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드래곤 레어
1
앤디가 검을 들고 견제 어린 모습을 보였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기사들도 오러를 밀어 넣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앤디의 지원을 해줄 모습인 것이다.
언데드 드래곤이 앤디를 주시했다. 자신의 사냥감을 건드린 앤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크르르르! 크아아앙!
언데드 드래곤의 앞다리가 다시 휘둘러졌다.
부우웅!
대기를 통해 밀려오는 거대한 중량감.
묵직한 그 소음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앤디는 민첩하게 움직이며, 언데드 드래곤의 공격을 여유롭게 피했다.
콰과과광!
단순한 발길질이라고 보기에는 파괴력이 너무나 엄청났다.
언데드 드래곤의 공격에서 파생된 충격파에 앤디의 옷이 펄럭였다.
표정을 보니 충격의 여파에 무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앤디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위험하군.’
언데드 드래곤의 덩치 자체가 위협이 되었다. 또한 그것을 넘어서 속도가 엄청났다.
앤디는 높은 허공에서 외줄을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공격을 시도했다.
아무리 빠르다 해도 큰 덩치가 가져오는 허점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검에 실린 오러가 대기를 가르며 드래곤을 공격했다.
솨아아악!
드래곤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앞다리를 휘둘러 앤디의 공격을 막고, 그대로 몸을 돌려 꼬리로 공격을 가했다.
부웅!
앤디의 몸이 바닥을 치고 날아올라, 벽을 박차서 드래곤의 사각을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검을 그어 언데드 드래곤의 등줄기를 베어냈다.
서걱!
꾸오오오오!
언데드이지만 고통을 느끼는 것인가? 녀석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벌어진 상처 틈으로 푸르스름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시체가 썩어서 생기는 시독이 가스 형태로 배출되는 것이었다.
앤디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만!”
그는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모두 피해! 독가스다!”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일행들이 입과 코를 막고, 마나를 끌어올려 면역력을 높였다.
쉐리는 둥그런 구형의 워터 실드를 만들어 자신과 렐리를 보호했다.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끝장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앤디가 검을 꼬나 쥐고, 검의 손잡이가 주는 그립감을 느끼며 호흡을 다듬었다.
상처를 내면 낼수록 녀석의 몸에서 독가스가 흘러나오는데, 정말 답 안 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든 단번에 목을 잘라 처리를 해야만 녀석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녀석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어째서인지 녀석의 몸이 조금 삐걱거리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스스로 컨트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일어나 비몽사몽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독가스가 어쩌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처라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있기에 독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앤디였다.
밑에 일행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자신이 녀석을 마무리할 때까지 버텨 주기만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아귀에 힘을 가했다.
‘마라자천, 아니 하다못해 광천무흔을 쓸 수만 있어도….’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지금으로서는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광천무흔은 유운검결의 상위 검결로, 지금 앤디의 상태로는 사용이 불가능한 기술이었다.
마라자천이야 말해 무얼 하겠는가.
물론 광천무흔 같은 경우 억지로 쥐어짠다면 어떻게든 될지 모른다.
완벽하지는 못해도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기술이니까.
절반의 공격력만 나와도 충분히 녀석을 어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기를 끌어 모아서 단숨에 내질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녀석이 ‘날 죽여주슈!’ 하고 목 씻고 내밀어주지는 않을 것 아니지 않겠는가.
된다고 해도 문제다. 자칫하면 과도한 기의 운용으로 인해 나약한 몸뚱이가 견디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입장에서라면 주화입마에 걸려도 좋으니, 녀석의 모가지를 자를 시간이나 줬으면 싶었지만….
녀석은 쉬지 않고 줄기차게도 앤디를 유린했다. 전혀 시간을 벌 틈을 주지 않았다.
희끄무레한 녀석의 눈동자가 짜증이 났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은 탓이다.
앤디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이었다.
이러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이런 나약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말이다.
앤디의 검이 날을 번뜩였다.
캬롸롸락!
언데드 드래곤 녀석이 괴성을 토하며 공격했다.
앤디가 검에 전력을 쏟았다. 5미터가 넘는 순수한 오러가 맺혔다.
우웅!
검이 울었다. 이어 검이 휘둘러지고, 화려한 오러 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거침없이 앤디를 공격하던 녀석의 몸이 주춤거렸다.
조금 전에 자신의 몸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던 오러에 대한 공포가 드래곤의 몸을 움츠리게 한 것이다.
그때 기사들이 합류했다. 영주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아무리 상대가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구석에 숨어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앤디는 그들을 보고는 뒤로 빠지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희는 기사입니다.’
그들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앤디가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이 육탄 돌격을 시도했다.
언데드 드래곤은 ‘이것들은 뭐야!’라는 식으로 몸을 쿵쿵 움직여 기사들을 위협했다.
차마 공격을 하지 못한 것은 앤디가 있기 때문이었다.
틈을 주면 앤디가 자신의 몸에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언데드 드래곤은 자신의 몸에 상처가 생기더라도, 개미 같은 두 녀석을 우선 죽이고 봐야겠다고 판단했다.
바로 그때, 앤디가 언데드 드래곤의 품에 파고들어가 일격을 가했다.
“조금 아플 거다!”
파가가가각!
앤디의 검이 언데드 드래곤의 두터운 비닐로 덮여 있는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푸우욱!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검의 흔적이 남는 오러 라인이 날카로운 예기가 되어 상처를 더욱 벌렸다.
녀석이 검을 틀어박고 있는 앤디를 향해 자신의 앞발을 휘둘렀다.
