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35화 (48/68)

제6장. 결혼

1

이름 없는 지하 감옥.

누군가가 고문을 당하는 것일까?

“으아아아아악!”

“크크크크큭!”

“사, 살려 줘! 으아악!”

어디선가 들리는 비명 소리는 참담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비명이 초라하게 사라져 갔다.

그때 어디선가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큭! 크크큭! 이제 완성이 되어가는군.”

어두운 음영이 가득한 방 안에서 한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제 곧…. 크흐흐흐흐흐!”

“안드레이 경,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오?”

헤르만 8세의 부름에 안드레이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무엇을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우리 레오나 공주를 슬슬 결혼시킬까 하는데 말이오.”

안드레이가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긴 공주 마마께옵서 혼기가 차셨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제게 그런 질문을….”

헤르만 8세가 당연한 것을 어찌하여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차다 못해 지나가기 직전이오. 그리고 결혼 문제를 안드레이 경에게 묻지 않으면 누구에게 묻는단 말이오?”

“예?”

“앤디 경의 스승이 경이지 않소?”

그 말뜻을 깨달은 안드레이의 머리가 띵 하고 울렸다.

“헐! 그 말씀은 예전에 하신 농담이 진담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농담? 농담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짐은 경에게 농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소.”

“….”

순간, 안드레이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경도 지금까지 짐이 이야기할 때마다 긍정의 빛을 보이지 않았소?”

이번에는 등줄기로 땀이 줄줄 흘렀다.

지금까지 농담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가볍게 맞장구를 쳤던 것뿐이었는데, 헤르만 8세는 그 모든 것을 진심으로 들었던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막막한 기분이 드는 안드레이였다.

상황을 눈치챈 헤르만 8세가 투덜거렸다.

“어쩐지… 혼기가 지나가려 하는데도 불구하고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더만….”

“소, 송구하옵나이다. 소신의 불찰이 컸사옵나이다.”

“아닐세.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지. 난 또 우리 공주를 이대로 노처녀로 만들 심산인가 했지.”

“쿨럭!”

은근한 헤르만 8세의 뒤끝에 안드레이는 하루 종일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헤르만 8세에게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통신구를 붙잡고 앤디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앤디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수련을 하시는 중이라고 나중에 연락을 하시랍니다.]

이 말에 복창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순간 이동을 하여 앤디의 영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앤디가 수련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멀리서 앤디가 보이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가던 안드레이가 멈칫했다. 그리고 불신의 시선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앤디가 안드레이를 보고 반가운 모습을 보였다.

“스승님!”

“…앤디?”

의문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안드레이를 보며 앤디가 울컥했다.

“뭡니까? 오랜만에 보는 제자를 꼭 그런 눈으로 봐야겠어요?”

“누구냐?”

“누구긴요. 앤디죠. 다른 앤디라는 이름의 제자가 또 있으신가 보죠?”

앤디의 이죽거림에 안드레이가 그제야 수긍 어린 모습을 보였다.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깐족거림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개김성이 아닌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냐?”

“뭐가 말입니까?”

“네 기운이 변한 것 같은데, 내 착각이냐?”

그 말에 앤디가 움찔하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스승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네요. 딱히 피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안드레이의 물음에 앤디가 말했다.

“잠시 후 제 집무실에 뵐게요. 이 상태로 계속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길거든요.”

안드레이는 땀에 절어 있는 상체가 그대로 드러난 앤디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앤디가 안드레이를 찾아 집무실로 갔다.

안드레이는 차를 마시며 앤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앤디는 안드레이에게 수정구로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자세한 내용을 모두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안드레이의 표정이 굳어갔다.

“언데드 드래곤? 언데드 드래곤이라고 했느냐?”

“예.”

“너는 그 언데드 드래곤과 죽음 직전까지 싸워서 이기고, 녀석의 몸에 있던 드래곤 하트 기운을 흡수하여 육신의 재구성을 하게 되었고?”

“네.”

“레드 드래곤 브라키우드와 싸워서 졌고, 깨어난 후 이야기를 나눠서 언데드 드래곤을 만든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과, 그 인간이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벌이는 존재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뭘 새삼스럽게 다시 되물어보세요.”

