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블러드 데빌
1
나라로 압송당한 반트레오 백작은 재판부에서 모든 죄질이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모든 재산과 영지, 그리고 백작위를 압류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경매장에서 도망치듯 나왔다가 붙잡힌 귀족들 또한 재산을 압류시키고, 작위를 파직했다.
작은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귀족 사회에 큰 파장을 만들어냈다. 평소 일반적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귀족들에 대한 권위와 투명성을 위해 조용히 풀어주는 관례를 벗어던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도마뱀 꼬리 자르기 식으로 큰 힘을 지닌 귀족들은 조용히 풀어주고, 힘이 없는 지방 귀족 같은 이들만 뒤집어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름만 들어도 놀랄 만한 권세 있는 가문의 귀족들도 이번 처벌 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왕권파에 속해 있던 이들까지 말이다.
그 자리에서 잡혔던 모든 이들을 처벌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말이 많았다.
전형적인 철권통치로 왕권 강화를 하기 위해 수를 쓰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왕의 밑에 있어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떠돌기 시작했다.
단순한 소문이 아니었다. 몇몇 왕권파 귀족들이 귀족파로 옮겨 갔다.
그러자 왕권파 내부에서 왕권파의 귀족들을 달래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헤르만 8세가 내린 말은 단호했다.
“짐 또한 짐의 수족을 잘라내는 것이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럽다. 스스로가 깨끗하지 못한데 어찌 남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짐은 그대들의 말처럼 철권통치를 원하지 않는다.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움켜잡을 생각도 없다. 완벽하고 깨끗한 나라까지도 원하지 않는다. 하나, 최소한의 도리를 지킬 줄 아는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지금 그대들에게 이 한순간의 결정이 고통스러울지 모르겠지만, 그 고통은 한순간뿐이다. 고름은 고일 때 짜야 하는 법이다. 놔두면 썩기 때문이다. 썩으면 그 부위를 잘라내야 하는데, 고름 짜는 것과 잘라내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고통스러울지 그대들이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헤르만 8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반박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지금 반박을 한다면 자신이 뭔가 찔리는 짓을 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후! 드디어 끝났군요.”
앤디의 말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제 시작이지.”
“예?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지금 흐름을 시점으로 부패의 뿌리를 뽑아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모두가 부패에 대해 동조의 분위기를 띠고 있을 때 움직이지 않으면 다음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앤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약간 지친 데다, 질려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휘둘린 탓이다.
“그, 그렇겠죠. 하지만 지금은 조금 쉬….”
“조금 쉬어도 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똑똑하고 잘나기 그지없는 내 제자가 그렇게 미련하고 덜떨어진 소리를 할 리가 없을 거다. 그렇지?”
“물론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조금 쉬면 대어들이 애써 깔아놓은 그물망을 다 빠져나가니 쉴 수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이지요. 핫핫핫핫!”
“허허허허허!”
“핫핫핫핫핫!”
둘의 웃음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온 셀린이 웃으며 둘에게 차를 건넸다.
셀린은 밖에서 이미 이야기를 다 들었기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었지만, 조심스러운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봐요.”
“암!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렇지, 제자야?”
“물론이지요, 스승님. 너무 좋아서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습니다요. 하하하!”
“허허허!”
“호호호!”
그들의 어색한 웃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얼마 후, 반트레오 백작의 사형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셀린과 앤디, 그리고 안드레이가 모여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반트레오 백작의 사형 소식에 대해 흘러나오게 되었다.
앤디가 셀린에게 물었다.
“셀린은 마음이 조금 어때요? 편해졌나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셀린이 찻잔을 내리며 질문을 한 앤디에게서 시선을 돌려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안드레이는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셀린이 찻잔을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신 후 대답을 이어나갔다.
“지금 제 모습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중이에요. 지금까지 어째서 그렇게 복수에 매달려 살았었는지 의아한 기분이 들고 있거든요. 모든 것이 허무하고 공허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 말에 안드레이가 말을 걸었다.
