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25화 (25/68)

제4장. 주군

1

“이제 슬슬 시작하지.”

안드레이의 말에 병사들이 진형을 압박하듯 앞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화살과 마법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최대 사거리를 조금 넘긴 위치인 3백 미터 앞까지 다가갔다.

일반적인 활의 사거리는 150미터 전후이지만, 성벽 위에서의 사격이라는 점을 계산했을 때 안전거리는 250미터 정도로 봐야 한다.

3백 미터라면 웬만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저런 작은 성에 공성 병기가 있을 리도 만무하고, 있어봤자 자신들에게는 대마도사 안드레이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저 성안에도 마법사가 분명히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몇 명 잡겠다고 그 귀한 마법사가 나설 리 없다.

영주 보호하겠다고 찰싹 달라붙어 있으면 모를까.

언제부터 있었는지 앤디가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

“뭐냐.”

“그래도 뭔가 수를 쓴 거죠? 물론 그때 회의에서 스승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자신감 있게 행동하기에 맞는 어떤 뭔가가 있을 법한데요?”

“큭큭! 시끄럽다, 제자야.”

앤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안에다 사람을 풀었군요.”

안드레이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언제 푼 거예요?”

안드레이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을 만한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풀었다.”

“그럼 이미 작전은 그때부터 짜셨군요. 그럼 그 이야기를 하지, 어째서 빼고 작전을 이야기하셨어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안드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앤디를 넌지시 보았다. 앤디는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또 퀴즈 낸다, 또. 교육 수준을 넘어서 병이라니까. 무슨 말만 하면 다 맞혀 보래. 그냥 가르쳐 주는 법이 없어.”

“큭큭! 원래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그러니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파봐라.”

앤디가 자신의 뒤에 자리하고 있는 셀린을 끌어들였다.

“셀린 생각은 어때요?”

“뭐가요?”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말이에요.”

“난 안 궁금한데요?”

앤디는 한방 먹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표정에 호기심이 가득한데 그 말이 설득력 있어 보입니까?”

“난 정말 별로예요. 알면 좋지만, 아니어도 그만이랄까요?”

셀린이 그렇게 말하며 오묘한 눈빛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마치 눈빛이 ‘그러니 어서 맞혀서 내 귀를 즐겁게 해줘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 봐.”

“앤디는 마치 스승님 제자가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앤디는 셀린을 향해 입술을 빼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

안드레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뭐라고?”

“제가 스승님의 제자인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녀석.”

안드레이가 시원하게 웃더니 앤디의 멱살을 덥석 움켜쥐었다.

“다 들었다. 퍼뜩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그리고 으르렁거리자 앤디는 눈에 힘을 풀고 피식 웃으며 깐족거렸다.

“다 들었다면서요? 그런데 또 뭘 물어보세요?”

“이놈의 자식이!”

“아이고! 스승이 제자 잡네! 제자 잡…!”

안드레이가 손을 뻗어 재빨리 앤디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곳에서 제자와 실랑이를 하다니, 이게 무슨 추태라는 말인가.

안드레이는 다행스럽게도 자신들에게 시선을 돌린 이가 몇 없음을 알고는 그들에게 일일이 미소를 던져 주었다.

그 미소의 뜻은 ‘죽을 때까지 입 다물고 살지 않으면 신상에 해로울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미소를 받은 몇몇 병사들이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다.

안드레이는 잘난 자신의 제자 멱살을 놔두고, 양손으로 구겨진 목 주위를 탁탁 털어주었다.

“알겠다, 잘난 제자야. 그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그럴까요, 멋쟁이 스승님?”

“끝까지 뺀질거리긴. 대체 누굴 닮았는지! 쯧!”

“낳아주신 것은 부모님을 닮았지만, 제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뭘?”

“그 사부에 그 제자라는 말 말이죠.”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안드레이가 뭐 씹은 표정으로 앤디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만 말해주마. 그것은 바로 내 지휘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지금 최고 지휘관이 스승님인데 누가 뭐라고 하나요?”

셀린의 물음에 안드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신뢰의 문제다.”

“신뢰요?”

“그렇단다. 저들이 내 명령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명령을 듣는 것과 믿음으로 명령을 받드는 것은 그 차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앤디와 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나는 나중을 위해 이번 작전을 투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투자요?”

