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24화 (24/68)

제3장. 첩자들의 색출 작업

1

“흠… 대체….”

서류를 뒤지고 있는 안드레이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인데 어울리지 않게 그렇게 심각하세요?”

앤디의 물음에 안드레이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오른쪽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눈동자를 가볍게 지압했다.

그 행동을 보고 흠칫 놀란 앤디가 몸을 움츠렸다가, 눈치를 살피며 태연하게 몸을 폈다.

안드레이가 지압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눈도 뜨지 않고 앤디에게 자신이 읽고 있던 서류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예전에 오크들과의 전투 기억나느냐?”

앤디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떻게 그날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기억하고 있지요.”

“나는 그 전부터 몬스터들의 이상행동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 사실도 알고 있어요.”

“너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도 전 대륙 내에서 많은 몬스터 무리가 체계적인 움직임으로 도시를 습격했다. 우리 헤르만 왕국 같은 경우 내가 압력을 가해서 대처를 하여 큰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었지만, 타 왕국의 피해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컸다. 물론 얼마 후 대책을 세운 후부터는 그곳도 달라졌지만 말이다.”

앤디가 심각한 표정으로 들으며 물었다.

“그런데요?”

그의 표정이 심각해진 이유는 안드레이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안드레이는 직설적인 성격이라 본론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대책안을 설명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안드레이가 사설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본론을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드레이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도 느끼던 일이었는데,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민첩해지고, 체계적으로 변화해나가고 있었다. 마치 전투에 대한 데이터라도 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지.”

“그것을 누가 쌓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인가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여하튼 요즘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일반 영지전 이상의 규모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근처 영지와 연합 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막아서는 것이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이해가 안 가는데요?”

“어떤 부분이 말이지?”

“그런 대규모 전투라고 하면 근처에 지휘관이 있을 것 아닌가요?”

“그렇겠지.”

“그런데 스승님 말씀을 들어보면 의문투성이거든요. 확실하게 알지 못해서 저에게 설명하며 자신이 놓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시려는 것처럼 말이죠.”

“네 말이 옳다.”

“한마디로 그들의 전투 현장에 지휘관 비슷한 것들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렇다.”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앤디의 표정이 조금 전 구겨져 있던 안드레이의 표정 못지않게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투는 영지전에 버금갈 정도로 체계적이고 말이죠.”

“치고 빠지는 움직임이 거의 예술이지.”

앤디의 정리에 안드레이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앤디가 혀를 차더니 격분하며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안드레이가 같이 폭발했다.

“그러게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앤디와 안드레이는 마치 누군가에게 수수께끼 문제를 받은 후, 알아맞힐 수 있으면 맞혀 보라는 말을 들으며 농락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앤디가 다시 물었다.

“지금 이 정보가 사실이에요?”

“확실하다.”

“몬스터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데, 우연히 같은 시간에 같은 곳을 치러 가다가 모인 경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만일 그런 일이 단 한 번이라도 벌어졌다면 내가 네 아들이다.”

“죄송하지만, 스승님 같은 아들은 사양을….”

“뭐라?”

“아니,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핵심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몬스터들을 조종하고 있다, 이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것이죠?”

“이런 체계적인 움직임은 누군가의 명령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전투를 정리한 자료를 훑어보며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휘를 하는 녀석은 보이지 않고…. 정말 골치 아픈 문제군요.”

“무엇보다 더 골치가 아픈 사실은 몬스터들의 목적이 약탈이 아니라는 점이다.”

“네? 몬스터들이 약탈을 하지 않는다고요?”

“이기면 자신들이 들고 이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만 챙긴다. 마치 신속하게 근거리로 이동하려 하는 군대처럼 말이다.”

“허! 그 말은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그래서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앤디가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그래도 뭔가 추론이라도 하고 계신 어떤 사실이 있죠?”

“세 가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넘을 수도 있고.”

“우선 세 가지만 들어볼게요.”

“내가 지금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상상 중에서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현실성 여부를 떠나서 그냥 우선 들어라. 첫 번째는 마왕이다.”

저쪽에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다가 앤디와 안드레이의 이야기가 신경이 쓰였는지 은근슬쩍 다가온 셀린이 질문을 던졌다.

“마왕이요?”

“그래, 마왕. 사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몬스터들의 통제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마왕뿐이겠지. 물론 드래곤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중간계의 균형을 지키는 존재들이니 배제를 해도 되겠지.”

