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44화 (57/68)

5장. 유희

1

여자아이는 꼬치 막대기까지 먹을 것처럼 무섭게 받아들고는 누군가에게 빼앗길세라 입에 허겁지겁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 작은 입에 들어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서둘러 먹는다고 먹는 게 쉽지 않은지 한참을 오물거렸다.

사내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으리, 여기 다 구웠습니다.”

“….”

사내가 시선을 돌려 꼬치를 받고 다시 먹기 시작했다.

기다렸다 먹으니 맛이 조금 덜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기분 탓인 듯했다.

그때, 사내의 뒤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뭐야? 여긴 뭔데 이렇게 사람들이 우글거려?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건가? 낄낄!”

대략 50세 정도 된 듯 보이는 술에 쩐 거렁뱅이가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거렁뱅이가 앞으로 나서자 사람들은 홍해가 갈라지듯 좌우로 물러섰다. 괜한 해코지를 당할까 싶은 것보다 그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이었다.

거렁뱅이가 여자아이를 보고는 언성을 높였다.

“엘리, 너 이년! 지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뭐하고 놀고 자빠져 있는 거야!”

엘리라 불린 여자아이가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최대한 움츠리며 덜덜덜 떨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올 잘못했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심각한 실어증 증상까지 앓고 있는 듯싶었다.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엘리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꼬옥 손에 쥐고 있던 꼬치를 바닥에 떨어뜨릴 정도였다.

그런 엘리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거렁뱅이가 히죽거리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향으로 걸어오는 거렁뱅이를 사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내는 표정도, 눈빛도 변하지 않았다. 그냥 무미건조한 의미 없는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생명이 없는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사내의 시선이 걸렸음인가, 찔끔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엘리를 발로 찼다.

“네년 언제 한번 걸릴 줄 알았다! 네년의 수입이 가장 적어서 의아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빼돌리거나 농땡이를 피웠다 이 말이지! 이년! 망할 년! 키워주고 먹여 줬으면 일을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냐!”

퍽퍽!

엘리는 맞을 때마다 바닥을 뒹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거렁뱅이가 엘리를 때리면서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인상을 구기든, 앞으로 나서서 막든 어떤 표현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면 그 수에 맞춰서 돈을 구걸하거나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과 전혀 관계없다는 듯 꼬치를 즐길 뿐이었다.

바로 옆에서 어린아이가, 그것도 여자아이가 맞고 있는데 무감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쓰벌! 독한 놈을 만났군.’

거렁뱅이는 짜증나고 화가 나서 이를 악물며, 자신의 분노를 담아 엘리를 더 강하게 내리까고 찍었다.

“이 쓸모없는 년!”

사내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꼬치 값을 치르고, 엘리가 맞고 있는 자리를 유유히 떴다.

허탕을 쳤다는 생각에 거렁뱅이가 엘리를 죽일 듯이 패기 시작했고, 엘리가 맞는 와중에도 바닥에서 사내가 가는 방향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

그 말을 남기고 정신을 잃었다.

“퉤! 괜히 힘만 뺐군.”

거렁뱅이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곤 흠칫 놀랐다. 저 멀리 갔던 사내가 어느새 돌아와 자신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돌아와서 엘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게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사내가 자신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렁뱅이는 주위를 둘러봤어야 했다. 모두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한 시선으로 사내를 주시하고 있는 그 모습들을 말이다.

눈치 없는 거렁뱅이가 사내에게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헤헤! 나으리, 저희 이 불쌍한 부녀를 위해 한 푼만 주십시오.”

사내는 거렁뱅이를 쓰윽 무시하고 엘리에게 다가가더니 질문을 던졌다.

“뭐라고 했느냐?”

“….”

“뭐라고 했는지 말해보거라.”

당연히 기절한 엘리가 대답을 할 리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엘리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거렁뱅이가 자신을 무시한 사내에게 반감 어린 표정을 하고 다가섰다.