셀린의 의문 어린 목소리에 안드레이가 대답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이렇게 해서 요렇게 했다, 그러니 걱정 말고 내 작전을 따라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생색내는 것이고, 잘난 척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준 후에 이런 방법도 있다, 그것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라고 모두에게 건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해줬다. 그로 인해 저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내가 알려 줬다는 사실이 깔려 있게 되지. 나중에 잘못되었을 경우 책임을 돌려야 할 테니까.”

“그렇군요.”

“무엇보다 기일이 문제다. 내가 지금 실행하는 작전은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내부 갈등이 생길 만한 요소가 벌어질 수 있도록 넉넉한 시간이 말이다. 예를 들어 식량이 떨어졌다거나, 상명하복을 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거나, 불만이 표출되어 거친 상황이 연이어 터지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런 상황이 하루 이틀 만에 일어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오늘은 딱 나흘째 되는 날이군요.”

“시기적으로는 아직 모자라지. 그 사실을 다른 지휘자급 작위를 지닌 기사들도, 한두 번 전투를 경험한 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이 무리해서 명에 토 달지 않고 나서는 이유가 뭐죠?”

“내가 총지휘관이기 때문이지. 총지휘관이 명을 내렸는데 토를 단다면, 그것은 즉결심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만일 내 명이 틀렸다고 해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내 말대로 안에서 문이 열린다고 쳐봐라. 저들에 대한 내 위상이 얼마나 높아지겠느냐? 이번 한 번의 상황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면, 저들은 차후 웬만큼 불가능하다고 짐작될 만한 작전을 펼쳐도 나를 믿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그렇겠군요.”

“안의 상황은 어떻죠?”

앤디의 물음에 안드레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지금이 흔들기 딱 좋은 적기다.”

“헐! 사흘 만에 저 예시의 사태를 만드셨다는 말이에요?”

“후후후후!”

왠지 안드레이의 콧대가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전혀 잘난 척하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단한 인간이라는 경외감만 들 뿐이었다. 자신을 조금 더 낮추기 위해 일부러 저런 과장된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말은 쉽지, 안드레이가 한 말은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우선 자신이 뭔가를 결정지었을 때 차후 어디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미리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대처할지 정하고, 그것에 대해 확실한 대처 방안을 실행해야 한다.

실행을 마친 후 계획대로 움직여서 예측된 상황을 만들고, 그와 같은 최상의 결과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안드레이는 자신이 이곳을 치기로 마음먹었을 때 얼마의 군대가 자신을 따라 어느 정도 속도로 움직이고, 그 와중에 저 영지의 영주가 겁에 질려 도망칠 타이밍을 놓쳐서 공성할 것을 예측했다.

그래서 군대가 움직이기 전에 수를 써서 자신의 끄나풀들을 안에 쑤셔 넣고, 내부의 사람들을 부추기는 등등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안드레이 역시 최대한 기사와 병사들을 독려하여 자신이 이끈 군대가 계산한 시간에 제때 도착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군사 수뇌부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묘수를 쳐서 성공했다.

그리고 오늘이 온 것이다.

이 모든 게 고작 그가 움직이는 병사들의 신임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 것이라니, 정말이지 엄청난 자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예측대로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감히 어떻게 하나의 상황 자체에다가 사용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는가.

“역시 스승님은 대단하세요.”

셀린이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경외의 시선으로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안드레이의 작전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2

몇 시간이 흐르고…

꾸우우우우! 쿵!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도개교가 내려오며 거대한 성의 문이 입을 쩌억 벌렸다.

왕실군은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병사들과 용병들, 몇몇 기사들이 창백해진 표정으로 시립한 채 왕실군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 주위에 핏자국이 흩뿌려져 있는 것을 보니, 몇몇이 반대하는 것을 쓰러트리고 문을 연 듯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옳았다. 첩자, 혹은 반역자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기마가 이곳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외쳤다.

“어떤 자식들이냐! 어떤 자식들이 문을 열었느냐!”

“네 녀석이냐! 너냐!”

서걱! 서걱!

“크악!”

“커흑!”

녀석들이 분노로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자신들의 공격 범위 내에 있는 이들이라고 하면 용병이건 병사건 상관치 않고 베어 넘겼다. 그러면서 외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공격해라! 문이 열렸다면 목숨을 걸고 더 이상 못 들어오게 막으란 말이다!”

어느새 나타난 궁수들이 자리를 잡고 왕실군을 향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방심하고 있던 왕실군의 병사 몇몇이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안드레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희가 막고 오겠습니다.”

