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재회
1
“…봐, 봤어? 저게 뭐야?”
“나라고 알겠냐?”
하루 정도만 더 가면 바로 앤디가 있는 포른트 영지에 도착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두두두두!
엄청난 수의 몬스터였다.
쉐리와 일행들은 높은 바위 위에 몸을 바짝 엎드린 채 몬스터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났다.
긴장감에 숨조차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괜히 자신들이 이곳에 있음이 드러나 봤자 좋을 일은 없었다.
반가워서 환영 인사를 해줄 녀석들은 아니지 않는가.
죽이겠다고 달려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한두 마리면 모르겠지만, 저런 개떼 수준의 몬스터들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그때 렐리가 긴장해서 몸이 뻣뻣하게 굳었는지 몸이 결린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실수로 몸을 움직였는데 바위 위에 쌓여 있던 부스러기와, 그 부스러기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있던 돌덩어리가 함께 움직이더니, 그대로 굴러서 절벽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목격한 일행들이 식겁해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애써 팔을 뻗어보았지만, 이미 튕겨져 나가고 있는 돌멩이는 어떻게 잡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안 돼!”
루슬란이 달려 나가 팔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끝이 닿았지만, 그게 한계였다.
틱!
아니, 그로 인해 사건이 커졌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루슬란의 손끝에 닿은 대가로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칠 녀석이 허공에서 밀려나 일부러 던진 것과 비스무리하게 된 것이다.
그 돌덩이를 보는 일행들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고, 숨이 저절로 막혀 왔다.
긴장감으로 인해 형성된 자연스러운 집중력 덕일까.
돌덩이가 날아가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으로 클로즈업되어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보이면 뭐 어쩌란 말인가. 추락하는 돌덩이를 막아낼 능력이 없는데….
돌덩이는 쉐리들의 혹시나 싶은 기대를 저버리고, 정확하게 달려가던 오크 지휘관으로 보이는 녀석의 머리 위를 가격했다.
뻐억!
오크 지휘관의 머리 위로 5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떨어진 돌이다. 돌멩이도 아니고 돌덩이.
박 터지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오크 지휘관의 머리가 움푹 일그러지며 그대로 즉사했다.
퀙!
우렁찬 비명. 오크다운 용맹한 단말마였다.
주위에 포진해 있던 오크들과 다른 종류의 몬스터들이 놀라 이동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라?
꾸익! 꾸익꾸익!
눈을 살벌하게 부라리는 몬스터 무리.
쉐리와 일행들은 재빠르게 몸을 낮췄지만, 이미 늦었다.
크르르르르르!
녀석들이 목울음을 흘리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를 챈 쉐리와 일행들이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몸을 뺐다. 몬스터들은 절벽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잔 먼지를 눈으로 확인하며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는 외침을 터트렸다.
꿔이이이익!
돼지 멱따는 듯한 외침이 터지자 몬스터들이 우르르 달려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젠장! 튀어요!”
클라우저의 외침에 일행들이 뒤도 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얼마 달리지 않았음에도 몬스터들이 그새 벽을 기어 올라왔는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쉐리와 일행들을 발견하고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꼴을….”
“헥헥! 닥치고 뛰어!”
클라우저의 투덜거림에 렐리가 정색을 하며 말을 잘랐다. 클라우저가 그런 렐리를 노려보았다.
“누님이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뭐!”
“내가 ….”
“그래서?”
싸늘한 목소리로 더 이상의 말은 불허한다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클라우저가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하여간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렐리가 눈을 부라렸다.
“무서운 게 뭔지 보여줄까?”
그 말에 식겁한 클라우저가 입을 꾹 다물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맨 앞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던 쉐리를 젖히고 저만치 달려 나갔다.
뒤쪽에서 달리고 있던 루슬란이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몬스터들이 30마리 이상은 되어 보였다.
“징그러운 놈들.”
어떻게 상대할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상대를 한다고 쳐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자신들이 녀석들에게 잡혀 딜레이가 길어질수록 몬스터들의 수가 늘어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 중 최선은 바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숲 속에 특화되어 있는 몬스터들은 신체의 이점을 살려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이런, 썩을!”
쉐리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사이 루슬란은 달리는 와중에 이런 저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뒤를 막아서면 과연 얼마의 시간을 벌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다.