“원래 삶 그 자체가 허무하고 공허한 것이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살아가거든. 그것을 위해 무진하게 애를 쓰지. 하지만 얻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음을 깨닫게 돼. 이것을 얻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 물론 얻어서 좋긴 하지만, 그것만 얻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것 같았던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이야. 그렇다고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
“잘 모르겠어요.”
셀린의 대답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스스로가 공허한 존재임을 알고 있지.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래서 어떤 목적을 목표로 두고 달리는 것이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만들기 위해 말이야.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은 이런 사람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말이지. 내가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우니 타인의 도움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지.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일반적인 사람이요?”
“셀린은 조금 다르지.”
“어떤 부분이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표를 세우는 것에 반해 셀린은 복수를 위해 달렸지. 복수 후의 삶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야. 그 말은 두 가지를 말해주고 있지. 하나는 복수를 할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다고 스스로 알고 있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복수를 하고 난 후 자신이 살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지. 아닌가?”
“…그랬던 것 같아요.”
셀린이 수긍했다. 안드레이의 말이 모두 옳았던 것이다.
안드레이는 수긍하고 있는 셀린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재밌군, 재밌어.”
“뭐가 그렇게 재밌으신가요?”
“별건 아니니 신경 쓸 필요는 없네. 우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공허함을 떨치고 목적성을 가지란 말이네.”
“제가 평범한 사람이 되길 원하시나요?”
셀린의 물음에 안드레이가 부정했다.
“자네가 평범해지고 싶다고 평범해질 수 있겠나?”
“아닐 것 같아요.”
“그렇다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네가 평범해질 수가 없지. 내가 하는 말은 자네의 과거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네. 평범한 것이 좋다고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라네. 난 자네라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네. 어째서인 줄 아는가? 자네는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 그것을 바탕으로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을 한번 그려 보고, 만들어보라는 것이라네. 지금까지 힘들지 않았는가. 삶은 한 번뿐이라네. 지금까지 우울했다면 이제는 즐겨 볼 때도 되지 않았나?”
“….”
“그 공허함을 느끼는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는가. 자네의 생각의 시간은 멈춰 있는데, 육체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네.”
셀린이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뭔가 결단을 내린 표정으로 안드레이를 올려다보았다.
“마법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혹시 아직도 그때 그 약속이 유효한 것인가요?”
그 말에 안드레이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 반가운 말이구만. 물론 아직도 그 약속은 유효하다네.”
“하지만 제가 그 마법을 배울 능력이 될까요?”
“물론 자네라면 가능하지.”
“저라면 가능하다고요?”
셀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드레이가 이해를 위해 설명을 시작했다.
“마법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뭔가 독창적이고 무념적인 어떤 이해 불가능한 시점에서 허를 찾아야 발전이 가능하다네. 그러다 보니 유명한 마법사들의 이름 앞에 하나같이 수식어로 붙는 것들이 괴짜 같은….”
앤디가 그 말에 끼어들었다.
“변태, 또라이, 미친놈 등등이 있죠.”
안드레이가 앤디를 노려보았다. 앤디는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안드레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흠흠! 뭐, 수식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네. 여하튼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가 가는가?”
셀린이 즐거운 표정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해가 가네요. 제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세상에 답은 없다네. 없기에 내가 원하는 답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지. 반갑네. 마법사의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 승… 님.”
셀린의 매력적인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스승님이라는 말을 듣자 안드레이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그 모습에 앤디는 피식 웃으며 나직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여우 같은 늙은이.”
“흠흠!”
“후후후후!”
2
“폐하, 부르셨나이까.”
“오오! 안드레이 경, 오셨구려. 어서 오시오.”
헤르만 8세는 안드레이를 반기며 말했다.
“경축 드리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하! 다 들었소. 제자를 한 명 더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말이오.”
“아, 그것 말씀이십니까? 별일 아닙니다.”
“어찌 별일이 아니겠소. 경의 제자라 하면 나라를 위한 인재일 텐데 말이오. 짐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소.”
“그리 높게 봐주시니 망극하여이다.”