앤디가 슬쩍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조금 늦은 탓일까. 녀석의 앞발이 휘둘러지며 파생된 강력한 풍압에 휘말려 바닥으로 볼품없이 착지하게 되었다.
기사들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날아가 구석 벽에 처박히고 정신을 잃었다.
크롸롸롸롸롸롸!
언데드 드래곤의 입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크악!”
“아악!”
마나가 가득 실린 녀석의 외침에, 구석에 움츠린 채 몸을 숨기고 있던 쉐리와 일행들이 비명을 지르더니 기절을 하고 말았다.
“엄청나게 시끄럽군.”
앤디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자신도 견디기 힘들 정도의 소음이니, 다른 이들이 버티는 것은 어불성설.
더군다나 그 음파에 마나가 실려 있지 않는가!
앤디는 인상을 구기고 있을 틈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터지는 강렬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피했다.
파앗!
후웅!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언데드 드래곤의 앞발에서 뿜어지는 어두운 빛.
일종의 오러와 같은 것임을 앤디는 알 수 있었다.
“슬슬 짜증이 나는구만.”
2
“제길!”
녀석의 두터운 팔에 머금어진 기운이 앤디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것을 앤디가 피하고, 녀석의 앞발이 허공을 갈랐다.
콰광!
바닥이 움푹 파이며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돌가루와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파생된 강력한 기운에 앤디가 휘말렸다.
“으으윽!”
그는 지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굴 속 독연이 짙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일행들이 독에 중독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왔다.
앤디가 몸을 뒤로 쭉 뺐다. 그리고 녀석과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잠시 호흡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던 탓이다.
녀석은 앤디에게 별로 그런 시간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녀석의 몸이 움찔하며 주춤거렸다.
앤디는 녀석의 행동에서 의문스러운 반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언데드 드래곤이 반격하지 않고 한참 멈춰서 있었다.
그렇게 미동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갔다. 침묵이 길게만 느껴졌다.
그때, 앤디는 이질적인 기운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강력한 마나의 기운 말이다. 아마도 녀석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상관성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갑자기 흘러나온 이 강력한 마나가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라면?
문득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자신이 조금 전 가한 공격에 녀석이 상상 이상의 큰 데미지를 입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럴듯했다.
녀석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그 상처를 수복하기 위한 것 같았다.
어디선가 흘러나오고 있는 마나의 양이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감이 뛰어난 앤디이기에 가능한 탐지였다.
앤디의 예상은 적중했다.
앤디가 검을 녀석의 가슴에 찔러 넣었을 때, 언데드 드래곤의 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드래곤 하트에 상처를 낸 것이다.
지금 앤디가 느끼고 있는 그 거대한 마나가 바로 녀석의 드래곤 하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었던 것이다.
앤디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회가 있다면 바로 지금임을 깨달은 탓이다.
앤디가 공격을 가하기 위해 기운을 끌어 모았다. 조금 전 떠올렸던 광천무흔을 시도할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앤디의 기운에 불안감을 느낀 것일까? 언데드 드래곤이 갑자기 움직임을 시작했다. 동시에 녀석의 주변으로 강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앤디의 표정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지금에 와서 끌어 모은 기운을 흩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언데드 드래곤의 기운도 거대해져 갔다.
누가 먼저 기운을 모아 공격을 시도하는지가 이 싸움을 결정짓게 할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언데드 드래곤의 주위로 거대한 화염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앤디의 검도 푸르스름함을 넘어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젠장! 조금만 더! 조금만!’
그러나 더 이상 시간은 없었다. 드래곤이 준비한 공격이 완성되어 쏘아져 왔다.
화르륵!
엄청난 열기! 열기만으로도 앤디를 압박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이를 악다문 앤디의 신형이 빛줄기처럼 쏘아졌다. 앤디의 목소리가 공동을 가득 메운다.
“광천무흔!”
순백의 기운이 뿜어져 나갔다. 앤디의 전력을 다한 최후의 초식이었다.
“크윽!”
앤디는 신음을 흘리며 전신의 진기를 모아 끝까지 기운을 밀어 넣었다.
언데드 드래곤의 거대한 화염구와 앤디의 광천무흔이 충돌했다.
충돌의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커헉!”
앤디는 검붉은 피를 게워냈다.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다.
퍼펑!
콰과과과과과!
동굴 안이 무너질 듯 울리더니, 상대적으로 지반이 약한 부위가 주저앉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마법으로 만들어져 있는 레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파괴력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물론 무너지지는 않았다. 일부가 붕괴되었을 뿐이지.
“크아아아아아!”
앤디의 전신이 부풀어 오르며 엄청난 기운이 폭사했다. 그러자 언데드 드래곤이 가한 화염구가 쩌억 갈라지며 무너지고, 앤디의 공격이 녀석에게 적중했다.
끄웨에에에에에에!
녀석의 목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지더니 쩌어어 살이 벌어졌다.
힘이 모자라 완전하게 베어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녀석의 목이 뒤로 젖혀지며 덜렁이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독가스가 뭉실뭉실 흘러나왔다.
독가스야 어쩔 수 없지만, 녀석은 곧 쓰러질 것이라는 생각에 앤디는 승리를 자축하는 마음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앤디의 생각과 달리 아직 끝이 아니었다. 녀석은 그 상태로도 쓰러지지 않고 발광을 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앤디가 씹어 내뱉듯 욕설을 토했다. 그리고 밑바닥에 깔려 있던 기운을 끌어 모아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녀석의 몸이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앤디가 숨을 헐떡이며 녀석의 몸뚱이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모든 기력을 쇠하여 정신을 잃은 것이다.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전멸이었다. 앤디를 포함한 모두가 언데드 드래곤이 죽으며 흘리는 독가스에 중독될 것이 뻔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앤디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은 상태로 쓰러졌는데, 어디선가 강대한 자연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무의식이 그 기운을 받아들이며, 활생의 심법인 태허무령심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몸에 기력이 조금 돌아왔다.
