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27화 (40/68)

제6장. 영지전 (2)

1

수천 명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곳 공터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고요했다.

그 한가운데,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덤벼들었다는 사실이 무색해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속도로 기절한 5명의 기사들과 2명의 귀족, 아니 남은 2명의 첩자들이 앤디를 중심으로 쓰러져 있었다.

“후후후! 개수작 부리지 마라. 그렇게 정신을 잃으면 그냥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나 보지? 나를 너무 물로 본 거야.”

앤디가 쓰러진 이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너희 때문에 개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하지만 일어날 시간은 주지. 가장 늦게 일어난 인간은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야.”

말과는 다르게 행여나 일어날까 싶어 속삭이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앤디였다.

그는 자신의 검을 처음 막아섰던 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툭툭 건드려 상태를 살피더니 거침없는 발길질로 정강이를 찼다.

쩌억!

“끄오오오오옥!”

마치 뼈가 사방으로 금이 가는 듯한 소리였다.

어떻게 차면 저런 타격음이 나는지 모르겠지만, 효과는 탁월한 듯 보였다. 정신을 잃고 있던 녀석이 눈을 부릅뜨고 비명하며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마치 사람에게 밟힌 운 없는 지렁이와 흡사해 보였다.

앤디가 씨익 웃는데, 그 미소가 사악하다 못해 사이해 보일 정도였다.

“드디어 일어났군.”

상식을 초월하는 고통에 이성도 없이 본능적으로 비명하는 모습이 앤디에게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님을 깨달은 앤디는 다가서서 팔을 높이 치켜들고 뺨을 후렸다.

쩍! 쩍! 쩍! 쩍! 쩍!

기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맞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여리게만 보이는 손바닥이었지만, 그 파괴력은 바람피다 걸린 트롤이 여자 친구 트롤에게 싸대기를 맞는 파워와 비슷할 정도였다.

그 결과 사방으로 비산하는 치아들.

우수수수수!

그 모습이 마치 다 익은 강낭콩 껍질이 터지며 사방으로 비산하는 콩알들 같았다.

기사는 어디 가고 만신창이가 된 사내 하나가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헐떡이고 있었다.

앤디는 손을 탁탁 털고는 콧방귀를 뀐 후,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름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쓰러져 있던 4명의 기사와 2명의 귀족이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이들의 머릿속에 수치스럽다는 단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조금 전에 동료이자 수하였던 한 기사가 개처럼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물론 반발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지나가던 양아치가 아니라 자신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무위의 초고수였다.

까불다가 한 대 더 맞는 수가 생긴다는 말이다.

앤디가 말을 걸었다.

“그런데 저를 저승의 길동무로 삼겠다던 분들은 다 어디 가셨습니까?”

남아 있던 기사 넷이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누가 그 말을 했었지?”

두 첩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앤디의 시선을 받은 두 첩자가 몸서리를 치며, 무릎을 꿇고 있는 4명의 기사들을 향해 다그쳤다.

“대, 대체 누가 그런 망발을 했단 말인가!”

기사들의 눈에서 분노가 이글거렸다.

자신들이 누구 때문에 이 꼴이 되었는데, 누가 어디서 큰 소리냐고 외치고 싶어 하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것이 이들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누구였더라….”

앤디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살기를 흘리자, 모두 화들짝 놀라 양손을 휘저으며 자신의 옆 사람을 가리켰다.

눈썹 없는 기사 놈이 가장 먼저 말했다.

“저, 저는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녀석이 말을 꺼냈습니다!”

“맞습니다! 저 녀석이 확실합니다!”

그러자 창백하게 질린 눈썹 없는 녀석이 눈물을 질질 흘리며 하소연했다.

“저, 정말 아닙니다. 정말 아닌….”

앤디가 웃으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저는요, 거짓말하는 사람이 가장 싫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한 대 덜 때릴게요.”

순간, 눈썹 없는 녀석이 갈등했다. 한 대를 덜 때린다는 그 한마디에 흔들린 것이다.

