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의문투성이
1
셀린은 자신의 몸통보다 큰 책을 덮은 후, 양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오랜 시간 책을 팠더니 눈에 피로가 몰려왔다.
창밖을 보니 어둑어둑했다. 점심도 거르고, 어느덧 저녁 시간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적당히 출출한 정도?
셀린은 들고 있던 책을 원 자리에 꽂아 넣고 책장을 훑기 시작했다. 무슨 책이 있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 습관처럼 돌아보는 것이다.
한참 동안 책장의 책을 보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차를 끓여서 마셨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살이 좀 쪘나?”
셀린은 자신의 팔과 배를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듯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공부한다고 매일같이 앉아서 책만 팠더니 생긴 결과였다.
셀린은 속상했다. 그녀도 여자였던 것이다.
“조금 관리를 하긴 해야겠어.”
셀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셀린을 전속하는 시녀였다. 셀린이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반기는 미소를 지었다.
시녀가 셀린에게 물었다.
“식사하시겠습니까?”
셀린은 고민했다. 오늘 하루 정도 굶으면 살들이 정신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의 살들이 출렁거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 굶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셀린은 결정을 내렸다.
‘그래, 오늘 조금만 먹고 내일부터 관리에 들어가야겠어.’
오늘은 그냥 먹고 내일부터 마음을 다잡은 채로 굶는 게 좋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결정에 약간은 씁쓸한 마음으로 입맛을 쩍 다셨다.
“응, 먹을게.”
셀린의 장고의 끝내 나온 결정에 시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졌다.
“그럼 곧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고마워.”
셀린은 가볍게 상기된 표정으로 밖으로 나서는 시녀를 보았다.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기분은 별로였다. 셀린은 입술을 쭉 내밀고 원수 같은 살들을 다시 한 번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처리해야만 하는 것들이었기에 신경을 끄고, 오늘 한 공부의 복습을 하기로 결정했다.
손으로 자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웠다. 셀린의 심장에서 유유히 흐르던 마나 서클이 움직이며 흘러나오더니 허공에 마나를 응집시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셀린을 중심으로 양쪽에서 각자 다른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오른쪽에는 물방울 입자가 뭉치고, 왼쪽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기다란 원통형의 불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이 손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르자 두 기운이 서로 어울려 춤을 추듯 다가서더니, 똬리를 틀 듯 서로를 부둥켜안고 휘감아 올랐다. 동시에 물과 불이 치이익거리는 소음을 내며 허공에서 소멸했다.
셀린의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짝!
셀린이 다급히 뒤를 돌아보고 상대를 확인한 후에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스승님.”
“네가 더블 캐스팅까지 하다니 놀랍구나.”
“스승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렸습니다.”
안드레이가 미소 지었다.
“무슨 소리냐. 부끄러운 모습이라니. 다른 마법사들이 들으면 경을 칠 게야.”
셀린이 안드레이의 칭찬에 부끄러운 듯 양 볼을 붉혔다.
“너의 서클이 삼 서클에서 올라가지 않고 오묘한 흐름을 보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만,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죄송합니다.”
“아니다. 이것은 죄송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이지.”
“스승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하! 나도 잠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만, 그래도 네 성장이 늦는 편도 아니었다. 내 제자로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심연의 눈이 있으니 그것을 중점적으로 수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고 말이다. 한데, 더블 캐스팅이라니. 너의 본질을 뚫어보는 능력이 그 정도로 뛰어난 것인 줄 미처 몰랐구나. 설마 마나의 본질까지 뚫고 봐서 두 종류의 마나를 한 번에 이끌어낼 줄이야.”
“부끄럽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라. 마법이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을 이룬 마법사들 중에서도 소수만이 더블 캐스팅을 할 수 있다. 복잡한 마나의 수식을 하나의 뇌로 동시에 두 가지를 진행하는 것이 어찌 쉽겠느냐.”
안드레이가 기특한 시선으로 셀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무엇을 하면 됩니까?”
“조사가 필요하다. 한데,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할 수 있겠느냐?”
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내비쳤다. 안드레이가 조금 굳은 표정으로 셀린을 주시했다.
“내 지원이 불가능한 일이다. 네 능력으로 혼자서 알아봐야 할 것이다.”
