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36화 (49/68)

제7장. 악마

1

셀린은 안드레이의 명에 따라 수많은 왕국을 지나 쿠렌트 제국의 국경에 도착했다.

이곳에 왜 와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안드레이의 말로는 무작정 가면 알 것이라고만 했다.

셀린이 국경을 넘어서자 갑자기 한 사내가 접근을 해왔다. 웬 변태인가 싶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셀린 님이시군요.”

셀린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누구시죠?”

그 말에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마, 마법은 거두시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해를 끼치려고 온 게 아니라 어떤 분께서 보내셔서 온 것입니다.”

어느새 셀린의 양손에 이글거리는 화염과, 보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 덩어리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어떤 분이 어떤 분인데요?”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맡은 일만 하는 것이라서요.”

그 말에 셀린의 머릿속에 안드레이가 떠올랐다.

‘스승님은 참 비밀도 많은 양반이야.’

셀린은 자신이 과의식 방어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마법을 거두었다. 괜한 부끄러움에 양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더 공손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는 셀린을 리버 영지까지 바래다주고 떠나갔다.

셀린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라는 말인가. 막막하고 막연했다.

그때, 갑자기 음침하게 생긴 사내가 셀린에게 다가왔다.

셀린은 그 사내의 등장에 긴장했고, 사내도 지금이라도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셀린의 마법에 긴장했다.

그런 식으로 여덟 번이나 사내가 번갈아가며 셀린을 인도했다.

그리고 도착한 글라스 영지.

“이곳에서 식사를 하십시오. 제가 할 일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셀린은 떠나가는 사내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식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린 배를 채웠다.

그 후, 셀린은 생각했다. 이번에도 다른 사내가 오겠지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은 지금까지와 달리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사내를 맞이했다.

“누구시죠?”

“탈리온이라 하오.”

셀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탈리온을 따라 이동한 작은 산장.

사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탈리온을 만나기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타 왕국의 핵심 인물의 관련자가 제국의 탈리온 공작을 만나는 일이다. 누가 봐도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셀린은 순간 자신이 여기까지 오면서 뭔가 실수한 것이 있는지를 고심해보았다.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네.”

“탈리온 공작 전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안드레이의 제자라고 들었네.”

“본의 아니게도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하! 내가 아는 안드레이 공작은 사소한 감정으로 사람을 들이지 않네. 만일 그러했다면 이미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 수는 아카데미를 차릴 만큼 많을 것이네.”

이 이상의 찬사가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부심이 생겼다. 자신의 스승인 안드레이를 이렇게까지 높이 평가해주는 이가 타국에, 그것도 제국의 중추 핵심 인물인 탈리온 공작이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저는 이곳에 왜 온 것입니까?”

“흠… 안드레이 공작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나 보군.”

“네.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신중한 그라면 그럴 만도 하지.”

탈리온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셀린을 보았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셀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신중한 셀린은 탈리온 공작의 신원을 직접 확인한 후에야 믿음을 보였던 것이다.

“그때는 실례를 했습니다.”

“아니라네. 누구라도 그리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옳다네. 막말로 누가 갑자기 자신의 앞에서 내가 이 나라의 왕이오 하면 누가 믿겠는가. 겉모습과 명함에 혹하는 것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지.”

“이해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감사씩이나.”

“그럼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흠… 정말 말하기 애매하군.”

탈리온 공작은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셀린은 이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랜 망설임 끝에 탈리온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내겐 스승님들이 계시다네.”

“네.”

셀린은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스승님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무엇보다 고등 검술을 익힌 자가 혼자서 익힐 경우는 더 드물었다.

“이런! 내 말을 이해를 못하고 있군.”

“예? 죄송합니다.”

탈리온 공작의 말에 셀린은 당황했다. 자신이 뭘 이해를 못했는지 다시 고민했다.

그러자 탈리온이 한숨을 내쉬며 보충 설명을 하듯 말했다.

“내 스승님들이 아직도 살아서 계시다는 말이네.”

“…예에?”

셀린의 입에서 실례라 할 수 있을 만큼의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탈리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셀린의 반응이 과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라 해도 모르는 입장에서 저런 말을 듣는다면 같은 행동을 할 것 같았다.