앤디와 만나서 해터슨과 싸웠을 때보다 더 강해진 자신이다.
그래봐야 여전히 중급 익스퍼트의 실력이긴 했지만, 같은 중급 익스퍼트라도 급이 있는 법. 그날 앤디와 해터슨의 전투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 있었기에, 거의 상급 익스퍼트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는 자신이었다.
못해도 10분 이상은 막고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루슬란이 결심을 굳히려는데, 그런 낌새를 눈치챈 것일까? 렐리가 말했다.
“꿈도 꾸지 마세요. 절대 혼자 놔두고 가지 않을 거예요.”
쉐리가 숨을 헐떡이면서 그 말에 반응했다.
“당연하지. 우린 죽어도 같이 죽어.”
그때, 저 앞에 있던 녀석이 언제 왔는지 클라우저가 마무리를 지었다.
“젠장! 나는 그 우리라는 단체에서 좀 빼줘요.”
그 말에 모두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손이 검 손잡이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협박도 이런 협박이 없었다.
루슬란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뭐라고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기쁨을 넘어선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런 녀석들이 동료라는 사실에 행복했다.
하지만 곧 한계에 달했다. 몬스터들의 숨결이 뒷덜미를 자극할 정도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일행들의 손에 어느새 무기가 들려 있었다.
쿠륵! 쿠륵! 쿠르륵!
몬스터들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저 멀리 있는 녀석들까지 합하면 어느덧 그 수는 40마리가 넘어섰다.
렐리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루슬란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가던 자리를 박차고 몸을 틀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의 날은 정확하게 그의 뒤에 있던 오크의 목을 잘랐다. 그 흐름을 이어서 검은 바로 옆에 있던 오크의 가슴을 깊이 베고 들어갔다.
쩌어어억!
쿠오오! 퀘익! 퀘익!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루슬란은 바닥에 발을 딛고 다음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와중에 잊지 않고 쓰러진 오크의 얼굴을 발로 강하게 내리 밟았다.
우지직!
오크의 얼굴에 경력이 실린 루슬란의 발길이 닿자 일그러지며 머리가 깨졌다.
파삭!
뇌수와 피가 물풍선 터지듯 바닥에 쫙 깔렸다.
루슬란의 검에 어느덧 오러까지 맺혀 있었다.
오크들이 정신을 차리고 루슬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기를 꼬나들었다.
하지만 쉽게 막을 수 없었다.
루슬란의 오러는 기습을 당해 당황하고 있는 오크들이 막아설 만큼 허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걱! 서걱!
묵직한 소음이 들리고, 오크 한 마리가 또 무너졌다.
그러나 요령은 거기까지였다. 정신을 차린 몬스터들이 루슬란의 공격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슬란의 공격을 흘리고 피하며 빈틈을 노려서 파고들었다.
루슬란이 몬스터 5마리에게 둘러싸인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
물론 5마리로 루슬란이 위기에 빠지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다면 또 다른 몬스터들이 루슬란을 더 촘촘하게 둘러쌀 것이 문제였다.
순식간에 2마리가 더 붙어서 7마리가 루슬란을 둘러쌌다.
루슬란의 손속이 복잡해졌다.
그때, 2마리의 공격이 루슬란이 미처 신경 쓸 수 없는 부분을 공격해 들어갔다.
“위험해!”
그때 터져 나온 두 줄기의 물기둥.
쉐리가 물의 정령을 부른 것이다.
쉐리의 공격에 당한 오크와 고블린 2마리가 머뭇거림을 드러냈다.
그 짧은 시간이 주는 기회를 루슬란은 놓치지 않았다.
쩌어억! 푸북!
오크와 고블린이 뒤로 넘어졌다.
클라우저가 루슬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들며, 루슬란을 막아서며 공격하고 있는 고블린 하나를 쓰러트렸다.
또한 렐리가 단검을 쏘아 던졌다. 몬스터들이 주춤하며 단검을 피했다.
그 틈으로 루슬란이 몸을 빼냈다.
“허억! 허억!”
“헉! 헉!”
“하악! 학!”
루슬란과 일행들이 숨을 몰아쉬었다. 짧은 시간 동안 급박하게 움직여서 체력 소모가 커졌던 탓이다.