“겉은 멀쩡하게 생긴 것 같은데 하는 짓을 보니 병신이었군. 퉤! 어이, 나으리, 그냥 돈이나 주고 꺼지시지?”

사내의 행동이 평범하지 못하자 대놓고 무시를 하며 협잡질을 하는 거렁뱅이였다.

이번에도 사내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상종을 하지 않았다.

거렁뱅이의 인상이 최대한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더러운 녀석의 인상이 정말 더 더러워졌다.

“지금 내 말을 씹는 거냐! 죽고 싶어? 앙!”

거렁뱅이가 사내에게 손을 뻗으며 밀치기 위해 다가왔다.

그때 사내가 말했다.

“더러운 손으로 건드리지 마라.”

“어쭈? 건드리면 어쩔 건데?”

거렁뱅이는 사내의 말을 무시하고 팔을 쭉 뻗어왔다.

순간, 팔목에서 시큰하고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앗! 뜨…!”

동시에 거렁뱅이의 오른 손목에서 손이 매끄럽게 미끄러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양손이 꿈틀거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어? 어라? 내, 내 손이 왜 저기에?”

푸슉!

그제야 사내의 팔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내 손! 내 팔!”

거렁뱅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사람들이 기겁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피가 튀는데, 사내 쪽으로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거렁뱅이는 결국 눈을 까뒤집고 기절을 하고 말았다.

사내는 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엘리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빛이 집중적으로 머무는 곳이 있었는데, 상처 부위 근처였다. 빛이 곧 사라짐과 동시에 엘리의 전신에 어려 있던 상처가 모두 사라졌다.

엘리의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빛은 지워지고, 표정과 호흡이 편안하게 바뀌었다.

사내가 그런 엘리를 보며 뭔가 불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깨울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사내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엘리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나중에 들어야겠군.”

사내가 저쪽으로 멀어지자 떠 있는 엘리 역시 그 뒤를 따라 유유히 멀어졌다.

파리한 안색의 꼬치 가게 주인이 주변을 보며 한숨을 토했다. 사방이 피투성이였기 때문이다.

꼬치 가게 주인은 쓰러져 있는 거렁뱅이를 씹어 먹을 듯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오늘 장사는 이걸로 접어야겠군.”

2

“대체 뭐가 뻔하단 말인가요?”

셀린의 말에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혀를 찼다.

“누가 너더러 싸우라더냐?”

약간 진정을 찾은 셀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그럼요?”

“네 잘난 능력 있지 않느냐?”

“제 능력? 심연의 눈 말인가요?”

“그거 말고 뭐가 있겠느냐. 나와의 전투도 정신을 집중하게 되어 제정신을 찾는 것 같으니, 심연을 건드리는 네 능력으로 그 정신을 바로잡아 보면 되지 않겠느냐?”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말에 셀린이 귀를 쫑긋 열었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가요?”

“재수 없어봤자 여기서 늙어 죽든, 저놈에게 맞아 죽든 둘 중에 하나일 테고, 운이 좋으면 이곳을 빠져나가겠지.”

셀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베르커스 님께서 대련을 하시는 것은….”

“난 여기서 그냥 살아도 상관없다.”

고개를 획 돌리는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행동에 셀린의 입술이 쭉 튀어나왔다.

셀린이 흰 머리카락의 노인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고 뒤를 돌아보니,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고개를 획 돌리며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과 눈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몇 번을 시도해봤지만,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은 이제 아예 딴 짓을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능청을 보였다.

셀린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셀린은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혼자 놀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쭈그려 앉아 있던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고개를 획 돌려 셀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고 얼굴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거대한 흰 털 뭉치가 움직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니 말이다.

그곳이 얼굴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붉은 안광 때문이었다.

“왜 왔냐! 너랑 안 논다!”

“에헤헤헤!”

셀린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흰 머리카락의 노인 앞에 마주 앉았다.

흰 머리카락의 노인은 말과 달리 셀린이 앉는 것을 보면서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안테르트 님.”

“왜?”

