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앤디의 이름
1
그렇게 반년이 흘러가고, 전쟁이 한창 준비 중이었다.
아직도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벌써 시작되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조용하게.
전략팀이 조성되고, 병력이 모였다.
세금이 올라가고, 군량이 쌓였다.
국경선이 강화되고, 살기가 충천했다.
기사단이 형성되고, 병사들이 군단별로 분배되었다.
용병들이 모이고, 용병대가 만들어졌다.
마법사들과 신관들을 소집해 마법 지원단과 치료 부대를 형성하여 30여 개의 단을 만들었다.
이제는 계기만 남았다. 발화점 말이다.
일촉즉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곳에 불이 붙는 순간 엄청난 피가 대지를 적실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쉬쉬하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만큼, 시간이 갈수록 대립해 있는 양 진영 간의 병사들의 피는 바짝 말라가는 것 같았다.
폭풍전야의 고요인가?
그러나 누구 하나 지금이 조용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헤르만 왕국은 미드로 왕국과의 사신 협상이 결렬되자마자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이미 먼저 움직이던 중이었다. 사신 협상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명분 소유권을 찾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는 앤디와 셀린, 헤르만 8세와 왕실 기사단 총대장 레이오트, 이번 전쟁을 위해 창설된 이글스 기사단의 핵심 멤버들과 함께 미드로 왕국의 국경 지역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미드로 왕국은 헤르만 왕국을 두르고 있는 바론 산맥의 끝자락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다.
사실 미드로 왕국과 헤르만 왕국의 국경선은 애매한 위치였다. 굽이진 경사로로 인해 들쭉날쭉한 지면으로, 일반적인 전투를 벌이기 힘들었다.
지형의 특성상 전쟁을 해도 이득권을 챙길 만한 풍요로운 토지가 없었기에 서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완벽한 침략 전쟁이라도 일으킨다면 모르겠지만, 두 왕국의 힘은 비등한 편이었다.
반대 왕국을 흡수한다고 쳐도 전쟁의 여파로 자국의 힘도 많이 축소되어, 타 왕국의 위협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될 확률이 높았다.
한마디로 그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을 확률이 현저하게 낮은 것도 모자라, 전쟁이 끝나고 나면 타 왕국의 견제로 인한 위험부담이 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계륵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헤르만 왕국의 동부 국경선은 쿠렌트 제국과 맞닿아 있었다.
헤르만 왕국이 전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쿠렌트 제국이 침략하면 손을 쓸 수도 없이 당하고 만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드로 왕국에서 헤르만 왕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헤르만 왕국은 그 도발을 결코 참을 생각이 없었다.
전 대륙의 왕국과 제국에 명분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고, 전쟁에 돌입하겠노라 선포했다.
물론 미드로 왕국 또한 같은 이유로 선포를 했다.
두 왕국의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왕국과 제국은 둘의 전쟁을 인정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쿠렌트 제국 또한 둘의 전쟁을 인정했다. 그 말은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힘이 법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흡수해놓고서 다른 왕국들이 들고일어난다면 쿠렌트 제국은 분명히 이럴 것이다.
‘억울하면 덤벼라.’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누구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쿠렌트 제국과 싸우고 싶은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드레이는 전혀 쿠렌트 제국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의 목표는 우리가 아닙니다. 대륙입니다. 소신의 입으로 말할 내용은 아닙니다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작은 왕국 하나 흡수하고 바짝 독 오른 대륙 연맹과 대립할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저들을 언제부터 견제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견제는 과거도, 지금도, 앞으로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미드로 왕국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저들은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란 점입니다. 아마도 그 후의 기회를 노릴 것입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어째서 그렇게 확신을 하는 건가?”
“사람들이 가축을 조금 더 살을 찌워서 잡아먹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나 미드로 왕국이 살찌길 바라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냉정하게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안드레이었다.
그래서 모두 더욱 안드레이를 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넓은 대지가 한눈에 보이는 높은 산맥의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헤르만 8세가 물었다.
“저곳인가? 첫 전투 장소가?”