“하긴 마왕이라면 이런 설명도 되겠네요.”

앤디의 말에 안드레이가 물었다.

“어떤 설명 말이냐?”

“몬스터들의 규모가 서서히 커지는 것을 보면 세상에 와서 힘이 약한 마왕이 그들을 시작으로 힘을 모으는 준비를 한 것이죠. 그렇게 힘이 커지면서 대규모 진형을 움직일 정도로 힘을 찾았다. 뭐, 이런 설명 같은 거요?”

“흠! 그럴듯하군.”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이 질문했다.

“두 번째는 뭐죠?”

“쿠렌트 제국.”

“쿠렌트 제국이요? 왜요? 심증이라도 있나요?”

“지금까지 크렌트 제국 내에서 몬스터 부대가 습격을 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거든.”

“흠… 그렇다면 스승님 말씀대로 가능성이 있긴 하네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곳이 강대국이기에 일부러 피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몬스터들이 왜? 그들에게 왕국의 존재 여부가 중요할까?”

“그거야 모르죠. 몬스터들이 전투를 그토록 효율적으로 진행할 정도로 머리를 사용할 줄 알든, 아니면 누가 조종을 했든 간에 아직 힘을 모으기 전에는 건드리면 위험하다고 판단을 했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럴듯했다. 무엇보다 몬스터들이 하나둘 늘어나며 세력이 커지고 있는 현실이 앤디의 말에 현실성을 뒷받침해줬다.

“뭐, 가능 여부는 지금 알 수 없으니까 하나의 가능성으로 놔두도록 하지. 그렇다고 용의선상에서 뺄 수는 없어.”

안드레이의 말에 앤디와 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실 세 번째는요?”

“제삼의 존재.”

“예? 무슨 추측이 그렇게 광범위하고 막연해요?”

“하지만 이 마지막 추측이 가장 현실성이 있지.”

안드레이는 마치 대단한 말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앤디가 묘한 눈빛으로 안드레이를 주시하며 물었다.

“어째서죠?”

“어쨌든 간에 어떤 존재가 저들을 조종하고 있음을 뜻하니 그를 용의자 X라고 놔두면 조금 마음의 부담감이 덜거든.”

“아, 그러니까 명확하지 않으니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X라는 적을 만들어놓고 몬스터 부대를 대처할 준비를 한다, 이 말씀이시죠?”

“그렇지.”

“에이, 돌팔이!”

“뭐, 뭣이! 감히 하늘같은 스승님께 돌팔이라니! 이런 후레자식 제자 새끼를 봤나!”

“뭐요! 아니, 세상 천지에 제자에게 후레자식 제자 새끼라고 하는 스승이 어디 있답니까! 그리고 그런 대답은 세 살 먹은 애들도 하겠습니다! 8서클 대마도사라고 한 거 뻥 아니야?”

“이 자식이! 그 말은 도저히 못 참겠다! 덤벼라!”

“계급장 떼고 뒤탈 없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그때 셀린이 소리를 꽥 질렀다.

“좀 그만들 하세요! 애들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거예요!”

안드레이가 뻘쭘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저 자식이 내 성질을….”

“스승님!”

앤디도 한마디 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요오.”

그러자 셀린과 안드레이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네가 제일 밉상이야.”

“네 녀석이 제일 밉상이야!”

앤디가 구시렁거렸다.

“내가 뭘….”

다시 한 번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무는 앤디였다.

셀린이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제가 들어봤을 때는 스승님의 말씀 중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서 세 번째가 가장 합당한 것 같네요.”

그 말에 안드레이의 콧대가 높아졌다. 그리고 눈빛으로 앤디에게 말했다.

‘이것 봐라, 자식아.’

앤디가 억울한 패배자의 표정을 하며 셀린에게 따지듯이 질문했다.

“어째서요?”

“다른 추론들도 잔뜩 있겠지만, 어떤 존재나 대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뻔할 테고… 그렇죠, 스승님?”

“네 말이 옳다.”

“그렇다면 차라리 안 듣는 것만 못해요.”

“왜요? 누군지 범인을 간추려 보는 것은 병법 중에 기본인데요.”

“그것은 추측이라도 가능한 상대가 있을 때에 대한 이야기이죠. 이번에는 추측이 아예 불가능한 백지 상태의 적이란 말이죠. 어디를 공격할지조차 몰라요. 더군다나 목적도. 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죠. 그렇죠?”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수긍했다. 왠지 셀린에게 잘 보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옆을 보니 안드레이도 앤디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는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었다.

