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30화 (43/68)

제10장. 불청객

1

“이곳인가?”

한 낯선 사내가 앤디의 저택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까지 감았다.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가 그 모습이 의아해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 그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이곳이 앤디 드 카르미온 백작의 집이 맞는가?”

자연스러운 하대에 병사는 귀족이겠거니 했다.

“분명히 우리 헤르만 왕국의 자랑이신 앤디 드 카르미온 백작님의 저택이지요.”

그 말에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씨익.

“잘 찾아왔군.”

앤디는 오랜만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한 사내가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앤디가 인상을 구겼다. 누군가 행패를 부리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만나겠다고 저러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았기에 이번에도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앤디의 전신이 섬뜩해졌다. 어떤 기파가 이곳 저택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앤디는 다급하게 검을 챙겨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한 사내가 저택의 대로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주위로 사병들이 두려운 모습으로 주춤거리며 원을 그린 채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앤디는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사내를 주시했다. 그러면서 사병들에게 뒤로 물러서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사병들이 안도의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하나둘 물러났다.

그때, 사내가 앤디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자네인가?”

“누구십니까?”

“자네가 앤디인가?”

“제 이름이 앤디인 것은 확실합니다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내는 앤디의 물음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질문을 더 이어나갔다.

그는 완전한 마이페이스였다.

“헤르만 왕국의 최연소 마스터라는 그가 확실한가?”

“제가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앤디는 누구냐고 묻는 것을 포기했다. 질문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사내가 갑자기 검을 뽑더니 혼잣말을 꺼내듯이 말했다.

“뭐, 직접 검을 맞대면 알 수 있겠지.”

스릉!

사내의 검이 은빛 광채를 자랑했다.

순간, 사내의 검이 엄청난 속도로 찔러 들어왔다. 앤디는 다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헙!”

챙!

앤디의 검이 반원을 그리며 사내의 검을 막아냈다.

찔러 들어오기 전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사내라면 이 정도는 가볍게 막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럼 다시 가보겠네.”

슈슛!

가벼운 손속.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다르게 사내의 검이 날아들며 생기는 물리적 파장을 보건대, 맞부딪쳐서 공방을 벌인다면 전혀 가볍지 않은 상황이 형성될 것임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앤디는 이번에도 검을 살짝 흘렸다. 그리고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켜 순식간에 사내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사내가 가볍게 몸을 피했다. 앤디는 끈질기게 쫓아 검극을 쏘았다.

사내의 검에도 오러가 맺히더니, 그 검극에서 쏘아지는 오러를 파쇄했다.

앤디는 지금 상황에 의문이 많았지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저 사내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앤디는 더 이상 잡념을 지우고 전투에 집중하고자 마음먹었다.

순간 마음에 검이 일었다. 그때 희한하게도 사내의 눈에서 이채가 띠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앤디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이번에 연속기를 선보였다. 십수 개의 검이 작은 틈도 없이 앤디를 향해 날아왔다.

앤디는 저 검이 모두 진검이라 확신했다. 환영이나 눈속임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살기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억울한 듯 혀를 차며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치잇!”

차창! 챙!

앤디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똥을 튀기며 자신이 있던 자리를 가르고 있는 사내의 검을 볼 수 있었다.

전율이 흘렀다. 죽을 뻔했던 그 순간이 뇌리를 자극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짜릿한 쾌감이 일어났다.

“이거 슬슬 재밌어지는데?”

사내가 그 말에 대답했다.

“나 역시.”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앤디와 사내에게 문답은 필요 없었다. 좋은 검 놔두고 떠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앤디의 검에 맺힌 오러의 빛이 서서히 짙어졌다. 앤디가 그만큼 현 전투에 신경을 쏟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러 자체도 위험하지만, 정제된 오러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실력이 엇비슷한 상대끼리 검을 맞대며 맞붙는 경우에 말이다.

후웅!

앤디가 정제된 오러의 검을 휘두르자 공명을 일으키며 공기가 진동했다.

사내가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공기의 진동을 느낀 피부에 닭살이 올랐다.

앤디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지금까지 잊고 있던 전투의 즐거움이 떠올랐다.

손맛! 그래, 손맛이라고 해야 할까?

후웅! 후웅!

검이 대기를 갈랐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손속.

하지만 화가 치밀 정도로 사내는 앤디의 공격을 속속들이 피해냈다.

물론 앤디도 사내의 공격을 피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조금 짜증이 났다.