“우리 눈싸움 할까요?”

“눈싸움? 싸움 좋다! 눈을 뽑는 싸움이냐?”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말하자 셀린의 등골이 오싹 달아올랐다. 지금이라도 당장 자신의 눈을 뽑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셀린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눈을 마주 보면서 먼저 눈을 감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치! 난 또.”

왠지 섭섭해하는 흰 머리카락의 노인을 보며 셀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곰곰이 생각하니 왠지 화가 나는 일이었다.

셀린이 퉁명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럼 하지 말까요?”

그러자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아니다! 하고 싶다! 하고 말 테닷!”

“그럼 시작할까요?”

“좋다! 좋다! 어서 하자! 눈싸움!”

흰 머리카락의 노인은 셀린이 자신과 놀아준다는 사실에 신이 난 듯 그녀를 재촉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준비 시이이작!”

셀린과 눈이 마주친 순간, 흰 머리카락의 노인의 붉은 안광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3

“….”

엘리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떴다.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때라고는 전혀 묻지 않은 듯한 순백의 캐노피 커튼으로 둘러싸인 분홍빛 침대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이불.

넓은 화장대와, 그 옆에 위치한 장식장에 화려한 향수병이 액세서리처럼 자리를 잡고 있고, 벽에는 화사한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천장에는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시는 샹들리에가 자리하고 있으며, 바닥은 고풍스러운 양탄자가 폭신하게 감싸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가득한 방 안.

엘리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도 했다. 잦은 폭행으로 언제나 아려 오던 전신이 전혀 아프지도 않고 가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너무나 리얼한 꿈이었다. 항상 꿈에서라도 꾸고 싶은 꿈이었다.

엘리는 이 꿈을 만끽하고 싶었다. 보드라운 이불 속에 쏘옥 작은 몸을 안겼다.

구름을 둘러싼 듯한 기분에 이대로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반면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꿈이 깨어질까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깨기 전에 이 기쁨과 행복을 더 누리고 싶었다.

넓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조신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이불 속에서 머리를 빼고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녀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엘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공주 꿈인가 보다.’

하녀는 엘리에게 방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깨어났니?”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주한테 말을 놓는 하녀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은 길지 못했다. 고소한 크림수프의 향이 후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하녀의 손에 들려 있는 쟁반 위에 크림수프가 담겨 있는 접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먹을 거니? 침대 위? 식탁?”

엘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불로 얼굴을 가리자, 하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침대 위에 상을 올려 크림수프를 내려놓았다.

“그럼 맛있게 먹으렴.”

하녀는 그 말을 남기고 문밖으로 나갔다.

옆에 자리할까 고민하는 듯하다가,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는 엘리 때문에 나간 것 같아 보였다.

엘리는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 모든 신경이 눈앞의 크림수프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끈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크림수프.

엘리는 침을 꼴딱 삼키며 조심스럽게 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수저를 들고 주위를 살핀 후, 한 수저 들었다.

입안에서 가득히 퍼지는 이 고소함과 담백함.

맛있다는 말이 미안할 정도다. 혀가 녹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맛있었다.

엘리는 숨도 쉬지 않고 퍼먹은 후, 접시까지 싹싹 핥아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하지만 양이 충분하지 못했다. 더 먹고 싶었다. 배가 꼬르륵거리며 더 달라고 재촉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자신을 때리는 사람도 없고,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리고 조금 전 그 하녀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도 뭔가를 들고 있었다.

엘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오므라이스였다.

들뜬 마음으로 그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하녀 뒤로 누군가가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녀는 그 사내를 모시는 듯한 자세로 최대한 조신한 모습을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사내를 어려워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어째서인지 낯이 익었던 탓이다.

사내가 엘리 곁으로 다가왔다.

순간, 엘리의 머릿속에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장 골목에서 자신이 바지춤을 붙잡았던 사내, 자신에게 꼬치를 건네주었던 사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사내가 엘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손짓으로 하녀를 부른 후, 상 위에 음식을 올려놓으라 시켰다.

