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먹거나, 혹은 먹히거나
1
카레오 시와 가까운 라이오넬 평야 지역으로 양국의 주력 부대가 모여들었다. 양쪽 모두 국가의 사활이 걸려 있는지라 필사적이었다.
양쪽 군대는 약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미드로 왕국이 10만의 병력을 확보했고, 헤르만 왕국은 현재 12만의 병력이 집결했다.
모두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상대 진영을 감시하는 데 약간의 소홀함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병력의 보충이 생기면 과장하고, 상대를 폄하하며 자군의 기세를 높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초반의 전투는 병력의 수로 되는 것이 아니다. 기세의 싸움인 것이다.
멀리 동이 트고, 새벽이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양군의 병력이 이동했다.
헤르만 왕국의 경우 중갑 보병이 정 가운데에서 이동했다. 그 좌우 날개로 일반 보병과 용병대가 자리했으며, 그들의 뒤편으로 경갑 보병이 자리했다. 가장 뒤쪽에는 기병과 중갑 기병이 자리했는데, 언제든지 위험한 곳을 지원하기 위한 위치를 잡기 위해서였다.
이런 넓은 평야에서는 계략이 거의 불가능하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교과서적인 공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미드로 왕국도 헤르만 왕국의 진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힘과 힘의 싸움이라는 말이다.
“이번에 밀리면 바로 전멸인가. 이번 전투로 모든 상황이 판가름 나겠군.”
미드로 왕국의 총지휘권을 받아든 펜더슨 후작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저쪽 병력의 움직임이 이상하군. 마치 일부러 공격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아. 무슨 일이지? 총 병력의 수가 우리보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 아니면 어떤 계책이라도 꾸미는 것인가?”
펜더슨 후작을 보좌하고 있던 보조 군사 트라비엔이 대답했다.
“제가 봐도 수상합니다.”
“우리 기사단은 모두 어디에 대기하고 있나?”
트라비엔이 병력의 이동 진형 모형의 위치를 직접 손가락으로 점하며 답했다.
“잠시 후 전쟁의 접전 지대에 돌입하기 위해 이곳과 이곳에 대기 중입니다.”
“애매하군.”
“그럼 우선 전쟁 후에 투입할 기사단을 선투입해서 저들의 반응을 살펴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건 위험해. 지금 병력의 싸움이 되어버렸지만, 나중에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기사가 꼭 필요해. 더군다나 저번의 패배로 우리 측 기사단의 전력이 현저하게 떨어졌어. 이런 상황에서 다시 기사를 잃을 만한 도박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 그 전투에서 패하지만 않았어도….”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상황을 지켜본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음에도 적군의 기사단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재빨리 기사단을 중앙부에 위치한 중갑 보병이 있는 곳으로 투입하여 공략한다. 그 시간이 길어서는 안 된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병력을 뒤로 빼야 하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미드로 왕국의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적들은 저 멀리 보이는데, 대지가 거대한 굉음을 내며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했다.
쿵! 쿵! 쿵! 쿵!
거대한 발 굴림 소리.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땅이 울렁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하는 대지.
헤르만 왕국의 병력이 이동하는 걸음걸음이 전신을 자극했다. 전설 속의 거인족들이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있다가 저들이 자신들을 그대로 밟고 지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속에서 구역질이 솟구칠 것 같았다. 저들의 함성과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은 소음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등 뒤는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며 창백해진 얼굴. 자신들도 모르게 무기를 꼬옥 꼬나 쥐었다.
자신들이 뚫리면 저들은 가족과 형제를 짓밟을 것이다.
지평선을 가득히 메운 저들의 엄청난 병력. 거리는 약 2킬로미터 정도.
기가 질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부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의 병력이 더 우세하다고.
그럼에도 두려웠다.
뿌우우우우우우!
둥둥둥둥둥!
진군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와 북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때, 헤르만 왕국의 병력이 우뚝 멈춰 섰다.
서로의 거리는 이제 약 1킬로미터 정도 남았다. 한순간에 좁혀질 수 있는 거리였다.
저들이 보이는 작은 움직임이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미드로 왕국의 궁수와 마법사들이 배치되어 적들을 향해 조준했다.
바로 그때, 헤르만 왕국의 병영에서도 마법사와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정거리는 어느덧 5백 미터 정도.
곧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격하라!”
분명히 그리 말했다. 궁수들과 마법사들이 공격을 퍼붓기에 자신들의 착각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자신들 쪽으로 밀려들어오는 화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어두워졌다는 착각이 일었다.
푸슈슈슈슛슛!
푸부부부북!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라가던 화살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소나기처럼 내려쳤다.
주위에서 펑펑거리며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마법들이 터지는 것이리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니 자신의 주위에 포진해 있었던 동료들이 모두 눈을 까뒤집고 죽어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다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돌격하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뛰었다. 병사는 자신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바닥에 물컹한 것이 밟혔다. 동료의 시체를 밟은 모양이었다. 휘청거렸다. 자칫하다가 넘어질 뻔했다.
그 말은 죽을 뻔했다는 뜻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한 번 쓰러지면 일어날 수가 없다. 뒤에서 치고 나오는 동료 병사들에게 밟혀 죽을 테니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서 달려들었다.
뒤쪽에서는 마법들이 쏘아졌다. 그리고 화염 마법들이 작렬했다.
“파이어볼!”
수백 개의 불덩어리가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퍼버버버벙!
화르르르르륵!
불공이 터지며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 화염 사이를 뚫고 완전 무장한 플레이트 중갑을 걸친 중갑 보병이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적의 사신인 양 자신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베어나갔다.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갈 뿐이었다.
마치 볏단처럼 자신을 쓰러트리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 연상될 지경이었다.
병사는 맥없이 적의 검이 날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자신의 양옆을 뚫고 미드로 왕국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기사단이 영웅처럼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자 무적처럼 보이던 중갑 보병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병사는 살았다는 생각에 환희를 느꼈다.
슈우욱!
푸푹!
헤르만 왕국에서 날아온 화살이 이마를 뚫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러했었다.