“누군가라고 생각하고 대비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를 생각하며 대비를 준비할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 허를 찔리면 위험하죠. 하지만 차라리 막연하게 X를 생각하고 대비하게 되면 허를 찔릴 이유가 없이 드디어 나타났구나 정도가 될 거라고요. 그 마음가짐의 차이는 크다고요.”

안드레이는 셀린의 말을 듣고 기특하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앤디를 보며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을 벙긋거리며 말했다. ‘내 말이 바로 저거였다고!’라고 말이다.

그러자 ‘웃기지 마세요!’라는 입 모양을 볼 수 있었다.

둘은 한참 동안 독둔술로 서로를 욕하다가, 셀린의 질타와도 같은 깊은 한숨에 입을 다물었다.

셀린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모두 X에 대한 대책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공감하는 거죠?”

“물론이죠.”

“물론이지.”

앤디와 안드레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그것에 대해 처음 해야 할 것은 무엇이죠?”

안드레이가 서류를 집어 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 가지 사안을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어떤 사안인데요?”

“아니다. 이번 것은 조금 더 있다가 이야기하도록 하자.”

“대체 무슨 이야긴데요?”

안드레이는 웃음으로 앤디의 질문을 넘어가며 말을 돌렸다.

“내가 평안해야 집안이 평화롭고, 집안이 평화로워야 나라가 평화롭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

앤디는 자신이 있던 곳에서 들었던 그와 비슷한 말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문장을 떠올렸다.

“물론 알고 있지요.”

셀린의 말에 안드레이가 손을 털고 일어났다.

“원래 거사를 치르기 전에 집안 청소부터 하는 것이다.”

“집안 청소요?”

“뭐, 청소는 청소하는 시녀들이 하고 있으니 우리들은 쥐새끼들을 잡아볼까?”

“쥐새끼요?”

앤디와 셀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따라 나오거라.”

안드레이의 말에 앤디와 셀린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앤디가 슬쩍 안드레이의 집무실을 살펴보고 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생긴 바람 길이 가벼운 돌풍을 만들더니, 안드레이가 내려놓았던 서류를 가볍게 훑었다.

서류가 슬쩍 들리며 펄럭이더니 종이 한 장이 흘러나왔다.

그 흘러나온 종이는 한 사내의 초상화였다.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사내의 얼굴은 바로 해터슨이었다.

2

앤디는 곧 안드레이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부터 그렇게 이야기하던 첩자 색출을 하자는 뜻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커서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소환하여 그들을 하나둘 대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혹시나 안드레이 공작이 사람들을 소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에 대해 추론하게 될 것이고, 괜히 조금이라도 찔리는 녀석들이 있다면 바로 꼬리를 잘라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산책을 해서 하나둘 만나보자는 건가요?”

“그렇지.”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얼굴만 본다고 녀석들이 ‘제가 첩자예요.’라고 말할 리가 없… 아아!”

순간, 앤디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강하게 강타했다.

놀란 표정으로 안드레이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네 생각이 옳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안드레이와 앤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셀린을 향하기 시작했다.

셀린이 움찔하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이렇게 물었다.

“나?”

안드레이와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이 낯선 사내 앞에서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유혹했다. 그리고 그가 다가오자 심연의 눈을 사용하여 말을 걸었다.

“괜찮다. 이들은 우리 편이다.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 말하도록 하라. 혹시라도 틀린 부분이 있다면 정정해주려 하기 때문이다.”

“….”

벌써 30명째 만나서 심연의 눈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모두 그녀의 심연의 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술술 불었다.

총 132명의 용의자가 있는데, 지금 속도로 한다면 4시간 안에 모든 용의자를 조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상황에 와서야 앤디는 안드레이의 대단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앤디는 진심으로 안드레이에게 감탄했다. 아니,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감히 스승으로 섬기고자 한 존재가 아닌가.

지금에야 깨닫게 된 것인데, 이 모든 상황이 안드레이의 계산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처음 자신이 들어오자 서류를 보며 인상을 구기고 있던 것부터가 작업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바로 셀린을 자신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만들어서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 위한 밑밥이었다는 말이다.