가벼운 손동작이었지만, 하녀는 그 지시를 정확히 파악하고 행동했다.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먹어라.”

“….”

엘리가 사내의 지시에 수저를 들고 토마토소스와 노란 계란으로 싸여 있는 오므라이스를 푸욱 찔러 한 수저 듬뿍 떠올렸다.

엘리의 작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짧은 망설임 끝에 퍼 올린 수저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냠냠냠!

떨리다고 못 먹는, 그런 거 없다. 주는 걸 마다하는 사람은 굶어 죽어도 마땅하다.

어린 나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삶의 지혜였다.

아무 때나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배만 불러도 소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만일 배가 부른데도 음식을 얻었다면 그래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굶어 죽고 싶지 않았다. 죽더라도 먹고 죽고 싶었다.

눈치도 보지 않고 먹는 엘리의 모습을 사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리가 식사를 마쳐 가는 상황에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때 나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지?”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말을 하지 않았더냐?”

이번에 어깨를 으쓱했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사내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가볍게 구겼다.

하지만 대략 생각의 정리가 된 것일까? 다시 인상을 펴고 엘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엘리의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손을 뻗는다는 것은 때린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그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내 이름은 브라키우드다.”

뜬금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힌 브라키우드가 팔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그리고 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한 번, 두 번 쓰다듬을 때마다 엘리의 움츠러든 목과 어깨가 조금씩 풀어졌다.

아직도 두렵긴 했지만, 이토록 따스한 손길이라니….

엘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손이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엘리가 입을 열려고 작은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브라키우드가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인간에게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인간에게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만 했었지,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아한 감정을 느낀 것으로 충분했다. 그 이상은 오버일 뿐이니까.

사실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척했지만, 모든 신경은 이 소녀에게 쏠려 있었다.

다만, 인간의 관계에 자신이 섣부르게 끼어들어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싫었기에 무시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도움을 요청한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비에 젖은 강아지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아마 엘리는 그녀의 반응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움직여야 하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싶었을 뿐이니 말이다.

4

외진 산맥의 어느 곳.

콰과과광!

거대한 굉음과 동시에 하늘 위로 엄청난 폭발이 터져 나갔다.

하늘 위로 버섯 모양의 구름이 일어났다.

산맥 주변에 위치하고 있던 마을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영지에서까지 그 폭음을 듣고 놀라 밖으로 뛰쳐나갔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가까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기절을 할 정도였다.

그 폭발로 일어난 현상이 조금씩 가라앉을 때쯤, 그 중심에서 여인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 웬 먼지가 이렇게….”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셀린이었다. 먼지 사이에서 셀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뒤에 자리하고 있던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말했다.

“하나의 공간이 무너진 일이다. 아마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거대한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런데 평소 보여 준 백치기가 가득한 말투가 아니라 근엄하고 논리 정연하며, 듣는 이에게 신용을 주는 어투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셀린은 의아함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흰 머리카락의 노인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안테르트 님의 정신은 이제 완전히 돌아온 것인가요?”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인상을 구기며 대답했다.

“난 항상 제정신이다. 생각이 보통 사람의 수백 배 이상으로 많아서, 그 생각의 충돌로 인해 파생된 현상을 가지고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런 걸 미쳤다고 하는 거라고.”

“흥! 다른 사람도 아닌 너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이를 드러내는 어투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나라고 네 녀석이 마음에 드는 줄 아느냐?”

“그럼 한 판 붙어볼까?”

“조오치!”

그때 셀린이 소리쳤다.

“어르신들! 대체 왜 그러세요! 친구들끼리 뭐하시는 거예요!”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친구? 이놈이? 언제부터 친구라는 단어가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되었지?”

“헹! 그러니까 오늘을 네 녀석의 제삿날로 만들어준다지 않느냐!”

“내 말이!”

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으르렁거렸다.

다시 터진 셀린의 한마디.

“그만들 좀 하시라구요!”