“이 녀석아! 이 중요한 것을 왜 지금에야 말하는 게냐!”

“안 물어보셨잖아요.”

“이건 안 물어보고, 물어보고의 문제가 아니질 않느냐! 당연히 모두 고했어야 하지 않느냐!”

안드레이의 높은 언성에 앤디가 구시렁거리듯 대답했다.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죠….”

앤디가 기죽은 모습을 보이기 무섭게 안드레이가 껄껄껄 웃었다.

“답답한 녀석아! 네가 또 다른 경지에 올라간 것을 지금에야 말하면 어쩌란 말이냐!”

“예에?”

“아이구! 이런 경사가 있나!”

안드레이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로 활짝 웃기 시작했다.

앤디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른 문제로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경지가 올라간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화가 났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레드 드래곤이나 다른 이야기 때문에 화가 난 것 아니었어요?”

“그것 때문에 왜 화가 나느냐?”

“아니, 그러니까….”

앤디는 뭔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니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레드 드래곤이 너에게 축객령을 내렸다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레드 드래곤은 또 만날 일 없을 것 같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디 한두 개냐? 언젠가 어떻게든 밝혀지겠지. 굳이 지금 머리를 싸매고 선문답 같은 수수께끼에 매달릴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그도 그렇네요.”

“그럼 그때 잡아서 레드 드래곤에게 연락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언제까지 잡아오라는 시간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끄덕끄덕.

안드레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괜히 자신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 앤디였다.

안드레이는 진정으로 기쁜 표정으로 앤디를 안아주었다.

“너는 정말 우리 왕국의 복덩이다.”

“뭘 복덩이씩이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앤디는 왠지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그럼 네 경지가 지금 어느 정도인 것이냐? 마스터의 벽은 넘어선 것이냐?”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럼 지금의 네 경지는 그랜드마스터 정도로 봐도 되겠구나.”

“그런가요? 그런데 스승님은 육체의 재구성에 대한 것을 어떻게 아시는 거죠?”

“어찌 모르겠느냐. 탈리온 공작님도 경험했던 것인데 말이다.”

“아!

“그분 나에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 진정한 그랜드마스터는 육체의 재구성을 경험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린지 사실 정확히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너를 보니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안드레이가 감탄 어린 시선으로 앤디를 열심히 훑어보았다. 자랑스럽기 그지없다는 스승의 눈빛에 앤디가 목을 쭉 뺐다.

안드레이가 넌지시 질문을 던져 보았다.

“혹시 탈리온 님과 붙으면 어떨 것 같느냐?”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짓궂은 질문이었다.

앤디가 고심한 후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앤디의 말에 안드레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누구 제자인데 지겠느냐. 후후! 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구나.”

“스승님,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그러거라.”

앤디가 밖에 나서는 모습을 보며 안드레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앤디가 나서고 문이 닫히자,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탈리온 공작과 붙어서 지지 않을 것이라는 앤디의 말은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 전 앤디를 뷰 마나 포스로 확인했을 때,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마나홀의 크기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 앤디가 손도 거의 쓰지 못하고 레드 드래곤에게 당했다고 했다. 그 말은 탈리온 공작도 드래곤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드래곤이 그렇게 강력한 존재였던가? 그리고 언데드 드래곤이라니. 또 그 언데드 드래곤을 만든 이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된 사람이라니? 설마… 설마….’

안드레이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 가기 시작했다.

안드레이가 뭔가를 부정이라도 하듯 머리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그때, 밖에서 문틈으로 심각한 안드레이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앤디의 표정도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앤디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던 것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스승님… 대체….’

2

화장실을 다녀온 앤디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부리나케 날아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수정구로 연락도 하셨다면서요?”

“아, 내 정신 좀 봐라.”

“왜요?”

“네 녀석의 뜻밖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여기 온 목적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구나.”

“목적이 뭔데요?”

집요하게 질문을 하는 앤디에게 결국 모든 이야기를 한 안드레이였다.

“네에? 결혼이요?”

“그래.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

“레오나와 말이죠?”

앤디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물론이다. 혹시 결혼에 대해서 생각이 있느냐?”

앤디가 몸을 배배 꼬며 대답했다.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세요오.”

“중요하니 그러지.”