“맡겨만 주세요.”
셀린이 굳은 의지를 보여 줬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목적지가 어딥니까?”
“쿠렌트 제국이다.”
앤디가 자신의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날 나눴던 이야기와 안드레이의 반응이 가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단약이라니?”
탈리온 공작의 물음에 앤디가 머리를 긁적였다. 말을 꺼내놓고 보니 마땅하게 설명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해터슨과 제가 붙었던 이야기는 아실 겁니다.”
탈리온 공작은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안드레이는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탈리온 공작은 질문을 하려다가 안드레이의 행동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조용히 들을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 해터슨의 능력은 수로 표현하면 5 정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밀리자 품 안에서 단약을 꺼내 먹었는데, 순간 8 정도의 능력으로 올라갔습니다.”
탈리온 공작과 안드레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단순한 설명이었지만, 그 한마디로 많은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탈리온 공작이 나직하게 말문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먹음으로 인해 마나가 늘어난다? 그런 것이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앤디가 대답하기 전에 의아한 눈빛으로 안드레이를 보았다. 탈리온 공작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앤디는 안드레이의 행동이 미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딱히 집어내라고 하면 뭐라 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했다.
그런 앤디의 눈빛을 느꼈는지 안드레이가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둘은 잠시 마주 보았고, 앤디는 으레 그런 행동을 한 것처럼 태연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확실한 것은 해터슨이 그 단약을 먹고 강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자의 행동으로 봤을 때, 그 약을 먹음으로 인해 위험하다고 인지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먹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위험하다고?”
“예.”
“흠… 그 말은 그 단약이라는 것에 큰 부작용이 있다는 뜻이겠군. 예를 들면 강력한 힘을 얻는 대신 생명력을 갉아 먹거나 하는 것같이 말이네.”
탈리온 공작의 말에 앤디가 수긍 어린 몸짓을 보였다.
“그 힘을 사용하는 시간도 한정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 순리를 벗어나 힘을 얻는 것이네. 수련을 통해 단계적으로 얻은 힘이 아닌 갑작스러운 기운을 몸이 버틸 리가 없지.”
앤디와 탈리온 공작의 시선이 안드레이를 향했다. 그의 의견을 듣고 싶은 탓이었다.
지금까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드레이는 입을 닫고 경청만 하는 중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 잠시 딴생각을 했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했지?”
“수련을 통해 얻은 힘이 아니라 몸이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흠….”
다시 침묵을 하고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안드레이였다.
“뭔가 그 단약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게 있었나요?”
“아니다. 마나를 증폭시킬 수 있다면 마법을 사용할 때 어떤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지에 대해 잠시 고심했다.”
“아, 네.”
말은 그럴듯했다. 탈리온 공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앤디는 지금 안드레이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확신했다. 그가 뭔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앤디가 자연스럽게 탈리온 공작에게 시선을 돌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앤디는 그때 짧은 시간이었지만 안드레이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앤디가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밀봉되어져 있는 상자를 꺼냈다.
잠시 망설이던 앤디가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상자 속에서 해터슨이 먹었던 단약과 동일한 단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앤디는 단약을 양 손가락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그런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전생의 세상에 있던 물건이었다.
“마하역혼환.”
안드레이가 감추고 있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2
앤디의 생활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기사들에게 이곳에서는 마나 호흡법이라고 하는 내공심법을 가르치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도록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카렌 마을의 친우들을 직접 지시하며 가르침을 내렸다.
카렌 마을의 청년들의 눈에 독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물론 밴트와 해리슨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앤디는 악랄하기 그지없는 악마 그 자체였다.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었다.
자신들이 아무리 그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상상하기도 싫은 넓이의 땅을 모두 개간한 것까지는 좋았다. 농사를 시키는 것도 좋았다.
망할 쇠 덩어리.
마나를 호흡하여 몸을 다스리도록 대연심법을 익혔음에도 조금 익숙해질 만하면 그 무게를 거침없이 올렸다. 정확한 판단으로 한계의 한계를 노크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기 바로 직전의 고통.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이건 단순한 인내심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원망이 극에 쌓이기 시작했다. 검술을 배우고 싶었다. 자신들은 이런 단순 노가다를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으득!