말이 한 대지, 앤디의 한 대는 자신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원 펀치가 아니었다.

결국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 제가 그런 모, 몹쓸 말을 하, 한 것 가, 가, 같습니다.”

입술을 악다물고 억울하다는 듯한 어투로 이실직고하는 녀석이었다.

앤디가 입꼬리를 올리자 드러난 하얀 치아.

그 치아가 달빛에 반짝거렸다.

그리고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침한 웃음소리.

“큭큭큭큭큭!”

마치 그 웃음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순진한 녀석 같으니라고. 큭큭큭!’이라고 말이다.

그 순간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앤디가 몇 대를 때린다고 확정지어 말한 적이 없었다.

실컷 때려 놓고서 나중에 원래 때릴 것에 한 대 덜 때렸다고 말하면 끝인 것이다.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각보다 빨리 뵙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같이 말이다.

눈썹 없는 녀석의 감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어금니 꽉 깨물어라.”

앤디의 주먹이 녀석의 안면을 향해 속도의 가감 없이 곧장 날아갔다.

퍼어어억!

“꾸에에에에에에엑!”

“엄살 피우지 마!”

안면 하악골이 자신의 영역을 이탈하여 결국 턱뼈가 부러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 주먹은 한 녀석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녀석들에게 골고루 같은 힘으로 분배하여 갈겨 주었으니 말이다.

퍽퍽퍽퍽!

“꺼어어어억!”

“부, 불효자는 웁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바닥에 혼을 잃은 듯한 녀석들이 뒹굴고 있었다.

녀석들을 보면 딱 한 단어가 생각날 정도였다.

재기 불능.

바닥에서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시위라도 하듯 껄떡거리며 신음을 흘리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앤디는 집안 청소라도 마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앤디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분노를 아직도 다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안드레이가 다가왔다.

“그만하면 되었다.”

“….”

앤디가 한숨을 토하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해도 자신이 손을 써서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상자들.

“수고 많았다. 더 아파할 필요 없다.”

“안 아파요.”

“그런데 표정은 왜 그러느냐.”

“제 표정이 어떤데요.”

“웃고 있지 않느냐.”

“웃고 있는데, 왜 아프냐고 하시죠?”

“네가 웃음을 짓는 이유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곳이 아프기 때문이다.”

앤디가 피식 웃었다.

이러다간 밑도 끝도 없이 이런 선문답 같은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걱정 마세요. 그만할 테니까요.”

그렇게 대꾸를 하던 앤디의 시선이 구석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두 첩자를 향했다.

두 첩자들이 두려운 얼굴로 앤디의 눈길을 피했다.

“저들로 인해 이런 상황까지 왔다는 사실에 분노가 나긴 하지만, 우리가 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저들은 폐하께서 직접 벌을 내리실 것이다.”

“네, 알아요.”

그때, 셀린이 두 첩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안드레이가 시킨 일을 하려는 것이다.

“당신들의 배후가 누구죠?”

순간, 두 첩자가 미친 듯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둘의 입에서 ‘맥도널드 후작’이라는 이름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맥도널드 후작?”

근처에 자리하고 있던 왕실 1기사단 단장의 목소리에 제7군장이 대답했다.

“미드로 왕국의 실세를 장악하고 있는 맥도널드 후작을 말하는 것 같군요.”

“미드로 왕국?”

두 첩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쿠렌트 제국이 아니라?”

“미드로 왕국이 대체 왜?”

갑자기 열띤 논의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혼란에 빠진 모습을 보이다가, 두 첩자를 통해 얻어낸 단편적인 지식들을 토대로 하나의 결론점에 도달했다.

“그 새끼들이 감히!”

“뒤에서 개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이 말이지?”

으드득!

이곳저곳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안드레이만큼은 신중한 표정으로 미드로 왕국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로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누군가의 어떤 계략일 수도 있는 탓이다.

그때, 앤디가 꿀꿀해하던 표정을 활짝 펴고 탄성을 토했다.

