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41화 (54/68)

제2장. 해적의 섬

1

그 시각, 레오나 공주들이 푸른 하늘과 바다를 보며 환호하는 것과 달리 앤디를 싣고 이동하고 있는 해적선이 가는 곳은 어두침침하고 음산한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바다 위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자욱한 안개로 시야가 가려졌다.

앤디는 안개가 있는 이곳의 마나 흐름이 조금 꼬여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해적들의 소굴에 어울리는 분위기군.’

앤디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이 맑아졌다. 안개가 자욱한 지역을 지나친 것이다.

그리고 한참을 가자 푸른 하늘 밑에 활기차 보이는 항구가 눈에 들어왔다.

앤디가 의아함에 질문을 던졌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나?”

앤디의 물음에 옆에 자리하고 있던 해적선의 조타수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요.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정확합니다요.”

“무슨 해적들이 있는 곳이 이래?”

“해적들은 사람 아닌감요? 헤헤!”

조타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앞니가 있을 부위가 텅 빈 것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조타수의 말에 앤디는 할 말을 잃었다. 해적이라면 음침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살벌한 녀석들이 모여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저곳은 아무리 봐도 일반 항구였다.

“그럼 처음 안개는 뭐지?”

“우리 섬을 군대나 뭐 이런저런 녀석들이 찾지 못하도록 해주는 녀석입지요.”

앤디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타수는 뭔가 더 질문이 나올까 싶어 잠시 눈치를 보다가, 더 이상 질문이 없을 듯하자 다른 것을 핑계 삼아 슬쩍 몸을 빼서 자리를 옮겼다.

앤디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처럼 긴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좌현으로 선회하란 말이야! 병신들아! 또 안개 속에서 한 바퀴 돌고 싶어!”

앤디는 그것을 보며 별말 하지 않았다.

항구에 다다르자 수많은 사람들이 해적선을 의아한 눈빛으로 봤다. 폐선 한 대가 떡하니 항구에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배로 항해를 해서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것도 잠시…

해적들이 허둥지둥 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배가 거대한 거품 방울을 남기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마치 ‘너희와 함께 여행한 시간, 너무나 즐거웠어.’라고 작별의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서글픈 장면이었다.

훌쩍훌쩍!

해적들은 저마다 손을 흔들며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앤디 역시 자신도 모르게 침몰하는 배를 보며 울적해졌다. 주위의 감정에 동화된 것이다.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당황하여 주위에 자리하고 있던 해적 한 명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안내해.”

그제야 정신 차린 해적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등을 돌렸다.

23명의 해적들이 어색한 듯 고개를 숙이고, 어기적어기적 자리를 이동했다.

앤디는 이동을 하면서 해적 녀석들에게 주워들은 이곳의 세력 구도를 떠올렸다.

7명의 부선장과 1명의 선장.

파시엘은 그 7명의 부선장 중 1명으로, 서열 3위에 속하는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그럼 파시엘 같은 녀석이 여섯 명은 더 있고, 그보다 강한 녀석이 하나 더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단순히 생각하면 그리 틀린 계산은 아니다.

하지만 앤디는 거기에 셋을 더했다.

항상 만약의 사태와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는 앤디의 성격 탓이었다.

앤디는 많은 고민을 했다.

그중에 해터슨이나 파시엘 같은 녀석이 몇이나 존재를 하고, 그들이 어떻게 그런 힘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더군다나 파시엘이 사용한 무공.

그것은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무공이 아니고, 자신이 전생에 있던 무림이라는 곳에서 볼 수 있었던 무공이라는 점이 더욱 의문을 자극했다.

단약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안드레이가 이런 사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의문스러웠다.

물론 그 의문 중에는 탈리온도 있었다.

그가 평소에 심상 수련을 한다는 안드레이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나가 의심스럽자 모든 것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고 있는 앤디였다.

‘분명 지금 이 세상에 뭔가가 있긴 있어. 정말 있지만 드러나지 않은 어떤 상황이 세상에 숨어 있는 것 같아. 나는 그 작은 끄트머리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고.’