헤르만 8세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이요? 짐은 몹시도 궁금하다오. 앤디 경만 하여도 든든한데, 대체 어떤 이가 안드레이 경의 눈에 찼는지 알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오.”
안드레이가 미소를 짓자 눈가에 보기 좋은 주름이 접혔다. 그 미소를 마주하며 헤르만 8세가 함께 웃었다.
“폐하, 혹시 심연의 눈이라고 아십니까?”
“심연의 눈?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구려.”
잠시 고심하던 헤르만 8세가 자신의 오른 주먹으로 왼 손바닥을 내려치며 말을 이었다.
“아하! 기억이 나오! 과거 안드레이 경이 짐에게 해준 이야기에서 들었던 기억이 나는 것 같구려. 정확하진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맞소?”
“역시 폐하의 기억력은 대단하십니다. 제가 폐하께서 다섯 살쯤에 해드린 이야기였지요.”
“그렇소? 하하! 그런데 그 심연의 눈은 어찌하여 물으시오? 설마!”
“맞습니다.”
“정말 맞단 말이오?”
안드레이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수긍함과 동시에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찾은 제자의 능력이 바로 심연의 눈입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소?”
“먼 과거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였지요.”
“하긴 지금은 헤르만 대제의 이야기도 전설로 퍼지고 있으니…. 아마 그것과 같은 맥락인가 보구려.”
“그렇게 보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정말 안드레이 경이 헤르만 왕국에 있다는 것은 진정 나라의 홍복이 아니라 말할 수 없구려.”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모두 폐하의 은덕에 가능하게 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짐이 무에 한 일이 있다고 그러시오.”
“폐하의 덕으로 인하여 그 친구를 끌어들일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헤르만 8세는 한참을 고심했다.
자신이 이번에 한 일이라곤 불법을 행하는 귀족을 잡아 벌을 준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을 잡기 위해 자신의 근위 기사대를 안드레이에게 빌려 주긴 했지만 말이다.
헤르만 8세는 그 일과 안드레이의 제자로 들어온 이의 관계가 엮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짐은 별로 한 일이 없소. 모두 경의 덕인 것이오.”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사실 안드레이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왕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왕실 기사단을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만한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르만 8세는 안드레이를 믿었다. 그리고 안드레이는 그 믿음에 보답을 해줬고 말이다.
“하하! 서로 공치사는 그만하지요. 별일도 아닌 것으로 칭찬을 받자니 쑥스럽구려.”
“망극하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어때 보였소? 과연 전설 속 이야기에 등장할 만하오?”
안드레이가 웃었다.
“그 이상으로 판단되옵나이다.”
“진심이오?”
“그렇사옵나이다.”
“허허! 이렇게 기쁜 소식이라니!”
헤르만 8세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 집무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어디 있소?”
“그녀입니다.”
“여인이란 말이오?”
“그렇사옵나이다.”
“언제쯤 짐에게 인사를 시킬 생각이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인사를 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안드레이의 말에 헤르만 8세는 달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냉수도 급히 먹으면 체하는 법이라 했소. 열흘 안에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구려.”
“그리하면 되겠습니까?”
헤르만 8세가 약간 망설이는 듯하다가 다시 말했다.
“물론이오. 그 정도면 될 듯하오. 앤디 경을 만나기 위해 사 년을 기다린 적도 있는데, 열흘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소. 그런데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허허허!”
안드레이가 조심스럽게 웃음을 흘렸다.
한 소녀가 꽃밭 한가운데 앉아서 꽃을 보며 대화를 걸고 있었다.
“오드렐리야, 어째서 앤디가 오지 않는 걸까? 그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 세드린, 네 생각은 어때?”
그 소녀는 바로 레오나 공주였다.
그때 저 멀리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오나! 레오나 어딨어!”
“앗! 앤디?”
레오나는 기쁜 나머지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기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궁내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 찾는다는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조금 화가 났다. 아무리 바쁘다 해도 자신을 최우선으로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앤디의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레오나가 마음을 굳히며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게 찌푸려지지 않았다. 앤디가 가까이에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던 탓이다.