왕실 제2기사단이 그 말을 남기고, 안드레이의 고개가 끄덕여지기 무섭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안드레이가 앤디에게 말했다.

“네가 가서 저들의 뒤를 봐주거라.”

“싫습니다.”

“그럼 전면에 나가라.”

“진작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야죠.”

앤디의 신형이 바람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가 막 왕실 기사단 앞으로 치고 나갔을 때는 이미 포른트 영지의 기사들과 왕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충돌을 하고 몇 합을 나눈 시점이었다.

당연히 왕실 기사단의 실력이 월등히 앞섰다.

하지만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을 치우느라, 포른트 영지 기사들에게 동조한 병사들의 합공을 저지하느라 생각보다 쉽지 않은 전투가 진행되었다.

회색이 만연한 표정의 앤디가 앞으로 치고 나서며 말했다.

“후후! 귀여운 놈들!”

앤디의 신형이 앞으로 등장하자 화살비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화살들은 앤디의 검막을 뚫기는커녕 그가 지나간 애꿎은 바닥만 두드릴 뿐이었다.

앤디의 속도가 그만큼 빨랐다는 말이다.

재빨리 바닥을 차서 단숨에 궁수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한숨에 궁수들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궁수들이 피를 내뿜고 있는 자신의 빈 손목을 움켜잡고 바닥을 뒹굴며 고통을 호소했다.

앤디는 지금까지 꼭꼭 숨어 있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5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마법사들은 왕실 기사단을 향해 마법을 준비 중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자신들 앞에 나타난 앤디를 보고 경악했다.

5명의 마법사를 보조하고 있던 8명의 기사들이 앞으로 나서서 방어 태세를 갖췄지만, 앤디의 검에 자신들의 애검들과 팔모가지가 동시에 댕강 잘려 나가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앤디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마법사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마법을 쏘고 목이 잘릴래, 아니면 마법을 거두고 목도 남겨 둘래?”

5명이나 되는 마법사가 가벼운 사인도 하지 않고 서로 동시에 마법을 거두었다. 그리고 양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앤디가 말했다.

“알아서 포박해. 만일 내가 없는 자리에서 포박된 것이 풀어지면 알지?”

앤디의 손이 목을 그으며 입으로 끽! 소리를 냈다.

마법사들은 아둔하지 않았다. 지금 본 앤디의 능력은 자신들이 6서클의 순간 이동이라도 배우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박 주문을 걸어서 스스로를 포박했다.

앤디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전투가 한창인 곳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실력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포른트 영지의 기사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훨훨 날아 다녔다. 칼이라는 날개를 휘두르면서 말이다.

그 칼이라는 날개는 움직임이 아름다웠지만, 그 끝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순식간에 기사 15명과 병사 50여 명을 쓰러트렸다.

단연 돋보이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 중 죽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손에 사정을 두면서 그토록 많은 이들을 상대했다는 말이다.

그것도 위기에 처한 동료들을 구하면서 이룬 전공이었다.

만일 혼자 아무런 걱정 없이 휘몰아쳤다면, 손속을 아끼지 않았더라면 아마 쓰러진 적들의 수는 저기 쓰러진 수의 2배 이상을 훨씬 상회했을 것이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두에는 왕실 기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실 기사단은 지금까지 거칠게 휘두르며 치켜들고 있던 검의 날을 아래로 내리고, 앤디의 종횡무진 활약을 지켜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안드레이 공작 전하의 제자라고 해도….”

“그건 차치하고 지치지도 않는 건가? 싸울수록 움직임이 더 좋아지는 것은 내 착각이야?”

그사이에도 앤디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지휘권을 가지고 있을 법한 기사들을 처단했다. 처단당한 기사들은 바닥을 처량 맞게 뒹굴었다.

적들의 능력이 없는 것도, 반격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앤디에게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그가 월등하게 강했기 때문이다.

마주 오는 검을 맞받아지며 검과 함께 갑옷을 둘러싼 몸뚱이를 베어내는데 어느 누가 버틸 수 있겠는가.

결국 기사들을 이끌고 뛰어나왔던 지휘관이 이를 악물고 후퇴를 시작했다.

“모두 저택으로 후퇴한다!”

지휘관의 명령에 주춤거리며 앤디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진땀을 빼고 있던 기사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기다렸다는 듯 말고삐를 돌렸다.