앤디의 몸은 더 많은 기운을 원했다.
꿈틀꿈틀.
앤디의 몸이 움직였다. 마치 애벌레처럼 언데드 드래곤의 몸 위를 기었다.
기운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앤디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곳은 바로 앤디가 조금 전 일격을 가했던 가슴 부근이었다.
앤디의 몸이 좀비처럼 일어서더니,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벌어진 가슴 속을 향해 팔을 찔러 넣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곧 팔을 뽑아냈다.
들어갈 때는 맨손이었지만, 나올 때는 맨손이 아니었다. 앤디의 주먹보다 큰 붉은 덩어리가 함께 빠져나온 것이다.
바로 드래곤 하트였던 것이다!
드래곤 하트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는데, 바로 앤디가 만들어낸 상처였다.
그 틈으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거대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앤디의 손바닥이 그 틈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팔을 통해 엄청난 내력이 앤디의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노도와도 같이 거칠기 짝이 없는 속도로 들어간 그 기운은 앤디의 몸을 휘저었다.
생각 이상의 기운이 가져온 고통에 앤디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으….”
3
앤디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운을 더 이상 흡수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게 불가능했다.
한 번 길을 찾은 기운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앤디의 몸으로 인식한 것이다.
앤디의 눈이 뒤집어지고, 입에 거품이 물렸다. 앤디의 몸이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포화 상태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에 체계적인 다스림을 행할 수 없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통증.
한 발을 죽음의 문턱에 올려놓은 순간이었다.
쾅쾅!
전신이 크게 울렸다. 민감해진 신체는 그 충격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엄청난 고통에 앤디의 정신이 깨어났다.
다급하게 상황에 대한 정리를 할 것도 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전에, 우선 몸의 상태를 해결하고자 내기를 진정시킬 준비를 했다.
유운심결의 흐름으로 기운을 몰았다.
전신의 혈도에 터질 듯이 몰려 있던 기운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스려도, 다스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감당할 수 없는 기운에 몸이 폭발할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만 같았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넘치는 것이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이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화심경의 한 구절이었다.
‘첫 번째는 자연과의 조화를 들 수 있고, 두 번째는 자연의 흐름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세 번째는 자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자연을 자기 수족처럼 부리며, 다섯 번째는 자연이 자신이 되고, 여섯 번째는 자연을 넘어 우주로 나간다. 일곱 번째는 우주의 기운과 천지조화의 기운을 하나로 일통시키고, 여덟 번째는 스스로가 소우주가 되며, 끝으로 무상이라. 무상이라 함은 그것이 곧 선인의 경지이니, 스스로 하나의 신이 되어 세상을 굽어봄이라.’
앤디는 자신의 상황이 지금 두 번째 단계라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기운을 억지로 구겨 넣으려고 했다.
몸에 들어온 이상 나이거늘 내 것, 혹은 다른 것으로 분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전신의 혈관과 혈도를 지웠다. 그냥 그 기운들을 풀어두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육체의 그릇이 작아 더 담을 수 없는데, 억지로 우겨 넣으니 아픈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그릇에 담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릇을 담고 있는 그릇에 말이다.
그 그릇이란 마음이었다.
조화 심경의 세 번째 단계인 자연이 되는 것.
내가 바로 자연이고 자연이 나인데, 따로 분류할 필요가 있겠는가.
온몸에 열기가 퍼지더니, 급기야 몸이 한 치가량 떠올랐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렇게 우주의 기운과 앤디의 기운은 일치되었다.
하지만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여러 차례 우주의 기운을 느끼게 된다. 단지 무의식 상태라 자기 몸이 공중에 유영하는 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허공에 떠오른 앤디의 몸에서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고오오오오!
순간, 전신에 진기가 충만히 자리를 잡으며, 근육과 골격이 요동을 쳤다.
몸이 덜덜덜 떨렸다.
“…!”
경련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앤디의 눈이 떠지며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번쩍!
몸에서 증기가 피어올랐다.
그렇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몸에서 역겨운 분비물들이 빠져나왔다. 혈도와 여러 기관에 쌓여 있던 불순물들로, 밖으로 배출되기가 무섭게 타들어갔다.
자신의 몸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앤디는 몰아지경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태식을 시작했다.
“하후!”
앤디의 몸에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었다.
눈부신 빛이 얼마쯤이나 뿜어졌을까?
앤디는 몸이 바짝바짝 타들어 감을 느꼈다. 머리카락과 눈썹은 둘째 치고, 전신의 피부가 타들어가면서 화상을 입은 것처럼 일그러지는 것을 시작으로, 이가 모조리 빠지고 손톱과 발톱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곧 새살이 돋는데, 마치 시간을 빠르게 돌리는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재생했다. 금세 윤기를 발하는 두발이 찰랑거리고, 어느덧 치아는 고르게 제자리를 잡았으며, 피부는 백옥이 부럽지 않은, 갓난아이의 그것처럼 보드라웠다.
동굴 안의 열기가 차츰 제자리를 찾아갈 무렵, 앤디의 신체적 변화도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앤디가 눈을 떴다.
번쩍!
순간적으로 엄청난 안광이 쏟아졌다.