결국 두 노인이 마지 못한다는 듯이 다시 등을 돌렸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저 애가 너를 살렸다.”

“얘 앞에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보이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니지.”

곧 죽어도 잘난 두 노인이었다.

이런 두 노인이 어떻게 친구가 되어서 붙어살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반면에 어떻게 생각해보면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슬쩍 일었다.

원래 끼리끼리 논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 이야기를 하면 둘이 펄펄 뛰겠지만 말이다.

셀린은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조심스럽게 흘리며 말했다.

“이렇게 불필요한 소모를 할 거면 빨리 내려가요. 이제 곧 어두워질 것 같아요.”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말했다.

“무섭냐?”

“무섭긴요. 저녁은 먹어야 할 것 아니에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어요.”

그 말에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과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회가 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흐흠… 식사라….”

“제대로 된 식사….”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앞서서 걸으며 서두르듯 말했다.

“뭣들 하냐? 어서 가지 않고.”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내려갔다.

셀린은 결국 허탈한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아효….”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어린 어색한 미소를 그대로 머금으며, 앞서가는 두 희고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뒤를 따랐다.

흰 머리카락의 노인과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검고, 흰 머리카락으로 싸여 있는 두 노인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털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말이다.

뒤늦게 셀린이 그 사실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그사이에 둘의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식당 앞에서 멈춰 선 셀린이 흰 머리카락의 노인과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만 다른 곳에 가요.”

“왜? 싫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 좀 먹겠다는데 무슨 일이야?”

두 노인의 투덜거림에 셀린이 대답했다.

“지금 두 분의 모습 좀 보세요.”

“왜? 이게 어때서?”

“난 좋은데? 편하고.”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셀린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자신이 너무나도 편협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을 좀 보세요. 모두가 희한하게 우리를 주시하고 있잖아요. 음식점에서 밥이나 제대로 주겠어요?”

셀린의 설득에 한참을 고심하던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과 흰 머리카락의 노인.

“흠… 그런가?”

결국 흘러나온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수긍에 셀린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어서 가요. 우선 미용실부터 가요.”

“사실, 나는 그냥 먹어도 상관은 없는데.”

“음식에 침이라도 뱉어서 나오면 어쩌려구요.”

“죽여야지.”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은 정말 죽일 것이다.

셀린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더군다나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쓸 나이도 지났고 말이지….”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말에 셀린은 잠시 그들이 몇 살인지 궁금했지만, 그러면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저 검은 노괴는 나이를 먹다 먹어 정말로 요괴라도 된 모양이군. 나는 사람이니 양식과 도리를 지켜야겠다.”

“뭔 개소리냐! 누가 요괴야!”

“너.”

“도저히 안 되겠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 녀석의 무덤을 지나가야겠다.”

“아직도 개소리가 들리는군.”

순간 셀린이 울컥했다.

“아이 참! 나도 몰라요! 지지든 볶든, 어르신들이 알아서 하세요!”

셀린의 짜증 어린 분노에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과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입맛을 쩍 다셨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말했다.

“이 봐라. 네 녀석 때문에 꼬맹이가 화가 나지 않았냐.”

“내가 할 소리를 대신해주니 편하군.”

으득!

흰 머리카락의 노인과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은 이를 갈며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다 저 멀리 멀어지고 있는 셀린을 보고 헛기침을 흘렸다. 그리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흠흠! 그러고 보니 벌써 날이 저물었군.”

“밤이슬이 차가울 텐데.”

“돈은 저 아이가 가지고 있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과 흰 머리카락의 노인은 셀린이 사라진 방향을 쫓아 쫄래쫄래 이동하기 시작했다.

목욕을 다섯 번 이상 하여 땟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씻은 후, 기운을 돌려 순식간에 전신을 뽀송뽀송하게 말린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과 흰 머리카락의 노인.

물기가 닿아 더욱 풍성해진 머리카락이 두 노인의 전신을 푸근하게 가려 주었다.