국경선의 애매한 지리적 이유로 인해 헤르만 왕국의 정예군은 주요 도로와 능선에 대대와 연대 규모의 요새들을 구축하여 견제 작업을 하고 있었고, 주력 부대는 뒤쪽으로 빼서 상황을 주시하기로 한 그 모든 작전 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 폐하. 저곳이 바로 첫 번째 대립 지역이 될 것입니다.”
“좋군. 적들의 전력은 어찌 되는가?”
“6만의 병력이 본진으로 주둔하고 있습니다. 총 9만의 병력으로, 나머지 3만의 병력은 우리와 같이 연대와 대대로 나뉘어져 산맥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그러한가?”
“이번 작전은 이곳 국경선을 지키고 있던 슈베르츠 장군이 지휘할 것입니다.”
한 노장이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렸다.
“신 슈베르츠,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믿겠네.”
헤르만 8세가 믿음 어린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
“지도를 가져와라.”
슈베르츠의 명에 넓은 지도를 품에 안고 있던 병사가 재빠르게 다가와 바닥에 펼쳤다.
슈베르츠가 들고 있던 지휘봉을 지도로 향했다.
“이번 전투의 첫 장소는 바론 산맥의 협로가 될 것입니다. 사방이 급격히 좁아지는 이곳은 여차하면 갇혀서 집중 포화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만 뚫는다면 우리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 바론 산맥의 언덕입니다. 국경선 중 가장 전략적인 지역으로, 미드로 왕국이 목숨을 걸고 막으려 들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과 이곳의 요새를 보병들로 선점하면 바론 산맥의 협로는 쉽게 포위가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점령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들의 발을 묶는 데는 최고의 포지션을 줄 것입니다. 위기를 느끼고 본진에서 기사단이 돌진해올 것입니다. 그때 뒤로 서서히 빠지며, 이곳 협로 입구로 그들을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헤르만 기사단이 앞뒤로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입니다.”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그럴듯하군.”
“감사합니다.”
“원하는 만큼의 마법사를 지원해주겠네. 계획이 틀어졌을 경우에 대한 대책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난전이 예상되는 곳에 용병대를 투입하는 것도 잊지 말도록 하시오.”
“충!”
“병력 지원은 브론 경이 맡고, 후방 지원은 내가 하겠소.”
“충!”
작전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연대장들이 대대장들을 모았다. 그중 3연대장이 자신의 수하들을 모으고 작전을 하달했다.
“우리 연대가 공격할 곳은 이곳에 위치한 검은 안개 요새다. 우리들은 무조건 이곳으로 진입해 들어가 진입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 대대장들이 반론을 했다.
“검은 안개 요새가 어딘 줄 모르십니까?”
“안다.”
“아시는 분이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곳은 천연 공성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입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쇠뇌와 공성 병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곳으로 가는 것은 돌진이 아니라 자살이라고 하는 겁니다.”
“닥치고 작전이나 더 들어봐! 우리가 돌격하기 전에 이글스 제2기사단이 마법사들을 대동하여 먼저 돌격해서 문을 열 거야. 그 이후에 우리가 들어가는 거지. 우리들의 임무는 한 번 뚫린 길을 다시 막히지 않도록 사수하는 거다!”
“뭐, 조금 나은 건가.”
“당연히 낫지. 우리 뒤로 들어오는 지원 부대와 먼저 들어간 2기사단과 마법사들이 요새를 점령하는 동안 우리는 대기를 하는 것일 뿐이니까.”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서 최대한 빨리 후퇴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는 일이란 말이죠?”
“만일 기사단이 점령을 깨끗이 이룬다면 우리는 거의 싸울 일도 없겠군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미드로 기사단이 밀려올 수도 있다. 그때는 최대한 뒤로 후퇴를 해야 한다.”
“예? 싸우는 것이 아니고요?”
한 대대장의 물음에 연대장이 대답했다.
“우선 상부의 지시는 그렇다. 이번 전투는 요새 따위를 점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적의 기사단을 끌어들이는 것이지.”
“그렇다면 상부에서는 이번 기사전에서 승리할 확신이 있다는 말인가 보군요. 그렇지 않다면 이건 자살….”
“이번 작전에 본 왕국 기사단 전력이 투입된다.”