그것은 빠르게 갈무리되며 앤디의 두 눈 안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는데, 앤디의 두 눈이 깊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앤디가 의도기도 이의영기로써 기를 마음대로 전화하고 기화하여, 바르게 쓸 수 있는 단계에 오른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환골탈태를 통해서.
앤디는 가부좌를 튼 채 눈을 지그시 감고 휴식을 취했다. 환골탈태를 위해 많은 심력을 소모한 탓이다.
이 모든 현상은 하루도 걸리지 않아 끝이 났다.
환골탈태하며 소진한 기를, 아직도 처음과 같은 기세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드래곤 하트에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 충만감! 발끝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흐르는 거대한 기운이 가져오는 엄청난 희열!
처음 앤디의 유운신공은 8성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지금 어검술을 사용할 수 있는 9성을 넘어, 속세 사람들이 현묘한 경지라 일컫는 현경에 속하는 10성의 벽을 단숨에 깨어 넘어섰다.
눈을 감고 있던 앤디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그 미소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자신감이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5. 오래된 이야기
새롭게 태어난 앤디가 더 이상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는 드래곤 하트를 갈무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단숨에 일행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모두 위독한 상태였다.
하지만 앤디는 안도의 모습을 보였다.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앤디는 중후한 내력으로 그들의 몸에 스며든 독기를 태웠다. 그로 인해 안젤른과 파프라는 기사 둘과 쉐리와 렐리, 루슬란과 클라우저는 기연 아닌 기연을 얻게 되었다. 독기가 타들어가며, 동시에 몸에 쌓였던 탁기도 함께 타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순수지체를 만들 정도는 아니지만, 혈관에 쌓인 노폐물은 모조리 탔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 추궁과혈을 시도했다. 그러자 내상이 치유되며 막혀 있던 혈도까지 뚫어졌다.
6명에게 그와 같은 고난이도 치유술을 선보였음에도 앤디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도 맺혀 있지 않았다.
앤디는 그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대로 놔두면 잠시 후 정신을 차릴 것이 확실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거대한 언데드 드래곤의 본신이 눈에 들어왔다.
앤디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런 녀석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실이 말이다.
“징그러운 놈.”
앤디는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 발광할 것 같은 녀석을 보며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하얀 섬광이 번뜩이더니 언데드 드래곤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는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그러자 오러가 아니고서야 상처도 나지 않는 강력한 비늘로 무장되어 있던 언데드 드래곤의 거대하다 못해 엄청난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쩌어어억!
그것도 모자랐는지 팔과 다리, 날개까지 해체했다. 이 상태라면 언데드 할아범이 와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설마 이 녀석이 그 브라키우드라는 녀석일까? 아니겠지?”
그제야 안심이 된 앤디가 이 거대한 공동 안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곳은 단순한 공동이 아니었다.
엄청난 수의 방이 있었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이었다.
어떤 곳은 서재였고, 어떤 곳은 식당이었으며, 드레스 룸도 있었다.
보물 창고, 무기고 등등 없는 것이 없었다.
옷장 앞에 선 앤디는 부스스 부서지는 자신의 옷을 벗었다. 벗은 게 아니라 사실은 거의 털어낸 수준이었다.
그의 티끌 하나 발견할 수 없는 매끈한 몸이 드러났다.
앤디는 옷장에서 가장 수수한 옷을 꺼내 입었다.
하지만 수수하다고 해도 그중에서 수수한 것이지, 하나같이 화려했다.
블루블랙의 벨벳 양식의 정장을 입었다
옷을 하나 입었을 뿐인데 앤디의 모습은 하나의 그림이었다. 볼일을 마친 앤디는 밖으로 나와 다른 방을 구경하려던 찰나,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한 낯선 사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였다. 그가 화가 치민 표정으로 살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오듯 흘러나오고 있는 기세!
앤디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결코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유운신공이 10성에 오른 앤디로서도 저자를 감히 이길 수 있으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누구십니까?”
사내가 지금 짓고 있는 싸늘한 표정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죽어라!”
순간, 주위에 엄청난 빛줄기가 형성되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수백여 개의 파이어 에로우였다.
슈슈슈슈슝!
파이어 에로우가 작은 틈 하나 보이지 않고 그물망처럼 촘촘히 날아들었다.
하지만 앤디는 당황하지 않고 하나하나 차분하게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앤디의 검에 닿는 족족 파이어 에로우들이 거짓말처럼 소멸되었다.
그때 발생한 엄청난 충격파와 대단한 열기!
퍼펑! 콰과과광!
하지만 그 무엇도 앤디의 검막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놀라운 장면을 보고도 사내는 싸늘한 표정을 지을 뿐,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주먹을 꾸욱 움켜쥐었다.
팟!
사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앤디가 놀라는 것도 잠시, 자신의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발을 가볍게 뒤로 끌며 신형을 이동했다. 그리고 왼팔을 들어 사내의 연속 공격을 막고,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검 손잡이로 인중을 노려 공격을 가했다.
사내의 허리가 거의 뒤로 접히듯 꺾이며 공격을 피했다.
앤디가 다리를 휘둘러 연차 공격을 시도했다.
사내의 몸이 다시 허공에서 사라지고,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의연한 자세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건방을 떠는군.”
“누구십니까?”
“궁금하면 스스로 알아봐라.”
이 한마디로 앤디는 마음을 굳혔다. 사내는 결코 자신과의 전투를 멈출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앤디의 단전에서 마나가 산들바람처럼 일어나며 순식간에 사지백해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앤디는 검을 들고 거침없이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파팟!
