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43화 (56/68)

제4장. 태양과 달

1

석양의 끝을 주시하며 걸음을 옮기던 사내가 우뚝 멈춰 섰다.

“후! 지루하군.”

말과 달리 듣는 이의 가슴을 청량하게 해주는 깨끗한 목소리였다.

석양에 비친 그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웠다.

넓은 이마에 시원하게 뻗은 눈썹, 오뚝한 콧날과 윤곽이 뚜렷하며 적당한 두께의 입술, 가느다란 선의 얼굴은 여자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사내의 뒤를 따르던 굽은 허리의 노인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허리를 조아리며 말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본 노(奴)가 부족하여 주군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현재 일의 진행 사항은 어찌 되었나?”

“착실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사령단의 성취가 놀랍습니다.”

“오호! 그래?”

“현재 총 30명의 술사들로 마물 5개 연대의 행동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0,000마리 정도의 마물을 말이냐?”

“그렇사옵나이다.”

지루함에 물들어 있던 사내의 눈빛이 약간 이채를 띠었다.

“나쁘지 않군.”

“주군께서 배려하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성취는 어느 정도인가?”

노인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두 사령협혼술이 10성의 벽을 넘어선 상태입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처음에 난해했던 대형 마물들의 조종도 이제는 완벽하게 제어가 되었습니다. 모두 주군의 든든한 병사들이 될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사내는 손가락에 끼어 있는 검은 구슬이 박혀 있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반지는 드래곤이 아닌 용 3마리가 휘감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것이었다.

노인이 그 반지를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

“마령환의 빛이 더욱 어두워진 것을 보니 천마신공의 성취가 있으신 듯합니다.”

사내가 노인의 말에 반응했다.

“이제 9성의 단계를 넘었다.”

“오오! 감축드리옵나이다.”

“….”

사령협혼술.

그것은 사이한 기운에 움직이는 마물을 조종하는 술법이다.

하지만 사령협혼술을 익힌 술사는 마령환의 명에 절대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사령협혼술의 단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거절할 수가 없게 된다.

마령환은 만마의 주인이 착용할 수 있는 기물로 주인이 익힌 천마신공에 반응을 하는데, 천마신공과 상성의 작용을 하여 주인의 능력을 끌어올려 주는 역할을 한다.

노인이 눈물을 머금으며 말했다.

“이제 마령환의 어둠이 세상을 덮을 날이 곧 오겠군요.”

“그래야지.”

“본 노는 벌써부터 심장이 뜁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배신자를 먼저 처단해야지.”

사내가 눈을 번뜩이며 저 먼 어딘가를 주시했다.

그 말에 노인의 눈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이한 마공이 노인의 통제를 벗어나 들끓는 것이다.

“주군의 손에 죽을 대공자의 시체를 제 손으로 찢어 들판에 던질 것이옵니다.”

노인의 말에 사내가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눈꺼풀 속에 감췄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다시 뜬 사내가 말했다.

“이만 가자.”

“예, 주군.”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있는 나무들이 작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들은 서로의 가느다란 뼈대를 맞대고 비비면서 다그락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런 나무들이 가득히 자리하고 있는 황량한 숲 한가운데 한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휘유우!

높고 청명한 하늘과 달리 이곳은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에 바닥에 깔린 낙엽이 바닥을 구르듯 자리를 이동했다.

하지만 사내는 머리카락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다름 아닌 대륙 제일의 검객으로 불리는 탈리온 공작이었다.

탈리온 공작은 10분이 넘게 내뱉지 않던 숨을 거미가 줄을 내뿜는 것처럼 가늘고 길게 뱉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는 탈리온 공작의 앞에는 검이 한 자루 떠 있었다.

검은 독특한 형태의 모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실존하는 검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명하게 그 형태가 드러나 있었다. 기하학적인형태로 꼬아져 있었으며, 그것의 날은 자잘한 것까지 포함하여 16개가 넘었다.

바로 마음의 검이었다. 마음에서 일어난 검이 눈앞에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눈을 뜬 탈리온 공작이 한참을 눈 한번 깜빡이지도 않은 채 그 검을 주시했다.

그러다 곧 한숨을 토했다. 그러자 눈앞에 자리하고 있던 검이 바람에 닿은 먼지처럼 흩뿌려졌다.

“방법이 틀린 건가? 하아… 하아….”