2
미드로 기사단은 순식간에 헤르만 왕국의 중갑 보병을 쓰러트렸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헤르만 왕국의 이글스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드로 기사단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제길! 이것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이지! 모두 밀집대형을 갖춰라!”
하지만 이미 1백여 명의 기사들이 기습에 밀려 죽임을 당한 후였다.
두두두두두!
미드로 기사단과 이글스 기사단이 부딪쳤다.
검과 검, 방패와 방패가 충돌하며 거친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춤을 추었다.
차창! 창창창!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검이 적군의 심장을 뚫었다.
서걱! 푸슉!
피칠갑이 된 그들이 살기 위해 바동거렸다.
그때 형형색색의 오러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그것은 살육의 시작을 알리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었다.
서걱! 서걱!
갑옷도 필요 없었다. 오러가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같은 오러뿐이었다.
차창! 창!
“으윽!”
푸푹! 퍼퍼퍽!
난전 속에서 헤르만 왕국의 한 기사가 심장에 찔린 검을 부여잡고 입가에서 핏줄기를 흘리며,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찌른 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단숨에 미드로 왕국 기사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억!
미드로 왕국 기사의 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단말마의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목이 잘린 그는, 바닥에 떨어지기 전까지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헤르만 왕국의 기사는 그 머리를 발로 짓밟고 분을 토하던 와중, 등 뒤에서 창을 찌르는 병사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런 난전 속에서 양군은 누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두 병력은 서로 비등한 양상을 띠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누가 먼저 지치는지가 이번 승부의 관건이 될 것 같았다.
그때, 한 사내의 등장으로 그 승세의 균형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앤디 경이다!”
앤디가 어디서 전투를 하다가 왔는지 전신이 피로 물든 채, 검을 들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기사들 틈으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앤디는 검을 횡으로 그으며 자신의 위치를 점했다. 그리고 헤르만 기사들을 최대한 배려하며 자신의 신형을 앞으로 쏘았다.
순간 돌풍이 일었다.
휘오오오오!
아니, 그렇게 느껴졌던 것뿐인가?
바람이 끝났다고 깨닫는 순간, 미드로 왕국의 기사들의 몸이 이상하게 휘청거렸다.
쩌저저저적!
“어? 어라?”
“이게 대체 무슨!”
그리고 그의 근처에 있던 미드로 왕국의 병사들과 기사들의 몸에 균열이 생겼다.
“커, 커허허허헉!”
“크허헉!”
상, 하체가 분리된 그들은 떨어진 상체와 달리 아직도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신의 하체를 올려다보며 공포에 비명을 지르다가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앤디의 오러가 화려한 선을 남기며 다시 한 번 이동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조용하지 않았다. 앤디의 검과 닿은 쇠붙이 종류의 것들이 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퍼펑! 퍼버벙!
콰과광!
“크아아아아악!”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된 시신이 바닥에 즐비하게 널렸다.
앤디의 모습은 사신과 같았다.
미드로 왕국의 기사와 병사 모두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 틈을 노리고 헤르만 왕국의 기사단이 다시 돌격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미드로 왕국의 병사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헤르만 왕국의 기사단과 병사들은 거침없이 검과 창, 둔기를 휘두르며 적들을 섬멸했다.
결국 미드로 왕국의 기사단이 250명만이 살아남은 상태에서 퇴군을 시도했고, 헤르만 왕국의 이글스 기사단이 그 뒤를 쫓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쫓아 들어가지는 않았다. 기사들을 하나 잡는 것보다 본진에 남아서 병사들과 함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병은 놔둬서 수프 끓여 먹을 일 있나? 기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쫓아갔다.
앤디가 외쳤다.
“아직 깊이 들어가지 마라! 최대한 자신의 몸을 보호하라!”
시끄러운 전장이었지만, 앤디의 목소리는 희한할 정도로 주위의 병사들의 고막에 또박또박 틀어박혔다.
앤디는 다시 혼전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구도 앤디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앤디의 모습이 보이기 무섭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금이군.”
전장을 지켜보고 있던 안드레이가 한 기사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지시를 받은 기사가 노란 깃발을 들어올렸다.
뿌뿌! 뿌우우! 뿌우우!
순간 뿔피리가 전장을 크게 울렸고,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헤르만 왕국의 좌우 측면에서 엄청난 병력의 보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드로 왕국의 병력들은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도 죽을 지경이었는데, 추가 병력이 튀어나왔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했다.
“크악!”
“아아악!”
사방에서 미드로 왕국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이미 패기를 느낀 병사들이 전투에 적극적인 가담을 피하며 벌어진 일이었다.
미드로 왕국의 총지휘관인 펜더슨 후작이 이를 악물며 붉은 기를 들어올렸다.
둥둥! 둥둥둥! 둥둥!
후퇴를 명하는 북소리에 미드로 왕국의 병력이 뒤로 썰물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뒤로 빠져나오는 병력의 수는 절반도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결정타가 터졌다.
“파이어 익스플로전!”
쿠구구구구궁!
헤르만 왕국의 진두 진영에서 엄청난 마법이 폭사하여 퇴군하고 있는 미드로 왕국군의 중심 병력 부분을 직격한 것이다.
파이어 익스플로전.
5서클의 대범위 공격 마법이다.
엄청난 섬광과 동시에 한 지역이 섬멸했다.
마법이 직격한 공간에 살아남은 것은, 아니 그 어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충격파에 죽거나 쓰러진 수많은 병력만이 조금 전 상황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최소 2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다.
놀랍게도 그 대규모 마법을 단 한 사람이 일으켰다. 바로 안드레이였다.
미드로 왕국군은 패닉 상태를 넘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후퇴하는 방향까지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쓰러지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헤르만 왕국군조차 놀라서 눈을 껌뻑이고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헤르만 중갑 기병과 경갑 보병들의 추격으로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거의 쓸어 담는 수준이었다. 적들이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 한 번의 마법 공격이 가져온 효과가 지금의 이런 상상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전장은 정리가 되었고, 전쟁은 헤르만 왕국의 승으로 끝을 맺었다.