그때, 앤디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레오나,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
“레오나?”
“칫! 웃겨. 왕실에 온 지 며칠이나 됐으면서 한 번도 연락 없다가 지금 찾아와 놓구.”
레오나는 토라진 말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꽃만 주시했다.
“미안! 미안!”
“흥!”
“삐쳤어?”
“안 삐쳤어!”
“에이! 삐친 것 같은데?”
“에잇! 안 삐쳤다니까!”
화난 목소리로 휙 돌아선 레오나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화났음을 앤디에게 알리고자 의도적으로 찌푸린 탓인지 그 표정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앤디의 입가에 자연스레 웃음이 걸리고 말았다.
앤디의 등 뒤에서 풋! 하고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레오나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 누구야?”
그 말에 앤디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여긴 셀린이라고….”
“신 셀린이 레오나 공주님을 뵙습니다.”
“셀린?”
레오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셀린을 노려보았다.
“넌 뭐지?”
“저는 이번에 안드레이 공작 전하의 제자로….”
“제자라고?”
레오나가 앤디를 보며 물었다.
“뭐야? 제자면 제자지, 여긴 왜 왔어! 여긴 금지 구역이란 이야기 못 들었어?”
셀린이 당황했다. 레오나 공주가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앤디를 보았다. 앤디도 당황해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셀린은 이곳이 금지 구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본 이곳의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가보고 싶었다. 그런 셀린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 앤디가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이다. 자신이 지금 저 꽃밭에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가면 괜찮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앤디가 조심스럽게 레오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저… 그게….”
순간 레오나의 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앤디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레오나의 눈물을 보자 머릿속이 텅 비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레오나가 지금까지 보이던 분노 어린 모습을 지우고 한없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날 보러 안 온 게 이 여자 때문이었어? 엉엉! 어마마마께서 남자는 다 늑대라고 믿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래도 앤디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잉잉잉!”
대앵앵앵앵!
머릿속이 종소리를 내며 울렸다.
“잉? 이게 뭔 소리여?”
앤디의 다리가 순간 휘청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다르게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할 말을 잃게 된 것이다.
레오나가 다 울었는지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서서 말했다.
“이제 할 말 있으면 해. 난 각오가 다 됐어.”
입술을 당찰 정도로 굳게 다문 레오나를 보자 이번에는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도무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등 뒤에서 먼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앤디의 입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전에 말이다.
당연히 그 주인공은 셀린이었다.
“뭐야? 왜 웃는 거야?”
“공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와 앤디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 말에 레오나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물었다.
“그럼 어떤 사인데?”
“그냥 안드레이 공작님의 제자에 불과하죠.”
셀린이 빙긋 웃으며 설명하자, 레오나의 심각한 표정이 조금 풀어지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정말 단지 그뿐이야?”
“물론이에요, 공주님. 그리고 무엇보다 앤디는 제 스타일이 아니랍니다.”
“그럼?”
“저는 저런 기생오라비 같은 스타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남자는 든든한 근육이 있어야죠.”
그 말까지 듣자 레오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말 정말, 정말이지?”
“물론이에요, 공주님.”
“와아! 다행이다아!”
레오나가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셀린은 푸근한 미소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앤디를 돌아봤다.
앤디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레오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레오나가 약간 달아올라 상기된 얼굴로 앤디를 마주 보았다.
앤디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더니 뭔가를 레오나에게 건네주었다.
“뭐야?”
“선물.”
귀엽게 생긴 사내아이의 인형이었다. 전체적인 생김새와 분위기가 앤디를 닮아 있었다.
“와! 이쁘다아! 설마 앤디야?”
“응, 이번에는 나야.”
“아!”
레오나가 감격한 표정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앤디가 씨익 웃자 레오나가 앤디 앞에서 수줍은 듯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앤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셀린은 레오나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나 귀여웠던 것이다.
그때 앤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셀린이 그 사인을 받고 시선을 돌려 주었다.
동시에 셀린의 귀에 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3
헤르만 왕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드로 왕국의 후퍼 영지.