“아이 참,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물어볼 필요가 있느냔 말이죠.”

앤디의 맹랑한 대답에 안드레이가 입맛을 쩍 다셨다.

안드레이의 눈빛은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앤디는 자신의 부모인 클레오와 벤존스에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둘은 흔쾌히 축하를 해주었다.

“네가 드디어 사내가 되는구나.”

“이 어미도 기쁘단다. 손자를 볼 생각에 벌써부터 기쁘구나.”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하! 우리야말로 고맙구나. 이런 기쁜 소식을 듣게 해줘서 말이다.”

“그런데 신부는 누구인지 알 수 있겠느냐? 어디 사는 어떤 색시니?”

어머니 클레오의 물음에 앤디가 대답했다.

“레오나라고 해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앤디로 인해 클레오와 벤존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머니 클레오가 말했다.

“그래도 조금은 섭섭한 감이 없지 않아 있구나. 신부가 될 정도의 사람이면 한 번쯤은 소개를 시켜 줘도 좋았을 것을 말이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어서요.”

그 말에 의문이 드는 클레오와 벤존스였다.

클레오가 물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고? 귀한 집 규수인가 보구나. 어떤 집안의 규수더냐?”

앤디가 쑥스러워하며 머뭇거렸다. 그런데 벤존스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그런데 앤디야.”

“예, 아버지.”

“혹시 레오나라고 했더냐?”

“왜 그러세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레오나… 레오나….”

“공주요.”

“그래, 공주. 하하! 맞구나.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우리 왕국의 공주… 엑! 뭐라고! 공주님이라고!”

“네.”

클레오와 벤존스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네가 말한 신부가 레오나 공주님이시라고?”

“예.”

“….”

클레오와 벤존스는 한참 동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앤디는 부모님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본궁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확실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아무리 집안에서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승낙을 받았다 한들 두 사람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겠는가.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의 준비가 필요한 법인 것이다.

지금 앤디는 남자로서의 준비를 하려고 가는 것이었다.

안드레이와 함께 순간 이동으로 왕궁까지 날아갔다.

“아, 속 울렁거려.”

순간 이동을 한 앤디의 짧은 감상이었다.

앤디는 안드레이와 헤어지고 레오나 공주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레오나 공주가 방에서 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레오나를 전담하고 있는 시녀에게 편지를 건넸다.

시녀는 편지를 양손으로 받아들고 레오나 공주에게 건네주기 위해 돌아갔다.

앤디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꽃밭으로 나갔다. 그리고 서성거리며 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보고 있는데 본 것 같지가 않았다. 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간은 가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빨리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 모를 초조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아, 정말 내가 왜 이러지?”

처음 결혼을 생각했을 때 별거 있나 싶었는데, 막상 상황에 닥치자 별거였다.

그것도 상당히 별거였다.

앤디는 연신 자신이 준비한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꾸만 목이 탔다.

그때, 저쪽 입구에서 인기척이 났다. 허둥거리며 달려오는 기척에 쿵쾅쿵쾅 가슴이 뛰었다.

볼 필요도 없다. 레오나 공주였다.

앤디는 발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앤디가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언제 뛰었냐는 듯이 허리를 쭉 펴고 고아한 자태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왜 왔냐는 듯 관심 없다는 시선으로 앤디를 주시하는 그녀였다.

눈치 빠른 앤디는 생각했다.

‘누가 레오나에게 저런 이상한 걸 가르친 거야? 쯧!’

분명히 누군가가 레오나에게 남자 잡는 법 어쩌고 하면서 가르쳤을 것이라고 생각한 앤디였다. 어제 수정구로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저런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어제 내가 실수한 것 없지? 혹시 어제 수정구를 먼저 끊었던가? 아냐. 분명 레오나가 끊고 난 후에 끊었어. 말실수한 것도 없고.’

앤디의 예상은 적중했다. 앤디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시녀들이 앤디가 왔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무섭게 몰려들어서, 레오나에게 한마디씩 했던 것이다.

레오나로서는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화장을 시키며 떠드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평소와 다르게 남자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결합되자 고목나무보다 뻣뻣한 그녀의 귓불이 팔랑거리게 되었다.