그 상태로 헤르만 왕국군은 미드로 왕국까지 치고 들어갔다.
미드로 왕국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미드로 왕국군의 남은 병력은 2만에 불과했다.
헤르만 왕국의 대승이었다.
3
거리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여인들이 꽃가루를 날리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병사들을 환영했다.
개선군들이 당당하게 행진해 들어왔고, 여인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에 어깨를 으쓱이며 더욱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모든 여성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의 고막이 찢어질 듯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아아아!”
“앤디 경이시다!”
“어디? 어디?”
“저기 말이야!”
“앤디! 앤디!”
이미 앤디의 전과는 헤르만 왕국 곳곳에 모두 퍼진 지 오래였다.
그는 헤르만 왕국의 영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에고! 피곤해!”
앤디가 털썩 몸을 푹신하게 받아주는 소파에 전신을 파묻었다.
그의 표정이 행복해 죽겠다는 듯 화사하게 살아났다. 누군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해요? 어서 일어나지 않고.”
“셀린, 조금만 쉬면 안 될까요? 이러다가 쓰러지겠어요.”
겨우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방에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셀린이 앤디를 귀찮게 했다.
“안 돼요. 어서 일어나요.”
“그깟 무도회가 뭐라고 그래요.”
“그깟 무도회라니요! 폐하께서 이번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으로 여는 승전 무도회예요! 다른 일반 무도회랑 그 차원이 다르다구요!”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이거죠. 그냥 자면 안 될까요? 우리 이제 막 돌아왔다구요.”
“안 돼요!”
“왜요?”
앤디의 물음에 셀린이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혼자 가기 부끄럽단 말이에요.”
“안 가면 되잖아요.”
순간, 셀린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해버렸다.
“빨리 일어나요! 그리고 저 옷 입어요! 당장!”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앤디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녀가 들고 있던 옷을 홱 낚아챘다.
그리고 그가 앞서서 걸어 나가자 시녀가 뒤를 따라 이동했다. 옷 입는 것을 도와줘야 했기 때문이다.
셀린은 시녀들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화장까지 마쳤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섰다.
시녀들이 물었다.
“어떠십니까?”
거울 앞에 자리한 자신의 모습에 셀린이 살짝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려 왔다. 그에 따라 기다란 속눈썹이 함께 떨렸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아름다운 눈썹과 촉촉하고 매끄러운 입술, 그리고 흰색과 분홍빛이 조화롭게 어울린 아름다운 드레스.
시녀들이 입을 열었다.
“너무나 아름다우세요.”
“정말이에요.”
셀린 스스로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하고 말이다.
그러던 찰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머! 스승님.”
“오오! 셀린, 아름답구나.”
“부끄럽습니다.”
다소곳하게 수줍어하는 셀린의 모습에 안드레이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안드레이 역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도 이번 연회는 빠질 수 없었던 것인지 검은색 연회복을 입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도 이번에는 빠지실 수 없었던 모양이군요.”
셀린의 말에 안드레이가 피식 웃었다.
“사실은 슬쩍 빠지려고 했는데, 폐하께서 엄명을 내리셨더구나.”
“후훗!”
안드레이가 지금의 형색이 어색한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앤디는 어디에 있느냐?”
“조금 전에 옷 입으라고 했는데….”
그때, 문이 열리면서 황금으로 수실을 넣은 하얀색의 화려한 연미복을 걸친 앤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와 고집스럽게 굳게 닫혀 있는 입술.
조각상과도 같은 앤디의 얼굴에 순간 셀린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앤디는 배려심 없게도 투덜거리며 셀린에게 따지듯 말을 걸었다.
“자, 이제 만족합니까?”
순간, 감정이 팍 식은 셀린이 샐쭉거리며 대답해주었다.
“네에, 만족하네요.”
헤르만 왕궁의 대지의 궁전.
그 중앙홀에서 대규모 연회가 열렸다.
한쪽에 1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한 사람이 그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화려한 꽃보다 더 화려하고 우아한 옷과 화장으로 치장한 처녀들과 최대한 어깨에 힘을 주고 무게를 잡고 있는 청년들. 그리고 수백여 명의 귀족들과 각 계층의 이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초대를 받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 중심에 앤디와 안드레이가 있었다. 모두 앤디와 안드레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때, 대지의 궁전 정문이 열리며 한 사내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입을 가볍게 벌리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냈다.
메인 로비 입구 근처에 있던 이들은 그대로 굳어버릴 정도였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과 짙은 눈동자, 날카로운 눈매와 매끈한 눈썹, 시원한 이마.
마치 꿈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외모가 아닌가!
거기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금수를 두른 흰색 계열의 연미복은 정말이지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리고야 말았다.
모두들 사내의 환상적인 외모에 넋을 잃었다.
그 옆에 있는 여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인형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인이 흰색과 분홍빛이 조화롭게 어울린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치고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애, 앤디 드 카르미온 경?”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이름으로 인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오오! 역시! 그란 말인가!”
“앤디 경의 외모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이야!”
“꺄아! 저분이?”
“어쩜 좋아! 나 쓰러질 것 같아!”
모두들 앤디에게 아는 척은 하며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의 범접할 수 없는 외모와 분위기에 누구도 함부로 다가서지 못했다.
사실은 앤디가 피곤한 나머지 사람들이 귀찮아서 다가오지 말라는 기운을 뿌리고 있는 것이었지만, 누가 그 사실을 알겠는가. 지금 앤디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 오묘한 분위기와 기운은 그런 가운데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수줍게 손을 흔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응?”
앤디의 눈에 그 주인공이 확 띄었다. 바로 프린지 영주의 딸 엘리스였던 것이다.
앤디는 자신도 모르게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힘들든, 뭘 하든 간에 자신과 가볍지 않은 인연을 이은 그녀가 아니었던가.
앤디가 성큼 다가가서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주위에는 또래의 소녀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었다.
앤디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엘리스가 스스로 팔을 들어 친분을 드러낼 정도의 성격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약간 의아했던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이다.