탈리온 공작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만큼 지금 한 일에 심력을 쏟아 부었다는 뜻이다.

앤디가 지금 이 장면을 봤으면 놀람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시도를 하려고 하는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탈리온 공작은 놀랍게도 무에서 유를 만들고자 했다.

탈리온 공작이 이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데구루루!

탈리온 공작의 주머니에 자리하고 있던 새끼손톱만 한 구슬이 바닥에 떨어졌다.

선명한 푸른빛이 마치 하늘의 색을 담은 것 같은 느낌의 구슬이었다.

탈리온 공작이 그것을 주워들고 한참을 주시했다. 그리고 손가락에 힘을 가해보았다.

하지만 그 구슬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쇠구슬조차 압축시킬 그 압력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흠….”

탈리온 공작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푸른빛의 구슬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때가 지났군. 이만 내려가서 밥이나 먹어야겠어.”

그는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혼잣말을 하고 산을 내려갔다.

2

앤디는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와 같은 존재들?”

앤디의 반응에 얀이 역시나 싶은 반응을 보였다.

“모를 거라고 생각은 했지.”

“…그게 무슨 뜻이지?

“전생을 말하는 거라네.”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은연중 다시 말을 놓는 얀이었지만, 앤디는 그런 사소한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 생?”

앤디는 오싹한 뭔가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얀을 주시했다.

얀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부담스러운 눈으로 보지 말라고. 사실 나도 처음 이 사실을 깨닫고 당혹스럽긴 했지만 쉽게 생각하기로 했지.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어.”

“어떤 생각이었지?”

“나에게도 일어난 일이다. 다른 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결론이었지.”

“…!”

얀의 한마디에 앤디도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과 같은 일을 다른 이도 겪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얀이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전생에 어떤 존재였지?”

“….”

“대답하기 힘들면 우선 내 이야기부터 하도록 하지. 전생에 나는 곽현이라는 사람이었다.”

“곽현?”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아니니 모를 수도 있지. 뭐, 당신의 후대에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고 말이지. 하하!”

지금 얀이 말한 것과 달리 곽현은 유명했다.

호북 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광운문의 16대 문주이며, 조화경을 넘어선 자로 정사를 포함한 22대 고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죽기 직전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지.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이 세상이더군. 그 깨달음을 넘어서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사실 너무 기뻤지. 또 다른 기회가 왔기에. 하지만 무공만 파고들어 익힐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지.”

앤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마음을 왠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삶을 거스르고 싶었네. 다 뒤엎고 싶었어. 전생의 세상도 그리 좋은 세상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지옥과도 같았기 때문이지. 뭐, 사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전생의 세상도 이곳과 다를 바 없었을 수도 있지. 지옥 같다는 감정은 내가 밑바닥의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느끼게 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단지 그곳에서는 나름 명가의 자제로 태어나서 몰랐던 것일 수도 있겠지. 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이런저런 감정을 가지고 살다 보니 여러 가지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고, 정신 차리고 보니 해적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더군.”

앤디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공감대가 그 이야기 속에 담겨 있었던 탓이다.

얀은 그런 앤디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진 후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부터였지. 나와 같은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말이야. 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야. 해적으로서 조금씩 유명세를 타다 보니 번거로운 일들이 생기더군.”

“토벌군 말인가?”

앤디가 조금씩 대화에 반응을 내비쳤다.

얀은 마치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닌 듯 태연하게 상황을 주도했다. 능청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토벌군이 오는 것 정도는 애교지. 나랑 한번 붙어보겠다고 개나 소나 덤벼들어서 말이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에서 헛기침이 터지기 시작했다.

앤디가 의아한 시선으로 헛기침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부선장들이 모두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앤디는 지금 얀이 말한 개나 소가 누군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앤디가 얀을 보자 얀이 씨익 웃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미소였다.

“뭐, 그들이 누군지는 말 안 해도 알아차린 것 같군.”

얀의 뻔뻔한 말에 앤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여하튼 그들과 상대하며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네. 그들이 바로 무림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것도 화경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말이네.”

“흠….”

“나중에 그들과 대화를 하며 알게 되었지. 이 세상에 온 존재가 나 하나가 아님을 말이야. 그럼 정말 모두가 넘어온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더군.”

“그건 무슨 말이지?”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정도 이상의 깨달음을 가졌던 자들이라는 사실이었지.”