모두들 몬스터들을 견제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젠장! 녀석들의 수가 전혀 줄지 않은 것 같은데?”
클라우저의 말에 쉐리가 대답했다.
“더 늘어났어.”
루슬란이 침음을 흘렸다.
“너무 지체했군.”
렐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단검을 흩뿌려 몬스터들의 돌발 행동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어느덧 몬스터들의 수는 50마리를 넘어섰다. 견제 수준을 넘어섰다. 어떻게 막을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설마 여기서….”
렐리의 말에 클라우저가 이를 갈며 말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나는 여인들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죽을 운명이라구요!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 따위는 없다구요!”
그 말에 쉐리가 눈을 부라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꼴은 못 본다.”
클라우저가 움찔하다가 슬쩍 쉐리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그때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제길!”
클라우저가 가장 먼저 튀어나갔다. 그 뒤로 루슬란이 검을 휘둘렀다.
둘의 검에서 오러가 흘러나와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쉐리와 렐리는 각자 정령술과 단검술로 보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한계는 곧 드러났다.
쉐리와 렐리가 약점임을 파악한 몬스터들이 클라우저와 루슬란의 다리를 묶고 쉐리와 렐리를 공략했기 때문이다.
쉐리와 렐리를 보호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 클라우저와 루슬란은 결국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한곳에 몰린 일행들.
“…미안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그 한마디.
루슬란이 전력을 다해 마나를 뽑아 올려 종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오크 1마리에게 중상을 입히고, 나머지 2마리에게 경상을 입히는 것으로 끝났다.
상처를 입은 녀석들을 시작으로 녀석들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몬스터들이 단체로 무기를 치켜들고 승리의 괴성을 토했다.
꿔이이이익!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무기를 휘두르는 몬스터들을 노려보았다.
죽어서도 네 녀석들의 얼굴을 잊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써어어어억!
꿔이?
루슬란과 일행들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던 열댓 마리 정도 되는 몬스터들의 몸에 가느다란 붉은 실이 그려지더니, 그곳을 시점으로 서서히 몸이 쩌어억 벌어졌다.
붉은 피와 꿈틀거리는 내장이 모습을 드러내며 녀석들의 상, 하체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눈을 까뒤집고 비명을 지르며 통나무 쓰러지듯 쓰러져 나갔다.
“뭐, 뭐야?”
당황한 루슬란과 일행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몬스터들도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제가 물을 말입니다. 프린지 영지에 있어야 할 당신들이 여긴 어쩐 일이죠?”
모두의 얼굴에 기쁨과 반가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일행들 앞에 착지했다.
“앤디!”
앤디가 히죽 웃으며 그들에게 반가움을 드러냈다.
“다들 잘 지냈나 보군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행들 뒤로 묵직한 발소리 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일행들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곳에 엄청난 수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그 병력을 보고는 놀라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던 몬스터들도 놀라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려 뛰어가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앤디가 외쳤다.
“놈들을 섬멸하라!”
“돌격하라!”
“우아아아아!”
엄청난 수의 병력이 숲을 뒤덮으며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쉐리와 루슬란, 렐리와 클라우저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흐흐!”
“큭큭큭!”
“아하하하하하하!”
2
“저를 찾아오던 중이었다고요?”
앤디의 물음에 쉐리와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렐리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앤디에게 말을 걸었다.
“앤디야말로 어떻게 된 거죠?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몬스터 무리가 나타나서 말이죠. 그래도 한 영지의 영주로서 수비군이나 토벌대를 형성해서 방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그럼 그렇게 출군한 상태에서 운이 좋게 우리와 마주쳤다는 말인가요?”
“사실 운이라고 하긴 뭐하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수색대의 눈에 당신들의 모습이 띄어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니까. 하긴 거리가 멀었다면 오기도 전에 죽었을 수도 있으니, 그것도 어떻게 보면 운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제야 일행들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쉐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마워요.”
“뭘 고마울 것까지야.”
렐리가 질문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저야 그냥 평범하게 지냈죠. 전쟁도 하고, 영지도 얻고.”
평범하지 않은 일을 정말 별일 없었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하는 앤디였다.