그사이에 셀린이 마음을 가다듬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스승님들이라는 것은 한 분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다네.”

“그분들이 누구십니까?”

“누구라고 말을 해도 알 수가 없을 것이라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신 분들이기 때문이지.”

역사라는 말까지 나왔다. 셀린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분들이 어디에 계십니까?”

“흠… 설명하긴 힘드네. 내가 자네를 직접 데려다줄 것이네.”

“저를 데려다주신다고요?”

“그렇네. 자네가 할 일은 그곳에서 그 두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거든. 그런데 그곳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네.”

“예?”

“흠… 설명은 어렵고, 직접 가면 알 것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군.”

셀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맡게 된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각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자네가 가는 것을 반대하고 싶네.”

“…?”

“하지만 안드레이 공작의 말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한다면 그분들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셔야겠지….”

‘앞으로 일어날 일?’

탈리온 공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릴 정도로 깊은 심적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자신이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셀린을 그곳에 보낸다는 말과 달리 정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사이에 셀린 역시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니, 무슨 소리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뭔가 큰일이 벌어진다는 뜻인가? 그리고 모시고 나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디에 기거하고 계시다는 뜻인가? 아니면 혹시 갇혀 있다는 뜻?’

탈리온 공작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자네가 이곳에 오게 된 사정 따위는 모른다네. 안드레이 공작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른다네. 다만, 자네가 내 스승님들을 이 세상에 불러낼 가능성이 있는 적임자라 생각하고 보냈다는 것만은 짐작하고 있지. 부탁하겠네. 가능하다면 꼭 스승님들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실 수 있도록 해주게.”

셀린이 다부지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탈리온 공작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셀린의 양어깨를 꼬옥 잡았다.

잠시 후, 탈리온 공작을 따라 들어간 곳은 어떤 동굴이었다.

“그분들이 여기에 계십니까?”

“이곳이긴 하지만, 조금 다르네.”

“예?”

“직접 가보면 알 것이네.”

탈리온 공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탈리온 공작이 셀린의 목을 수도로 내리쳤다.

“…!”

“….”

작은 신음도 없이 셀린의 정신이 끊어졌다.

탈리온이 쓰러지고 있는 셀린을 안전하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회안에 빠진 모습으로 팔에 안긴 셀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2

또옥  똑

“으, 으음.”

종유석 위에 맺혀 있던 차가운 물방울이 셀린의 얼굴에 떨어졌다.

또옥

“앗! 차가워! 뭐, 뭐지!”

잠에서 깨어난 셀린. 눈을 뜨니 막막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탈리온 공작이 자신을 기절시켰던 기억이 떠올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주위에는 탈리온 공작은커녕 쥐새끼의 기척도 잡히지 않았다.

덜덜!

그러고 보니 몸에 한기가 어렸다.

을씨년스러운 바람과 소리의 울림 따위가 이곳이 동굴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곳에 있는지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몇 걸음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들쭉날쭉한 돌부리에 발이 걸려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셀린은 한 손을 들고 라이트 마법을 일으켰다. 환한 불빛이 갑자기 시야를 눈부시게 했다. 그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셀린은 마나의 양을 조절하며 불빛을 약하게 낮추었다.

시야가 잡히자 셀린은 주위를 둘러보고 확실하게 동굴임을 확인했다.

그때, 저 안쪽 어딘가에서 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밌군. 이곳에 사람이 들어오다니.”

“낄낄낄. 맞아. 재밌어.”

“이게 얼마 만이지? 오십 년 만인가?”

“맞아, 맞아. 얼마 만일 거야.”

노인은 하나가 아니었다.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노인의 말을 따라 하며 웃어대는 괴인도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자꾸 했다.

셀린이 불안함과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거기 누구시죠?”

“맞아. 난 누구다!”

“아, 정말 정신 사납네! 시끄러워!”

“맞아. 정말로 시끄럽다! 조용히 해! 낄낄낄!”

셀린이 라이트 볼의 불빛을 밝혔다. 그러자 저 끝자락에 인영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인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곳에 갇혔지?”