앤디는 자신의 추론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정설로 굳혔다.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선 자신을 봐도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이라고 그러지 않았으리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 자신만 특별하라는 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앤디는 자신이 보며 의심을 품었던 역혈신공이나 화령검법을 결코 비슷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치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확실하게 역혈신공이고, 화령검법임을 의심치 않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아니, 마음먹을 것도 없이 확실했다.

이로써 앤디는 무엇을 봐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다음에는 금강지, 일보신권을 봐도 놀랍지 않겠군. 혹시 무림에 있는 사람들이 단체로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한 건가?’

앤디는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진심으로 고심했다.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뭐, 차츰 알 수 있겠지.’

앤디가 상념을 접고 시선을 들었다.

그때, 한 녀석이 말했다.

“저기입니다.”

그 말에 앤디가 녀석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뚝 멈춰 서서는 감탄을 흘렸다.

“호오!”

보기만 해도 금세 무너질 것 같은 수백 척의 폐선이 탑처럼 쌓여 있는 곳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2

처음에는 그냥 폐선 처리장인가 싶었다. 넓은 만 한가운데에 수백 척의 폐선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폐선 처리장으로 보기엔 너무 밝았다. 쌓여 있는 폐선의 창구멍으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곳저곳 이동을 위한 다리도 만들어져서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배는 나가고 어떤 배는 들어오며 물자를 나르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폐선을 오가며 이동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이들이 말하는 아지트가 저곳을 지칭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앤디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저런 곳도 좋다고 사는 사람도 있겠지, 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앤디는 자신들을 이곳까지 길잡이 해준 해적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수고 많았다.”

앤디가 한 말이 아니었다.

앤디가 말문을 꺼내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앤디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너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1백여 명이 넘는 해적들이 흉흉한 분위기를 흘리며 앤디를 향해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이들이 셋이 있었다.

앤디는 그중에서 가장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금발의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려서는 히죽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언제 모습을 드러내나 생각하고 있었지.”

저들의 움직임은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해적의 가족일 텐데, 낯선 이방인이 들어온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해적 두목을 잃은 해적선이 선착을 해서 그 이방인을 어디로 이끌고 간다.

이보다 수상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마을 사람들은 재빨리 해적들에게 알렸을 것이고, 그 결과가 바로 이 상황인 것이다.

그때 금발의 사내가 앤디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런가? 이거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 대접이 형편없었군. 미안하게 되었네.”

한없이 편안한 말투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것인 양 반갑게 들릴 정도였다.

그런 해적들을 향해 앤디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긴 미안한 사람에게 검을 뽑아드나 보군.”

“뭐, 일종의 관례지.”

“큭큭! 말로 이야기를 풀 생각이 없다는 뜻이군.”

“자네도 같은 생각 아니었나?”

앤디는 자신은 아니라고 항변이라도 하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금발의 사내도 검을 뽑아들었다.

앤디가 혀를 차며 혼잣말을 했다.

“뺨을 치라고 들이대는데 안 칠 수도 없는 노릇이군.”

“큭큭큭! 건방진 녀석이군. 하긴 정신 상태가 멀쩡한 녀석이 이곳에 기어 들어올 리가 없지.”

금발의 사내가 살기를 흘리며 자신의 무기로 바닥을 찍었다.

쾅!

바닥이 터져 나가며 움푹 파였다.

사방으로 흙먼지가 퍼져 나갔다. 순간 시야가 가려졌다. 하지만 앤디는 똑바로 정면을 주시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처청!

앤디의 검에서 불똥이 튀었다.

앤디의 몸이 가볍게 휘었다. 날카로운 2개의 예기가 앤디의 얼굴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한 합격술이었다.

하지만 그런 합격술을 자연스럽게 피한 앤디는 더욱 대단했다.

앤디의 표정에서 여유가 약간 가셨다.

자신을 합격하고 있는 3명의 상대들 하나하나가 조금 전 싸웠던 파시엘과 비견될 정도의 강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셋은 녹록하지 않은 무위를 과시했다.

차차창! 창!

앤디가 부드럽게 손을 놀렸다.

하나둘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을 때, 뒤에서 해적 수하들이 달려들었다.

앤디가 뒤차기로 해적 하나의 턱을 강타했다. 녀석의 눈이 뒤집어지며 뒤로 쭈욱 날아갔다.