앤디는 자신의 본분을 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엘리스, 잘 지냈니?”
“오, 오라버니… 안녕하셨어요?”
그 말에 앤디가 엘리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물론이지. 너야말로 어떻게 지냈니?”
앤디의 말이 끝날 때마다 엘리스의 주위의 소녀들이 꺄악거리며 함성을 터트렸다.
“이번에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도 열심히 응원했구요.”
“그랬니? 내가 힘이 났던 이유가 네 응원 때문이었구나.”
그 말에 엘리스의 얼굴이 붉디붉게 물들었다.
“지금 엘리스와 춤을 추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괘, 괜찮아요. 지금 바쁘실 텐데 이렇게 대화를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려요.”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니. 그럼 재밌게 놀다가 가려무나.”
“아버님께서도 뵙고 싶어 하세요. 다음에 기회 되시면 꼭 저희 영지에 놀러오세요.”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빛을 보여 주었다.
곧 앤디가 자리를 이동하자 셀린이 말을 걸었다.
“저번 그 무도회에서 봤던 아가씨군요.”
“네, 맞아요. 기억하시는군요.”
“후후! 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겠어요.”
셀린이 지금 보여 주는 다소곳한 모습과, 조금 전 옷을 강제로 입히던 표독스러운 모습이 오버랩 되자 앤디는 피식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그것도 사람 얼굴을 보고?”
“그냥 웃겨서요.”
“싱겁긴. 소녀들의 우상이 된 기분이 어때요?”
“글쎄요. 그냥 덤덤해요. 어차피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데요.”
“어머! 저질!”
앤디의 미소를 짓고 있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제가 왜 저질이란 소리까지 들어야 하죠?”
“소녀들의 꿈을 밟았잖아요.”
“에효! 말을 말아야지.”
그렇게 말하던 앤디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어떤 시선들 때문이었다.
앤디가 셀린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전에 제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셨죠?”
“왜요?”
“그럼 한번 느껴 보시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앤디가 경쾌한 스텝으로 셀린과 거리를 벌렸다.
셀린은 당황해서 앤디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휘청하고 넘어졌다. 그러자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청년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셀린을 부축했다.
셀린이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자, 사내들이 쑥스러운 듯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돕는 것은 신사로서 당연한 예의지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분의 성함을 경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 질문이 나오자 사내들이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셀린을 주시했다.
멀리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앤디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신의 후광 때문에 사내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리를 비켜 줬는데,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몰랐던 것이다.
“셀린 인기 좋은데? 저 중에서 신랑감이나 구하면 좋겠군. 큭큭!”
그때, 대지의 궁전 2층에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헤르만 8세의 보좌관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목을 가다듬고 외쳤다.
“헤르만 8세 폐하와 여왕 폐하께서 드십니다!”
헤르만 8세는 모든 대소신료의 인사를 받으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여왕 역시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헤르만 8세와 함께 예를 받았다.
헤르만 8세와 여왕의 등장에 이어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드레이 공작 전하께서 드십니다!”
앤디가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에 있나 했더니, 저기에 잡혀 있었구만.’
그때, 다시 보좌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레오나 공주님께서 드십니다!”
앤디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틀어 올린 금발 머리카락과 그 위에 살포시 걸쳐 있는 머리띠, 뽀얀 우윳빛의 피부, 레몬 빛의 드레스를 걸친 아름다움의 결정이라고밖에 감히 뭐라고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뛰어난 외모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앤디조차 할 말을 잃고 말 정도였다.
그때, 헤르만 8세가 앤디 앞으로 다가와 반가움을 드러냈다.
“신 앤디 드 카르미온, 폐하를 뵙습니다.”
“하하! 일어서시게. 나도 우리 왕국의 영웅을 볼 수 있어 반갑구만.”
“하하하!”
“아 참, 내가 시간을 너무 잡았군. 미안하네. 늙으면 주책이라고. 허허!”
앤디는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말을 거는 헤르만 8세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짓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 레오나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가 있었다.
그녀가 우아하게 팔을 들어 앤디에게 손등을 뻗었다.
앤디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후, 자연스럽게 연회장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마침 음악이 부드럽게 바뀌고 있었다.
앤디가 말을 걸었다.
“저에게 춤을 추실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레오나 공주가 대답해주었다.
“흠! 뭐, 그럴까나?”
“풋!”
“킥!”
둘은 아무도 모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서로를 주시한 후, 자연스럽게 한 발을 뗐다. 그리고 음악에 몸을 맡기고는 둘만의 시간으로 흘러들어갔다.
9. 영지를 얻다
1
전쟁이 끝나고 안드레이는 바쁜지 통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전쟁 때보다 더 바쁜 것 같아 보였다.
흡수한 땅을 분배하고, 정리하고, 지지고 볶고 하느라 잠도 자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대대적으로 나라 안정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 왕국 등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적당한 선물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헤르만 왕국은 폭풍의 핵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승님도 피곤하겠어. 뭐, 그래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앤디는 혼자가 된 그 시간 동안 자기 개발에 투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이번 전쟁의 공으로 하나의 영지를 하사받게 된 탓이다.
앤디는 귀찮다며 반발했지만, 가족과 친구들을 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돌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그것 이상이 어디 있겠냐는 말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사실 듣고 보니 그러했다.
자신의 땅 안에서 자신이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는 것만큼 안전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안드레이가 ‘너도 내 품을 떠날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말하며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이 컸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언제까지나 안드레이와 함께 방을 쓸 수도 없었다.
이번에 하사받은 영지도 수도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바로 첫 번째 첩자였던 마크 센트로 백작의 포른트 영지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앤디에게 자체 기사단을 만들 수 있는 권한과 왕국의 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율권을 주었다.
한마디로 반역에 가까운 죄를 짓지만 않는다면 죄를 사면해주겠다는 것이다.
앤디는 나머지 말들은 대충 넘겨들었다.