‘죄? 갇혀?’

셀린은 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가래 끓던 노인이 정색을 하고 노인의 말을 받았다.

“뭐? 죄? 나쁜 놈이냐!”

“놈은 무슨, 년이다.”

“나쁜 년이냐!”

순간 심장을 조여 오는 살기!

셀린이 놀라 다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 저는 셀린입니다. 나쁜 년이 아닙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이 사라지는 살기와 의문사.

“셀린?”

“맞아. 셀린이야. 케헤헤!”

“시끄러워! 너한테 한 말 아니니 좀 닥쳐.”

“맞아. 시끄러워. 너한테 한 말 아니니 좀 닥쳐. 케헤헤헤헤!”

셀린이 의문을 던졌다.

“어르신들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렇게 질문은 했으나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탈리온 공작이 말했던 그 곳인가 보군. 그렇다면 저 두 분이 탈리온 공작의 스승이란 말인가?’

아직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 셀린의 물음을 가래 끓는 노인이 받았다.

“누구? 누구가? 누구지?”

“시끄럽고 정신 사나우니까 제발 넌 뒤로 좀 빠져라. 응?”

“네가 더 시끄럽고 정신 사나워. 네가 빠져. 케헤헤!”

셀린은 두 노인의 투닥거림을 들으며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힘 있는 노인이 대답을 해줬다.

“누구라….”

“….”

“그런 질문을 받아본 것이 얼마나 됐는지 기억도 안 나는군. 큭큭큭! 이 미친 녀석 외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린 지 얼마 안 됐는데, 기분이 묘해.”

“맞아. 기분이 묘해. 헤헤!”

“흠… 그러고 보니 내가 누구였더라? 하도 오랫동안 고민을 해봤더니 기억도 나질 않는군.”

두 노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셀린이 비추고 있는 라이트 볼 아래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모습을 드러냈다.

둘 모두 벌거벗고 있었는데, 옷을 입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머리와 수염으로 전신이 뒤덮여 있어, 마치 두터운 로브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한 명은 검은색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었고, 한 명은 흰색 머리카락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치 각각 흰 로브와 검은 로브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말했다.

“그런데 너는 이곳에 어쩌다 들어왔느냐?”

그 말을 흰 머리카락 노인이 바로 받았다.

“여길 어떻게 들어왔겠지. 낄낄!”

셀린은 융통성을 발휘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들어왔는지는 알았기 때문이다.

괜히 자신까지 횡설수설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서는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스스로 들어왔다는 이미지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저는 사람을 찾으러 들어왔습니다.”

“사람을 찾아?”

“사람은 찾아?”

“사람을 찾으려고 지옥에 왔다고?”

“지옥? 거긴 어디야?”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약간 짜증나는 어투로 말했다.

“너랑 있는 곳이 지옥이다.”

“하아! 내가 지옥이구나! 내가 지옥이다! 내가! 이히!”

“…저 녀석 말은 듣지 마라. 혼란스러워질 뿐이니까.”

셀린은 그 말에 다소곳이 웃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그 미소를 봤는지 혀를 찼다.

“클! 이곳에 올 녀석은 확실히 아니군. 누굴 찾으러 왔는지 모르겠지만, 찾는다 해도 못 나갈 것이다.”

“예?”

“이곳은 나갈 길이 없는 곳이거든.”

“여기 나갈 길 없다! 없지롱롱롱! 없지롱!”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놀리는 듯한 말을 하자, 셀린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갈 길이 없다니요?”

“쯧! 역시 그렇군. 네년의 꼴을 보니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들어온 것이로군.”

“케케케! 나도 여기가 어딘지 몰라~”

“넌 몰라도 되니 조금 빠져.”

“싫어. 알고 싶어서 안 빠질래. 안 빠질 테야.”

셀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해주지. 이곳은 감옥이다.”

“감옥….”

“그래. 죄를 지은 자를 가두는 감옥.”

“맞아. 감옥이야, 감옥. 헉! 여기가 감옥이었어? 난 죄를 지은 게 없는데! 날 풀어줘!”