“와우! 이건 도박 수준 아닙니까?”
“흥! 이기는 게임도 도박이라고 하는가?”
“이거 정말 해볼 맛 나겠는걸!”
“그럼 질문을 받겠다.”
“부상자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연대 후방에 사제와 마법사로 이뤄진 구호반이 따를 것이다. 그들의 판단으로 우리 연대의 상태가 심각하다 싶으면 정규사단 후방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질문 있는가? 없으면 이동해라!”
2
이곳 전쟁에 투입된 이글스 기사단의 전력은 과거 명칭으로 따진다면 헤르만 왕실 1기사단과 2기사단, 그리고 카를로스 기사단과 벤트로 기사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글스 용병단으로 이름을 묶은 것은 지휘권을 통일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이글스 용병단의 총 기사들의 수는 1기사단 120명과 2기사단 100명, 3기사단 150명과 4기사단 120명으로, 총 490명의 기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수는 보조 기사와 수련 기사들의 수를 뺀 것으로, 그들의 수를 더한다면 병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 추가 지원 기사단이 있는데, 각 영지에서 끌어들인 기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근위 기사단으로 엮인 베어스 기사단으로, 그 수는 총 3백 명이나 되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자 계획된 작전이 실행되었다. 전방에 포진하고 있던 3연대의 병사들은 마법사들이 마법을 날려 요새의 벽을 후려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진하는 기사단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때, 그 사이에서 한 사내가 튀어나오더니 믿기지 않는 장관을 연출해냈다.
그 사내의 검에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오러가 피어나더니, 그대로 요새 벽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마법사들이 공격을 해도 꿈쩍하지 않던 요새의 벽이 그대로 붕괴되며, 요새의 수성 탑 위에서 마법과 활을 날리고 있던 마법사와 궁수들이 그대로 산비하여 날아갔다.
사내는 그대로 안으로 뚫고 들어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엄청난 섬광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뒤로 우르르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뛰어 들어갔고, 그것을 목격한 3연대장이 재빨리 손을 흔들어 병력을 이동시켰다.
병사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기지 않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자신들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이대로 상황이 종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원 병력이 후방을 밀고 들어간 이후로 더욱 빠르게 요새 내부가 정리되는 느낌을 주었다.
“저, 저 사람 대체 누구야?”
“설마 그 사람인가?”
“그 사람 누구?”
“안드레이 공작 전하의 제자 있잖아.”
“그 앤디라는 사람?”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던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기가 질린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게 정말 인간이 내는 능력이란 말이야?”
“마법사들도 저 정도는 해.”
“문제는 저 사람은 기사잖아. 그리고 마법사보다 더 강해 보이는데?”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쩍 벌렸다.
그때, 저 멀리서 엄청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연대의 병사들이 기가 질린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2백 명이 넘는 기사들이 검에 살기등등한 오러를 뿜으며, 엄청난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자군의 기사들이 오러를 뿜으며
날아다니는 모습에 느끼던 듬직함과 달리, 저들의 오러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뿌우우우우!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순간, 안에서 조금 전 들어갔던 기사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원 병력들은 나오지 않고 내부에 남는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빠지자 3연대의 병력들이 그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후퇴하라!”
그리고 미친 듯이 협로를 향해 이동했다.
저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바로 등 뒤에 잡혀서 저 시퍼런 오러가 맺힌 검에 모가지가 댕강 잘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물씬물씬 풍겨 왔다.
“히익! 히익!”
“사, 살려 줘!”
“뛰어! 병신들아! 뛰란 말이다!”
여기저기에서 독려하는 외침에 기운을 받아 두 다리를 놀렸다.
그때 작은 둔덕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곳에 파여 있는 참호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병사들이 모두 뛰어 들어가 모습을 감추자, 대기하고 있던 병력들이 흔적을 지우고 자신들을 은닉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두거리는 거대한 굉음과 동시에, 조금 전 등 뒤를 서늘하게 만들었던 미드로 왕국의 기사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저들의 손에 자신들은….
“헉헉! 사, 살았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군. 내 목이 정말로 붙어 있는 건가?”