하루에도 몇 번씩 이가 갈렸다. 아니, 휴식을 취하듯 이 가는 것이 멈추었다.
기회만 보이면 뒤통수라도 후려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사실 이미 몇 명이 시도를 했다.
그 결과는 개처럼 두들겨 맞아 형상조차 알아볼 수 없는 꼴이 되었다.
누군가 외쳤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어! 친구 아니었어! 대장!”
앤디가 대답했다.
“너희는 스스로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었나? 왜 그렇게 나약한 소리를 하는 거지? 친구? 내가 친구이길 원하나? 너희가 나에게 검술을 배우러 왔을 때 이미 너희는 내 수하가 되었다. 설마 너희는 나에게 가르침을 원하고서조차 대등한 관계를 원했던 것인가? 그런 썩은 정신 상태로 검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게 힘든가? 그럼 가라. 가고 싶다면 언제든 돌아가도 좋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마라. 스스로가 정한 일도 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자들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다.”
“….”
앤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모두들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들 속에 그런 나약함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자신들은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고 항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친구가 되고 싶은가?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앤디를 향해 쏠렸다.
앤디가 말문을 열었다.
“강해져라. 강해져서 나와 눈높이를 맞춰라. 그럼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백 년이 지나도 힘들겠지만. 큭큭!”
으득!
대놓고 이가 갈리는 소리를 흘렸다.
“큭큭큭! 뭐하는가? 수련을 시작하지 않고.”
“대장님,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앤디가 넌지시 시선을 던졌다. 말을 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정말 지금 하는 노가다가 수련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훗! 그럼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때 모두의 머릿속에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한마디.
‘삽질이요.’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이것은 너희에게 꼭 필요한 수련법이 확실하니 말이다. 다소 무식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수련을 하여 오러를 느낀 기사와 지금에 와서 검을 배우려는 너희의 간격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 지금 너희가 일을 하며 흘린 땀방울이 그들이 수십 년간 흘려 온 땀방울보다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 수련이 너희와 그들의 갭을 줄여 줄 것이다.”
“확실합니까?”
“물론이다. 지금의 수련은 너희의 약해빠진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이 곡괭이질로 인해 너희의 물러터진 근육이 갈라지고 찢어지며, 그 속에서 새로운 근육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 새로운 근육은 너희에게 새로운 힘을 줄 것이다. 또 다른 질문 있나?”
모두 입을 다물고 살기를 풀풀 흘리며 앤디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금까지 움켜쥐고 있었던 곡괭이를 다시 치켜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손목에 달려 있는 족쇄와도 같은 쇠 팔찌가 부딪치며 묵직한 소음을 울렸다.
앤디는 그런 그들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눈빛이라면 드래곤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수련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내가 싫은가?”
“그렇습니다!”
모두들 솔직했다. 앤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더욱더 수련해라! 그리고 스스로를 몰아붙여라. 한계를 넘어라. 그리고 발전해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넘사벽이라는 말을 말이다. 큭큭큭큭!”
모두 앤디의 뒷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지금 쇠몽둥이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더 이상 논리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앤디는 한참 동안 연무장에서 그들의 수련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앤디는 지금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보고 있었다.
주위로 실타래 같은 가느다란 기운들이 산들바람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오고 가는 기운들.
그 속에 하나의 기운이 새치름하게 반응했다.
잡을까 고민했다. 그 고민이 들기가 무섭게 그 기운이 그대로 동결했다.
다시 상념을 지우고 동공에 전념했다. 그러자 다시 그 기운이 호기심 어린 몸짓으로 앤디의 주위를 맴돌았다.
신경이 쓰이지만 그저 고요한 가운데 있으면 언젠가 변화가 오리라고 생각했다.
기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는 선천기와 살면서 얻게 되는 후천기를 말한다.
선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원기가 있고, 후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종기, 수곡지기, 오장육부지기가 있다.
선천기에 속하는 원기는 선천지정에서 생산되고, 인체 명문혈에 저장되어 있으며, 생명 활동의 원동력이 되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후천기인 종기는 대기와 비위에서 물을 소화해 획득한 정기와 결합되어 형성된다. 형성된 기운은 심장을 움직여서 피를 돌게 할 뿐만 아니라, 폐부에서 나눠서 널리 까는 부포작용을 한다.