공수가 한 번씩 진행될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서로 힘을 아끼고 있다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도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비등한 능력이라 해도 이건 너무 매끄러운 공방이었다. 마치 합을 맞춘 것과 같은 공방 말이다.

앤디 자신은 지금 상당한 힘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거의 80퍼센트 이상.

그런데도 저 사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저 상대가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다시금 앤디의 의문에 불꽃이 튀었다.

‘누구지? 대체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지? 이 대륙에 이런 존재가 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의문은 길어질 수 없었다. 사내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공격은 지금까지 공격의 연장선상과도 같았다. 아니, 약간 변화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변화는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앤디의 마음에 조급함이 들어섰다. 아무리 공략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사내에게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앤디의 검이 조금 더 강렬하게 뻗어졌다. 그 결과 사내가 수세에 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상황은 눈에 보이는 것과 조금 달랐다. 오히려 앤디의 거친 검의 흐름이 사내에게 더욱더 여유를 주었다.

앤디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앤디의 흥분이 눈앞에 작은 장막을 친 탓이다.

그때, 사내의 검이 뱀처럼 앤디의 틈을 파고들어 손등을 후려쳤다.

앤디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목이 말라왔다.

“대, 대체….”

“이유가 뭐냐고?”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 멀었군. 내가 너무 서두른 모양이야. 쯧!”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화가 치미는 앤디였다.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에게 실망감을 안겨 준 모양이군.”

앤디의 검극에 엄청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간, 사내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 검극을 주시했다.

“미안해서 조금 힘을 써보려고.”

앤디의 검극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러가 한계점까지 뭉쳤다는 뜻이었다.

그 주위의 공간이 힘의 영향을 받아 일그러졌다.

후우웅!

파팟!

사내가 앤디의 몸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지만, 앤디의 몸은 이미 사내의 등 뒤를 점하고 있었다.

순간 이동이 아니었다. 스피드였다.

눈이 좇아갈 수 없을 속도.

바로 완벽한 이형환위였다.

2

사내는 앤디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막은 게 막은 것이 아니었다. 그 검이 가져다주는 충격파에 내장이 진탕되는 기분이 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사내가 말했다.

“그래. 이래야 기대한 보람이 있지.”

사내의 주위에 여러 개의 푸른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사내의 주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오러 덩어리였다. 검을 벗어나 허공에 오러를 맺은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일대일 전투에서는 효과가 큰 편이지. 기술의 이름은 오러 그랜드 노바라고 하네.”

사내의 말에 앤디가 바짝 긴장했다.

곧 앤디를 향해 오러들이 쏘아졌다. 앤디는 검으로 오러를 쳐냈다.

쾅! 쾅! 쾅!

대기가 쩌렁쩌렁 울리는 강력한 파괴력.

오러가 부서지며 일어나는 충격파 자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앤디의 정원이 모두 뒤집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앤디는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판단을 할 틈도 없었다.

막아도 충격이 오고, 그렇다고 막지 않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정말이지 큰 충격이었다.

자신이 움직이면 이미 그곳에 오러 덩어리가 자리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방어를 하다 보니 체력이 서서히 떨어졌다.

앤디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대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몇 개의 공격을 무시하고 타격을 가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겠다는 뜻이다.

“하앗!”

앤디가 일갈을 터트리며 사내에게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사내가 오러 덩어리를 이용해 앤디를 농락하려 했지만, 앤디는 오러 공격을 그대로 허용하고 검을 휘둘렀다.

사내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사내가 오러를 모아 앤디의 검을 막는 데 소모했다.

앤디의 이번 작전이 통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 또한 알아냈다. 사내가 저 오러 덩어리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눈속임도 불가능하고, 저 오러 덩어리가 사내의 공격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무서운 것이지, 눈에 보이는 적은 두렵지 않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앤디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사내는 앤디의 공격을 막고 피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왜, 겁나나 보지? 지금까지처럼 까불어 보시지 그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앤디는 시야가 어두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뭐, 뭐지?”

전신을 몰아치는 살기에 앤디는 양팔을 양극으로 휘둘러 원을 만들었다.

그때 원을 만들던 그의 팔에 이질적인 뭔가가 걸렸다.

앤디는 자연스럽게 원을 완성하고 힘을 풀었다. 그러자 시야가 원상태로 돌아오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내의 발이 앤디의 안면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 기운이 너무나 폭발적이어서 잠시 앤디의 시각을 흔들었던 것이다.