사실 셀린은 이곳이 왕궁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스승이 이 왕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실세 중의 실세라는 사실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드레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셀린의 마음을 풀어주며, 그녀의 가치를 높여 주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나라를 위해 첩자를 색출해야 한다. 그러니 네 능력을 사용하도록 하자, 라고 말하면 부담감이 작용할 것이 뻔했다. 부담감은 오히려 될 일도 망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안드레이였다.

그래서 우선 셀린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그 준비가 바로 몬스터 부대에 대한 설명을 하여 자신들의 이야기에 셀린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거기다 일부러 어리석기 그지없는 말싸움까지 진행하여, 자신들이 그렇게 어려운 사람이 아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분명 이 상황을 통해 한결 편하게 앤디와 안드레이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안드레이는 그녀가 자신감을 얻은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말을 에둘러서 밖으로 끌고 나왔다.

안드레이의 이 계산 어린 행동이 셀린에게는 자연스러운 상황의 연장으로 느껴졌다.

안드레이가 쥐새끼를 잡자며 셀린에게 자연스러운 부탁을 유도했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셀린은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해 첩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첩자들의 색출이 완료되었다.

셀린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안드레이에게 배운 대로 심연의 눈을 갈무리했다.

“후! 이제 되었나요?”

“그래, 수고가 많았다. 네 덕에 일이 엄청난 진전을 보이게 되었구나.”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셀린의 겸양의 모습에 안드레이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서는 조금 전 앤디와 철없이 싸우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늘 수고가 많았다.”

“제가 더 도울 일은 없나요?”

“당연히 많지. 하지만 지금은 없다. 그러니 가서 쉬도록 해라.”

안드레이의 푸근한 목소리에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숙소를 향해 올라갔다.

가면서 다리를 가볍게 휘청거렸다.

그것을 본 앤디가 안드레이에게 말했다.

“제가 가서 바래다주고 올까요?”

“놔둬라. 지금 우리가 셀린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지금 괜히 도와주면 자신의 약한 모습을 우리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괴로워할 거다. 겨우 스스로 자신의 몫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대로 놔두도록 하자.”

“그렇군요.”

앤디의 의젓한 말에 안드레이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앤디가 자신의 속내를 모두 헤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조금 전 까불거리며 계급장 어쩌고 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

왠지 연기였지만 울컥하는 안드레이였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내심을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 전 그 상황에서도 자신의 내심을 알고서 맞힌 것인지였다.

안드레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는 앤디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까불고 대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초롱거리는 눈빛으로 존경의 빛을 보이고 있는 앤디에게 그 사실에 대해 화풀이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드레이는 자신의 욱한 감정을 극한의 인내로 누르며 앤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간 앤디가 흠칫했다. 이유 모를 살기가 어딘가에서 엄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세 사라졌기에 신경을 끊었다.

안드레이가 앤디에게 말했다.

“자, 그럼 우리가 찾아낸 쥐새끼들을 솎아내러 가볼까?”

“한 번에 쓸어버리죠.”

순식간에 왕실 근위 기사대가 바람같이 달려들어서 첩자들을 모조리 잡아냈다.

모두 76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첩자가 잡혔다.

왕궁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동료, 혹은 지인들이 첩자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정말 그 녀석이 첩자였어?”

“그렇다니까. 내가 왕실 기사단에 끌려가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접시 닦던 민트도 끌려갔잖아.”

“제3기사단의 제2부단장도 첩자였다고 하더라.”

“그게 사실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잡혀 들어온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드러난 정보에 결국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자결을 시도한 자들도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앤디가 먼저 눈치를 채고 원천 봉쇄를 한 탓이다.

안드레이에게 잡힌 첩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가족들과 단체로 생매장을 당해 죽거나, 아니면 접선자들에 대한 정보를 불어서 다시 자신의 본래 직분에 자연스럽게 복귀하는 것이다.

첩자들이 물었다. 정말로 자신들을 이용한 이들을 완벽하게 잡아주는 것이냐고 말이다.

“걱정 마라.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잡아줄 테니 말이다.”

“그 증거를 보여 주시오.”

“어떻게 보여 줄까?”

앤디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어떻게 심어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앤디를 모두 믿기로 결정했고, 후자를 선택했다.

사실 지금 잡은 잔챙이 첩자들은 자신들을 이용한 접선자와 상관에 대한 의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잡힌 약점으로 이용당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접선자들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불기 시작했다.