“이, 이런!”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앤디를 향하게 되었다.

이미 앤디는 이들에게 영웅이었다. 일거수일투족 사소한 모든 것 하나까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셀린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앤디에게 의문 어린 표정을 던졌다.

앤디가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며 큰 고민을 하는 듯 신음했다.

“아아! 이럴 수가! 어떻게 내가 이런 실수를 할 수가 있는 거지! 아아!”

셀린이 나지막이 질문을 던졌다. 왠지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무슨 일 있… 어요?”

앤디가 슬쩍 돌아보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찾아냈어요.”

“네? 그게 무슨?”

앤디는 주먹을 꾸욱 움켜쥐며 말했다.

“저 녀석 말이죠, 저 녀석!”

“저기 쓰러져 있는 눈썹 없는 기사요?”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은 한 대 덜 때린다고 해줬는데, 다 똑같이 때린 것 같아요.”

“쿨럭!”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안드레이의 입에서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그게 지금까지 그토록 고민을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나요?”

“그럼 중요하지요. 저는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지….”

끙끙 앓던 앤디가 고개를 들고 눈빛을 반짝였다.

“아! 좋은 방법이 있었군.”

그는 그 반짝이는 시선으로 바닥에 쓰러진 녀석들을 돌아봤다.

움찔!

쓰러져 있는 녀석들이 무엇인가 본능적으로 파악했는지 꿈틀거렸다. 정신을 잃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놀라운 생존 본능의 결과라 아니 말할 수 없었다.

모두 앤디가 무슨 짓을 하는지 주시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생각이 떠올랐기에 저렇게 맑고 시원하며, 상큼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어떤 생각이신데요?”

앤디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셀린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 녀석을 빼고 나머지 녀석들을 한 대씩 더 때리면 되는 거잖아요!”

“아!”

앤디는 정말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으쓱거렸다.

셀린은 약간 기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녀석들을 돌아봤다. 정말로 싫은 녀석들이었지만, 왠지 측은한 마음이 일었다.

앤디가 한 발 앞서며 말했다.

“생각했으면 실천을 해야죠. 흐흐흐!”

천사와도 같은 외모를 지닌 앤디는 자신의 모습과 달리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려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녀석들 틈으로 들어가 한 녀석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셀린은 단지 자신의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

지만, 녀석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니 눈썹 없는 녀석은 뿌듯한 표정으로 긴장 없이 누워 있었고, 나머지 녀석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셀린은 지금 이 장소에서 처음으로 기절한 사람도 표정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퍼퍽!

“쿠헉!”

그 비명을 시작으로 기절해 있었던 기사들이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으로 고통을 하소연하듯 전신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그 표정들이 얼마나 리얼한지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들이 함께 인상을 구기며, 고통을 느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일 지경이었다.

그때, 앤디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토했다.

“이, 이런!”

“왜요?”

셀린의 질문에 앤디가 대답했다.

“실수로 이 녀석을 두 대를 때리고 말았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앤디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쓰윽 돌렸다.

그 눈빛은 번쩍이며, 반 시체에 가까운 녀석들을 향해 돌아갔다.

정신을 잃었음이 분명할 눈썹 없는 녀석의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안드레이가 씁쓸한 표정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쯧!”

2

파핫!

순간 이동 마법진에서 환한 빛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바로 안드레이, 앤디와 셀린, 총대장과 기사단장이었다.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헤르만 8세가 웃으며 다가섰다.

“수고들이 많았군.”

“신 안드레이, 폐하를 뵙습니다.”

안드레이를 시작으로 모두 인사를 했고, 그 예를 받은 헤르만 8세가 보기만 해도 듬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고맙네. 그럼 안으로 들게나.”

헤르만 8세가 따뜻하게 그들을 맞이하며 발걸음을 궁 안으로 돌렸다.

얼마 후, 전략 회의실 안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폐하, 절대로 그냥 넘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것은 미드로 왕국이 우리 헤르만 왕국을 향해 보이는 명백한 도발입니다!”