지금 그곳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과광!
어디선가 해일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폭우를 동반한 폭풍이 밀려왔다.
“으아아아악!”
“사, 사람 살려!”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있는 봉두난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특이하게도 두 눈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사이한 느낌이 온몸을 서슬 칠 정도였다. 악마가 강림한다면 분명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 사내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그 위로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고오오오오!
서서히 커져 가는 소용돌이를 그대로 놓아버리자, 그것은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곧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를 정도로 거대해졌다. 그에 따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맥없이 바람에 딸려 하늘로 솟구쳤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 줘!”
쿠와와와!
그러나 비명은 소용돌이에 파묻혀 주인과 함께 하늘로 사라졌다.
믿어지기 힘들겠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모든 자연현상은 사내의 손이나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생겨나고 있었다.
우르르릉!
퍼벙펑펑펑!
어느새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허공 위로 날아 올라간 붉은 눈의 사내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사내의 마나가 가득 실려 있는 웃음소리는 이곳 후퍼 영지를 가득 메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돌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자연의 대재앙을 정신없이 피하던 후퍼 영지의 기사들이 웃음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저주 어린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노려봐서야 폭풍을 뚫고 그 사내의 신형이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허공에 떠 있는 사내는 왠지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가 이런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비바람 속에서조차 젖지 않은 의복과, 바람에도 휘날리지 않고 가라앉아 있는 봉두난발의 머리카락 탓이었다.
그가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4개월도 채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연합국의 일급 수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블러드 데빌’이라고 불렀다.
그가 가는 곳마다 혈겁이 일어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한 듯 세상을 뒤흔들어버린 악마.
이유와 목적성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미친 듯이 살육을 자행하고 있는 그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 악마를 잡기 위해 피해를 입은 주변국들이 기사를 모아 녀석을 이곳 후퍼 영지로 몰아넣었다.
싸우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그가 진정한 악마라는 것일 뿐이었다.
“괴, 괴물!”
“악마야! 정말 악마였어!”
“으아악! 사, 살려 줘!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모두들 서서히 좌절했다.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그 누구도 저 악마의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손이나 바스타드 소드를 허공에 휘저을 때마다 사신이 생사부에 수명을 적는 붓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저 바스타드 소드가 휘둘러질 때면 방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죽어 나자빠졌기 때문이다.
“악마다! 악마가 현세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한 기사의 좌절 어린 한마디에 모두 이를 악물었다.
이곳 후퍼 영지를 가득 메울 만큼 죽어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
서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를 정도였다.
휘오오오오!
그때, 블러드 데빌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이곳 후퍼 영지에 울려 퍼졌다.
“큭큭! 이제 네 녀석들의 능력을 알겠나? 그 시답잖은 능력으로 으쓱이며 기사라고 노대는 꼴이 우스웠었지. 그리고 너의 더러운 귀족들! 으득! 너희는 평화로운 세상의 독소에 불과해. 너희가 없어져야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나는 더러운 네 녀석들을 청소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니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웃기지 마라! 그런 언변이 통하리라 생각하는가! 그런 것으로 네가 벌인 이 살육이 정당방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의 용기 있는 외침.
그러나 그마저도 폭풍에 휩싸여 허공에 사그라졌다.
블러드 데빌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자, 이제 정화가 되어질 차례다! 모두 죽어라! 크하하하하!”
블러드 데빌의 몸에서 거대한 황금색 빛이 방출됨과 동시에 마나의 폭풍이 터져 나갔다.
퍼어어엉!
“으아악!”
“크하하하! 더 크게! 더 크게 비명 소리를 내라!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라! 크하하하하하!”
“끄아아악!”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지옥의 풍경이 바로 이러할까.
하지만 비명은 곧 그쳤다. 2백여 명이 넘었던 기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던 지휘관과 귀족들이 모두 죽는 데 불과 2시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큭큭큭큭!”
블러드 데빌은 허공에서 한참을 서서 자신이 일궈낸 장관을 주시하다가, 남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