태극의 기운으로 그 힘을 흘려보내지 않았다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이거 오길 정말 잘한 것 같군.”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반갑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앤디의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둘은 다시 격돌을 준비하고 바닥을 박찼다.

앤디의 신형이 마치 시위를 벗어난 활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궁신탄영의 묘였다.

쭈욱 늘어지는 듯한 잔영을 남긴 두 사람은 엄청난 속도로 치고받았다.

파칭! 파칭! 칭칭칭칭!

검풍의 영향 탓에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작은 흙먼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쐐애애액! 츠츠츠츠츳!

엄청난 마나의 폭풍.

주위에서 앤디와 사내의 전투를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고, 눈앞에서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의 전투로 인해 터진 진공파에 이미 저택의 정원은 진흙탕이 된 지 오래였다.

사방에서 불꽃 기둥이 터져 나오고, 빛줄기가 번쩍번쩍하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앤디와 사내의 모습은 거의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다시 큰 굉음이 터지더니, 2개의 그림자가 빛 속에서 튕겨져 나왔다.

인위적인 폭풍과 그 사이에 비치는 섬광들.

밖에서 보는 것은 그게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사내와 앤디는 한순간 한순간이 죽음과 대면하는 끔찍한 순간이었다.

사내의 검이 교묘하게 틀리고, 앤디의 검을 기다렸다. 앤디가 검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이 뒷발로 올려 찼다.

앤디는 상체를 최대한 뒤로 틀어서 공격을 피했다. 발길질을 피한 것이 아니다. 두 번째로 이어지는 검날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내의 검이 허공을 스쳤다. 아쉽다는 듯이 바람 가르는 소리만 허무하게 들렸다.

타닷!

“대단하군.”

“당신이야말로.”

“나는 원래 대단한 걸 알아.”

그 말투를 듣자 앤디는 왠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치 스승인 안드레이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사내의 검이 더욱 빨라졌다. 이번에는 마흔여덟 번의 변화를 보이며 앤디의 전신을 공략했다.

앤디는 전력을 다해 오러를 뿜어내며 사내의 검을 막았다.

사내의 마흔여덟 번의 변화가 한 점에 모여 앤디의 검과 충돌했다.

콰과과과광!

‘크흐흑!’

앤디는 전신이 넝마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미약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천외천이라고 했던가?

하늘 위에 하늘이 있었던 것이다.

앤디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내가 검을 슬쩍 갈무리하며 말을 걸었다.

“더 할 만한가?”

“물론.”

앤디의 검극에 다시 붉은빛이 응집된다 싶더니, 사내의 목덜미를 파고들어갔다.

사내는 가슴 철렁한 기분으로 앤디의 공격을 막았다.

믿을 수 없었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덤벼드는 무모함에 질린 것이다.

사내는 지금에야 자신이 생각한 일에서 조금 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공격도 막아보시죠.”

앤디의 검이 폭발적으로 들이닥쳤다.

사내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힘을 더 개방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순간, 사내의 움직임이 앤디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앤디는 맥이 빠졌다. 자신의 공격이 허공을 점했다는 사실을 넘어서, 사내가 아직도 본신의 힘을 모두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

전투를 하다 말고 웃는 앤디의 모습은 왠지 허무해 보였다.

앤디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망설이지 않고 검을 쏘았다.

사내의 검도 같이 쏘아졌다.

쾅! 쾅! 쾅! 쾅!

순식간에 터진 네 번의 충격!

“크흑!”

전신이 으깨질 것만 같은 고통에 앤디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이…!’

비 오듯이 흐르는 땀과 긴장감.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것인가.

앤디는 억울함을 느꼈다. 자신의 본신의 힘을 지니고 있는 상태로 이자와 싸웠어도 이렇게 비참하게 당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도 실력이다.

만일 이대로 죽는다 해도 억울해할 필요가 없었다. 실력이 모자라 패하고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도 자신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수많은 사람을 베어오지 않았던가.

그래도 억울했다.

앤디가 다시 검을 내질렀다.

콰광! 쾅!

또다시 이어진 격돌.

아무런 기교도 없이 날아오는 거대한 힘.

힘과 힘의 대결!

앤디가 그대로 튕겨져 날아갔다.

“크아아악!”

그는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왠지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패한 것은 슬프지만, 이곳의 새로운 검술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과 충돌하려는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자신의 등 뒤에서 받아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 누구?’