“그냥 있다간 모든 다른 왕국이 우리 왕국을 우습게 보고 폄하할 것이 확실합니다!”

첩자들을 통해 미드로 왕국이 헤르만 왕국의 어떤 정보를 빼갔는지 모든 파악이 끝났다.

헤르만 왕국의 충신들이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까지 보내졌던 그 정보들로 인해 어떤 상황에 처했고, 그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추산이 가능해졌다.

그 정보 손실로 인한 피해를 금액적으로 산출해보니, 약 5년치 국가 정책 비용에 맞먹을 정도였다.

눈 뜨고 있는데 코를 베어간 것이다.

헤르만 8세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했다.

지금 나라의 안정화 작업이 채 정리가 되지도 못했는데, 이런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헤르만 8세는 조심스럽게 안드레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드레이라면 이 상황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경.”

“예, 폐하.”

“경의 생각이 듣고 싶구려.”

“소신 역시 다른 경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다만, 하나 걱정이 되는 것이 있사옵나이다.”

“그게 무엇이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미드로 왕국의 계획에서 생긴 일이냐는 것이지요.”

모두가 웅성거렸다.

사실 다들 그 부분에 대해서 꺼림칙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이 모든 증거가 미드로 왕국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미드로 왕국에서 이런 짓을 했을까요? 혹시 다른 작전 세력이 그렇게 믿도록 우리를 유도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다른 작전 세력이?”

“저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른 작전 세력이 무슨 이유로 미드로 왕국과 우리를 이간질한다는 말이오?”

“그것에 대답을 하려면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안드레이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수군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 누구냐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분명히 중요합니다.”

다시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모두의 머릿속에 어떤 나라의 이름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헤르만 8세가 깊은 한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쿠렌트 제국의 개입 확률은 얼마나 되오?”

“높습니다.”

“얼마나 말이오?”

“제가 확신을 할 정도로 높습니다.”

안드레이의 단호한 대답에 모두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쿠렌트 제국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 아니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쿠렌트 제국을 향하고 있는 제 분노가 얼마나 포함이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술적으로 확률을 따지는 것이 불가능하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렇구려. 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니 쿠렌트 제국에 높은 비중을 거는 것 아니오?”

그 말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짐작을 하고 계셨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처음에 쿠렌트 제국의 첩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모두 미드로 왕국의 첩자였습니다. 첫 번째로 쿠렌트 제국의 첩자를 발견했음에도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쿠렌트 제국으로 보냈던 첩자의 정보가 시민으로 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내용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모든 왕국이 의무적으로 심어놓은 첩자의 수준으로 봤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모든 첩자들이 미드로 왕국의 첩자로 밝혀졌습니다. 그들로 인한 피해액은 상식을 초월할 정도임이 밝혀졌고요. 당연히 지금까지 막연하게 쌓이기만 했던 모든 분노가 미드로 왕국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한데, 안드레이는 이 자연스러운 상황이 오히려 켕겼다.

마치 이렇게 되라고 작업이라도 한 것처럼 일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쿠렌트 제국이 수를 쓴 것이 사실이라 가정을 한다면,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고 있으시오?”

“당연히 전쟁입니다.”

“당연히 전쟁이라니…. 서, 설마!”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헤르만 왕국과 미드로 왕국의 전쟁을 계기로 정벌 전쟁을 일으킬 생각인 모양입니다.”

헤르만 8세가 흥분한 표정으로 다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그 수에 넘어가면 안 되지 않소?”

“물론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태의 추후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신료들은 지금이 보통 사태가 아님을 깨닫고는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듯 딱딱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사태를 이렇게까지 정리한 안드레이에게 경외심을 품었다.

그때 안드레이가 말했다.

“그러나.”

“그러나?”

“미드로 왕국이 진정으로 우리 왕국을 이용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가만히 둬서는 안 되겠지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쿠렌트 제국의 수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저희가 싸운다고 쿠렌트 제국의 수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수에 쿠렌트 제국이 넘어오게 하면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대, 대체….”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드레이를 올려다보았다.