보무도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던 50여 명의 포른트 영지의 기사들은 지금 10여 명만이 멀쩡하게 남아서 처량하게 꽁지를 돌리고, 누가 뒤를 쫓기라도 하는 양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앤디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쫓아가서 잡을까 말까 하는 것이다.

지금 추격을 해서 공격을 시도한다면 쉽게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자군의 피해 상황과 전시 내용을 파악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디의 근처로 안드레이와 기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수고 많았다.”

“수고는요…. 우리 측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경외 어린 시선으로 앤디를 바라보고 있던 한 기사가 대답해줬다.

“기사 여덟 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고, 병사 세 명이 사망했으며, 스무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생각보다 미미한 피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안드레이의 표정은 굳어졌다. 원치 않은 돌발 상황으로 피해가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앤디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 피해는 생각보다 커졌을 것이다.

앤디 역시 화가 났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면 조용히 혼자 벌을 받아 끝낼 것이지, 애꿎은 사람들까지 꼬여서 이토록 사건을 키운 그에게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했습니까?”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포위를 해놓았습니다.”

안드레이가 물었다.

“비밀 통로에 대한 대책은?”

“병사들을 풀어 인근 동굴과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점해서 미리 보내놓았습니다. 곧 신호가 올 것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폭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안드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폭약을 써서 출구를 막은 건가?”

“예, 그렇습니다.”

“잘했군.”

“감사합니다.”

“자네의 이름이 뭔가?”

안드레이의 말에 기사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는 이미 정자세였지만, 다시 한 번 자세를 고치고 관등성명을 했다.

“제4기사단 쥬베로입니다!”

“알겠네. 앞으로도 수고를 부탁하네.”

안드레이가 가볍게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주자 쥬베로가 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충!”

“그럼 저택으로 가지.”

안드레이의 말에 기사들이 앞장서며 이동을 시작했다.

3

굳게 닫혀 있는 저택의 철문을 바라보며 왕실 기사단이 우뚝 멈춰 섰다.

그 모습에 왕실 기사단의 총대장 레이오트가 앞으로 나섰다.

“조금만 뒤로 가주십시오.”

그 말에 모두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레이오트의 일검이 대각선으로 횡을 그어 내리쳤고, 그 두터웠던 철문이 끼기기기기! 하는 거친 소음을 내더니 그대로 정원 쪽을 향해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정문이 무너지기 무섭게 안쪽에서 병사들이 달려 나왔다.

왕실 1기사단의 부단장이 거침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너희가 하는 행동이 폐하께 검을 들이미는 반역 행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당장 검을 내려라! 기회는 지금뿐이다!”

병사들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저 뒤에서 조금 전 도망쳤던 기사단의 기사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저들의 간사한 말에 속지 마라! 모두 목숨을 걸고 영주님을 보호해라! 지금까지 그분께 받은 은혜를 저버리는 쓰레기들은 내가 직접 목을 벨 것이다!”

다시 영지 병사들에게서 투기가 흘러나왔다.

앤디가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을 말로 어떻게 한다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안쪽에서 소리치고 있던 기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조금 전 앤디의 악귀와도 같았던 엄청난 신위를 목격하지 않았던가.

꿀꺽!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꼬나 잡았다.

“말로 끝내도 좋을 상황을 굳이 이렇게까지 하게 하다니. 죽이진 않겠지만, 상당히 아플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앤디의 신형이 이동했다. 바닥을 차는 순간 마치 땅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일자로 쭈욱 뻗어나갔다.

그리고 후의 상황은 설명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한순간에 정리가 되었다.

모두 부러진 팔과 다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뒤에서 앤디의 엄청난 무용을 지켜보는 기사들과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들의 상관의 눈치를 보느라 차마 지를 수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상관들 역시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수하들의 눈치를 보느라 지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앤디는 싸늘한 눈빛을 저 뒤에 경악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쏘아 보냈다.

“어디 더 해보시지?”

으득!

“치잇!”

포른트 영지의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려던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앤디와 왕실 기사단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시선을 돌린 그곳에서는 후덕하게 생긴 중년 사내와, 그 옆을 보필하듯이 따라붙고 있는 건장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년 사내를 본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와 경례를 했다.

“여, 영주님!”

그 말을 들은 앤디 측 사람들의 기세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앤디들에게 이곳의 영주라는 말은 첩자, 혹은 반역자와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왕실 기사들이 그를 잡겠다며 달려들었다.

그때 영주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검을 뽑아들었다.

앤디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호!”