“확인시켜 주랴?”
“크악! 캑캑! 그렇다고 조르는 건 대체!”
병사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하나둘 참호 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참호를 지나서야 협로가 시작된다. 참호의 위치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협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가 있었다.
눈치 빠른 병사들이 슬그머니 그곳으로 이동했다. 벌써 연대장과 대대장들도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포위된 미드로 왕국의 기사단이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자리를 잡았다.
그들을 앞과 뒤로 포위한 이글스 기사단이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 병사가 입을 열었다.
“와! 저길 봐! 기사들이 격돌하는 저 모습!”
“정말 대단하군. 박진감 넘치는데? 평생 이야기할 거리가 생겼어.”
“이런 장관을 목격하게 되다니, 난 정말 행운아야.”
“어라? 그런데 저 녀석 비겁하게 등을 찌르는 거야?”
“이 자식이 우리 편한데 비겁하다니, 뭔 개소리야!”
“하지만 기사인데. 정면 대결만 해야 하는 것 아냐?”
그 말에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코웃음을 쳤다.
“개풀 뜯어 먹고 있는 소리 하고 있네.”
“왜?”
“넌 싸울 때 어떻게 싸우냐?”
“이렇게, 이렇게?”
각을 잡고 설치는 녀석의 말에 모두가 비웃음을 흘렸다.
“웃기지 말고. 머리끄덩이 안 잡으면 다행이게?”
“이씨! 아니라니까!”
“흥! 싸움이 다 똑같지. 일대일 대결이나 화려하지, 머릿수 모여서 싸우는 막 싸움에서도 기사도 찾다간, 검 뽑기도 전에 죽어. 헛소리하지 말고 지켜나 봐.”
할 말을 잃은 녀석이 입술을 쭉 내밀고 전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동시에 터진 진군의 북소리가 빠른 속도로 울려 퍼졌다.
양쪽에서 포위를 당한 미드로 왕국의 기사들 얼굴에 패색이 짙게 퍼졌다.
둥둥둥둥둥둥둥!
누군가의 첫발을 시작으로 양 기사단이 격돌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두두두!
굉음과 함께 바닥이 울리다 못해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 육탄으로 치닫는 양 진영의 기사들! 그리고 접전!
그들이 찌른 창과 검에 서로 꼬치처럼 엮이거나, 팔다리 혹은 머리가 잘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차창! 챙!
검과 창이 부딪치자 불똥을 반짝이며 시야를 자극했다.
“죽엇!”
“너나 죽어!”
차창!
검과 창이 부딪치며 튕겨진 순간,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다른 미드로 왕국의 기사의 검이 헤르만 왕국의 기사의 등허리를 깊이 파고들었다.
서걱!
“으악!”
푸슈슈슈슉!
육중한 고기가 베어지는 소리와 함께 피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런 현상은 이곳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탓일까? 시야가 붉게 느껴지는 이유가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엄청난 오러가 붉은 안개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 오러가 빛줄기처럼 뻗어나가더니, 순식간에 미드로 왕국의 기사들을 향해 파고들어갔다.
“크헉!”
“커어어어어어….”
멀쩡히 서 있던 기사들의 상체가 이질적인 각도로 꺾이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는 듯했다.
갑작스럽게 미드로 왕국의 기사들을 향해 파고들었던 그 거대한 기운이 기사들의 허리를 댕강! 하고 잘라버린 탓이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일자로, 마치 숲에 길이라도 낸 것처럼 말이다.
그때, 그들의 잘려 나간 허리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푸슉푸슉푸슉푸슉!
그 옆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은 허리가 잘린 채 무너지는 동료들을 보며 당혹감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내뿜는 피를 전신으로 받으며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몇몇에게는 패닉 상태도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다시 뻗어져 나가는 오러의 빛.
수많은 기사들이 다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정적.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아직도 비명과 고함, 검과 검, 혹은 방패 등과 부딪치며 생겨나는 검명에 고막이 쩌렁쩌렁했다.
하지만 짙은 오러의 검을 들고 있는 사내의 주위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은 적과 아를 망라하고 모두 검을 내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이 주위만 시공간이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 탓이다.