자신의 상관에 대한 정보를 내뱉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4명의 고위 귀족과 연결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 4명의 귀족들은 간과 쓸개를 모두 내놓고 헤르만 왕국과 적대하는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음도 밝혀졌다.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뒤늦게 포착되었다.

안드레이는 그 사실을 알고는 치가 떨려 옴을 느꼈다.

그는 부리나케 헤르만 8세를 찾아갔다.

“폐하, 저 역적 놈들을 당장 처치할 수 있도록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흠… 위험하지 않겠소? 지금쯤 저들도 자신들의 정체가 들켰음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이오.”

“물론 소신도 당연히 알고 있사옵나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렵다고 녀석들의 반역 어린 죄질을 알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옵나이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줄 수 없겠소?”

“폐하!”

안드레이의 독촉에 헤르만 8세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짐은 경만 믿겠소. 경에게 2만의 병사와 300의 기사의 명령권을 내리겠소.”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로 붉게 충혈되어 있던 안드레이의 눈동자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분노가 커지고 커져 결국 깊이 가라앉은 것이다.

3

포른트 영지의 영주 마크 센트로는 오늘 아침도 평소와 다름없이 즐겨먹는 티본스테이크와 뽀드모아뇽 산 와인을 곁들인 간소한 식사를 들었다.

“오늘따라 음식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군.”

“감사합니다. 평소하고 다르게 조금 손을 써보았습니다.”

“좋아.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주면 좋겠군.”

그 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와이프와 뒤뜰을 산책하며, 집사에게 오늘 처리해야 할 사안과 문건에 대해서 들었다.

마크 센트로는 왕권 세력 내의 중추적 인물 중 하나로, 백성들을 보살피는 유능한 정치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가 쿠렌트 제국에서 심어놓은 첩자라는 사실이었다.

과거 그는 별 볼일 없는 변방의 귀족에 불과했다.

언젠가 정권의 중심에 서고 싶었지만, 현실성이 거의 없었다.

변방의 귀족이 중앙 정권 세력 내에 들어갈 확률은 하늘의 별 따기였기 때문이다.

그때 전쟁이 터지고, 그는 모든 전력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공을 세우기 위해 눈을 뒤집고 달려든 것이다.

그는 녹록지 않은 전과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공을 모두 자신의 위에 있는 지휘관이 가로챘다. 그럼에도 마크 센트로는 아무런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이를 악다물 뿐이었다. 언젠가 알아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희망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전쟁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연합 왕국의 도움으로 마무리를 지어나갈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찰나였기 때문이다.

마크 센트로 영주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런 그에게 쿠렌트 제국에서 은밀한 접촉이 왔다. 차후를 위해 자신들과 손을 잡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이 제안을 받아준다면 아낌없는 지원으로 거대 세력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말을 해왔다.

양심에 걸렸다. 하지만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받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이 제안을 받겠지. 그는 분명 떵떵거리며 잘살게 될 거야. 나는 이 제안을 거절한 대가로 그 누군가에게 조용히 처리가 되겠지.’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신흥 거대 귀족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쿠렌트 제국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자신을 통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을 만한 정보의 수준을 원할 뿐이었다.

굳이 자신과 손을 잡아야 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이 정도 정보라면 헤르만 왕국에 큰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신의 조국에 대한 도덕적 책임 의식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마크 센트로 영주는 점심이 지나기도 전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왕실 군대가 자신의 영지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연락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재빨리 연락망을 통해 첩자들에게 접선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오지 않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첩자라는 사실이 들켰구나!’

도망칠 수 있는지 사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지금 도망쳤다간 금세 꼬리가 잡혀서 전멸을 당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마크 센트로 영주에게는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공성에 대비하는 것 말이다.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포른트의 영주 마크 센트로는 머리를 움켜잡고 고민했다.

그때, 그의 오른손이자 포른트 영지의 기사단장 에쿠스가 다가왔다.

“영주님, 모든 병력을 성벽에 집결시켰습니다.”

마크 센트로 영주는 조심스럽게 에쿠스에게 물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는 건가?”

“쿠렌트 제국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들이 지원군을 보내준다고 했으니 그때 몸을 빼시면 될 것입니다. 그동안 저들을 막아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쿠렌트 제국이 올 동안 과연 버틸 수 있겠는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며칠이나 버텨야겠는가?”

“오 일 정도 버티면 그들이 우리를 빼내줄 것입니다.”