“그런 자들이 많다는 말인가?”

“흠… 많다, 적다의 개념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자들만 해도 스무 명은 넘지.”

“허!”

앤디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화경급의 고수가 20명이 넘는다니. 무슨 화경이 동네 꼬마들 놀이 이름도 아니고 말이다.

“아직 놀라기는 일러.”

“더 놀랄 만한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이제 시작이지.”

“시작이라고?”

“서론이 끝났으니 본론에 들어가야지.”

“….”

앤디는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더 놀랄 만한 이야기라니, 상상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뭐 궁금한 것 없나?”

“다른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얀이 웃었다.

“그것을 궁금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뒤의 녀석들도 두 번째 삶을 사는 녀석들이지. 녀석들은 수하를 자청하며 내 옆에 남았지.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돌아갔다.”

“돌아가?”

“정신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는 듯 보였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나?”

“지금 자네에게 해주는 이야기 정도는 해줬지.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자신이 직접 풀어야 할 문제지.”

“그렇군.”

앤디가 수긍의 빛을 띠자 얀이 말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한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

“누군가 자신들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소식이었어.”

“누구에게 들었는데?”

“이곳에 남지는 않았지만, 연락이 오는 이들은 있었지. 일종의 동질감이라든가, 뭐 그런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물론 대부분은 완전히 잠적했지만 말이야.”

“그렇군. 그런데 그들이 누군지 아는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감이 오기는 했지.”

“감?”

“혹시 이걸 아는가?”

얀이 품 안에서 꺼낸 것은 앤디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마하역혼환?”

“역시 알고 있군.”

“모를 수가 있나. 해터슨과 파시엘도 그 환약을 사용하며 나에게 덤볐었으니까.”

앤디의 표정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그때 얀이 질문했다.

“해터슨? 설마 그자와 만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앤디의 표정이 묘해졌다.

“지금 그 말은 해터슨이 당신들과 관계가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물론.”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알지?”

“그도 이곳을 찾은 이 중 하나였으니까 알 수밖에.”

“파시엘도 그 환약을 써서 나를 공격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앤디의 물음에 얀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썼나 보지.”

“정말 몰랐단 말이지? 그렇다면 파시엘이 나에게 덤비더니 ‘해터슨을 그렇게 만든 녀석이 너였군.’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제야 얀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뒤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의 표정도 얀의 표정처럼 변했다.

바이널이 혼잣말을 흘렸다.

“녀석, 결국 마교의 계략에 넘어갔던 건가?”

앤디의 귀가 꿈틀거렸다.

“마교? 지금 마교라고?”

앤디의 의문에 얀이 한참을 주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설마 정말 그 마교란 말인가?”

“자네가 생각하는 그 마교가 확실하다네.”

앤디는 기가 찼다. 정말 더 놀랄 것이 있을까 싶었는데, 얀의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그가 말한 본론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앤디의 머릿속에 드래곤 브라키우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드래곤을 가지고 장난을 친 존재가 있다.’

‘확언컨대, 이 장난을 친 녀석은 인간이다.’

‘아마 지금 너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민첩한 관계가 있는 녀석일 것이다.’

앤디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지금 그 이야기의 뜻을 왠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얀이 말문을 열었다.

“마교가 이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네.”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은….”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되었다는 것이지. 우리가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나한테 물어본다고 내가 답을 가지고 있겠나?”

“마하역혼환을 마교에서 만들었단 말인가?”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지. 뭐, 아마 그렇겠지만 말이야. 지금까지 상황을 봐서는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얀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자신의 수하가 마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기분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환생도 하는 세상인데, 과거에 죽었던 놈들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뭐 놀랄 일이라도 되겠나?”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앤디가 물었다.

“그럼 그들에 대해 알려져야 하지 않나?”

“이미 알고는 있지. 하지만 그들이 마교라고 아무도 생각을 못하고 있을 뿐.”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흠… 내 설명이 부족했군.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같은 존재 외에는 마교에 대해서 알 리가 없지 않는가.”

“….”

“광신도들이 가득히 있으면서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고, 의심을 받지 않는 곳이 있지.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앤디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얀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하는 행동을 보니 정확히 떠오른 모양이군. 맞네. 바로 콘 왕국이라네.

3

고급 재질의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아름다운 외모의 붉은 머리의 사내가 시장 골목 한가운데에 서서 사과를 고르고 있었다.