기사단을 만들 생각도 없었고, 자신이 죄를 지을 만한 일을 할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앤디는 마땅히 옮길 짐도 없었기에 상황이 정리가 되는 대로 떠나기로 했다.
이미 자신의 부모님과 마을 주민들은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고 있다고 했다.
왕국에서 정리할 것도 사실 별로 없었다.
셀린과 안드레이는 잘 가라며 반갑게 인사를….
‘뭔가 버려지는 기분인데.’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레오나 공주였다. 그리고 그 걱정이 현실이 된 것도 레오나 공주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레오나 공주는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난 쿨하니까.”
“어, 그래.”
앤디는 왠지 그 한마디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레오나 공주가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앤디의 뒷덜미를 움켜잡고는 나직하게 말문을 열었다.
“다른 여자한테까지 쿨하지는 않으니까 알아서 잘해.”
“….”
앤디는 땀을 뻘뻘 흘리며 그렇게 왕국을 벗어났다.
포른트 영지의 저택에 들어서자 벤존스와 클레오가 앤디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버지! 어머니!”
“잘 지냈느냐?”
“건강해 보이는구나.”
둘은 담담한 모습으로 자신의 자랑스러운 자식을 바라보았다.
앤디는 그런 두 분의 모습에 감동했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배려하는 모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니다. 사내란 스스로의 목표를 세웠다면 앞만 볼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오히려 이렇게 훌륭하게 스스로의 길을 찾아줘서 우리가 고맙구나.”
벤존스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앤디의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어떤 감정이 치솟았다.
앤디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서자, 아버지 벤존스와 어머니 클레오가 두 걸음 더 다가와 자신의 아들을 강하게 부둥켜 안아주었다.
“정말 건강해서 다행이구나.”
“너무나도 보고 싶었단다.”
앤디는 부모님의 뜨거운 눈물이 자신의 품을 적시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떠신가요? 사시는 것에 불편하신 것은 없나요?”
“좋단다. 하지만 조금 어렵더구나.”
클레오의 말에 앤디가 물었다.
“어디 어떤 부분이 어려우신가요?”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것이 어렵단다. 옛날에는 그런 내 모습을 그려 봤던 적도 있었지만, 그게 생각처럼 편한 것이 아니더구나. 후후!”
클레오가 어색한 모습으로 주위의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앤디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자신도 처음에는 시녀들의 존재가 거북하지 않았던가.
뭐, 지금도 그렇게 편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처럼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앤디는 잠시 시종들을 물릴까 싶기도 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모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마을 분들은 어떻게 계시나요?”
“이곳 영지 앞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줘서 그곳에 들어가 살고 있단다.”
“모두들 좋아 보이던가요?”
그 말에 벤존스와 클레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을 말이라고 하느냐. 네 덕에 호강한다며 모두가 기뻐하고 있단다.”
“모두들 뵙고 싶네요. 마을 축제라도 열어야겠어요.”
“그것 좋은 생각이구나. 모두가 기꺼워할 것이다.”
벤존스의 말에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는 다음 날, 바로 과거 카렌 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
영지민들에게도 그날을 모두 즐길 수 있도록 술과 음식을 풀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과거 자신을 대장이라고 따르던 밴트와 해리슨, 로즈와 로이 등등의 친구들도 만나서 어색하지만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앤디를 보며 어려워했던 마을 주민들과 친구들도 나중에는 편하게 서로를 대하게 되었다. 어렸을 적의 기억이 추억이 되어 앤디와 마을 주민들 머릿속에 떠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차후를 기약하며 마을 잔치를 접었다.
앤디는 최대한 부모님을 위주로 생활 패턴을 바꿨다.
모든 식사를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조정했으며,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연무장에서 보냈다.
왕국에서 안드레이는 그런 앤디가 수련에 몰두할 수 있도록 영지 경영에 관한 능력을 지닌 이들을 수하로 보내주었다.
앤디는 영지에 대한 걱정을 덜고, 중요한 문건만 직접 보고 사인을 하는 것 외에 영지 운영에 대해서 모든 관심을 끊었다. 그래도 충분했던 것이 안드레이가 보내준 수하들이 정말 유능했기 때문이다.
앤디는 어느 때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무공이 빠르게 발전하는 이유에 대해 감을 잡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걱정 없이 무공을 익히며 스스로를 발전해나갔다.
그렇게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앤디의 나이가 23살이 되었다.
지금 앤디의 유운신공은 8성에 접어들었다.
이대로 가면 스물다섯이 되기 전에 9성에 무난하게 접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9성은 어검술의 단계로, 과거 자신이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의 칭호를 받았을 때의 단계를 말한다.
지금에 와서 확신하게 된 것인데, 유운신공의 발전이 빠른 이유는 이곳의 충만한 마나의 양도 양이지만, 유운신공의 유한 기운과 이 세상이 품고 있는 기운이 서로 상생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앤디의 뛰어난 오성도 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긴 했지만….
그런데 앤디가 요즘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기운에 포착되는 어떤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이 품고 있는 기운과 같은 것 같으면서 달랐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분명히 존재는 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뭘까?’
신경을 끄고자 하면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주위를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 앤디는 수련을 잠시 접고야 말았다. 그 기운으로 인해 두통이 너무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복잡할 때는 그냥 길을 걸어 다니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집 안에 가만히 있어봤자 잡생각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금의 문제는 단순하게 골을 싸맨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정원에 있던 클레오가 앤디에게 말을 걸었다.
“앤디야, 어딜 나가니?”
클레오가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지금은 꼼짝하지 않고 연무장에서 수련을 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런 앤디가 연무장에서 나와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의아했다.
“머리가 좀 아파서요. 산책 좀 하고 올게요.”
“많이 아프니?”
“심각하지는 않아요.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그러려무나.”
앤디는 밖에 나와 시장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구경했다.
지금까지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앤디로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글거리며 오가는 틈에 끼자 왠지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여자아이가 주위를 불안한 시선으로 기웃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눈치를 살피며 빵을 훔쳤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해 주인에게 잡혀서 두들겨 맞았다. 그 정도가 심해 앤디가 끼어들었다.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흥! 끼어들지 마쇼!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들은 다 혼구멍이 나야 한다고!”