그의 몸이 쭉 늘어났다.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이 마법이 아닌 움직임이 만들어낸 현상임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사용하면 생기는 마나의 잔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피하지 못한 사내는 한 손을 뻗어 앤디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터텅!
“큭!”
사내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앤디의 주먹에 실린 경력에 밀려 사내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공동의 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 상태로 가다가는 벽에 충돌할 것 같았다.
팟!
다시 허공에서 사라진 사내.
그의 몸이 반대편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재밌군. 조금 신경을 써야겠어.”
사내가 팔을 들어올렸다.
한순간에 엄청난 불덩어리가 팟! 하고 사내의 어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 불덩어리는 저 언데드 드래곤이 한참 동안 시간을 할애하며 만들었던 그 불덩어리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파괴력은 언데드 드래곤의 것을 상회하는 것 같았다.
고오오오오!
사내의 가벼운 손길에 불덩어리가 앤디를 향해 날아갔다.
앤디는 검에 마나를 불어 넣고 그 불덩어리를 갈랐다.
지금의 앤디는 조금 전의 앤디와 달랐다. 가볍게 그 불덩어리를 베어냈다.
그런데 갈라진 불덩어리 사이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앤디를 향해 거침없이 발길질을 가했다.
앤디의 몸을 가격한 발길질.
뻐억!
“크흐흣!”
앤디가 엄청난 속도로 벽을 향해 날아가 부딪쳤다. 피하고 막고 지질 상황이 아니었다.
쿠구구궁!
앤디가 벽에 충돌하자 벽이 움푹 파였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즉사를 했을 만한 엄청난 공격이었다. 아니, 웬만한 기사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쿨럭! 쿨럭!”
앤디가 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할 겨를도 없었다. 그의 검이 순백의 빛을 띠고 있었다. 검을 휘둘러 검기를 연속으로 날렸다.
사내는 작은 흔들림도 없이 순간 이동을 하며 앤디의 검기를 피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앤디를 가리켰다.
앤디가 본능적으로 머리를 틀어 공격을 피했다.
그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
푸슛! 푸슛!
사내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강맹한 기운이 앤디의 안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 대체 저자는 누구…!’
앤디의 표정에 불신감이 어렸다.
지금 상태라면 세계 제일의 고수라 불리는 탈리온 공작도 이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사내에게 연신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름을 떠올림과 동시에 있을 수 없다고, 아닐 것이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언데드 드래곤도 보지 않았던가.
비록 언데드이긴 했지만, 전설로만 들었던 드래곤의 실체를 말이다.
‘드래곤?’
“브, 브라키우드?”
앤디의 입에서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그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이런 신위를 보일 수 있겠는가.
앤디가 틀었던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다시 이어지는 공격. 앤디는 그냥 몸을 회전시켜 사내의 공격을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내의 공격이 멈췄다.
앤디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마주 섰다.
물론 어떠한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몸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분노와 멸시, 무시로 일관하던 사내의 얼굴이 피식 웃음을 흘리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 내가 브라키우드다.”
“…!”
앤디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2
옛날 옛날에 바론 산맥에는 많은 드래곤이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어요.
그중에 브라키우드라는 레드 드래곤이 있었어요.
브라키우드는 6천 살이 넘은 에인션트 드래곤으로 근방에 악명이 자자했지요.
같은 드래곤들조차 브라키우드를 피할 정도였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브라키우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나 봐요.
자신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것을 좋아할 뿐이라고 했으니까요.
드래곤들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바론 산맥에 살던 드래곤들을 쫓아낸 브라키우드는 행복했어요. 더 이상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존재들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곧 심심해졌어요. 아무런 일도 없이 무료한 시간이 흘러간 탓이에요.
자신의 존재감 때문에 주위에 북적거리던 몬스터들도 종적을 감춘 지 오래되었지요.
그래서 자신도 바론 산맥을 떠났답니다.
그렇게 시간이 1백 년이 지나고, 다시 몇백 년이 흘렀어요.
그 많은 시간 동안 브라키우드는 세상에 나가서 많은 꿈(유희)을 꾸었지요.
인간이 되어 많은 직업을 경험하기도 했고, 몬스터가 되거나 물고기 가축 혹은 애완동물이 되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요.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모든 것이 시들해졌지요.
그래서 잠을 청하기 위해 자신의 레어로 돌아왔어요.
몇백 년 푹 자고 일어나면 자신이 간섭할 만한 사건들이 터질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었죠.
그런데 잠을 청하기도 전에, 아니 레어에 들어서기도 전에 눈이 뒤집어지고 말았어요.
자신의 레어에 보도 듣도 못한 녀석이 자신이 주인인 양 떡하니 똬리를 틀고 자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것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녀석이 말이에요.
위대한 종족으로서 죽었음에도 대지의 여신께 돌아가지도 못한 머저리 같은 녀석 주제에 말이죠.
화가 치민 브라키우드는 한발에 밟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하지만 극한의 인내심으로 살기를 누르고, 이것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을 했어요.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지 생각한 것이에요.
그리고 녀석을 깨워서 밖으로 끌어내 죽이기로 마음먹었지요. 무엇보다 녀석을 이용해서 감히 어떤 망할 녀석이 드래곤에게 이런 더러운 짓을 했는지 밝혀내기 위해서는 녀석을 깨워야 했어요.
녀석을 일으키기 위해 드래곤 피어를 터트렸어요.
그러자 깨어나라는 녀석은 깨어나지 않고, 브라키우드가 없는 동안 자리를 잡고 살아온 몬스터들이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녀석은 기가 막히게도 웨이크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웨이크 트레이닝이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드래곤이 굳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전신에 피를 돌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에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녀석이 꼴에 할 짓은 다 하고 있는 것이었어요.