그 결과가 저 도도한 표정과 눈빛, 시선, 걸음걸이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레오나 공주가 뻣뻣한 모습으로 앤디에게 말을 걸었다.

“왔어?”

“응, 왔어.”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레오나의 가슴이 두쿵두쿵 뛰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풀이 죽어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앤디의 반응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 역시 떨리는 가슴으로 인해 제정신은 아니었다.

항상 보던 레오나였는데,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도무지 스스로도 알 도리가 없었다.

“그, 그게….”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레오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앤디가 눈을 부릅뜨고 딱딱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나와 결혼해줄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레오나가 되물었다.

“어? 뭐라고?”

앤디가 다시 말했다.

“나랑 결혼해주지 않을래?”

그렇게 말을 내뱉은 앤디가 다짜고짜 한쪽 무릎을 꿇더니, 품에서 반지를 꺼내고는 팔을 레오나 앞으로 뻗었다.

레오나는 머뭇거렸다. 언제나 꿈꾸던 상황이긴 했는데,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앤디는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레오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양 볼이 붉게 물들어 있는 레오나와 시선을 마주치게 되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레오나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승낙을 한 것이다.

앤디는 떨리는 손길로 자신이 가져온 반지를 레오나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레오나는 손가락에 끼워지는 예쁜 반지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

하지만 반지를 빛에 비춰보는 것처럼 고개를 들며 애써 눈물을 감췄다.

그때 앤디가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들어?”

“….”

‘그걸 말이라고 해? 너무 예쁘고 마음에 들어!’

속으로 하는 생각과 달리 레오나는 입 밖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대답을 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앤디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품을 뒤적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그것을 지켜보던 레오나는 앤디가 왜 저러는가 싶었다.

그때 앤디의 손이 펼쳐지고, 손바닥 위로 작은 목각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아이의 모형이었다. 그 작은 아이의 모형이 5개나 있었다.

레오나가 가까스로 물었다.

“…이게 뭐야?”

그리고 그 인형들을 건네받자 앤디가 밝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우리 아이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금까지 참고 있던 눈물이 무색할 정도로 레오나의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앤디가 당황했다.

“레, 레오나, 왜 그래? 왜 그래?”

레오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앤디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런 앤디와 아이들의 목각 인형을 보던 레오나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목이 멘 듯한 소리로 말했다.

“…너무너무 예쁘다.”

“우리 행복하게 살자.”

“…응.”

앤디가 레오나를 부둥켜안자, 레오나가 손에 들려 있던 아이들의 목각 인형을 꼬옥 쥐었다.

둘은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속도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3

“둘의 영혼이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길고 긴 주례사가 끝나고 왕의 선포를 하자 모두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공주님! 축하합니다! 행복하세요!”

“두 분 모두 행복하세요!”

둘의 결혼은 나흘 동안 왕국의 국민들이 모두 축복해주는 가운데 무사히 치러졌다.

나흘 동안 헤르만 왕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밤이 낮인 양 불이 꺼지질 않았다. 왕국 곳곳에서 음악과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국 내의 모든 귀족들도 둘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왕국의 자랑인 최연소 소드마스터 앤디와 왕실의 무남독녀 공주의 결혼식.

이보다 화려한 결혼식은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초인과 맞먹을 정도로 강해진 앤디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여하튼 축하를 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흘 동안 받다 보니 지칠 지경이었다.

녹초가 되어 빠져나온 둘은 신혼 방에 올라오기가 무섭게 달라붙었다.

찰싹 부둥켜안은 둘은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또 탐했다.

침실 밖으로 달뜬 레오나 공주의 신음이 흘러나가자, 문 앞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시녀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저리도 좋을까?”

“그러게 말이야….”

말과는 달리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른 시녀들. 다른 곳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문 앞에 계속 달라붙었다.

둘은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지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베리오스 대륙의 동남쪽에 위치한 하이네스 왕국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하이네스 왕국은 이번에 헤르만 왕국으로 흡수한 미드로 왕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이다.

지금 헤르만 왕국은 미드로 왕국을 흡수하여 국토 면적이 비약적으로 늘어나 문건 분류에 어려움이 생겨, 편의상 헤르만 지구와 미드로 지구로 분류해서 불렀다.