이와 같이 기라는 것은 우리 몸에 상호작용을 일으켜 생명의 근본으로 생장 발육과 각 장부 활동을 열어 움직이게 한다.
기가 담고 있는 뜻은 매우 넓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를 살펴보면 기는 일종의 물질이자 에너지이다. 즉, 자연 상태를 예로 들면 우주 간 만물의 생장 발전과 변화는 모두 기의 운동을 의미한다.
앤디가 지금 하고 있는 동공 수련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기의 운동을 거들어 스스로의 변화를 느끼기 위함인 것이다.
수련이 깊어질수록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 이질적인 기운.
조금만 더 다가서면 다가올 듯도 한데….
저 기운이 뭔가 자신에게 알려 줄 것 같았다. 과거에서조차 깨닫지 못했던 어떤 경지를 보여 줄 것 같다는 감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이 정도 발전 속도로도 빠르며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목표가 생긴 탓이다.
바로 탈리온 공작이 앤디의 힘에 대한 목마름을 자극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후우우!”
앤디가 수련을 마치고 깊은 호흡을 들이 마시고 내쉬었다. 그제야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한 걸음 다가섰다.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다가서던 집사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앤디의 정교한 근육이 드러난 피부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가벼운 호흡과 작은 움직임에도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근섬유 하나하나가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절로 탄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를 보니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름답다.’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과도 같았다.
처음에 앤디의 수련을 봤을 때는 무슨 수련이 저렇게 시시한가 싶었다.
검을 들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수 시간을 버틴다. 정확히 말하면 움직이긴 움직이는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수련이 끝났을 때 보면 한 걸음 정도 나아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끝나고 나서 보면 항상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걸음 옮기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더 이상 파고들어가지 않았다. 의문은 의문이고 궁금하긴 했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자신의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앤디는 웃는 표정으로 집사가 건네는 수건을 받고 땀을 닦았다.
“목욕 준비를 마쳤습니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죠?”
“목욕을 마치고 나오시면 식사가 준비되어 나올 것입니다.”
“부모님은 오늘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사냥을 나가셨다 조금 전 들어오셨고, 마님께서는 친구 분들과 다과를 즐기셨습니다.”
“오늘 제가 확인할 문건은?”
“모두 정리하여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까?”
“큰 사건은 없습니다만, 눈여겨보실 만한 내용은 모두 정리하여 문건과 함께 올려두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대화가 끝났을 때 정확히 목욕탕 앞에 도착했다.
“탕 안에서 서류를 검토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은 조금 혼자 있고 싶군요. 생각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집사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일이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앤디는 휘적휘적 욕실 문을 열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물이 전신을 포근히 감싸자, 오늘 하루 품었던 피로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깊은 심호흡을 하며 몸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노곤함에 눈이 감겼다.
앤디는 그 노곤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늘 수련을 하며 느낀 것을 다시 한 번 복습하듯 떠올렸다.
3
“내가 자네들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라도 있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떠나려 하는가?”
프린지 영주의 말에 루슬란이 대답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루슬란이 말끝을 흐렸다. 할 말은 있지만, 그것이 프린지 영주에게 어떻게 들릴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루슬란의 마음을 알았던 것인가?
프린지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납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하면 알겠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사실 자네들은 충분히 해주었네. 계약 기간도 예전에 끝났고, 지금 남아달라고 부탁한 것도 내 미련이 가져온 욕심이었지.”
“아닙니다.”
일행들이 송구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푸근한 미소로 바라보던 프린지 영주가 마무리를 지었다.
“괜찮네.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프린지 영지를 벗어난 쉐리와 렐리, 클라우저와 루슬란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2년이 넘도록 있던 곳을 떠나는 것인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왜? 돌아가고 싶어?”
렐리의 물음에 클라우저가 어깨를 으쓱였다.
“훗! 그럴 리가 없잖아요.”
“편하긴 편했지.”
“뭐, 그렇긴 하지만 좀이 쑤셔서 말이지.”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로 갈까?”
“우선 가까운 마을로 가서 용병 길드에 일거리가 있는지 찾아보자.”
그때, 클라우저가 동료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왜?”
“흠… 아직 목적지를 잡지 못했잖아요. 그럼… 거긴 어때요?”