화가 치밀 대로 치미는 것을 느꼈지만, 인내심이 강한 브라키우드는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기다린 만큼 자신의 분노를 더 시원하게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에요.
그런데 기다리던 와중에 라훔 왕국에서 먹었던 와인 케이크가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요.
오랜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어요.
‘뭐, 갔다 오면 깨어 있겠지.’
브라키우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룰루랄라 라훔 왕국으로 갔답니다.
그사이에 어떤 인간들이 자신의 레어에 침투를 한 거예요.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처리하겠노라 마음먹었던 어리어리한 녀석을 죽이기까지 한 상태가 아니겠어요?
배후도 밝혀내지 못했는데 말이죠.
브라키우드는 화가 이만저만 난 게 아니었어요.
저 멀리 한 사내가 서 있는 것이 보였어요.
화가 났음에도 브라키우드는 정중하게 다가갔어요. 지성을 가진 존재로서 예우를 갖추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사내가 개념을 상실했는지 반말로 ‘누구냐!’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자신의 소개를 하려 하는데, 갑자기 그가 ‘죽어라!’ 하면서 브라키우드에게 달려들었어요.
브라키우드는 참다못해 사내를 엄청난 신위로 눌러버렸어요. 그리고 정중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어요.
“내가 브라키우드라 하오.”
“그래. 내가 브라키우드다.”
“…!”
“궁금증은 해결되었나? 그럼 이번에는 내가 대답을 들어야겠군.”
“무슨 대답을 원하십니….”
앤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브라키우드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파팟!
“쓰러트린 다음에.”
그리고 앤디의 앞에 나타나 귓속말처럼 속삭이고는 주먹을 휘둘렀다.
“크흑!”
앤디가 바닥을 튕기듯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대로 발을 사용하여 공격을 시도했다.
브라키우드는 양팔을 모아 자신의 상체를 방어했다.
퍼벅!
“큭!”
브라키우드가 팔의 욱신거림을 느끼며 앤디를 튕겨 내듯 밀어냈다.
그 반탄력에 앤디의 신형이 뒤로 길게 밀려났다.
슈슛!
앤디의 몸이 바람처럼 사라지더니, 브라키우드의 눈앞에 나타났다. 물론 그냥 나타나지 않았다. 다리를 힘껏 치켜든 상태의 모습으로 브라키우드를 압박했다. 그 자세는 바로 내려찍기를 하기 전에 브레이크를 걸어놓은 상태의 모습이었다.
슈우우욱!
발뒤꿈치로 내리 그었다.
그 기세가 사뭇 심상치 않았다.
공기에 단층이 생기며 일그러질 정도의 압력이라니. 이 공격은 브라키우드가 뒤로 빠질 것이라 예상하고 시도한 것이리라.
그러나 브라키우드가 안쪽으로 치고 들면서 회심의 일격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육탄전은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그럼 맞춰서 같이 놀아주지.”
브라키우드가 씨익 웃었다.
그렇게 시작된 난타전.
터엉! 터엉!
공방이 생길 때마다 일어나는 충격파조차 결코 예사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앤디가 팔꿈치를 들어올리며 턱을 놀렸지만, 그의 손바닥에 막혀 길을 잃었다.
쩌릿쩌릿!
한 번의 공방에 전신에 전기가 오는 것처럼 짜릿했다.
앤디는 불안했다. 아무리 덤벼도 이길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신이 났다.
손과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치고받는 난타전에 쓰러져 있던 일행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고막을 넘어서 머리를 울리는 엄청난 굉음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뭐, 뭐지?”
모두들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토막 나서 죽어 있는 언데드 드래곤은 그렇다 치고,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퍼버버버버버버벅!
오랜만에 시원하게 몸을 움직이다 보니 브라키우드 역시 즐겁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모든 공격이 막히는 것에 짜증이 나려 했다.
더 짜증나는 사실은 공방이 시작되면서 만만하게 생각했던 앤디에게서 시간이 지날수록 허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움직임이 체계적으로 보완이 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인정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러한 것을 자신이 느꼈다는 것은 상대방의 전투 감각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어느덧 둘이 충돌한 지 8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브라키우드는 결국 이런 자잘한 공격이 앤디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주먹에 마나를 모았다. 그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모든 공격을 거두고 힘의 초점을 모았다는 데 의의가 달랐다.
후웅!
브라키우드의 공격이 터지기 전에 앤디의 주먹이 거침없이 그의 안면을 향해 뻗어왔다.
브라키우드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주먹을 막고 가볍게 흘리며 반격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헛손질만 이어질 뿐이었다.
반면에 앤디는 브라키우드의 공격이 거세지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휘익! 뻐걱!
앤디의 안면이 돌아갔다. 브라키우드의 왼 주먹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온 탓이다.
이연타를 노림인가.
그 상태로 앤디의 정수리를 내리찍으려 했다.
그러나 그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앤디는 브라키우드의 팔뚝을 움켜잡고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당기며 머리로 안면을 노렸다.
퍼억!
“크흑!”
앤디의 공격을 허용한 브라키우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뒤로 물러섰다.
앤디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뛰며 공격을 시도했으나, 브라키우드의 손짓에 중심이 흐트러져 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잠시 접고 있었던 마법을 다시 사용한 것이다.
앤디도 다시 검을 들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호흡을 다듬었다.
“비겁하십니다.”
앤디의 한마디에 가슴이 뜨끔한 브라키우드.
괜히 부끄러워졌다.