기사들은 저 멀리 굳건하게 닫혀 있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냥 쳐 버릴까요?”

“그대들의 마음은 알겠네만, 그렇게 되면 우리 편의 피해도 무시 못할 것이라네.”

2기사단의 단장의 말에 1기사단의 단장이 대답해주었다.

2기사단의 단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여긴 공성을 위한 성이 아니라 부분 부분이 허술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늦장을 부릴수록 궁지에 빠진 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 한 병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충! 내부에 자리하고 있던 용병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연락입니다.”

“흥! 그까짓 용병들 따위 무섭지 않다. 모여 봤자 쓰레기들이지.”

2기사단의 단장의 말에 안드레이가 그들의 딱딱한 분위기에 파고들며 어색한 미소로 말문을 열었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째서 공격을 당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을 거라네. 밖에 위압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질려 그들에게 붙는 것일 테지.”

“그럼 안드레이 공작 전하께서는 다른 방도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선 내부를 흔들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네.”

“내부를 흔들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들 중에 전투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분명 별로 없을 것이라네. 지금 우리의 병력 수와 저들의 병력 수는 터무니없이 차이가 난다네. 질 것이 뻔한 싸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저들 중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겠노라 눈치를 살피고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 확실하네.”

왕실 기사단 총대장 레이오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살려 주겠다는 확신만 들게 한다면 저들이 우리들에게 문을 열어줄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않을까 싶소.”

다시 2기사단의 단장이 말을 받았다.

“그럼 지금 당장 그 작전을 시도할까요?”

“아니네. 우리가 밖에서 열심히 떠들어봐야 저들에게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지금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속이는 것일 거라고만 생각할 것이라네.”

“그럼 어떻게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안드레이가 앞에 펼쳐져 있는 지도를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지금 집어주고 있는 이곳과 이곳과 이곳의 위치로 병사들을 나누어 보내도록 하지. 저들이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인식을 시켜야 한다네.”

“이렇게 병력을 나누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작전은 저들을 물리적으로 함락하려는 것이 아니라네. 저들에게 심적 압박감을 주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적이지.”

“심적 압박감이라구요?”

“그렇다네. 쉽게 말해 정신적 스트레스 말이네.”

“아, 그렇다면 외부에서 압력을 가해 저들의 신경을 긁으라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맞았네. 욕도 좋고, 무시도 좋지. 흠! 무시가 더 좋겠군. 어차피 저 녀석들이 한방이라도 먹이겠노라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도발을 할 테지.”

“그런데 이 작전이 먹히겠습니까?”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의 병사들이 성 내부에 있다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을 상대로 잠을 잘 잘 수 있을 리가 없지.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네. 그것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그 피로도는 극심해질 것이야.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지. 그렇게 되면 분노가 어디로 향하게 되겠는가? 우리들이겠는가?”

“그렇지 않을까요?”

“아닐세.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문제라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냥 쓸어버려도 되지 않습니까?”

2기사단장의 말에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답답한 사람아, 저들은 적이 아니라네. 우리 헤르만 왕국의 백성이지. 적은 마크 센트로 그자 하나뿐이라네. 저들과 싸우는 것이, 그래서 같은 민족끼리 피를 흘리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그게 바로 적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해도 그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회의에 모인 총대장, 군장과 군단장, 기사단장과 부단장, 마법사 등등의 수뇌부들이 그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이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다림이 조금 지루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이긴다면 그 어떤 전투보다 값진 승리가 될 것이라네.”

“알겠습니다.”

“이것 생각보다 재밌겠군요.”

“분명히 경들의 기대에 미칠 만큼 충분히 재미있을 걸세.”

안드레이의 말에 수뇌부들의 입가에서 웃음이 가볍게 흘러나왔다.

이틀이 지났다.

성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 용병들이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에게 도발을 시도했다.

“큭큭! 녀석들, 우리들에게 졸았냐? 아니면 한번 쳐들어 와보시지!”

“새끼들! 아니면 그냥 돌아가라고!”

“킥킥킥킥킥!”

“저기 봐. 저 새끼 얼굴 빨개진 것. 화나면 덤벼 보라니까?”

“에효! 생긴 것들하고 달리 겁대가리만 많아요.”

발끈한 몇몇 기사가 몸을 움찔했다.

그것을 본 기사단장이 말했다.