“이 정도면 충분히 혼이 난 것 같은데 용서하시죠.”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결국 주인이 화가 났는지 앤디의 가슴을 양팔로 밀치며 덤볐다. 그리고는 아이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앤디는 자신의 발을 뻗어 빵집 주인의 발길질을 막았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구부려 복부를 찍고, 다리를 휘둘러 그의 무릎 뒤쪽을 걷어찼다.
그러자 그가 무릎을 굽히며 고통을 호소했다.
앤디가 그런 주인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까지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빵 값으로 이것이면 되겠습니까?”
앤디가 건네는 은화에 눈이 동그래진 빵집 주인이 냉큼 받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마음 넓은 내가 용서를 하지.”
빵집 주인은 가면서 여자아이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때는 정말 혼이 날 것이다!”
그 말에 여자아이가 작은 몸을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빵집 주인이 멀어지자 눈치를 살피던 여자아이가 땅에 떨어진 빵을 주워들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앤디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여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2
앤디는 콧물을 흘리는 지저분한 소녀를 보며 물었다.
“몇 살이니?”
소녀가 손가락 9개를 펼쳤다.
“아홉 살이구나. 왜 훔쳤니?”
“돈이 없어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시켜 주는 사람도 없고요.”
소녀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앤디를 주시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앤디는 그렇게 맞았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소녀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럼 일자리를 주면 물건을 훔치지 않을 거니?”
소녀가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앤디를 바라보았다.
“따라오거라.”
“왜요?”
“네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자리를 주겠다.”
소녀가 망설이다가 앤디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윽고 결심을 했는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는, 때가 꼬질꼬질 묻어 있는 소매로 콧물을 닦고 앤디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앤디는 마주 보며 웃고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니?”
“제시카.”
“예쁜 이름이구나. 가족은 있니?”
“네. 오빠 하나랑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부모님은?”
“몇 년 전에 이곳에서 전쟁이 있었는데 그때 돌아가셨어요.”
순간, 그 말을 들은 앤디의 가슴이 싸해졌다.
“무슨 전쟁이었니?”
“영주가 나쁜 놈이었나 봐요. 그래서 왕국에서 기사들이 와서….”
앤디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상념이 앤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빠와 동생은 어디에 있니?”
“왜요?”
“그 아이들도 같이 일을 시키려고 한단다.”
“그럼 따라오세요.”
제시카를 따라 앤디는 한참을 걸었다.
제시카의 집은 포른트 영지 구석진 곳에 위치한 판자촌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예요.”
제시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앤디가 따라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두 사내아이가 기침을 하며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앤디는 재빨리 밖으로 나서서 신관을 불렀다.
심드렁한 모습을 보이던 신관이 앤디의 신분을 듣고는 놀라서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아이들을 진찰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폐렴과 영양실조가 겹쳐 있군요.”
신관은 기본적인 치료를 하고 신성력으로 원기를 회복시켰다. 그리고 아이들을 신전으로 옮기겠노라 했다.
“우리 저택으로 가지요.”
앤디의 말에 아이들은 저택으로 옮겨졌다.
클레오와 벤존스가 들것에 실려 오는 아이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 아이들은 누구냐?”
앤디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클레오와 벤존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아이들을 손수 목욕시킨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혔다.
앤디가 그 옷을 보고 놀라 물었다.
“어라? 이 옷은?”
클레오가 웃었다.
“맞다. 네가 어릴 적 입었던 옷이란다.”
앤디는 감회가 새로운 눈빛으로 그 옷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자신의 어린 시절 옷을 가지고 있는 부모님께 왠지 더욱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 대신 그 옷을 보며 눈물을 훔치셨을 부모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는 동안 저 옷을 얼마나 챙기셨을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낡아 닳았던 부위도 모두 깨끗하게 기워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느냐.”
‘아들로서의 추억을 만들어드리지 못한 것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목 끝에 걸쳐 차마 나오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 옷을 입고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옆에 제시카도 어느새 잠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 벤존스가 제시카를 안고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손짓으로 클레오와 앤디를 불러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푹 자도록 자리를 피해주자는 것이었다.
작은 소년의 나이는 8살, 이름은 토미.
가장 큰 아이의 나이는 11살, 이름은 까뮤.
아이들은 처음에는 경계를 했지만, 이윽고 앤디의 부모님과 앤디를 잘 따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병은 완치가 되었고, 잘 먹어서 살도 제법 통통하게 올랐다.
그 틈에서 제시카는 점점 웃음이 많아지고 활발해졌다.
앤디에게 그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관심을 주지 않았던 영지의 운영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첩자를 잡겠다며 왕실군을 끌고 들어온 날 사망한 사람의 명단과, 그로 인해 파생된 고아들의 수를 모두 체크했다. 또한 판자촌의 사람이 몇인지 연령별 체크를 하고, 그중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고, 몸이 아픈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도 체크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바로크라는 수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정확히 모르겠사오나, 난민들을 모두 구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말에 앤디가 정리하고 있던 서류를 접으며 안구를 양 손가락으로 지압했다. 그리곤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바보는 아니라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네. 하지만 우선 해볼 만큼은 해볼 생각이네.”
“예?”
바로크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되물었다.
“가만히 놀아서 뭐하겠나. 우선 해볼 만큼은 해봐야지. 무엇이 저들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될지 생각해봐야겠네. 그렇다고 걱정은 하지 말게. 무작정 퍼주기만 하는 바보는 아니니까.”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바로크였다.
앤디는 많은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기사단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사단을 형성할 때 자금이 필요한데, 그것의 보조 지원금을 왕국에서 대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앤디가 만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만들라고 시켰던 것이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미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병사로서 수련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물론 무작정 끌어다가 훈련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방위군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실력을 보일 때마다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또한 영지의 보수 작업과 사용하지 않는 영토를 개간 작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좋게만 말하지는 않았다. 이미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는 자들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모두 영지 밖으로 쫓아냈다.
