였다.
레오나 공주는 한숨을 흘리며 맑고 푸른 바다 저편을 주시했다.
자신의 님이 언제 돌아올지 막연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저기… 아가씨들.”
“누구?”
렐리와 레오나 공주의 시선이 돌아갔다. 잘생긴 청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렐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생긴 청년 또한 렐리와 레오나 공주의 얼굴을 확인한 후 헤벌쭉해졌다.
자신들이 상상한 것보다 예뻤기 때문이다.
렐리의 섹시함도 좋았지만, 레오나 공주의 아름다움은 형용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다.
잘생긴 청년이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헤벌쭉해진 입을 열었다.
“저희와 함께 어울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좋아요.”
렐리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벌떡 일어나, 운동으로 다져진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며 추파남 앞에 섰다. 그리고 추파남의 팔짱을 끼며 걸어 나가려고 하는데, 추파남이 당황한 듯 멈춰 서며 말했다.
“저, 저기 아가씨는요?”
그 말은 마치 ‘난 너 말고 저 아가씨가 좋은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왠지 기분이 상한 렐리가 상냥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머! 저분은 낭군님이 계시답니다아. 만일 저분께서 댁들과 노니는 모습을 그분이 목격하기라도 하면… 어휴….”
렐리의 말에는 리얼리티가 살아 있었다. 말만 들어도 왠지 어떻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저 뒤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3명의 덩치들도 눈에 거슬리고 말이다.
3명의 덩치란 바로 다름 아닌 호위 무사 안젤른과 파프, 그리고 루슬란이었다.
왠지 눈빛만으로도 고기를 뼈째 씹어 뜯어 먹을 것 같은 위인들이었다.
추파남은 잠시 갈등 어린 모습을 보이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그리곤 렐리에게 최대한 미소와 화술을 뽐내며 웃음을 주기 시작했다.
렐리의 까르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감정 변화가 빠른 녀석이었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지금 손에 넣은 것에 충실해지자는 훌륭한 마음가짐을 가진 녀석이었다.
하지만….
“쯧쯧! 심지에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가는 줄도 모르고….”
루슬란이 혀를 차며 측은한 시선으로 렐리를 향해 즐거운 표정으로 알통을 만들어 보이고 있는 추파남을 바라보았다.
안젤른과 파프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 또한 루슬란의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덥군.”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고 싶어지는구만.”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었는지 셋은 죽이 잘 맞는 대화를 나누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모두 말뿐이었고, 누가 감히 레오나 공주에게 다가오는지 눈에 불을 켜고 감시 중이었다.
충성심도 있지만, 후환이 더 무서운 그들이었다.
만일 어디선가 나타난 앤디가 누군가의 추파를 받고 있는 레오나 공주를 본다면 눈이 돌아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추파를 던진 놈도 던진 놈이겠지만, 자신들도 산목숨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때 자신들의 시선을 피해 레오나 공주에게 다가가는 한 녀석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안젤른이 눈을 크게 뜨고 나직하게 경고성을 토했다.
“어라? 저 새끼가 감히.”
“어디!”
부릅부릅!
그들의 시선이 닿았음인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사내들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내가 레오나 공주를 향해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질리지도 않는군.”
다시 눈을 부라리기 시작하는데, 안젤른이 당혹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어! 주군!”
“주군?”
“주군!”
앤디가 돌아온 것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
레오나 공주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앤디를 노려보았다. 앤디가 레오나 공주에게 쩔쩔매며 대답했다.
“미안해, 레오나. 빨리 온다고 왔는데, 생각보다 일이 늦게 마무리되었어.”
“몰라! 몰라! 몰라!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정말로 잘못했어. 용서해줘.”
“싫어! 싫어! 신혼여행을 온 부인을 팽개치고 사라지는 남편이 어딨어!”
앤디가 쩔쩔맸다.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앤디가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일행들이 바람같이 모여들었다.
알은척을 하려 했지만 눈치가 보여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가만히 주시할 뿐이었다.
“아, 맞다. 사실은 서, 선물을 주려고 찾다가 조금 늦은 거야.”
“선물?”
그제야 레오나 공주는 토라진 표정을 조금 지우고 앤디를 슬쩍 돌아보았다.
앤디가 다급하게 몸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화를 풀어보려고 얼떨결에 내뱉은 말이다. 선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앤디가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레오나 공주에게 말했다.
“노, 놓고 왔다. 내가 다시 가져올게!”
앤디가 다급하게 몸을 날리려는데 레오나 공주가 버럭 말했다.
“또 나 혼자 남겨 두고 가려는 거야!”
“그, 그게 아니고오.”
“그게 아니면 뭐야! 잉잉!”
앤디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레오나 공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꼬옥 껴안아주며 말했다.
“미안해. 다시는 혼자 놔두지 않을게.”
“몰라! 몰라! 나빴어!”
그렇게 말하면서 앤디의 품에 포옥 안기는 레오나 공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