앤디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받아들었나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앤디는 곧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을 받아든 사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사내였다. 지금까지 이유도 모른 채 검을 맞대며 상대를 한 사내 말이다.

그 사내가 앤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거 인사가 늦었군. 내 소개를 하지. 나는 탈리온이라고 한다네.”

순간, 앤디의 머릿속에 안드레이와 나눴던 이야기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현 베리오스 대륙의 최강자이자 초인으로 불리는 사나이.

쿠렌트 제국의 탈리온 공작.

복잡하게 꼬여 있던 앤디의 마음이 탁 풀리며 갑자기 유쾌해졌다.

그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크윽! 큭! 크하하! 정말 너무 인사가 늦으셨군요, 탈리온 공작님.”

3

두 사내가 저택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섰다.

사병과 기사들이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서서히 좁히며 다가왔다.

앤디가 숨을 헐떡이면서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제지했다.

“비켜라. 자네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 하지만….”

앤디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저분이 바로 쿠렌트 제국의 탈리온 공작이시다.”

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번쩍하며 번개가 내리쳤다. 엄청난 충격에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반면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도 있게 되었다.

소드마스터인 앤디를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이 대륙에 몇이나 되겠는가.

대륙의 최강자라 불리는 탈리온 공작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엄청난 신위.

앤디도 엄청났지만, 탈리온 공작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지금도 보라. 둘의 능력 차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넝마가 되어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앤디와 다르게,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둘 모두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적국에 태연하게 들어와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는 탈리온 공작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대륙의 최강자라 불리는 사내와 맞서서 이 정도까지 해낸 앤디라는 사내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앤디는 휘청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고 최대한 담담한 모습으로 탈리온 공작을 마주했다.

탈리온 공작은 앤디의 기백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보였다.

앤디가 탈리온 공작에게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이유? 당연히 자네를 만나러 왔지.”

“연락이라도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요.”

“흠! 만일 내가 연락을 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나?”

“지금보다야 평화적인 상황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말에 탈리온 공작이 큭큭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었겠군.”

“그런데 저를 만나실 만한 이유라도 있으셨습니까?”

잠시 앤디를 주시하던 탈리온 공작이 질문과 다른 대답을 했다.

“그런데 여긴 손님이 왔는데 차도 안 주는가?”

앤디는 속으로 ‘칼 들고 설치는 손님은 한 번도 들인 적이 없습니다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입 밖으로 나간 말은 조금 달랐다.

“안으로 드시죠.”

앤디는 피식 웃으며 발길을 저택 안으로 돌렸다.

탈리온 공작이 무슨 생각으로 차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신이 힘들어하고 있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 쥐 생각 하는 건가.’

앤디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탈리온 공작이 그 뒤를 태연하게 따랐다.

저택의 사람들이 모두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을 때 앤디는 괜찮다는 말로 물렀다. 부모님께도 걱정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모두들 앤디의 그 한마디에 정말로 걱정을 끊었다. 뒤집어진 저택 정원을 어떻게 살릴지 고민을 돌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탈리온 공작은 그러한 저택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이들이 얼마나 앤디라는 사내를 믿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앤디가 차를 마시며 조금 편해진 표정으로 탈리온 공작을 마주 보게 되었다.

탈리온 공작은 그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조금 전의 일로 인해 화가 나고 적개심을 가질 만도 한데, 앤디라는 사내가 정말로 자신을 손님으로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나지 않는가?”

“그걸 아시는 분이 다짜고짜 검을 날리십니까?”

앤디가 웃으며 하는 말에 탈리온 공작이 콧잔등을 긁적였다.

“내 성격이 조금 별나서 미안하군.”

“뭐, 괜찮습니다. 죽지는 않았으니까요.”

“좋게 생각하니 고맙군.”

“좋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제가 어쩔 수 있는 분도 아닌데 말입니다.”

앤디의 뼈가 어린 한마디에 탈리온 공작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화가 나 있긴 한 거군.”

“사람인데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냥 체념하는 것이죠.”

농담과 진담이 적당히 섞여 있는 앤디의 말에 탈리온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불만을 이야기해주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구만.”

“그렇게 불안하시면 처음부터 평범하게 오셨으면 되었을 텐데요.”

“미안하구만. 내 성격이 조금 특이해서 말이네.”

앤디는 그 말에 수긍했다.