순간, 흰 머리카락의 노인이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이곳저곳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혀를 찼다.

“쯧!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또 발광하는군. 그건 그렇고 자네, 거기 있으면 위험하니 한 발 앞으로 나오게.”

“예?”

“싫으면 말고.”

“….”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말에 셀린이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 위로 거대한 돌덩이 파편이 떨어졌다.

쿵!

셀린이 놀라 바닥에 엎어졌다. 그 상태로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놀란 눈빛으로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곳이 어째서 나갈 길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큭큭! 역시 전혀 모르고 들어왔어. 큭큭큭큭!”

저 위쪽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으아아아! 날 내보내 줘! 내보내 줘!”

쾅쾅쾅!

셀린이 머리 위가 걱정되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반면에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은 태연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은 존재하는 곳이지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야. 들어오고 싶다고 들어오고, 나가고 싶다고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지.”

“그게 무슨….”

“이곳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차원과 다른 공간이기 때문이지. 최악의 범죄자들만 가두는 현세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감옥이지.”

셀린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다.

“그런 감옥에 어르신께서는 무슨 나쁜 짓을 하셔서 들어오셨습니까?”

“나? 나는 내 발로 들어왔지.”

“예? 어째서….”

“큭큭! 누가 나를 가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전신에서 폭사되는 가공할 기운.

셀린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마치 드래곤이라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 혹시 그거 아는가?”

“…무, 무엇을 말입니까?”

“악마를 잡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악마에게 물들어버려서 끝내는 스스로가 악마가 된다는 이야기 말이네.”

순간,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머리카락 틈으로 붉은빛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의 심장이 얼음장이라도 올려놓은 것처럼 써늘하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어렸을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마왕의 강림을 막기 위해 악귀들과 싸우고 악마가 되었다는 용사들의 이야기가 말이다.

셀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 설마! 두 분의 정체가 혹시 용사 베르커스 님과 안테르트 님이십니까!”

“큭큭큭큭큭!”

검은 머리카락의 노인의 음침한 웃음소리가 동굴을 가득 메워나갔다.

앤디와 레오나 공주는 하이네스 왕국의 풍취에 흠뻑 빠졌다.

헤르만 왕국도 사계가 뚜렷하여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곳 하이네스 왕국은 기후가 따뜻해서 항상 여름 날씨가 유지되었다.

또한 앤디는 자꾸 따라다녀 귀찮은 녀석들을 떼어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검술을 지도해주기로 한 것이다.

이미 브라키우드의 레어에서 기연을 얻어 한 단계 실력이 상승한 그들은 앤디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고 있는 바였다.

앤디로 인해 살아났고, 앤디로 인해 기연을 얻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혹하는 것은 바로 고급 검술밖에 없었다.

늘어난 마나량과 어울리는 고난이도 검술.

앤디가 모두를 불러냈다. 안젤른과 파프, 쉐리와 렐리, 루슬란과 클라우저.

그리고 그들 앞에서 딜을 했다.

“따라 나오겠나? 아니면 내가 가르쳐 주는 검술을 수련하겠나?”

안젤른과 파프가 욕구를 누르고 말했다.

“따, 따라 나, 나가겠, 겠….”

“정말인가!”

“저, 저희는 주군의 안위를….”

순간 앤디가 검을 뽑아들었다.

휘릭! 슈리리릭!

그리고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서 화려한 검무를 펼쳤다.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멋진 검술이었다.

모두가 감탄에 감탄하여 입을 쩌억 벌렸다. 하나라도 놓칠까 눈도 감지 않고 주시했다.

그 덕에 검무가 끝났을 무렵 모두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말과 달리 마음은 정직했던 것이다.

앤디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검술만 익히면 너희는 상급을 넘어 마스터의 벽을 두드리게 될 수도 있다.”

순간 안젤른과 파프, 루슬란과 클라우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급 익스퍼트에 속한 클라우저, 중급 익스퍼트에 속한 안젤른과 파프,  얼마 전에 깨달음을 얻어 상급 익스퍼트에 속하게 된 루슬란ㄴ.

그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뽐내고 있었다.