“빛깔이 좋군.”

“맛은 더 좋습니다요.”

아삭!

시원하게 베어 물자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메워졌다. 사내는 우물거리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 가게 주인은 사내가 너무나 맛있게 먹자 자신도 모르게 같이 베어 무는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헤헤! 드실 만하십니까?”

“우물우물! 얼만가?”

“다섯 개에 동전 두 닢입니다.”

“다오.”

“여기 있습니다, 나으리.”

사과를 건네받은 사내가 주머니에서 은전을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은전은 정확하게 과일 가게 주인에게 날아갔고, 주인은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받은 돈을 확인한 과일 가게 주인은 부산스럽게 거스름돈을 찾았다.

“됐다. 많이 팔아라.”

그 말에 과일 가게 주인이 화색을 밝히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사내는 인사도 받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아삭아삭!

“이건 무슨 냄새지?”

연신 사과를 베어 물며 시장 구석구석을 살피던 사내가 멈춰 섰다. 그 시선 끝에 꼬치구이가 들어왔다.

두세 명 정도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는데, 사내가 다가서자 줄을 선 사람뿐만 아니라 주위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움찔 놀라며 슬금슬금 길을 비켜 주었다.

한없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시선.

옷의 고풍스러움도 그렇거니와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범접하지 못할 기운 때문이었다.

귀족이고, 아니고를 넘어서 비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가 갈라진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자신의 후각을 자극한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저 없는 음색으로 말했다.

“꼬치군. 아삭!”

사내를 맞은 꼬치 가게 주인이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다오.”

“예?”

사내가 손가락으로 꼬치를 가리켰다. 꼬치 가게 주인이 다 구워진 꼬치를 건넸다.

사내가 꼬치를 받아들고 한입을 베어 물었다.

텁!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꼬치 가게 주인이 사내의 냉혹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본능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꼬치 가게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호, 혹시 이,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꼬치 가게 주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이 맛은?”

우물! 우물우물!

순식간에 한 줄기 꼬치를 분쇄한 사내가 두 번째 꼬치를 들었다.

꼬치 가게 주인은 그 상황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사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꼬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꼬치 가게 주인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나으리.”

“이 소스….”

텁! 우물우물!

“소스요?”

“이 입안에서 가득히 퍼지는 육즙과 소용돌이치듯 어우러지는 소소의 감칠맛! 이 감칠맛의 비밀이 뭐지? 마법이라도 부렸나? 마법은 아니겠군. 내가 모르는 마법이 세상에 있을 수 없으니.”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꼬치 가게 주인은 사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내가 눈을 부라렸다.

“뭐하고 있는 거지? 나에게는 꼬치를 줄 수 없다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

“아, 죄, 죄송합니다.”

치익! 치이익!

꼬치 가게 주인이 꼬치를 구워주기 무섭게 입안으로 쏙쏙 밀어 넣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너무나도 맛있게 먹는 그 모습에 군침이 도는 것이다.

“저게 저렇게 맛있나?”

“나도 한번 먹어볼까?”

하지만 말과 달리 누구 하나 가게 근처에 갈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주위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을 포함하여 동시다발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에 눌린 탓이다.

‘감히 네놈들 따위가 내 옆자리에 서겠다는 것이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주위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다시 손과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대충 어떤 소스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감이 오는군. 집에 가서 한번 만들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사내가 막 8개의 꼬치를 내려놓을 때, 밑에서 누군가 자신의 상의 끝자락을 잡아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사내가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작고 올망졸망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옷이 꼬질꼬질한 것을 넘어 걸레에 가까워 보였고, 물이 뭔지 모르는 것처럼 얼굴과 손 가득히 얼룩덜룩한 때가 묻어 있었지만, 사내에게는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얼굴에 멍이 들어 있었고, 전신에 상처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사내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사내가 신경 쓰는 것은 단 하나. 여자아이의 시선이었다.

자신의 꼬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자아이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사내는 여자아이의 말이 들렸다.

꼬로로록!

대놓고 달라고 협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내는 짧은 고민을 했다.

‘지금 바로 먹지 않으면 다음 꼬치를 굽는 일 분 동안 입맛을 다시고 있어야 한다.’

찰나의 시간 동안 보통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상념이 사내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결정을 내린 듯 사내가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콘 왕국.