순식간에 영주를 잡겠다고 달려들던 기사들이 그의 손에 쓰러졌다.

검의 궤적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앤디는 약간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봐온 이곳의 검술들 중에서 상당히 독창적인 방식의 검의 운용법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앤디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한 자신의 동료들을 보고 복수하기 위해 달려들던 다른 기사들을 1기사단장이 막아섰다.

“흥분하지 마라. 누구도 죽지 않았다.”

그제야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이 단순한 혼절을 했을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1기사단의 단장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당신이 영주요?”

“그렇소.”

“첩자가 맞소?”

“…그렇소.”

대답하는 마크 센트로 영주의 표정이 슬프기 그지없었다.

왕실군이 보기에는 자신의 정체가 들킨 것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다르게 해석했다.

“할 말이 있을 것 같구려.”

“들어주시겠습니까?”

“뭐, 급할 것은 없지.”

“고맙습니다.”

마크 센트로 영주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모든 이야기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공감이 가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냉정하게 잘랐다.

“당신이 잘한 것은 없소.”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다른 모르는 사람이 나라에 위험을 주는 것보다, 차라리 나라에 애국심이 남아 있는 자신이 거래를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른 이들이 그 힘을 얻고 떵떵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말 아니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고맙소. 모든 대답을 순순히 해줘서 말이오. 하지만 처음부터 문을 열고 사죄를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구려.”

안드레이의 말에 마크 센트로 영주가 대답했다.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이오?”

“저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말이지요.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다급하게 저를 잡겠다고 오는 사람들을 보고 누가 겁을 먹지 않겠습니까?”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안드레이는 자신의 편에 대한 생각과 상대인 ‘적’에 대한 생각만 했지, 적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배려를 먼저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의 결정은 무엇이오? 이렇게 왕실로 가서 사죄를 하는 것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오?”

“그렇습니다. 저는 달게 죗값을 받을 생각입니다. 대신 이곳에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이곳 영주민들에게는 손을 대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저를 따라줬을 뿐이니 말입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안드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소.”

그때,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쿠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우리 영주님은 가시면 어떤 죗값을 받으십니까? 혹시 사형입니까?”

“미안하지만 그럴 것이오.”

에쿠스가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영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고, 무슨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에쿠스!”

“영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저보다 영주님께서 먼저 돌아가시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 삶의 목적을 상실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에쿠스….”

마크 센트로 영주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에쿠스가 마크 센트로 영주를 안고 뒤로 뛰기 시작했다. 그 달리는 속도가 엄청났다. 마치 말이라도 타고 달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앤디가 검을 날렸다.

에쿠스가 마크 센트로 영주를 안은 채로 앤디의 공격을 튕겨 냈다.

튕겨 나온 앤디의 검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앤디가 팔을 뻗자 날아가던 방향을 바꾸고 날아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앤디는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에쿠스가 빠르다고 한들 질풍금룡행을 사용하는 앤디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에쿠스는 앤디와 마주 섰다.

쩌엉!

죽음을 각오한 에쿠스의 눈빛이 앤디의 시야를 가득히 메웠다.

그는 마크 센트로 영주를 안전하게 자리에 놓은 후, 앤디의 틈을 살피기 시작했다.

극도로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에쿠스. 앤디의 빈틈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쫓아오고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앤디에게서 틈을 찾을 수 없다면 틈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에쿠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쏘아냈다. 죽음을 도외시한 공격이었다.

일체의 방어도 염두에 두지 않은 필살의 공격.

에쿠스의 검이 강력한 오러를 담고 앤디를 향해 날아갔다.

앤디의 검도 놀지 않았다.

파칭!

에쿠스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흑!”

터져 나온 신음 사이로 핏물이 흘렀다.

이어서 에쿠스의 검이 쩡! 하는 소리와 동시에 검신이 마치 유리라도 된 것처럼 깨어져 나갔다. 그 뒤로 앤디의 검이 푸른빛을 발하며 허공을 수놓았다.

에쿠스의 당혹스러워하는 몸짓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에쿠스의 상체가 흉할 정도로 깊이 쩌억 갈라지며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주군, 끝까지 지켜 드리지 못해서 죄, 죄송합니다….”

그의 최후를 목격한 마크 센트로 영주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앤디는 경건한 표정으로 에쿠스의 시체 앞에서 짧은 묵념을 한 뒤, 말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지키지 못한 당신의 주군이지만, 그곳에서는 꼭 당신의 주군을 지켜 주길 바라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