딜이 끝났음을 앤디는 깨달았다. 자신이 던진 떡밥에 홀딱 넘어간 것이다.

‘됐군. 큭큭!’

반면에 쉐리와 렐리는 시큰둥해 보였다.

앤디는 아차 싶었다. 쉐리는 정령술사고, 렐리는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떨어트릴 다른 방법이 있었다.

우선 저 사내놈들이라도 떨어트려야 했다.

결국 앤디는 안젤른과 파프, 루슬란과 클라우저에게 각자 몸에 맞는 검법을 전수해주었고, 막힌 부분에 대한 세밀한 지도를 해주었다.

그들의 검술은 날이 갈수록 쑥쑥 늘었다. 우후죽순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들은 강해지는 재미에 빠져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할 정도였다.

수련하다 막히면 앤디가 망설임 없이 가르쳐 주고 말이다.

이곳은 검사인 이들에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앤디는 정보 길드에서 구입한 것을 쉐리와 렐리에게 건넸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점과 제과점 정보, 액세서리와 유명한 옷가게 정보가 가득 담긴 카탈로그였다.

거기다 충분히 놀 수 있는 용돈까지 챙겨 주었다.

“꺄아! 이게 웬 떡!”

쉐리와 렐리는 그것을 본 순간 환호하며 사라졌다.

건네기도 무섭게 낚아채서 사라지는 둘을 보며 앤디는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그제야 둘이 된 앤디와 레오나 공주는 닭살스럽게 붙어서 하이네스 왕국의 수도 곳곳을 돌아다녔다.

바다와 어우러진 천연 자연의 최고의 휴양지 하이네스 해변!

하이네스 해변의 백사장은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쪽빛 바다.

저기 멀리 바다에서 파도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림 같은 숙박 시설과 혀가 같이 녹아도 모를 정도로 맛있는 해물 음식들. 이곳에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몰리는 이유가 있었다.

그 넓은 백사장에 자리한 그늘진 야자수 아래 자리를 잡은 앤디와 레오나 공주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둘의 존재 자체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많은 남녀들이 지나칠 때마다 한 번씩 돌아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자는 앤디를, 남자는 레오나 공주를 말이다.

남자가 앤디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앤디가 느끼한 눈빛으로 레오나 공주의 두 눈을 마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아름다운 두 눈에 건배를.”

“앤디도, 참. 몰라아아.”

“아하하하!”

“오호호홋!”

둘은 옆에서 자리하는 다른 커플들의 손발까지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아주 깨가 쏟아졌다. 세상에 자신들 둘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레오나 공주가 말했다.

“진작 결혼할 걸 그랬어.”

“그러게. 아, 잠시만.”

“왜? 어디 가?”

“금방 올게.”

앤디가 신이 난 듯 발걸음도 경쾌하게 어디론가 뛰어갔다.

레오나 공주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잔에 담겨 있는 주스를 빨대로 빨아 마셨다. 트리피컬 주스의 독특한 맛이 레오나 공주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촤아아아! 촤아!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넓은 바다가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왕궁에 갇히다시피 살아 많은 것을 보지 못했던 레오나 공주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으며 즐거웠다.

무엇보다 자유스러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레오나 공주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특히나 기분이 좋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그때, 레오나 공주는 누가 등 뒤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등 뒤의 존재가 앤디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웃으며 반길 준비를 했다.

“흠흠! 저기… 아가씨.”

“네에.”

레오나 공주가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러다 순간 당황했다. 등 뒤의 사내는 앤디가 아니라 전혀 엉뚱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귀족이라고 떠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고 있는, 너무 화려해서 촌티까지 나는 옷, 그리고 땅딸만 한 키, 음흉하게 보이는 실눈과 이죽거림이 배어 있는 얄팍한 입술, 넙대대한 얼굴과 흐르는 개기름. 그 뒤로 호위인지 기사복을 걸치고 자리하고 있는 사내들.

순식간에 스캔을 마친 레오나 공주가 인상을 구겼다.

“왜 그러시죠?”

녀석은 대답할 수 없었다. 레오나 공주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기 때문이다. 뭐, 그래봤자 실 자가 줄 자로 변한 수준이었지만.