현재는 착실하게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고, 이제 누가 뭐라 해도 미드로 지구는 헤르만 왕국이었다.

여하튼 전쟁의 여파로 시국이 약간 어수선했지만, 둘은 꼭 신혼여행을 가고 싶었다.

안드레이에게 조언을 얻기 위해 찾아갔다. 안드레이는 달가운 표정으로 앤디와 레오나 공주를 반겼다.

“흠… 신혼여행을 가고 싶다고?”

“예.”

“꼭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면 신분을 숨기고 여행객으로 놀러가는 수가 있지.”

“신분을 숨길 수 있나요?”

앤디의 물음에 안드레이가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후후후!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대마도사 안드레이가 바로 본인이시다.”

“쳇! 자랑질은…. 윽!”

눈꼴 시린 앤디가 투덜거리자, 레오나가 입 다물라는 의미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호호! 안드레이 공작님, 꼭 부탁해요.”

레오나의 정중한 부탁에 안드레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 녀석 혼자 가는 것이라면 지옥행 티켓을 끊어줬을 것이지만, 공주님을 위해 실력을 발휘해보겠습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레오나 공주의 신혼여행을 위해 호위대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앤디의 결정에 맡기기로 했다.

꼬리들을 주렁주렁 달고 가면 번거롭고 귀찮아질 것을 예상하여 자신이 직접 고르겠다고 한 것이다.

그나마 한 번 같이 뒹굴었다고 조금 편해진 영지 기사단의 안젤른과 파프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둘로는 모자라다는 말에 인상을 구기며 따라가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운 쉐리 일행들을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총 8명의 소소한 파티가 출발했다.

21일에 걸쳐 무탈하게 하이네스 국경에 도착한 앤디 부부와 호위대.

생각보다 많이 늦어진 탓에 도개교가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통과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나 쪽문은 있으니까.

국경 검색을 하는 병사들이 헤르만 왕국의 지방 귀족으로 소개되어 있는 신분 패를 받아 확인한 후, 온 목적을 확인했다.

“무슨 이유로 오셨습니까?”

“여행입니다.”

“짐과 인원은 이게 다입니까?”

“그렇습니다.”

한참 일행을 돌아보던 병사가 초라할 정도로 적은 인원수를 확인하고는 외쳤다.

“통과!”

그렇게 국경을 통과해 넘어갔다.

국경과 맞닿은 쿼트론 마을.

그 쿼트론 마을의 뒷골목을 장악하고 있는 루사벨 일당.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뒷길로 오가는 여행객들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었다.

“야, 오늘 수입은 어떻게 되냐?”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루사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손님들이 없지 말입니다.”

“그러게요. 그냥 접고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루사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너희 수당은 없다.”

순간 돌변한 분위기.

“뭣들 해! 어서 자기 위치에 숨어서 자리 잡지 않고!”

수하들이 부리나케 몸을 숨기는 것을 확인한 루사벨이 입맛을 쩍 다셨다.

“여하튼 새끼들, 빠져 가지곤.”

그렇게 말하며 루사벨도 몸을 숨겼다.

골목길에 많은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면 어떤 바보가 들어서겠는가.

“왜 이렇게 손님들이 안 오는 거지? 하암!”

루사벨이 하품을 하며 하는 소리에 수하 하나가 대꾸했다.

“우리가 무서워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무서워서?”

“그만큼 우리들의 위명이 높아졌다는 뜻이지요.”

“위, 위… 그래! 크하하! 우리가 위명이 됐지! 그런데 위명이 뭐냐?”

루사벨은 조심스럽게 옆에 있던 수하 마르코에게 물었다.

“아이고! 형님,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엄청 무식하시네. 킥킥킥!”

순간 루사벨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돌덩이 새끼도 아는 것을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워진 탓이었다.

“그럼 너는 아냐?”

마르코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좋은 말 같습니다.”

왠지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입맛을 쩍 다시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냥 마지막으로 한탕 뛰고 가야겠다.”

“유후! 좋은 생각입니다, 두목!”

기다림은 지루했다.

“하암….”

루사벨은 온몸이 찌뿌드드한지 기지개를 펴고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때 옆에서 마르코가 말했다.