하지만 대부분이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지 못하는 자들이었기에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일하지 않는 자들까지 챙겨 줄 정도로 앤디는 미련하지 않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앤디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모두 불러서 내공심법을 전수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3개의 반으로 나누었다. 무공을 익히기에 뛰어난 아이와, 무공을 익힐 만한 아이, 그리고 무공에 적합하지 못한 아이들로 말이다.
앤디는 무공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물론 다른 반 아이들도 공부를 하긴 했다. 하지만 무공에 적합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조금 더 어려운 과제를 진행시켰다.
글과 회계 같은 것들을 알아두면 나중에 무슨 일을 해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미와 까뮤는 무공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제시카 역시 자질이 훌륭했지만, 계산과 회계에 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앤디는 추진하고 있는 다른 일들을 수하들에게 분배하여 일을 진행시키고, 자신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그때 카렌 마을의 친구들이 앤디를 찾아왔다.
“다들 잘 지냈지?”
“물론이지. 영주님이 잘 보살펴 준 덕이지.”
밴트의 말에 모두가 하하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앤디의 물음에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에게도 검술을 가르쳐 줘.”
“검술을?”
앤디는 잠시 고민했다.
이미 몸이 굳은 이들이다. 지금에 와서 검술을 배워도 문제는 없겠지만, 높은 단계까지 올라가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가능하겠어?”
“아마 힘들 거야. 하지만 잘만 하면 오러를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순간, 밴트와 해리슨이 놀라서 소리쳤다.
“오러라고!”
“우리가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단 말이야?”
“응. 내 지시만 잘 따라온다면 말이지.”
그 말에 밴트와 해리슨, 그리고 마을 친구들이 입을 모아서 앤디를 불렀다.
“대장! 고마워!”
앤디는 당혹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 표정을 지우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정말 힘들 거야.”
“오러만 사용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
그 말에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에 왔던 이들보다 수가 배로 늘었다. 과거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아이들이 모두 온 것 같았다.
그 수는 총 16명.
결국 앤디는 밴트들이 따로 수련할 수 있는 수련장을 만들어야 했다.
밴트들과 아이들이 수련해야 할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선 굳어진 몸을 풀어야 했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타혈신공을 시전하면 이들의 몸이 어느 정도 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일일이 그렇게 하기엔… 귀찮았다.
‘자신이 노력해서 얻는 것과 그냥 얻는 것은 다르지.’
앤디는 자신의 귀찮음을 이렇게 그럴싸하게 덮어 씌웠다.
사실 뭐, 틀린 말도 아니었고.
앤디는 밴트들의 수련 방법을 위해서 적지 않은 고민을 했고,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그래. 이렇게 막연할 때는 그저 단순한 게 최고지.”
다양한 육체노동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단순한 육체노동은 효과가 없다. 다양한 육체노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해야만 했다.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다.
앤디는 밴트들을 신경 쓰느라 아이들의 지도가 미흡해졌다.
그 결과, 당연히 아이들의 진도가 지지부진해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과 밴트들을 같이 수련시킬 수는 없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결국에는 안드레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수정구를 꺼내 깨끗하게 먼지를 닦고는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신호가 가더니 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십니까?]
“앤디라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여인의 목소리가 수정구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앤디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마법 연락망으로 연락을 할 만한 사람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앤디의 부탁대로 안드레이를 연결해주었다.
“스승님,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이로구나.]
“몸은 어떠십니까?”
[궁금한 녀석이 지금까지 연락이 한 번도 없었단 말이냐!]
“하하! 제가 좀 바빠서 말입니다.”
[쯧! 망할 녀석! 아쉬울 때나 연락하고….]
“…쩝!”
앤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연락을 하셨는지 들어나 보자.]
앤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수련시켜 기사로 키우려 한다는 말이 나오자 안드레이가 화색이 도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참말이더냐!]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누가 좋아한단 말이냐! 그런데 네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제자를 양성한다는 말이냐.]
“제자가 아니라 그냥 가르치는 거라니까요.”
[그게 그거지, 뭐. 네 녀석은 나한테 마법을 배워서 제자가 됐냐?]
앤디는 다시 한 번 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여하튼 그러니까 기사 좀 보내주세요.”
[뭐, 그리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네 녀석이 조금 번거로울 거다.]
“번거롭지 않으려고 부르는 건데 번거로운 일이 생긴다고요? 귀찮은데 기사 양성이고 뭐고 확 때려치울까요?”
앤디의 협박 아닌 협박에 안드레이가 움찔했다.
벌써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앤디가 아이들을 키운다고 한다. 앤디의 경이적인 검술을 자신은 알고 있지 않은가.
앤디에게 배움을 받은 아이들이 성장해서 일반적인 기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또 다른 마스터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아이들을 키워 기사로 만들어달라고 자신이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빌어도 해줄 녀석이 아님을 알기에 실행을 안 했을 뿐.
그런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몇 년 만에 연락을 해서는 기사단을 만든다는 말만 들었었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을 키워서 기사단을 양성하고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왠지 헤르만 왕국이 강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런 상황인데 뭐든 못해주겠는가.
앤디를 달래야만 했다.
[그렇게 번거로운 일은 아니다. 내 말은 이 왕국의 최고수로 알려진 네가 근처에 있는데 설마 기사들이 가만히 있겠냐는 것이다.]
그 말에 앤디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 말이시군요. 그렇다면 걱정이 없지요. 어차피 제 수련법과 검술을 알려 줘야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럼 곧 연락을 주도록 하마.]
그 말이 흘러나오고 난 후에 안드레이는 기사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왕국 내 모든 기사들이 자신을 포른트 영지로 보내달라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가지 않겠다고 하는 기사들 때문이 아니라 가겠다는 기사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얼마 후, 3명의 기사들이 포른트 영지에 왔다.
그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습으로 앤디를 만났다. 그리고 앤디의 말을 경청하며,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앤디는 이야기를 마친 후 그들의 몸을 스캔했다.
체질은 어떠한지, 지금 쌓여 있는 마나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 등등.