“흠흠! 미안하군.”
“….”
“그럼 다시 시작할까? 이번에는 절대 마법을 사용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만, 곧 그 말씀을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훗! 그럴 리는 없을 거네.”
브라키우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앤디는 자신의 검을 앞으로 길게 찔러 넣었다.
푸슛!
선공을 하지 않고 여유를 부릴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실력이 높은 존재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바보가 어디에 있겠는가.
브라키우드는 여유롭게 몸을 틀었다. 하지만 앤디의 검술은 브라키우드가 알고 있는 검술보다 차원이 높았다. 교묘한 틀어짐이 브라키우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절대 피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움직임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의 능구렁이 같은 상대가 놀랍게도 지금까지 자신의 본 실력을 숨기고 전투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실력을 짐작하게 만들어놓고 지금에 와서 기습을 가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이 한 방을 노린 것이었다.
으득!
절로 이가 갈렸다.
결국 몸을 완전하게 빼내지 못한 브라키우드는 얼굴에 깊은 자상을 남기고야 말았다. 그 부위가 화끈거렸다.
하지만 화끈거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 검기가 미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척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속도로 다가온 앤디의 팔꿈치에 강타를 당한 것이다.
퍼억!
어깨와 등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꺼! 커헉!”
울컥하며 입에서 한 모금의 핏물이 배어나왔다. 내상을 입었다는 뜻이었다.
억지로 몸을 움직여 반격을 시도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휘청.
무릎이 풀렸다. 그것도 한 방에 말이다.
브라키우드가 눈을 부라리며 손끝에서 마법을 폭사했다.
“플레어 임팩트!”
터엉!
“커허헉!”
순간,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던 앤디의 몸이 쭈욱 밀려나더니 천장에 충돌했다.
쿠콰광!
천장이 들썩이며 큰 원을 만들면서 붕괴되었다. 앤디는 아직도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쉐리들이 앤디의 이름을 외쳤다.
“앤디!”
그리고 다급하게 입을 막았지만, 먼저 터진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일까?
브라키우드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구석에 몰려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들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곧 시선을 돌려 허탈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토했다.
앤디를 보는 것인지, 뚫린 레어의 천장을 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브라키우드가 입맛이 쓴 표정으로 한마디 흘렸다.
“쯧! 비가 새겠군.”
쉐리가 말했다.
“브라키우드 님, 이거 맛있는데 더 없어요?”
“내가 너희 식모인 줄 아느냐!”
그때, 팅! 하는 맑은 소리가 오븐에서 흘러나왔다.
브라키우드는 투덜거리며 오븐에 굽고 있던 쿠키를 꺼내서는 쉐리가 들고 있는 접시에 담아주었다.
쉐리는 그 쿠키를 받고 일행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테이블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브라키우드의 옆에서 주스를 따르고 있던 클라우저도 자리에 합류했다.
“브라키우드 님도 어서 오세요.”
“시끄럽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마라!”
“칫!”
브라키우드가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쉐리는 혀를 날름거리며 웃었다.
지금 브라키우드는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요리라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렐리가 옆에서 보조를 하며 도와주었다.
군소리 없이 지시를 잘 따르는 렐리가 약간은 마음에 드는 브라키우드였다.
그에 반해 쉐리라는 계집은 마음에 안 들었다.
바라는 게 뭐가 그렇게 많은지.
쯧!
도마에서 움직이는 브라키우드의 놀라운 손놀림.
탁탁탁탁탁!
퐁퐁퐁퐁퐁!
브라키우드가 썬 야채 등은 이미 야채라고 할 수 없었다. 자로 재며 썬 듯이 각 잡힌 녀석들은 이미 세상에 현존하는 예술 작품 중 하나였다.
잠시 후, 가장 맛있는 두께와 각도로 사람의 입맛을 자극할 예술품들.
그것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그와 동시에 이곳 주방을 가득 메우듯이 퍼지는 오묘한 음식의 향긋한 향기는 배가 부른 이조차 음식을 먹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 지경이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를 보며 다시 국자를 들었다.
한 바퀴 휘저어주고…
후룹!
‘흠! 맛 죽이는군!’
수프를 ‘후후!’ 불어 한입 떠먹어보고, 국자를 뚜껑 위에 살짝 걸쳐 놓았다.
여하튼 이제 음식들의 간이 대충 맞은 것 같으니 제대로 끓기만 하면 될 듯싶었다.
이번에는 스테이크를 볼 차례.
어떻게 익고 있는지 불을 살피고, 고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에 맞는 소스는 이미 완성된 상태.
“여기에 있습니다, 브라키우드 님.”
렐리가 건네는 소스를 맛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키우드는 자신의 음식 실력이 이미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 음식들이 완성되었으니 마무리 차례였다.
음식은 맛도 중요하지만, 시각적 효과도 중요하다. 마무리 데커레이션을 하는 브라키우드의 표정은 진중했다.
“됐다!”
“수고하셨어요.”
“후후! 렐리도 수고가 많았다.”
그렇게 완성된 식사가 식탁으로 옮겨지고, 사람들은 기다렸던 음식에 환호했다.
“잘 먹겠습니다!”
기사 안젤른과 파프는 경외스러운 모습으로 식사를 시작했고, 렐리는 참하게 루슬란은 젊잖게 쉐리와 클라우저는 허겁지겁 입에 쏟아 부었다.
모두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먹었다.
브라키우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하게 음식을 들었다. 옆에서 누가 보면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브라키우드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완벽한 진미는 없을 것이다.’라고.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물론 너무 맛있어서.