“젠장! 지금 소피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쯧!”

“시끄러, 짜샤.”

“어라?”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마르코의 시선을 따라 루사벨이 골목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크크! 먹잇감이다!”

그 말이 가져오는 파장은 확실했다.

“모두 숨어!”

루사벨의 한마디에 지금까지 피로에 물들어 하품을 터트리던 수하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민첩하게 움직여 자신의 위치로 몸을 숨겼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위치에서 숨죽인 채 다가오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총 8명. 둘은 멀리 지방에서 여행을 온 어리어리한 귀족 부부로 보이고, 나머지 여섯은 고용한 용병 같았다.

자신들의 수는 총 열다섯.

충분했다.

머릿수를 이기는 것은 없다는 믿음은 지금까지 자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저버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저들이 오기 무섭게 소리칠 수 있었다.

“크하하하! 어서 주머니를 털고 부리나케 도망…!”

그러나 그 말은 중간에 커트 당했다.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가 그 말을 외치던 루사벨의 멱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컥!”

“….”

순간의 적막감.

공기조차 얼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용병으로 보이던 사람들 중 요염하게 생긴 여인이 말문을 열었다.

“뭐야? 강도?”

그 말에 다른 여자가 말을 받았다.

“심심했는데 잘됐네.”

“쉐리, 너는 빠져 있어.”

“왜?”

“내 몫 챙기기도 모자라잖아.”

“열다섯이나 되는데?”

“열다섯밖에 안 되니까 그렇지.”

그때, 각을 잡고 서 있던 다른 용병이 말을 타고 있던 여인과 사내에게 말했다.

“저희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피곤하니까 최대한 빠르게 부탁하네.”

말을 타고 있는 사내의 말에 용병으로 보이던 사내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보였다.

“충!”

그리고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안젤른, 들었지?”

루사벨의 멱을 잡고 들어올리고 있던 안젤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반대 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고는 복부를 쑤셔 박았다.

퍼억!

“꾸억!”

루사벨의 눈이 까뒤집어졌다. 강도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두, 두목!”

안젤른은 피식 웃었다.

“뭐야? 이놈이 두목이었어? 좋다가 말았네. 난 몸 좀 푸는가 했더니만. 쯧!”

안젤른의 말에 화가 치밀어 이성을 잃은 마르코가 언성을 높였다.

“신사적으로 나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다! 덮쳐!”

어느새 안젤른 옆자리에 온 파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웬 파리 떼가 윙윙거리는 거지?”

안젤른과 파프는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의 틈 사이로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대책 없이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주먹 끝에 자석이라도 붙어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강도들의 얼굴을 난타했다. 단 한 방도 헛손질을 하거나 어긋나지 않고 말이다.

두 사내의 신속 정확한 주먹질에 강도 녀석들은 걸레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지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은 전신으로 걸레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경쾌한 타격음.

퍼버버버벅!

시원한 비명.

“으으악! 너무 아파욧!”

유쾌한 웃음.

“당연히 아파야 조지는 내가 신명나지!”

“으아아아아악!”

그 장면을 목격한 쉐리와 렐리, 클라우저와 루슬란은 입맛을 다셨다. 자신들이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만 양보하지.”

“아쉽네. 쯥!”

그 말을 들었는지 안젤른과 파프는 더욱 경쾌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한방 한방에 전신이 아렸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때리면 이런 효과가 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안젤른과 파프에게 두들겨 맞으며 생과 사를 초월하고 있던 녀석들. 전신이 쑤셔 오는 고통에 기절조차 하지 못하고 연신 비명만 질렀다.

얼마 후, 안젤른과 파프의 주위에는 인간 넝마의 산이 쌓여 있었다.

둘은 말을 타고 있는 앤디와 레오나 공주 곁으로 가서 말했다.

“끝났습니다.”

“수고했네. 하지만 조금 지루했어.”

“죄송합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가지.”

앤디 부부와 일행들이 반대쪽 골목으로 어슬렁어슬렁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닥에 엎어져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루사벨.

“끄으으으으! 대, 대체 저 자식들 정체가….”

복수를 다짐한 루사벨.

앤디들의 모습이 반대쪽 골목으로 사라지자, 그제야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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