그런 앤디의 모습에 모두가 웃고 말았다.
사실 예의상 질문한 것일 뿐이지, 모두들 왕국을 쩌렁쩌렁 울리는 앤디의 신위를 들어오며 감탄하지 않았던가.
쉐리가 물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몬스터들을 토벌하여 영지의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해야죠.”
앤디스러운 답변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슬란이 앤디를 향해 말했다.
“우리도 받아주게. 영지 보호를 위한 몬스터 토벌에 한손 거들고 싶네.”
“네?”
의외의 말에 앤디가 의문 어린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았는지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앤디의 말에 루슬란이 대답했다.
“우리는 용병이라네. 일거리를 보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혹시 우리가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는 건가?”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만….”
앤디가 말꼬리를 흐리며 뒤를 바라보자,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엘버트가 귓속말을 했다.
“자리는 충분하다고 하는군요.”
“다행이군.”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일 중에 쉬운 일은 없었다네.”
루슬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앤디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대답하는 것 같은 긍정의 모습이었다.
앤디가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실력이 늘었군요.”
그 말에 클라우저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검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말에 앤디가 입맛을 다셨다.
어째서인지 요즘 들어 자신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르침을 내려 달라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각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그러한 것 같았다.
루슬란도 말문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나도 부탁을 하고 싶네.”
앤디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니, 나중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게 좋겠네요.”
“하하! 우리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지. 미안하네.”
“후후!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배우겠다는 사람을 막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다만, 모든 것은 과정이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이번 토벌을 깨끗하게 해결한 후에, 그때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그 말에 루슬란과 클라우저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는 다음 날 아침이 밝기도 전에 벌어졌다.
수색병들은 다급하게 수신호와 특유의 소리로 사인을 보냈다.
육성이나 나팔, 호루라기 같은 소리를 내면 몬스터들의 신경을 끄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인은 신속하게 보초병에게까지 연결이 되었고, 신속하게 쉬고 있던 병사들을 무장시켰다.
병사들은 눈을 비비고 길목에 나서서, 날이 선 표정으로 이동하는 몬스터 무리를 기다렸다.
대략 2백 마리 정도의 몬스터 무리.
생각보다 적다고 할 수 있었지만, 오우거나 트롤 같은 대형 몬스터도 있었기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끼기긱!
그때, 고블린 한 마리가 병사들이 숨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
고블린의 반응에 몬스터들이 흉성을 드러내며 주위를 살폈다.
그때, 오우거 2마리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병사 한 명의 목을 잡고 척추를 잡아 뽑았다.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지휘관이 이를 갈았다.
“이런, 제길! 기사들이 나서서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라!”
신속하게 어디선가 튀어나온 기사들이 오러 맺힌 검을 들고 대형 몬스터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병사들도 민첩하게 삼인 체제를 이루며 몬스터들을 각개격파해 나아갔다.
“이야아앗! 죽어! 죽어!”
끼에에에엑!
푸욱!
고블린의 몸을 유린하는 병사들의 검과 둔기.
“이 자식이 감히 우리 동료를!”
서걱!
꿔익! 꾸이이익!
사방에서 병사들의 함성과 몬스터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처음 돌발 상황에 사상자가 생기긴 했지만, 전투가 벌어진 이후로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때 기사들의 견제에서 벗어난 오우거 한 마리가 일반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검을 휘두르고 있는 병사를 우습다는 듯 붙잡고, 자신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기사들을 향해 집어던졌다.
기사들은 민첩하게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병사를 피했다. 병사를 살리기 위해 받아들었다간 같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도 받아주지 못한 병사는 그대로 피떡이 되어 즉사했다.
오우거가 활개를 치며 같은 몬스터인 오크나 고블린 같은 몬스터도 닥치는 대로 붙잡아 기사들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우거 주위에 병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받은 병사들이었다.
오우거의 난동이 시작되기 무섭게 밀물 빠지듯 빠져나간 것이다.
오우거의 난동에 오히려 몬스터들이 녀석을 향해 공격을 할 정도였다.
이미 몬스터 무리의 질서는 붕괴되는 중이었다.
그때 앤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뽑아들고 오우거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파팟!
한 줄기 바람과도 같은 질주!