녀석들은 끝도 없이 달려들었다.

처리하는 것도 한두 명이지, 이런 식으로는 곤란했다.

다른 곳에 신경 쓰면서 검을 맞대고 있는 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셋만 상대하는 것도 진이 빠질 지경이니 말이다.

직접적인 육탄전에서는 다구리에 장사 없는 법이다.

그것도 스스로에게 재재를 걸고 있는 와중에서는 더욱더 말이다.

“칫!”

결국 앤디가 몸을 빼 거리를 벌렸다.

물론 적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앤디를 따라붙어 더욱 휘몰아칠 기세를 드러냈다.

앤디가 검을 횡으로 그었다. 하얀 오러 덩어리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따라붙던 사내들은 앤디의 오러 덩어리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콰광!

사내들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앤디의 능력이 자신들보다 한 단계 위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느덧 앤디는 저 뒤에서 호흡을 고르고, 차분히 가라앉은 시선으로 사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해?”

앤디의 말에 사내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눈으로 대화라도 나누는 듯했다.

곧 붉은 머리를 하고 있던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루했지?”

“응.”

“지루하지 않게 해주지. 너희 모두 물러나라. 타죽기 싫으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적들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해적들이 모두 자리에서 멀어지자 붉은 머리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케산이다.”

“앤디다.”

“이건 내 염화일도다.”

화르르륵!

케산이 들고 있던 검에서 붉다 못해 검고 짙은 빛의 암염이 피어올랐다.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얼굴이 후끈해질 정도였다.

앤디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염화일도? 설마… 염천마왕의 무공?”

움찔.

순간, 케산의 붉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케산의 눈빛이 의아함과 의문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녀석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아졌어.”

케산의 말에 앤디가 검을 꼬나 쥐며 대답했다.

“나만 할라고?”

“큭큭! 그 의문을 풀려면 네 녀석이 쓰러져야 한다는 건가?”

케산이 그 말을 하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케산의 미소를 본 앤디도 함께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빨리 와라. 빨리 끝내게.”

“누가 할 소리!”

케산의 몸이 앞으로 쏘아지며 종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앤디는 자신의 몸을 가를 듯이, 아니 전신을 태울 것처럼 날아오는 불덩이를 보고 몸을 옆으로 뺐다. 그러자 앤디 뒤쪽 부근에 자리하고 있던 해적 2명이 대신 그 기운을 뒤집어쓰고 불덩이가 되어 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끄아악! 살려 줘!”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살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숯덩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해적들은 대경실색하여 아주 멀리까지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앤디의 오러와 케산의 화염이 충돌했다.

오러의 기운과 화염의 기운이 충돌하며,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불꽃과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었다.

쿠구궁!

하지만 앤디와 케산은 그 충격파의 중심에서 전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앤디의 검이 케산의 면전으로 날아갔다. 케산이 다급하게 검을 들어 앤디의 검을 막았다.

순간 앤디의 검이 케산의 검과 충돌하여 튕겨지는가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케산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헙!”

당황한 케산은 엉거주춤 서며 무리하여 방어를 시도했다.

쩌엉!

앤디의 검과 충돌한 케산의 검이 깨졌다.

케산의 부서진 검을 통과한 앤디의 검이 케산의 두꺼운 근육이 꿈틀거리던 상체를 깊이 훑었다.

케산은 순간 자신의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시큰함과 화끈함을 느낌과 동시에, 눈앞에서 자신의 피가 물 풍선처럼 터져 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

“크아아악!”

앤디는 그대로 발을 앞으로 쭉 뻗어 케산의 복부를 가격했다.

텅!

케산의 거대한 몸이 붕 떠서 10여 미터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서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다급히 주위에 있던 해적 수하들이 다가가다가 멈췄다. 앤디의 공격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앤디가 몸을 붕 띄워 검극을 아래로 향한 채 내리꽂는 중이었다.

이들을 초기에 제압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앤디는 곧 검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다른 두 녀석이 작정하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흥!”

금발 녀석이 몸을 틀며 가속을 붙여 공격을 시도했다.