보통 성격이 아니고서야 초면에 인사 대신 검을 휘두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들이 있긴 하다. 얼굴을 보지도 않고 검을 찔러대고 보는 암살자들 말이다.

“눈앞에 강한 자가 있으면 무조건 붙어봐야 직성이 풀려서 말이네.”

앤디가 차를 들며 말했다.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요?”

“뭐가 말인가?”

“제가 대륙의 최강자라 불리는 탈리온 공작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말로 들려서 말입니다.”

“하하하!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군.”

한참 웃던 두 사람에게서 다시 적막이 흘렀다.

“그런데 어째서 오신 것입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를 보러 온 것이라고.”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나는 지금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네. 강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중이지. 내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스스로 모르다 보니 내가 발전은 하고 있는지, 발전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들고 있다는 말이네.”

앤디는 그 말에 커다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과거 자신이 생각해봤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앤디가 신중한 어투로 물었다.

“혹시 그것에 대한 답은 찾으셨습니까?”

“아직도 못 찾았다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자네를 찾아온 것이지. 대륙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다는 말에 흥분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말이네.”

탈리온 공작은 정말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지금 탈리온 공작의 행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타 왕국에 무단으로 난입하여 전투를 벌였다.

탈리온 공작이 어디 개인인가? 그는 대륙을 아우르는 공인이었다.

누구보다 영향력이 높은 존재다.

막말로 쿠렌트 제국의 황제보다 더 위명이 높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하나하나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타 왕국의 핵심 인물을 처리하기 위한 치사한 행위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쿠렌트 제국은 비난 여론을 피할 수가 없게 되고, 최악의 경우 명분을 빼앗긴 채 전쟁에 돌입하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었다.

탈리온 공작이 개인의 사정으로 왔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 말이다.

하지만 앤디는 그런 것을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우선은 지금 탈리온 공작이 하는 말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탈리온 공작의 경지는 어느 정도인가.’

앤디는 그 사실이 너무나 궁금했다.

조금 전, 자신과의 전투에서 탈리온 공작이 사용한 힘은 본신의 능력의 절반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자신을 상대하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자신이 유운신공을 9성까지 끌어올린 상태에서는 어떤 전투가 될지 궁금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를 만나신 것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실망이라니. 아니라네. 오히려 하나 얻어서 가네.”

앤디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탈리온 공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군. 말해줄 수가 없네. 이것은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 말이지.”

앤디는 탈리온 공작의 대답에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뭐, 어쩔 수 없군요. 그건 그렇고, 목적을 달성하셨으면 이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탈리온 공작이 몸을 앞으로 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네와 할 말이 하나 있다네.”

그때, 누군가가 들어오며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 이야기에 저도 낄까 합니다.”

앤디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막 안으로 들어선 그를 불렀다.

“스승님?”

그는 놀랍게도 안드레이였다.

4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넨가? 반갑구만.”

둘은 간단한 인사로 서로의 친분을 드러냈다.

앤디는 그 둘을 보면서, 탈리온 공작과 대화를 하며 안드레이가 떠올랐던 이유에 대해 조금 추론해볼 수 있었다.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지라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지만 말이다.

“스승님이 여긴 어떻게?”

“내가 너무 늦은 모양이더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정원 꼴을 보니 볼 만했겠더구나. 지금 네 꼴도 그렇고 말이다.”

그제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앤디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만일 보셨다면 참 볼 만했었을 겁니다. 늦게 오셔서 아쉽네요.”

그때 하나 의아한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스승님은 마치 이 상황을 짐작하고 계셨던 것 같네요.”

“맞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느냐.”

“그건 무슨 말이죠?”

“네가 그때 전쟁으로 헤르만 왕국의 영웅으로 부상했을 때 이미 지금 상황은 시간문제에 불과했지.”

“네에?”

“뭘 그렇게 놀라느냐? 지금쯤이면 탈리온 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을 텐데.”

앤디는 욱했다.

“지금이야 그렇지, 조금 전까지는 몰랐다고요!”

“그건 당연하지. 어떻게 만나지도 않고 알 수 있겠느냐.”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런 상황을 짐작했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든지 말입니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게요!”

“그건 좀 미안하다. 내가 깜빡했다.”

말과 달리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앤디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앓느니 죽겠단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이미 지나간 문제보다 안드레이가 어째서 이곳까지 먼 행차를 했는지에 대해 더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앤디가 입을 다물자 탈리온 공작과 안드레이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군.”