앤디의 신형이 이동하는 곳마다 섬광이 번뜩였다.
스걱!
반쯤 잘린 오우거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촤아아아아!
퀴롸롸롸롸!
오우거가 발광했다. 벌어진 목에서 콸콸 피가 쏟아지는데도 죽지 않고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자신이 오우거라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시켜 주겠다는 듯 거대한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몇몇 몬스터가 오우거의 발광을 의아한 시선으로 지켜보다가, 미친 듯이 팔을 휘두르는 오우거의 주먹에 맞아 죽어나갔다. 이미 오우거에게는 고통이 가져오는 분노로 인해 적아의 개념이 사라진 것이다.
눈치 빠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던 몬스터들은 외곽에서 견제하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몰살당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쿵!
미친 듯이 발광을 하던 오우거가 무너졌다. 소리만으로도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앤디는 수하들과 병사들을 진두지휘하며, 몬스터가 몰려 있는 곳이 눈에 띄면 거침없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앤디와 기사들이 휘두르는 검에 몬스터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추풍낙엽! 그 말이 딱 어울렸다.
그때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용병으로 참전하고 있던 쉐리가 그 모습을 보고 히죽 웃었다.
“감히 어딜! 솟구쳐라!”
미노타우로스의 이동하는 곳을 미리 점하듯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움무우우우우!
놀란 미노타우로스가 주춤거렸다.
그때, 클라우저가 미노타우로스의 다리 아래를 파고들어가 아킬레스건을 잘라냈다.
슈슛!
스걱!
그리고 신속하게 빠져나왔다.
우오오오오!
아킬레스건이 잘린 미노타우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그리고 녀석은 눈을 까뒤집고 클라우저를 잡으려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 순간, 렐리가 던진 단검이 미노타우로스의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다급히 자신의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얼굴을 막은 팔에 단검이 틀어박혔다.
미노타우로스가 화가 난 몸짓으로 팔을 훑어 단검을 뽑아내고, 자신을 공격한 렐리를 향해 분노를 돌렸다.
“어딜!”
루슬란이 바람같이 달려와서 검을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루슬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하지만 오러의 날카로움에 가슴 가죽이 쩌억! 하고 벌어졌다.
움무우우!
미노타우로스가 루슬란을 향해 무지막지하게 양팔을 휘둘렀다.
루슬란의 몸이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기울었다. 넘어지는 것 같아 보일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말이다.
그 와중에도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정확성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루슬란은 몸을 백팔십도 틀며 바닥을 박차더니 검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푸욱!
꾸오오오오!
루슬란의 검을 피하지 못한 미노타우로스가 목을 부여잡은 채 뒤로 나자빠졌다.
쿠웅!
마침표를 찍듯 둔중한 굉음이 들려왔다. 잠시 몸을 떨던 미노타우로스의 손이 축 늘어졌다.
3
앤디와 병사들의 호흡은 척척 맞아떨어졌다.
전투가 벌어질수록 피해는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피해 상황이 전무에 가까워질 정도였다.
앤디는 지휘만 하지 않고 몬스터들이 몰려 있는 곳을 향해 직접 파고들어가 검을 휘둘렀다.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이 몰려와 우왕좌왕하는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다시 몬스터들이 몰리는 듯한 곳으로 달려가면, 그 주위에 포진해 있던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와 공략하기 시작했다.
앤디가 검을 쉴 때는 전투가 마무리되어질 때쯤이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몬스터들.
앤디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해 상황은 어떠한지, 위험해 보이는 것은 없는지 등등을 살피며 말이다.
이번 전투도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 것 같았다.
앤디는 한결 편안한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움직임을 보며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각자가 익혔던 기술들이 능숙하게 펼쳐지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넓은 시야로 자신의 임무를 소홀하게 하지 않아 주위를 든든하게 받쳐 주었고, 기사 지망생들의 검은 날카로워지고 있었으며, 기사들은 오러를 사용하는 것이 한결 편해지고 능숙하게 변해갔다.
그때 루슬란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흠을 잡을 곳이 없었다. 굳이 잡자고 하면….
‘흠….’
앤디의 머릿속에 하나의 검술이 떠올랐다. 자우검법이라는 것이었다.