“와! 그건 그렇고, 저 사람 정말 대단하군.”
“저 크기에 선명한 오러라면 아까 그 앤디라는 사람인가?”
“저 거대한 전장에서 눈에 확 띄는군. 적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며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정말….”
모두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보았다.
그 사내는 엄청난 검술로 미드로 기사들을 요리했다.
상대방의 오러가 맺힌 검과 동시에 갑옷을 입고 있는 몸뚱이까지 단번에 베어버렸다.
“정말 대단하군.”
“미드로 기사단이 상대가 안 되는데?”
“정말 실력 차이가 너무 나. 다른 기사들도 대단하지만, 저 앤디라는 사내는 정말이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군.”
“저 사람 혼자 있어도 이백 명의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는 것 아냐?”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서, 설마.”
“하하!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모두 머릿속으로 가능성을 점쳐 보고 있었다.
그때, 요새 쪽에서 붉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요새를 점령했다는 사인이었다.
저 밑에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드로 왕국 기사들이 패잔병이 되어, 전의를 상실한 채 항복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한 병사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번 전쟁은 너무 싱거운 거 아냐?”
“싱거운 게 아냐. 행운이지.”
“나는 칼도 한번 휘둘러보지 못했는데.”
“큭큭! 저런 말 한 녀석치고 끝까지 살아남는 녀석을 본 적이 없지.”
“맞아, 맞아.”
동료들의 무시에 그 사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너희가 내 실력을 알아! 아냐고!”
“몰라도 알 것 같다.”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그 사내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이씨!”
“이씨이?”
순간, 사내가 당황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무시한 사람의 정체가 3연대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말에 3연대장이 피식 웃었다.
“자, 이제 그럼 눈요기도 끝났겠다, 승리를 만끽하러 가볼까?”
“야호!”
“그럼 빨리 본진으로 이동한다! 이동!”
모두 일반적인 완승을 거둔 상황을 즐기며 빠른 걸음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3
이번 전투로 인해 확실한 승기를 잡은 헤르만 왕국군은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드로 왕국의 기사의 절반 이상이 이번 첫 번째 전투로 섬멸 당했다.
그 기세를 몰아 산맥에 진지를 틀었던 4개의 연대와 8개의 대대를 쓸었다.
이 이상의 대승이 어디에 있겠는가.
전 대륙이 헤르만 왕국의 선전에 놀람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힘을 보일 줄 몰랐기 때문이다.
미드로 왕국의 본진이 후방에 위치한 카레오 성으로 퇴군하는 결정을 내렸다. 후방에서 잃은 병력을 정비하겠다는 뜻이다.
헤르만 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경선을 점거하고, 본진을 이끌고는 카레오 성을 향해 이동했다.
모두들 기뻐하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안드레이와 수뇌부들은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짜는 중이었다.
“요원들의 보고가 왔습니다.”
“어떤 것인가?”
“적들의 병력이 카레오 성으로 총집결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겠다는 뜻인가?”
“아마도 그러할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훗! 웃기는군. 그들의 병력 규모는?”
안드레이의 물음에 장교가 대답했다.
“1개 보병 군단과 2개 기병사단, 추가로 1개 용병 여단과 근위 기사단을 포함한 450명의 기사단이 있습니다. 아직도 각 영지에서 용병들과 병사들을 추가로 징병하고 있고, 모두 지속적으로 카레오 성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총병력의 수는?”
“기사단을 제외하고 용병단까지 합쳐 9만에 달합니다. 추가로 모집될 것이라 예상되는 수를 말씀드리자면, 최종 병력의 수는 12만에 육박할 것으로 보입니다.”
“오호! 생각 이상이군.”
안드레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습게 보실 문제가 아닙니다.”
“난 전혀 우습게 보고 있지 않았다.”
안드레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자, 그 말을 꺼낸 사단장이 함구했다.
“실례했습니다.”
장교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카레오 성에 화이트 왕국의 바이론 기사단 깃발이 보이고 있습니다.”