“거기?”
클라우저의 말에 동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서로의 시선을 맞추고 눈을 반짝였다.
“아! 거기!”
클라우저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머뭇거리던 일행들이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앤디는 왠지 모를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집사가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영주님? 몸이 안 좋으십니까?”
“흠… 그런 건 아니고 갑자기 소름이 돋는군요.”
앤디의 말에 집사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구석에 있는 창이 슬쩍 열려서 바람에 덜컹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찬바람 때문인 것 같습니다.”
“흠….”
앤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화불침의 경지인 자신이 찬바람에 소름이 돋을 일은 없다.
하지만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할 말이 무엇입니까?”
앤디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영지 수색과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말콤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영지 근교 산맥에서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발견되었습니다.”
“몬스터?”
앤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그렇습니다.”
그의 머릿속으로 안드레이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군대처럼 체계화된 그들의 움직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바론 산맥으로 둘러싸인 헤르만 왕국의 영지는 안전 지역에서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도 함께 떠올랐다.
몬스터들이 험난한 산맥을 타고 다니기 때문에, 바론 산맥을 통해 헤르만 영토를 침범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몬스터들의 거리는?”
“이곳과 이틀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렇게 가깝단 말입니까? 그동안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터라….”
앤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들의 침략에 대처를 해야겠군요. 몬스터들의 수는 어떻게 됩니까?”
“대략 2천 마리 정도로 추산됩니다. 확인된 중, 대형 몬스터들의 수만 해도 1천6백 마리 이상이었습니다.”
“2천 마리! 그들의 이동 경로는 파악이 되었습니까?”
“저… 그게… 그것이….”
“편하게 말을 하십시오.”
앤디의 말에 말콤이 송구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움직임이 체계적이지 못해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떠나서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애매한 구석이라고요?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말콤이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곳 영지를 목적으로 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으로 침범하려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요?”
“예.”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그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직접 본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 쫓긴다구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명쾌한 답이 없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저희가 판단하기에는 그렇게밖에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지금까지 내려온 몬스터 부대에 대한 보고와 너무 다릅니다.”
“어떤 면이 다릅니까?”
“보고에 의하면 몬스터 부대는 최대한 집결하여 신속하게 이동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각개 분산하여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근처 영지에 자신들이 왔다는 것을 선전포고라도 하는 것처럼, 지나쳐 가는 근처의 모든 마을을 습격하는 것으로 전해진 것과 달리 이번에는 그러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충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주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하여 먼저 대응을 하다 입은 피해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몬스터 부대의 습격으로 인한 근교의 주민들 피해가 거의 없단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들의 행동 양식과 확실히 다르긴 하군요.”
“….”
앤디가 한참 고심하다가 말문을 이었다.
“그 말은 몬스터들이 일부러 인간과의 최소한의 충돌도 피해서 돌아갔다는 말입니까?”
“돌아서 갔다고 말하긴 뭐하지만, 피해를 입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바 확실한 것 같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저 혼자 어떻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군요. 긴급회의를 소집해야겠습니다.”
“충.”
“수고했습니다. 우선은 나가보십시오.”
한데, 말콤이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앤디가 의아한 시선으로 말을 건넸다.
“왜 그러십니까? 제게 더 말할 것이 있는 것 같군요. 할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그러자 말콤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피해를 보고한 각 마을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말입니까?”
“자신들과 충돌한 몬스터들의 행동이 이상했다고 말입니다.”
“몬스터들의 행동이 이상했다고요? 어디가 말인가요?”
“마치 겁에 잔뜩 질려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을 죽이려는 몸짓이 아니라 자신들이 막아섰기에 대응하는 것 같았으며, 한시라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고 말을 했습니다.”
“겁에 질려 있다고요? 몬스터가? 말콤 경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앤디의 물음에 말콤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제가 목격한 것도 있고 해서 그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유는요?”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해치는 것보다 자리를 벗어나는 데 열중하여 자신들이 살아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앤디의 표정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딱히 뭐라 설명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황당하다.’ 이런 느낌이었다.
설명하고 있는 말콤의 표정도 앤디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알겠습니다. 나가보십시오.”
“충! 수고하십시오!”
말콤이 밖에 나가자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겁에 질려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