루슬란은 자신의 독특한 검술을 만들어 그것을 완전하게 몸에 배어들게 하여 터득했지만, 그것은 실전을 오가며 만들어낸 기술로, 한쪽으로 치우친 편향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심에 대한 미묘한 문제와 마나의 흐름이 매끄럽게 전도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미 루슬란의 검의 깨달음은 상급 익스퍼트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어야 했으나, 그 문제로 인해 아직도 중급 익스퍼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때, 앤디의 시야에 어떤 위급한 상황이 잡혔다.
오크와 맞서 싸우던 한 병사가 위기감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오크의 쇠방망이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앤디가 바닥을 박찼다. 동시에 묵직한 고기가 베어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걱!
푸촤촤촤촤!
방망이 대신 뜨끈한 무언가를 뒤집어쓴 병사는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앤디가 검을 들고 서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겨 간다고 방심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살아 있어야 진정한 승리인 법입니다!”
“예예! 알겠습니다!”
병사는 바짝 군기가 든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의 어깨를 툭 쳐줬다.
앤디가 이끄는 몬스터 토벌대는 착실하게 몬스터들의 흔적을 쫓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정말 애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고 받았던 것처럼 이동하는 방식이 지금까지 모습을 보여 준 것처럼 체계적이지 않고, 정말 어디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으로 보낸 토벌대의 연락을 받았는데, 그곳에서도 같은 내용의 정보를 보내올 뿐이었다.
앤디와 군사, 그리고 부대장들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지속했다.
“우리의 이동 경로가 이 파란색 선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벌써 토벌을 나온 지 나흘이 되었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무리가 몇이었죠?”
앤디의 물음에 엘버트가 대답했다.
“총 열다섯 무리로, 토벌된 몬스터의 수는 약 2천4백 마리가 넘습니다.”
“피해 상황은 어떻게 되죠?”
“사망자가 스물여섯에 사상자가 쉰일곱 명입니다.”
“흐음.”
“일반 전투로 봤을 때 피해는 극히 경미한 상태입니다.”
“그러합니까?”
“그렇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앤디가 모두의 의아함을 대변하듯 말문을 열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몬스터 놈들의 모습을 보면 반쯤 혼이 나간 듯해서 말입니다. 왜일까요?”
총단장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 병사들의 용맹한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다가 쓰러지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 것은 아닐까요?”
“그럴까요? 그럼 좋겠지만.”
“….”
“하지만 의문스러운 점이 너무 많다, 이 말이죠.”
“무엇이 그렇게 의문스러우십니까?”
앤디는 어느 지점을 중심으로 넓은 원의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보고 받은 지역과 우리가 살피고 있는 지역들을 보았을 때, 이 지점을 중심으로 녀석들이 다급하게 회피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군요. 그 지역을 중심으로 몬스터들이 퍼지는 듯한 모습입니다.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요?”
“우연이라…. 우연이라는 놈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고 하죠. 결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흠….”
“혹시 이런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지능이 낮은 동물들은 자신의 위기를 감지해서 피하는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게 무슨….”
“지진이 일어날 때 동물과 새들은 그 전에 감지를 해서 피해 지역을 벗어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기 감지 능력이 그 위치의 위험함을 파악하여 도망치게 한다는 것이지요.”
앤디의 말에 모두가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히 앤디의 말에 ‘그런 이야기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라고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누가 있겠는가.
앤디는 그런 수하들의 속내를 읽고 입맛을 쩍! 하고 다셨다.
“처음 듣는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뭐, 모를 수도 있지요.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니까.”
앤디가 잠시 고심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몬스터 무리에 대한 흔적이 더 있습니까?”
엘버트가 대답했다.
“수색대를 펼쳐서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더 이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곳 포른트 영지 근교 산맥에 몰려 있던 몬스터들이 저희 토벌대 손에 토벌이 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죠….”
앤디가 곧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럼 토벌대를 해산하도록 하지요.”
“충!”
“그리고….”
앤디가 지도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마을에 내려가는 즉시, 조사를 위한 수색조를 편성하겠습니다!”
“수, 수색조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어떤 조사를 하시려는 겁니까?”
“저 부근에 대한 조사입니다. 지리가 밝은 자와 발이 빠른 자를 우선으로 모집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