“탈리온 님도 건강해 보이십니다. 아니, 더 젊어지신 것 같군요.”

“몇 년 만이지?”

“이십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대충 이십오 년은 된 것 같군요.”

안드레이의 말에 탈리온 공작이 감상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시간이 정말 빨리도 갔구만.”

“그렇군요. 어느덧 이렇게 되었군요.”

둘은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을 회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앤디는 이대로 있다간 이 궁상맞은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몰랐기에 입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타이밍도 좋게 오셨네요. 탈리온 공작님이 스승님께 말을 하고 온 것도 아닐 텐데요.”

안드레이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해주었다.

“전에 보낸 기사들에게 언질을 했었지. 그들에게 연락이 오자마자 하던 일을 정리하고 순간 이동 마법으로 온 거다.”

앤디의 이마에 힘줄이 올라섰다.

자신에게는 언질도 안 했으면서 기사들에게는 말을 해놨다는 사실이 짜증난 것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아까 끝난 문제를 다시 꺼내서 이야기를 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오신 거죠?”

“탈리온 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다.”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

탈리온 공작의 물음에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게 뭔가?”

“바로 이것입니다.”

안드레이가 건네는 서류를 받은 탈리온 공작이 신중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그사이에 앤디는 고개를 내밀어 그 서류를 같이 보았다. 앤디의 표정도 함께 굳어졌다.

“이것은….”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탈리온 님도 이것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모습이군요.”

탈리온 공작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안드레이는 그 무반응을 긍정의 뜻으로 해석했다.

탈리온 공작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서류에 해터슨과 다른 몇몇 사람들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앤디는 해터슨의 초상화를 들어올렸다. 이 한 장으로 짐작이 갔다. 아마도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다 해터슨과 같은 존재일 거라는 것이다.

앤디는 지금 안드레이가 가져온 사안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탈리온 공작이 있는 곳에서 이러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앤디의 그런 의문을 해결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탈리온 공작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나에게 묻는 건가?”

그것은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안드레이에게 진의 여부를 묻는 것 같았다.

“제가 쿠렌트 제국의 사정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탈리온 님을 뵙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직접 탈리온 님을 만나뵈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나를 기다렸다는 말이었군.”

“제 말이 그렇게 들리셔서 탈리온 님을 언짢게 만들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맞습니다.”

안드레이의 당당한 눈빛을 받으며 탈리온 공작이 씨익 웃었다.

“역시 자네는 변하지 않았군. 그래, 물어보게. 내가 대답해줄 수 있는 선까지는 모두 대답해주겠네.”

“감사합니다.”

안드레이도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이 사안들과 쿠렌트 제국이 연관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안드레이의 물음에 탈리온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없네.”

“아, 다행입니다. 그럼 저는 하던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드레이는 더 파고들며 질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급한 일이 있어서 간단다.

앤디는 안드레이의 그 모습에 기가 막혔다.

탈리온 공작의 그 말을 100퍼센트 믿고 받아들이는 모습이지 않는가.

마치 탈리온 공작이 빨간색을 파란색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 보였다.

앤디가 방 밖을 나서려는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그 질문이 끝이에요?”

“그래.”

“그 질문 하나 때문에 왕국에서 여기까지 단숨에 날아왔다고요?”

“맞다.”

“그런데 그 한마디 듣고 그냥 가는 거예요? 저분이 거짓… 흠흠!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진의 여부를 파악도 하지 않고요?”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탈리온 공작은 앤디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안드레이가 앤디의 의문을 해결해주고자 말문을 열었다.

“내가 세상에서 믿는 것이 있다면 바로 시간과 탈리온 님이다.”

“….”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탈리온 님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모르고 있는 문제면 모르겠지만, 알고 있는 사실을 대답하지 않을지언정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시는 거죠?”

“그게 저분의 강함의 이유니까.”

“아….”

앤디는 다시 한 번 납득하고 말았다.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탈리온은 자신의 힘을 믿기에 그 어떤 말에도 책임을 질 수 있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더 질문이 없다면 나는 이만 가보마. 시간이 나면 좀 찾아오거라.”

그 말을 남기며 다시 등을 돌리는 안드레이를 향해 탈리온 공작이 입을 열었다.

“잠시만. 나도 할 이야기가 있네.”

안드레이와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는데, 자네도 같이 들어야 할 것 같구만.”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자네가 가져온 저것의 이야기의 연장선상이라네.”