그리고 그들에게 마나를 효율적으로 쌓을 수 있는 마나심법과 검술을 가르쳤다.
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앤디의 가르침을 흡수했다.
이미 기본이 잡혀 있는 이들이었고,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 누구보다 강한 자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앤디는 하루에 1시간씩 기사들을 교육했고, 기사들은 아이들을 기본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앤디는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몇 번에 걸쳐 검토한 후에 그들의 교육 방식에 흡족해하며 신경을 끊었다. 자신의 가르침이 간섭과 잔소리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앤디는 밴트들에게 모든 신경을 돌렸다. 기본이 잡히기 전까지.
앤디의 교육은 간단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팔과 다리에 10킬로그램의 모래주머니를 달았다.
도합 40킬로그램.
모두들 기사가 되는 일인데 이 정도 무게쯤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 상태로 돌아가서 일상적인 생황을 일주일간 하라고 했다. 씻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잘 때도 떨어트리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몸과 같이 느끼라고 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더 힘들었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가 않았고,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았다. 가위 눌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텼다. 그때쯤 왕실에서 기사 셋이 왔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앤디가 다시 자신들에게 묶은 모래주머니를 풀라고 했다.
“그동안 불편했지?”
“아니, 뭘. 이 정도 가지고 힘들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
이제 이 수련은 끝났나 싶어 모두들 호방하게 웃으며 허풍을 떨었다. 그러자 앤디가 기다렸다는 듯이 뭔가를 앞에 내놓았다.
“그때는 이게 없어서 모래주머니를 썼지.”
“이게 뭔데요?”
“쇠 팔찌.”
모두들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터트렸다.
“모래주머니는 불편했을 거야. 십 킬로그램은 우스웠지? 그때는 준비가 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었어. 이번에는 너희의 기대에 충족할 수 있게 무게도 좀 올렸다. 각각 십오 킬로그램으로.”
앤디의 말을 들은 이들이 하나같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쇠 팔찌를 찼다.
“쇠에 피부가 짓무르지 말라고 안에 가죽도 덧댔으니 괜찮을 거야. 그럼 돌아가서 쉬도록 해.”
모두들 무거워진 몸으로 집을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5일이 지났다. 앤디의 부름에 모두가 모였다.
“그럼 모두 가자.”
“어딜 가는데요?”
“이번에 개간할 땅.”
“대장, 거긴 왜 가는 겁니까?”
“당연히 땅을 개간하러 가는 거지.”
앤디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곡괭이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모두 그것을 받아들고는 휘청거리고 말았다.
“헉! 뭐, 뭔데 이렇게 무거워?”
“무겁긴. 십육 킬로그램밖에 하지 않아. 그 팔찌보다는 가볍지. 그렇지? 그럼 모두 시작해. 오늘 목표치는 여기서 저기까지야.”
모두들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게 넓은 지형은 아니었는데, 왠지 까마득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를 악문 해리슨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곡괭이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헐떡이며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져서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앤디가 싸늘하게 말했다.
“친구들, 세상에 거저먹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밴트들은 첫날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고 모두들 후유증에 시달렸다. 엄청난 고통을 동반한 전신 근육통이 이들을 덮친 것이다.
숨을 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둘째 날은 그 배로 힘들었다.
셋째 날, 넷째 날…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더욱 지독해졌다.
정말 때려치우고 싶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오를 정도였다.
지금 하는 게 검술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괜히 앤디가 자신들을 엿 먹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빠지지 않았다. 군소리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이기냐, 네가 이기냐 한번 해보자고 악에 받친 모습으로 달려들었다.
‘저 자식들도 버티는데, 쪽팔리게 나 혼자 떨어져 나갈 수 없어.’
모두들 핏발 선 눈으로 살기를 품고 땅을 개간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걸려서 모두들 개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앤디가 이들에게 심법을 하나 알려 주었다.
“대연심법? 그게 뭔데?”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한마디로 숨 쉬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는 거야.”
“숨 쉬는 방법? 그걸 왜 알려 주는데?”
“대자연의 기운을 몸 안에 흡수하려면 우리가 대충 쉬는 호흡으로는 불가능해. 체계적인 방법으로 숨을 쉬어서 마나를 몸 안에 가둬야 하지.”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역시 기사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 했더니, 숨 쉬는 것도 달랐던 것이군.”
“그러니까 그렇게 강하지.”
“맞아, 맞아.”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앤디의 말을 받아들였다.
앤디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지, 부가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스스로 납득해서 배우겠다는데, 괜한 설명은 혼란만 가져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모두들 앤디가 말하는 방식대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지금까지 전신을 짓누르던 근육통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놀라서 눈을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같은 효과를 느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선을 모아 앤디를 향했다.
앤디는 밴트들을 보며 이들의 기감이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그때, 한 사내가 앤디에게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렇게 좋은 게 있으면 진작 알려 줬으면 좋았잖아, 대장.”
그러자 앤디가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틀려. 내가 너희를 일부러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그 모습을 보며 즐기려고 했을까? 아니야. 그 시간에 나는 수련을 하겠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정도로 나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이 심법은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효과를 가져와. 너희가 극한의 상황까지 몸을 혹사시켰기에 이 심법이 효과를 보인 거지.”
“아아! 그렇군.”
모두들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개의 땅을 더 개간했다. 하나도 낙오 없이 모두가 하나 되어 앤디의 지시 사항을 지키며 따라왔다.
앤디는 그런 이들을 보며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숨만 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몸 안의 기운을 느껴야 해. 그 기운을 느끼고 다루기 시작하면 근육통이 치료되는 것을 넘어서 몸이 가벼워질 거야.”
“기운이라니?”
앤디는 대답 대신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마나를 주입시켜 주었다.
그들은 그 기운을 느끼고 감동했다.
앤디가 말했다.
“지금 느낀 기운들을 모두 잊지 마. 알겠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호흡에 집중했다.
일주일 만에 16명 전원이 마나를 느꼈다.
앤디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 순박한 친구들이 어째서인지 듬직하게 느껴진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