“볼일 없으시면 가주세요. 일행이 있어요.”

그 말을 하고 몸을 돌린 순간, 음흉 돼지 녀석이 레오나 공주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왜 볼일이 없겠소. 흐흐흐!”

음흉 돼지 녀석이 웃음을 흘리는데, 충치로 상해 있는 누런 이가 드러났다.

순간 소름이 일며 전신에 닭살이 돋아 올랐다. 레오나 공주가 경기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비명을 터트렸다.

“꺄악!”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다고 그러오? 뭐, 비슷한 일을 하긴 할 거지만. 큭큭큭큭!”

“킥킥킥킥!”

음흉 돼지 녀석의 뒤에 자리하고 있는 기사들이 음흉한 웃음을 함께 흘렸다.

레오나 공주가 당차게 소리쳤다.

“당장 저리 가지 못하겠느냐!”

“가기 싫은데 어쩔 거냐.”

“낄낄낄낄!”

“흐흐! 나의 천사아, 나와 함께 놀아주오오오!”

음흉 돼지 녀석이 자꾸 다가오자,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어난 레오나 공주가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음흉 돼지 녀석은 레오나 공주의 팔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맛깔스러운 음식이라도 본 것처럼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레오나 공주를 주시했다.

“저, 저리 비키지 못하겠느냐!”

레오나 공주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자 음흉 돼지 녀석이 느글느글하게 입을 열었다.

“워워! 알아, 알아. 너도 이런 걸 즐기는 거지?”

“무슨 소리야! 사람 말을 해!”

레오나 공주가 몸부림쳤다.

“큭큭! 자꾸 빼니까 더욱더 흥분되는구만. 크흐흐!”

결국 도움 어린 목소리를 내질렀다.

“앤디!”

“나 불렀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음흉 돼지 녀석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호위를 서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나타났기 때문이다.

호위들이 다급하게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뭐, 뭐야?”

“뭐긴, 돼지 새꺄! 그 천사 남편이다.”

“뭐! 뭐! 돼, 돼지!”

음흉 돼지 녀석이 화난 표정을 지었다. 더 볼품없이 변했다.

하지만 앤디와 레오나 공주는 그 녀석이 괴물로 변신하든, 뭘 하든 관심이 없었다.

레오나 공주가 눈물범벅이 돼서 앤디를 책망했다.

“뭐하느라 늦었어어!”

“미안. 선물을 사오느라….”

“미워.”

“미안.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레오나 공주가 눈물을 훔치면서 물었다.

“왜에?”

“우는 모습도 예쁘잖아.”

앤디의 말에 레오나 공주가 수줍지만 싫지 않은 듯 몸을 배배 꼬았다.

그때, 음흉 돼지 녀석이 자신이 여기에 있는데 사이에 끼워두고 뭣하냐는 듯 언성을 높였다.

“이 자식들! 감히 내 앞에서 무슨 지…!”

퍼어억!

“커흐어허억!”

음흉 돼지 녀석이 앤디의 주먹 한방에 저 뒤로 날아가듯 나가떨어졌다.

“자식, 겁나 시끄럽네.”

앤디는 불결한 시선으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음흉 돼지 녀석의 안면을 가격한 손이었다.

“아, 젠장! 손이 썩는 것 같아.”

레오나 공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서 씻어. 나도 씻어야겠다.”

레오나 공주의 말에 앤디는 재빨리 백사장 모래에 손등을 씻었다. 레오나 공주도 녀석에게 잡혔던 자신의 손목을 모래로 씻기 시작했다.

그사이에 정신을 차린 음흉 돼지 녀석이 소리쳤다.

“가, 감히 날 때리다닛! 어, 어라!”

그런데 그 순간, 녀석의 앞니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앞니가 비어 휑한 구멍이 뚫렸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머리에서 불이 날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분노의 일갈을 내질렀다.

“뭐, 뭣들 하는 게냐! 저, 저 자식들을 당장 죽여라! 귀족 폭행죄와 모욕죄로 즉결 처형하라!”

“충!”

호위들이 검을 뽑아들고 앤디를 둘러쌌다. 앤디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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