“참아라. 저들의 저런 모습도 오늘까지 뿐일 것이다.”

그렇게 말을 하는 기사단장의 표정도 사실은 그리 좋지 못했다.

사흘이 되었다.

용병과 성벽 내부의 기사와 병사들이 하품을 하며 약간 신경질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던 탓이다.

밖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병사들이 돌발적으로 자신들을 흔들었기 때문에 잠을 잘 시간을 벌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돌격의 뿔 나팔 소리가 울리고, 발 구르는 소리로 자신들을 자극하는 것도 모자라, 진짜로 실행하는 기습 습격은 정말이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잠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죽기 싫으면 눈을 뜨고 있어야만 했다.

3일 동안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옆에 있는 동료들과도 신경질적으로 작은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들은 잘 훈련된 기사나 병사들이 아니라 거침없이 사는 용병들인 탓이었다.

“뭐야! 이 새끼! 왜 째려봐!”

“누가 째려봤다고 지랄이야! 니 새끼가 아까 전부터 나 꼬나보고 있던 거 참아줬으면 고마운 줄이나 알 것이지! 내가 옛날 더러운 성격 같았으면 그 시선 느낀 순간 넌 병신 됐어!”

“뭐라고! 죽고 싶어?”

“죽고 싶냐고 물은 게 그 아가리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성벽에 자리하고 있던 용병 둘이 격돌했다.

주먹이 서로의 안면과 복부, 가슴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결국 하나가 쓰러지자 미친 듯이 밟아댔다. 다른 용병과 병사들은 흥이 난 표정으로 싸움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서 기사 하나가 바람같이 달려와서 호통을 쳤다.

“지금 뭐하는 짓들이야! 그만두지 못해!”

그럼에도 둘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기사가 검을 뽑아들고 오러를 일으킨 후에야 둘이 떨어졌다.

기사는 그 둘을 보며 분노 어린 목소리를 내질렀다.

“지금은 전시 중이다! 그런데 이런 군기가 해이한 모습을 보이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너희 둘은 자중지란을 일으켜 동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음으로 그 죄를 물어 즉결 처형한다!”

순간, 두 용병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이미 늦었다.”

둘이 뭐라고 항변할 기회도 없이 기사는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억!

용병 둘의 목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바닥에 뚝 하고 떨어졌다. 기사는 목 없이 주저앉은 두 용병의 몸을 발로 밀어 자빠트렸다. 그러자 떨어져 나간 목 위로 피가 솟구쳐 오르며 전신이 발버둥을 쳤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움직임이 멈췄으나, 모두 경악 어린 시선으로 두 용병을 내려다보았다.

기사는 두 눈을 서슬 퍼렇게 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기사의 시선에 닿은 모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깊이 숙였다.

“또 이런 자들이 나온다면 이번에는 그 주위에서 말리지 못한 자들도 함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기사는 그 말을 남기고 성벽을 내려갔다.

모두의 고개가 조심스럽게 들어지고, 시선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두 용병의 시체를 지나 기사가 사라져 간 길을 따라갔다.

그들의 눈빛에 분노가 조금씩 어리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이곳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몇 군데에서 싸움은 터졌고, 하나같이 강경 대응을 하여 즉결 사형선고를 내렸다.

불만이 쌓이고 있는 와중에 터진 사건.

잠시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리해서는 아니 됐다. 군 기강을 잡는다고 한 일이긴 하지만, 기사들은 다른 방법을 택했어야만 했다. 이곳이 전장이긴 하나, 일반적인 전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착각은 자신들이 이곳에서도 강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으득!

용병들의 주먹이 강하게 움켜쥐어졌다.

마크 센트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무런 전투도 없이 조용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좋았지만, 불안하고 불안했다.

조용한 하루하루가 폭풍전야를 알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공격이 들어오는 것이 속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정말로 쿠렌트 제국이 자신들을 도와주기 위해 올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불안감을 크게 키웠다.

“그들이 오겠지?”

걱정 어린 어투의 마크 센트로의 말에 에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일 무슨 일이 있다면 제가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영주님을 구해드릴 것이니 말입니다.”

에쿠스의 말에 마크 센트로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내 자네만 믿네. 이제 이틀만 견디면 되겠군. 그런데 저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저도 그 사실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조금 불안하군.”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하십시오.”

“고맙네. 자네가 없었다면 나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야.”

“하하! 영주님께서 없으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흘째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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