셀린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속옷은 입고 계시나요?”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태연하게 말했다.

“속옷? 흠… 안 입은 지 오래되었지.”

“네에?”

지금까지 속옷도 입지 않고 거리를 활보했다는 말이 아닌가!

경악하는 셀린의 반응에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해명을 했다.

“정확히는 안 입은 게 아니라 못 입은 거지. 그곳에 우리 말고 누가 있겠느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셀린이었다.

셀린이 주는 속옷과 서민들이 입는 평범한 외출복을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과 흰 머리카락의 노인.

하지만 둘의 검은 머리와 흰 머리에 파묻혀 옷까지 가려졌다.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운 털 뭉치들이었다.

‘하긴 저런 것이 있으니….’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셀린이었다.

자신도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과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노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거 불편하군.”

“흠… 예전에는 이걸 어떻게 입었는지 모르겠군.”

투덜거리는 두 노인이었다.

“그래도 인간 세상에 나왔으면 인간의 법도를 지키셔야죠.”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입지 않았느냐.”

“그럼 이제는 또 뭘 해야 하지?”

셀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머리를 자르셔야죠.”

“머리?”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셀린을 보았다.

셀린은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머리카락이요.”

“아….”

흰 머리카락의 노인과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동시에 탄성을 토했다.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같은 말을 했을 것임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셀린이었다.

‘역시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셀린은 두 노인을 끌고 미용실로 찾아갔다.

미용실 주인은 두 노인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관리를 안 할 수 있죠?”

미용실 주인의 물음에 셀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다른 대꾸를 해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머리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어머! 이 머릿결은….”

셀린이 물었다.

“왜요?”

“이토록 좋은 머릿결은 만져 본 적이 없어서요.”

셀린이 자신도 모르게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스르르 미끄러져 내리는 부드러운 촉감이 비단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그렇군요. 어서 잘라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서걱서걱!

가위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우수수수 떨어져 내렸다.

머리카락이 큼직하게 잘려 나가면서 몸의 형태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머리만이 아니었다. 덥수룩하다 못해 뒤덮은 수염과 눈썹이 머리카락처럼 길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쯧! 어쩐지…. 저러니 얼굴을 볼 수가 없지.’

사실 약간 의아했던 셀린이었다.

아무리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다 해도 얼굴조차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금 밝혀진 것이다.

“이거 왠지 승부욕이 나는데요?”

그 말이 이해가 가는 셀린이었다.

벗겨도 벗긴 것 같지 않는 양파와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머리카락을 어느 정도 만진 후, 가위로 눈썹을 잘라나갔다. 그러자 그 속에서 맑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말했다.

“이것 참, 벌거벗는 기분이구만.”

“지금까지 벗고 있을 때는 몰랐나 보죠?”

셀린의 물음에 간단하게 대꾸했다.

“뭐, 대충….”

주인이 이제는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수염을 듬성듬성 자르더니 면도를 시작했다.

스윽! 스윽!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매끈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 또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고 탱탱했다. 마치 갓 20대의 피부처럼 말이다.

잠시 후, 얼굴이 드러났다.

셀린과 주인은 깜짝 놀라는 것을 넘어 자신들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조금 전 털북숭이는 어딜 가고 웬 미공자가 자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딘가 이국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그게 더 매력적이었다.

셀린과 주인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자리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절대적인 외모의 사내를 보고 눈에 하트를 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 어쩜….”

미용실 주인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했다. 그러자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 아니 베르커스가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을 마주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흠… 왠지 허전한데?”

셀린은 그의 목소리로 그가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셀린의 시선이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에서 흰 머리카락의 노인에게로 돌아갔다.

주인의 시선도 함께 돌아갔다.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의문성을 흘렸다.

“왜?”

“그냥요.”

셀린의 말을 주인이 이었다.

“여기 앉으세요.”

“흐음….”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자리에 앉자 주인과 주위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서걱! 서걱! 서걱!

흰 머리카락의 노인을 향한 가위질이 힘차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셀린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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