안드레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사실 저 친구를 만나서 검사로서 의견을 물을 생각이었네.”

앤디가 질문했다.

“어떤 의견입니까?”

“이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네.”

탈리온 공작이 품 안에서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놀랍게도 그 서류에서 나온 것들은 지금 안드레이가 가져와 탈리온 공작에게 보여 준 것과 같은 성향의 내용이었다.

앤디와 안드레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류에서 탈리온 공작의 얼굴로 시선을 이동시켰다.

마치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탈리온 공작이 대답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안드레이 자네가 가져온 서류를 보고 놀랐다네.”

“그러실 만도 하군요.”

“우리들도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네. 갑자기 등장한 마스터급의 고수들. 그 수는 최소 서른 명이네. 관심이 없다면 말이 안 되지.”

“….”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정도의 존재라면, 이미 그 전부터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을 것이라네. 그런데 이들은 갑자기 나타났어.”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땅에서 솟은 것일까? 갑자기 팟! 하고 나타났을 리는 없지 않는가.”

안드레이가 탈리온 공작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목적을 알 수 없는 짓을 하고 있지요.”

“그렇다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봤을 때 목적이 없다고 볼 수도 없어. 뭔가 이유가 있음이지.”

“흐음….”

그때 앤디가 물었다.

“그런데 저에게 질문하실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물음에 탈리온 공작이 눈을 번뜩이며 앤디를 스캔이라도 하듯 주시했다.

“자네도 내가 봤을 때는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케이스 중 하나이지.”

“아!”

그 말을 듣고 보니 탈리온 공작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무엇보다 자네는 젊네. 내가 알고 있기에 이제 겨우 스물세 살. 한데, 경지는 내가 이십오 년 전에 도달한 경지를 뛰어넘은 상태라네.”

뒷말인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겠는가?’라는 의문사를 듣지 않았음에도 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안드레이도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내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괜히 정확하지도 않은 반응으로 탈리온 공작에게 오해를 살 만한 모습을 보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앤디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어떻게 해석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다 제가 잘나고 천재라서 그런 것을 말입니다.”

탈리온 공작과 안드레이가 순간 빵! 하고 터졌다.

“파핫핫핫핫!”

“크하하하하!”

둘이 정신없이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웃어댔는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힐 정도였다.

한참이 지나고, 둘이 안정을 찾고 차를 한 잔 마신 후에야 다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분위기는 처음에 비해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긴 천재라서 그런 것이었구만.”

“왜요? 제가 천재라는 사실이 억울하십니까?”

그 말에 탈리온 공작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것은 아니네. 다만….”

탈리온 공작의 시선이 안드레이를 향했다.

“역시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저 친구는 자네의 제자가 아니었군.”

안드레이는 탈리온 공작의 빠른 눈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사이에도 자신의 반응을 모두 관찰하고 파악했던 것이다.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앤디는 제 제자가 확실합니다.”

탈리온 공작이 예상외의 대답을 듣고는 놀란 시선을 안드레이에게 던졌다.

“아, 그런가? 이거 미안하군. 내 지레짐작으로 자네들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 같군.”

“괜찮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마법사가 아닌가? 그런 자네가 어떻게 저런 검사를 키웠다는 말인가?”

안드레이가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앤디가 제 제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검술을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스스로 저 위치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탈리온 공작이 경악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이로군.”

앤디를 바라보는 탈리온 공작의 시선이 변해 있었다. 마치 괴물이라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앤디는 조금 기분이 애매했다.

‘누가 누구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탈리온 공작이 이번에는 앤디에게 질문했다.

“자네는 그 검술들을 어떻게 익혔나?”

“흠! 설명하기 조금 애매하군요.”

앤디가 말 그대로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탈리온 공작이 초상화를 앤디의 앞에 펼치면서 말했다.

“자네가 익힌 검술이 이자들과 관계가 있는가?”

앤디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앤디의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보고 탈리온 공작은 한숨을 흘렸다. 앤디에 대한 의문을 접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초상화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의문은 깊어져 갔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자들이란 말인가. 이 친구처럼 모두가 천재일 리는 없지 않는가.”

그때, 앤디의 머릿속에 한 가지 놓치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음? 뭔가 알고 있는가?”

“그 단약….”

앤디의 말에 탈리온 공작과 안드레이가 동시에 의문을 터트렸다.

“단약?”

검황의 이름으로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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