안드레이는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꼬리에 머금을 뿐이었다.

3

“안드레이라고? 헤르만 왕국?”

“그렇사옵니다, 폐하.”

베리오스 대륙의 실질적 지배자, 쿠렌트 제국의 절대 황권을 장악하고 있는 쿠렌트 황제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20년 전, 전쟁이 끝나고 지금까지 나른하고 무료하기 그지없던 목소리이던 그가 처음으로 생기 어린 목소리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고?”

“그렇다 하옵니다, 폐하.”

순간, 쿠렌트 황제가 눈을 반짝이며 웃음을 흘렸다.

“큭큭큭! 재미있군.”

“폐하, 단순한 일이 아니옵니다. 과거 안드레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거짓 정보를….”

휘슬 백작의 말에 쿠렌트 황제가 피식 웃고는 황좌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말했다.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지금 이렇게 재밌어졌는데 말이다.”

“저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놔둬라.”

“예? 예, 알겠습니다.”

황제가 하는 말의 진의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의문사를 던졌던 휘슬 백작은 곧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쿠렌트 황제가 자신이 토를 달았다는 사실에 인상을 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까지 죽은 척하고 있던 안드레이가 그냥 나타났을 리는 없고. 복수인가? 지루할 뻔했던 일이 그로 인해 재밌어질 것 같군. 그래, 그가 나타나서 무엇을 했나.”

“폐하께서 관심을 보이실 만큼 큰일은 없었습니다….”

“그것의 판단은 경이 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라.”

“예, 폐하.”

휘슬 백작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황제를 항상 곁에서 마주하지만 언제나 어렵다. 경외감이랄까. 쿠렌트 황제의 전신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운은 엄청난 중압감이 되어 주위의 대소신료를 압박했다. 그 중압감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정보부와 외교부의 신료들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어지자 쿠렌트 황제는 그 이야기에 흠뻑 빠진 듯한 시선으로 경청했다.

“재밌군, 재밌어.”

“….”

“전쟁인가?”

“현재로서는 그럴 확률이 높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큭큭큭큭큭! 드디어 우리의 계획에 결실이 맺을 때가 온 것인가. 가슴이 뛰는군.”

쿠렌트 황제의 광기 어린 모습에 모두 숨을 멈췄다. 괜히 그의 시선을 받아봤자 명줄만 짧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슬슬 작업을 진행해야지.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라.”

“사신을 말입니까?”

“그래. 이야기는 뭐든 좋으니 알아서 붙여라.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예, 폐하.”

“좋군. 크크큭! 안드레이가 살아 있다면 나를 즐겁게 해주는 데 모자람이 없겠지. 분명히 우리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설칠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복잡하게 수를 쓸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전쟁에 합류할 수 있게 되겠지.”

지금까지 잠시 접고 있었던 대륙의 정복 전쟁에 대한 꿈이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그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를 높이 평가한다고?”

쿠렌트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그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던 휘슬 백작이 식겁하여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지. 나는 그 누구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능력 이상을 보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지. 그러나 안드레이 그자는 달라. 그자는 나와 같다.”

“폐, 폐하, 무슨 그런….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관료들의 반응에 쿠렌트 황제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것이야 지켜보면 알 일이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뛰는군.”

쿠렌트 황제는 한껏 달아오른 표정으로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놀랍게도 진정 쿠렌트 황제는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구석에 고개를 잔뜩 숙인 채 자리하고 있던 한 시녀를 가리키며 쿠렌트 황제가 말했다.

“그런데 저 아이는 처음 보는구나.”

“저 아이는 오늘 처음….”

“이리 와보거라.”

탐심이 가득한 눈빛을 번뜩이며 시녀를 훑기 시작했다.

공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쿠렌트 황제. 그에게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나같이 끔찍한 소문들이었다.

공포로 창백하게 질려 있는 시녀의 얼굴.

종종걸음으로 다가서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머릿속도 하얗게 백지처럼 변해갔다.