“흥! 동맹이라도 맺었나 보지. 이대로 된 거 그냥 같이 쓸어버리면 되겠군. 안 그래도 하는 짓이 얄미운 왕국이었는데. 그들이 마법진을 이용하여 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
“삼 퍼센트 미만입니다. 그 정도 대규모 마법진을 그릴 수 있는 능력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저들의 마법 전력으로는 천 명 이상은 절대로 무리입니다.”
안드레이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빛을 보였다.
“그럼 우리들은 이렇게 작전을 짜야겠군. 국경선에 있는 수비군과 잔존 병력을 싹 소집하여 전투를 벌이고, 다시 원상 복귀를 하는 거야.”
“전 국력을 한곳에 모아 일전을 벌이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그렇게 되면 총병력이 얼마나 되지?”
“대략 17만 정도 될 것입니다.”
“17만이라…. 그렇다면 순식간에 밀어붙일 수 있겠군.”
“그건 그렇지만, 그 작전을 사용하신다면 본국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도박이네.”
“흠….”
“최소한의 병력을 놔두고, 그들을 풀로 가동시키는 거지. 그렇게 병력이 유지가 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야. 그리고 빼돌린 병력으로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벌이고, 승기를 잡기 무섭게 원상 복귀를 시키는 거야.”
“분명 말은 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될지는….”
“걱정하지 말게. 잘될 거니까.”
안드레이가 힘을 주어 말하자, 왠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아. 그 대신 폐하를 미리 어딘가로 피신을 시켜 드려야겠군.”
쿠렌트 제국의 밀실.
한 기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밀실 안에 자리하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전하.”
밀실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앉아 있던 젊은 사내가 눈을 떴다.
순간, 안광이 번뜩이며 주변 사위를 점했다.
기사가 움찔 놀라서 머뭇거리자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묵직한 저음이 밀실 안을 가득 메웠다.
“이번에 미드로 왕국과 헤르만 왕국의 전쟁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사옵니다.”
“놀라운 일?”
무미건조한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영상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분명 전하께서 관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기사의 확신 어린 목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가 밖에 나가서 마법사를 불러들였다.
마법사는 안에 들어서자 사내에게 공손한 예를 보인 후, 주문을 외웠다. 그와 동시에 수정구 위로 선명한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내가 영상을 지켜보며 관심 어린 반응을 보였다.
“오러 라인?”
“오러 라인이라니요?”
기사의 물음에 사내가 말했다.
“오러 블레이드와 오러 파이어는 알 것이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가 자신의 검을 뽑아들더니 말했다.
“오러 파이어가 정제되어 빛을 발하면….”
우웅웅!
“이런 정돈된 형태와 빛을 머금게 된다.”
기사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놀라 숨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이 빛은 자신이 존재한 공간에 머물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움직이면 빛의 선을 연출하지. 나는 이것을 오러 라인이라고 부른다네.”
“아, 아름답군요.”
기사의 그 한마디에 사내가 피식 웃으며 오러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아름답지.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가져오는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을 걸세.”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내였다.
감격에 젖어 있던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는 의아한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는 말씀은 지금 저 검사가 사용하는 기술이 오러 라인이라는 것입니까?”
“내가 봤을 때는 그러하군.”
사내가 저렇게 말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뜻이다.
누가 사내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기사는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영상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몸놀림과 검술이었다.
“저자는 누구인가?”
“아, 아직 확인 중에 있습니다.”
사내는 말을 다 듣기도 전에 혼잣말을 흘렸다.
“놀랍군. 아직 스물도 안 돼 보이는 앳된 얼굴이거늘, 오러 라인의 경지라니.”
사내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기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저 기사의 정체를 파악하여 내게 알려 줄 수 있겠나?”
그 말에 기사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사내가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큰 사건이 곧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입니다, 탈리온 공작 전하.”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지금 이 수수하게 생긴 사내의 정체가 세계 최강의 검사이자, 초인으로 불린다는 탈리온 공작이라는 말이 아닌가!
무엇보다 그의 알려진 나이는 이미 여든이 넘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사내는 아무리 봐도 서른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탈리온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고맙네.”
그리고 영사가 끝난 수정구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눈을 감았다.
기사는 그런 자신의 우상 탈리온 공작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밀실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