식사를 마친 브라키우드는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렐리가 브라키우드를 위해 음료와 후식을 챙겨 주었다.
그때, 렐리의 눈에 구석에 있는 방문이 열리는 것이 들어왔다.
혹시나 싶어 주시를 하니, 친숙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앤디 님!”
그 목소리를 들은 앤디가 시선을 돌렸다.
앤디만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클라우저와 기사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습을 드러냈다.
“앤디 군!”
“영주님!”
모두가 앤디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루슬란과 쉐리도 앤디를 찾아왔다.
“모두들 무사했군요.”
“영주님 덕입니다.”
“그런데 여긴….”
앤디의 표정이 상당히 어색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그때, 일행들의 등 뒤에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집이지.”
브라키우드였다.
브라키우드가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한마디를 했다.
“무슨 구경거리가 있다고 몰려 있는 건가? 너희 셋, 설거지는 다 했나?”
찔끔한 안젤른과 파프, 클라우저가 자리를 슬그머니 피했다.
브라키우드가 옆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 자리에 있던 쉐리와 루슬란도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피했다.
렐리는 센스 있게 예전에 자리를 옮겨 차를 타고 있었다.
앤디가 잠시 의아한 시선으로 브라키우드를 보다가 인사를 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지금에 와서까지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존재께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저희 사정을 봐주신….”
“그런 허례는 됐다. 그런 허례를 들으려고 한 일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한 것이지.”
“무슨 잘못 말씀이십니까?”
그 말에 브라키우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나 싶어 말하는 것이지만, 내가 마법을 쓰지 않아도 너를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브라키우드의 시선이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앤디가 피식 웃고 말았다. 브라키우드의 강한 자존심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단지 말뿐이 아니었다. 진짜 실력 대 실력으로 싸웠다면 자신은 졌을 것이다.
앤디는 진심으로 자신의 작은 꼼수가 운이 좋아서 통했다고 생각했다.
진심이 담긴 앤디의 말에 브라키우드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건 그렇고, 잘 쉬었는가?”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이틀 정도 되었네.”
이틀밖에 안 됐다니 놀라웠다.
눈앞에서 폭발한 그 엄청난 폭발력이 전신을 휘감던 순간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암만 못해도 사망 직전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쑤시는 곳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로 살려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내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지키지 못해 마음이 불편했을 뿐.”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때, 모습을 드러낸 렐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분, 차 드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세요.”
둘이 자리한 곳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객실이었다.
“늦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앤디라고 합니다.”
“알고 있다.”
“함부로 위대하신 분의 공간에 침입하여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무슨 이유로 이 산맥에 들어왔는지도 모두 들었다.”
“….”
브라키우드의 냉랭한 분위기.
앤디는 무슨 말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는지 막연했다.
그런 상황에 브라키우드가 말문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이곳에 올라와서 한 일들에 대한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앤디가 안도를 했다. 사실 그게 가장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브라키우드가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는 발언을 했다.
“그만 내려가라.”
“예?”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가 깨어났으니 저들도, 너도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이곳은 내 보금자리다. 앞으로 이곳에 발을 딛는 자는 경고조차 없이 모두 죽일 것이다.”
그 말에 앤디가 신중한 고갯짓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앤디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브라키우드가 불렀다.
“잠시.”
“말씀하십시오.”
“드래곤을 가지고 장난을 친 존재가 있다.”
앤디는 단편적인 브라키우드의 말을 듣고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언데드 드래곤을 지칭하는 것이다.
“예.”
“그 녀석을 잡아서 나에게 연락을 하라.”
“예?”
앤디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브라키우드가 찻잔을 들고 마시며 다시 이야기했다.
“확언컨대, 이 장난을 친 녀석은 인간이다.”
“인간이란 말씀이십니까?”
앤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 괴물의 위용을 말이다.
자신이 겨우겨우 죽이긴 했지만, 그것이 힘을 찾지 못한 상태로 싸웠기에 가능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 괴물이 모든 힘을 갈무리한 채 세상에 나서서 제 힘을 발휘했다면, 작은 왕국 정도를 멸망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원래는 내가 직접 잡아서 죽일 생각이었지만, 네 녀석 때문에 그 녀석을 쉽게 잡을 길이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네가 잡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
“대신 한 가지 힌트를 주마. 아마 지금 너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민첩한 관계가 있는 녀석일 것이다.”
그 말에 갑자기 앤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브라키우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니, 대체 어떤 일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약을 먹고 강해진 사람들이 나타난 일? 아니면 몬스터들이 부대를 이루고 덤벼드는 일?
아니면….
앤디가 갈망하는 눈빛으로 브라키우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호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올린 브라키우드.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영지로 돌아온 일행들은 영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오랜 시간 연락이 끊어졌다가 돌아왔기에 그 반가움은 더했다.
앤디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수하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안드레이에게 연락을 해 있었던 일에 대해 간단하게 보고를 마쳤다.
드래곤 브라키우드가 깨어나 몬스터들이 도망친 것이라고 말이다.
안드레이는 고맙게도 더 묻지 않았다. 알아내느라 수고했다고, 쉬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지금 피로가 쌓여서 대충 대답할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리 말한 것이다.
아마도 쉬고 난 후 이것저것을 캐물을 것이 분명했다.
앤디는 지친 몸을 침대에 누였다. 몸이 노곤해지며, 금방이라도 잠이 몰려올 것 같았다.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한 가지 힌트를 주마. 아마 지금 너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민첩한 관계가 있는 녀석일 것이다….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조금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한 화풀이를 이런 식으로 쪼잔하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아쉬운 것은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