말단이기에 황제의 곁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건만.

그렇다고 부름을 거부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수도 없었다.

공포가 극에 다르다 보니 오히려 주저앉는 게 더 힘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쿠렌트 황제가 혀를 찼다.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군.”

흠칫!

어째서일까. 분명 위로를 하려는 듯한 어투인데 그 말이 더 무섭게 들렸다.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버린 시녀의 얼굴.

쿠렌트 황제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신경을 껐지만, 주위에 있는 대신들의 입장은 달랐다. 시녀가 쿠렌트 황제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하게 된 탓이다.

시녀의 모자란 행동에 화가 치민 대신들이었지만, 황제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가 벌하지 않는데 자신들이 나서서 행동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 자리를 어영부영 벗어난다고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쳐도 이해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녀 따위가 감히 자신들의 심장을 철렁거리게 한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황제와 거리가 멀어지자 오들오들 떨던 시녀가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다행히 주위에 있던 동료 시녀들의 도움으로 바닥에 나자빠지지는 않았지만, 쿠렌트 황제의 인상이 가볍게 구겨졌다.

그것을 목격한 대신들의 등줄기로 오싹한 두려움과 동시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 쿠렌트 황제가 말문을 열었다.

“이봐.”

“예, 폐하.”

이 성질 더러운 황제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뻔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시녀를 죽이라는 이야기겠지….’

물론 내색은 할 수 없었다. 그 분노가 자신에게 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기분에 따라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몇 명이 죽어나갔던가.

그것도 사소한 일로 말이다.

대신들이 겁에 질려 있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녀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목숨이 어찌 될지가 걱정인 탓이다.

한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쿠렌트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휘슬 백작.”

“예, 폐하.”

“짐의 얼굴을 보라. 고개를 들라.”

묵직한 저음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실로 명령받는 마리오네트처럼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쿠렌트 황제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어떠하느냐.”

그 말에 휘슬 백작이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머릿속으로는 ‘저 미천한 계집년 때문에 내가 오늘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 폐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자, 잘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다시 봐라.”

그 말에 대신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던지며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누구 하나 고개를 들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눈 마주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힘들게 초점을 맞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다시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황제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휘슬 백작은 쿠렌트 황제가 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떠하느냐?”

“신은….”

“짐이 그리 무섭느냐? 나름 인자한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저 시녀가 저리 떠는지 모르겠구나.”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황궁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적막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뜻밖의 말에 사고가 정지되어 그 말의 진위를 이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한참 후…

휘슬 백작이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리며 쿠렌트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쿠렌트 황제가 다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 어색한 표정이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휘슬 백작의 머리에서 처음으로 공포라는 단어가 사라지게 되었는데, 그렇게 긴장감이 풀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푸… 헛!”

순간, 자신이 보인 실수를 깨닫게 된 휘슬 백작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더라도 쿠렌트 황제를 비웃은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등 뒤쪽에서 술렁이는 느낌이 이는 것을 보니, 대신들 역시 당황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인 휘슬 백작에게 쿠렌트 황제가 다시 질문했다.

“어떠한가?”

마치 조금 전 상황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어투였다.

그것에 용기를 얻어 휘슬 백작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매력적이십니다.”

“그러하느냐?”

“예, 폐하.”

“한데, 이 매력적인 얼굴을 보고 겁에 질리다니. 으득!”

그 말에 찔끔한 대신들.

시녀 하나가 죽어나가겠구나, 라고 모두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으로 끝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들에게는 버러지와도 같은 시녀 따위의 목숨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다만, 황제가 시녀 목숨 하나로 만족하겠느냐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예상과 달리 황제는 시녀를 죽이네, 살리네 따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시녀를 짐의 전속 시녀로 보내라.”

그 말에 휘슬 백작이 당혹감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아, 알겠사옵니다, 폐하.”

“짐 밑에서 짐의 시중을 들다 보면 짐의 매력을 깨닫게 되겠지. 후후!”

“부, 분명 그, 그리될 것이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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