앤디의 검이 원래부터 그 공격을 막으려고 했던 것처럼 중심을 잡고 방어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 앤디가 방어하기 무섭게 다른 녀석의 검이 공기처럼 다가와 앤디의 목을 향해 찔러왔다.

앤디는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이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금발 녀석의 검을 힘으로 밀어내며 후발선착의 묘리로 공격을 시도했다.

두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마치 마법과도 같은 검술에 놀란 것이다.

“크흐흑!”

앤디의 검이 가공할 속도로 자신을 공격하는 녀석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녀석은 움찔하며 자신의 공격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아직 죽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패르스! 뒤로 물러나!”

금발 녀석이 외침과 동시에 던진 돌을 발판으로 도움 삼아 몸을 뒤로 빼낸 패르스.

억지로 몸을 빼내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앤디가 가만히 그 꼴을 볼 리 없었다.

“감히 어딜!”

앤디의 검이 환영처럼 분리되더니 여덟 방위로 분산되어 녀석을 향해 날아갔다.

앤디가 작정하고 내지른 공격이다. 쉽게 피할 수 없었다.

금발 녀석이 중간에 끼어들며 오러의 기운을 터트려 앤디의 공격을 튕겨 내지 않았다면, 패르스의 몸은 넝마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반탄력은 어마어마했다.

콰과광!

금발 녀석의 몸이 날아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졌고, 뒤로 몸을 빼던 패르스도 그 충격파에 밀려 중심을 잃을 정도였다.

앤디 혼자 오연하게 서서 주위를 내려다보았다.

금발 녀석과 패르스, 그리고 뒤늦게 상체를 일으키고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 케산이 이를 갈며 앤디를 올려다보았다.

어째서일까. 저 사내의 몸이 거대한 산악과도 같아 보이는 이유가.

앤디의 능력이 자신들보다 한참 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3

“언제까지 노려만 볼 생각이지?”

앤디의 말에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더 덤벼 봤자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이미 승패는 갈라졌다.

“치잇!”

이미 드러난 결과에 순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버릴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았다.

패르스가 이를 악물고 씹어 내뱉듯 말문을 열었다.

“졌다.”

“그래서?”

앤디의 말에 해적 녀석들의 안면 근육과 눈썹이 꿈틀거렸다.

케산이 물었다.

“원하는 게 뭐냐?”

“의문이 하나 있어서 말이지.”

“그게 무엇이냐?”

앤디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어이, 금발, 네 녀석들의 두목이 누구냐?”

“내 이름은 바이널이다.”

“그래. 금발.”

“바이널.”

“그래그래. 바이널. 여하튼 네 녀석들 두목과 만나고 싶다.”

바이널은 고민을 하더니 패르스와 케산을 돌아보며 잠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당신이라면 우리 보스를 만날 자격이 있지. 따라와라.”

바이널이 몸을 돌려 등을 보이며 걷자 앤디가 그 뒤를 따랐다.

해적들이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내주었다.

패르스는 잠시 앤디의 등을 노려보다가, 신음을 애써 참고 있는 케산을 부축하여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폐선이 쌓여 있는 그곳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거대한 함선이 목적지란다.

앤디가 입을 연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 후였다.

“아직 멀었나?”

“거의 다 왔다.”

“시간이라도 벌 생각이었나 보지?”

바이널이 어깨를 으쓱였다.

“길이 이것뿐이라면 안 믿겠지?”

앤디가 피식 웃어줌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바이널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얼마 후,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멈춰 선 바이널이 앤디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곳이다. 들어가면 네가 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다.”

“고맙군.”

“별말씀을.”

“이거 왠지 팁이라도 줘야 할 것 같은데?”

“준다면 거절하지는 않겠다.”

말 한마디 지지 않는 바이널을 향해 앤디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러자 낚아채듯이 받아가더니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그 정중한 모습은 마치 호텔 벨보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앤디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하하하! 그래, 수고가 많았네.”

바이널이 뒤도 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자 앤디는 곧 웃는 표정을 지웠다.

자신의 무력을 경험했음에도 저토록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뜻하는 바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안에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해적 두목이 있는 문 앞이 휑했다. 사람은커녕 벌레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명색이 해적들을 대표하는 존재인데, 경비 서는 녀석 하나 없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작은 부산스러움이 없었다면 정말 사람이 있기나 한 걸까 싶을 정도였다.