헤르만 왕국보다 작은 중소국 중 하나로, 쿠렌트 제국과 구 미드로 왕국(현 헤르만 왕국)의 경계선에 자리하고 있다.

고산지대에 위치하였으며, 광물과 자원이 풍부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한 나라다.

깔끔한 외교와 처신으로 강대국 사이에서의 균형을 이루며 중립국으로 이름을 알린 곳.

태양과 달의 아들인 콘을 섬기며, 국민 모두가 독실하다 못해 광적인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곳.

앤디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콘 왕국과 일월신교.”

앤디가 얀의 말을 이었다.

“…둘 모두가 태양과 달의 아들을 섬기는 곳이군.”

“그렇다네.”

“어떻게 지금까지 모를 수 있었지?”

“사실 아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니겠나? 자신 외에 환생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데, 다른 세상에 마교라니.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그들이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처음 그들이 무슨 힘이 있었겠나. 조용히 있을 수밖에. 때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겠지. 오랜 기간 조용히 힘을 모아 왕국을 일으키고, 지금 도약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네.”

“도약의 때?”

“마교 천하. 다른 세상에서까지 권토중래를 외칠 일은 없지 않는가. 어디로 쫓겨난 것도 아니고 말이네.”

“왕국까지 건설을 했다면 그냥 잘 살지, 어째서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보인단 말인가?”

“뻔하지 않는가.”

“뭐가 뻔하단 말이지?”

“마교 천하 말이네. 세상이 다르다 한들 사상이 변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네. 난 이 환약이 그들의 준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준동이라….”

“그렇다네.”

얀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앤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금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갑작스러운 사건과 사고들이 그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 말이군.”

“그렇다네. 자네는 이  환약을 내가 어떻게 구했는지 궁금하지 않나?”

“난 이곳에서 이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것이 필요하다면 만들 필요가 없다네.”

“무슨 소린가?”

“마하역혼환이 시중에 유통이 되고 있다네.”

“유통? 지금 그것들이 팔린단 말인가?”

얀이 수긍의 빛을 띠었다.

“그렇다네. 일반인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한다고 작정하면 못 구할 정도가 아니라 이 말이지. 무엇보다 환생을 한 것으로 파악이 된 존재들에게는 조용한 접근을 하여 건네는 것으로 알고 있다네.”

“접근?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당연하다고?”

“그들이 접근을 한 존재들은 사파에 가까운 존재들이라네.”

“사파에 가까운 존재들? 사파면 사파지, 가까운 존재들은 또 뭔가?”

“정파라고 다 좋은 놈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이중성격에 가까운 미친놈들도 있으니 말이야. 물론 잘 참고 있는 녀석들도 있었을 테지만, 다른 세상에 환생을 했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알아볼 인간들이 없어. 더군다나 강한 힘까지 지니고 있지. 그럼 그들의 행동은 모두 전생에서처럼 곧은 모습만을 드러내 보일까?”

얀의 말은 앤디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앤디가 깊은 한숨을 흘렸다.

“흠….”

“나는 아니라고 보네. 사람의 환경에 따라 성격이 변할 수 있다는 거지. 나쁜 놈은 계속 나쁜 놈일 확률이 높지만, 좋은 놈도 나쁜 놈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이지. 나 역시 내가 해적이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해봤지.”

“후회하나?”

“아니, 전혀. 왜?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앤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군.”

“난 지금 내 생활에 만족하고 살고 있다고.”

“그럼 다행이고. 그건 그렇고, 자네가 말한 준동은 세상이 겪게 될 혼란을 뜻함인가?”

앤디의 말에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검을 다루는 자라면 그 약을 먹고 익스퍼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네. 우리같이 환생한 존재들이라면 마스터 이상의 능력을 보일 수도 있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 힘을 얻었다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당연한 결과지.”

“그런데 이 마하역혼환을 어떻게 그토록 많이 만들어낼 수 있지? 이것에 대한 약재가 그렇게 풍부한 것인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군.”

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앤디가 아쉬운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답을 원하고 질문한 것은 아니었다.

앤디가 물었다.

“혹시 더 놀랄 만한 이야기가 남아 있나?”

“기억나면 이야기해주지.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앤디라고 한 것 같은데.”

얀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도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 않나 보군. 이쯤 되면 이야기를 해줄 만도 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앤디가 피식 웃었다.

“남궁용민.”

순간, 주위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거, 검황?”

케산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한마디에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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