앤디는 입맛을 쩍 다시며 문을 직접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내부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나를 찾는 친구가 자넨가?”

사내의 목소리 뒤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따라서 들려왔다.

“가만히 있어봐요. 면도하다 말고 움직이면 어떻게 해요!”

“손님이 왔잖아!”

“지금 이 꼬라지로 손님을 만나려고요? 아직 절반밖에 못 깎았다고요!”

“난 면도 안 해도 원래 멋있다고.”

“지금 꼬라지가 어떤 줄 알아요? 광대도 이렇게는 안 한다구요!”

“아, 그럼 대충 마무리해줘!”

“오랜만에 온 손님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면도해달라고 한 게 누군데 그래요!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이럴 줄 알고 바이널한테 조금 천천히 오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쯧!”

결국 여자에게 눌린 듯 사내가 목소리를 높여 앤디에게 말했다.

“쩝! 상황이 이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

“그러지.”

앤디는 태연하게 대답하고 안쪽에 위치한 넓은 소파에 앉았다.

안에서 한참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앤디는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안쪽에서 말쑥한 모습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앙칼진 목소리를 연신 터트리던 여인도 등장했다. 그 둘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앤디를 주시했다.

사내가 웃으며 앤디에게 다가왔다.

“반갑네. 나를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하하!”

앤디는 얼떨결에 사내가 내민 손을 마주 잡고 악수했다.

“설마 당신이 해적 두목?”

앤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질 만도 했다. 해적으로 보기엔 너무나도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정정해주었다.

“두목이 아니라 선장이겠지.”

“여하튼.”

앤디의 대답에 사내는 자신의 옆에 자리하고 서 있는 여인을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제시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나 말고 다른 선장이 있어?”

“자꾸 헛소리할래요!”

“아니면 아니지, 왜 큰 소리야?”

“당신이 자꾸 화나게 하잖아!”

“야, 그래도 선장한테 당신이 뭐냐, 당신이.”

“그럼 야라고 불러줄까!”

으르렁거리는 제시카의 대답에 해적 선장이 바로 말을 바꿔 대답했다.

“…야보다는 당신이 낫긴 하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신이라는 어감이 참 좋은 것 같은데?”

제시카는 해적 선장의 대답에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하고 내쉬었다.

“에효! 됐어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해적 선장은 제시카의 말에 히죽 웃으며 앤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확실한 것 같지?”

“그렇군.”

“난 얀이라고 하네. 보시다시피 이곳 해적단의 선장을 맡고 있지. 캡틴 얀이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앤디.”

“앤디라…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군. 헤르만 왕국의 귀족이었던가? 맞지?”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를 왜 찾아왔지?”

“여기 해적 중 하나가 신혼여행을 하고 있던 나를 습격했거든.”

“그게 누군가?”

“파시엘이라고 하더군.”

“그는 지금 어딨지?”

“혼자 자폭했지.”

어중간한 대답이었지만, 얀은 모두 안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타까운 일이군. 늦었지만 결혼을 축하하네.”

“고맙군.”

“내 누누이 그 친구에게 사람 보는 눈 좀 키우라고 말을 했는데. 쯧쯧!”

그 말에 앤디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자네는 사람을 볼 줄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그럼 알지. 자네가 진짜라는 것을 말이야.”

“진짜? 그럼 가짜는 뭐지?”

얀이 비릿하게 말했다.

“만일 자네가 허세만 부리는 가짜였다면, 그 목은 벌써 바닥에 있었을 거네.”

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앤디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반박귀진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였다.

하지만 앤디는 여유 어린 미소를 지으며 얀을 마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진짜니까 네 목이 곧 바닥에 떨어지겠군.”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아하하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얀.

곧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놈!”

일갈을 지르는 얀의 얼굴에 싸늘한 분노가 서리처럼 서려 있었다.

“왜?”

“죽고 싶나?”

“난 죽을 생각은 없는데?”

“그럼 죽여주지.”

“실력이 된다면….”

앤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빛 섬광이 번쩍였다.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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