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22화 (22/68)

제1장. 죽음보다 더한 고통

1

“뭐, 뭐냐!”

“뭐긴 뭐야. 저승사자시다.”

반트레오 백작의 물음에 앤디가 하얀 이를 반짝이며 미소를 던져 주었다. 그 제자의 스승임을 밝히듯 안드레이 또한 환한 미소를 반트레오 백작에게 던졌다.

그 둘의 여유 어린 미소를 건네받게 된 반트레오 백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째서인지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반트레오 백작의 입에서 분노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저 잡것들을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오지 않고!”

어느새 홀 안으로 몰려든 가드들이 반트레오 백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기를 꼬나 쥔 채 앤디와 안드레이, 그리고 셀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을 잡아라!”

“충!”

타타타탓!

안드레이는 슬쩍슬쩍 블링크를 사용하여 몸을 뒤로 뺐고, 셀린은 한순간에 달려든 가드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워낙 급박하게 벌어진 일인지라 심연의 문을 열고 끌어들인 가드의 수는 많지 않았다. 달랑 둘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는지 그 둘의 실력이 다른 이들에 비해 월등했다. 그 둘의 검술은 치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셀린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막아내는 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막지 못한다고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전신에 자잘한 상처들이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쓰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생길수록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투기가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안드레이와 셀린 쪽의 상황을 파악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마음 놓고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앤디의 신형은 섬전과도 같이 움직였다.

이형환위!

이곳에서 한 놈이 쓰러지면 저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비명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한 녀석이 무너져 내리듯 쓰러지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대, 대체 이게!”

“유, 유령인가!”

유령으로 보여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앤디의 빠른 속도가 만들어낸 잔상이 유령처럼 보일 만도 했기 때문이다.

앤디를 상대하던 가드들은 모두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자신들을 휘젓고 있는 상대가 자신들로서는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초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반트레오 백작도 눈이 없지는 않았다. 뭔가 상황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다.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셀린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잡히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쓰러진 두 녀석이 최후까지 반항을 했지만, 곧 상대의 검에 목과 심장이 뚫린 채 숨을 거두었다.

그것을 목격한 반트레오 백작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가 심연의 눈을 알 리가 없었다. 배신자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배신자들의 처참한 최후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인질을 하나 잡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바로 그 순간, 앤디가 반트레오 백작의 눈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셀린이 반트레오 백작의 가드들에게 잡히기 일보 직전의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트레오 백작은 자신의 앞에 순간 모습을 드러낸 앤디를 보고 귀신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흠칫 놀랐다.

앤디가 히죽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시나.”

그때 반트레오 백작 옆에 자리하고 있던 아리엘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앤디를 보며 소리쳤다.

“아, 아니, 넌!”

앤디가 머쓱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아리엘 아가씨.”

“네, 네가 여길 어떻게 온 거지?”

앤디가 대답하기 전 반트레오 백작이 아리엘에게 물었다.

“아리엘, 네가 아는 사람이냐?”

“우리 저택의 하인….”

어째서인지 가볍게 흔들리는 목소리.

아리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트레오 백작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어떤 하나의 상황에 대한 유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네 녀석이었더냐!”

“무슨 말이지?”

“우리 아리엘을 모욕한 녀석이 말이다!”

“아아, 그거?”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앤디가 어떤 말을 삼켰는지 모를 수 없었다. 사실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트레오 백작의 목소리가 조금 나직하게 가라앉았다.

“내 뒤를 캐기 위해 침입을 한 것이군. 누구냐! 네 녀석을 사주한 녀석의 정체가 말이다!”

“그게 중요한가?”

앤디의 대답에 반트레오 백작이 씹어 내뱉듯 욕설을 퍼부었다.

“이 쳐 죽일 녀석!”

앤디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반트레오 백작이 이를 갈았다.

습관처럼 저 녀석을 ‘쳐 죽여라!’라고 외치려다가 멈추었다. 지금 상황에서 결코 자신이 경거망동해서는 안 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가드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하나둘 쓰러지지 않았던가.

가드들이 녀석의 편으로 보이는 여인을 붙잡았다곤 하지만, 자신 역시 녀석에게 붙잡혀 있는 것과 진배없었다.

자신이 명을 내려 가드들이 손을 쓰기 전에 자신이 먼저 당할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과 저 여인의 목숨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인 것이다.

반트레오 백작의 이가 뿌득 갈렸다.

앤디가 반트레오 백작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생긴 것과 달리 미련하지 않군.”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우습게 봤다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은 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앤디의 의미심장한 대답을 들은 반트레오 백작이 한쪽 팔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안드레이와 셀린을 에워싸며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가드들이 뒤로 몸을 뺐다. 그리고 반트레오 백작 주위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들에게서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 반트레오 백작과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는 앤디를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는 뜻이었다.

앤디는 히죽 웃고는 뒷걸음질 치며 반트레오 백작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안드레이 곁으로 다가갔다.

“셀린,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고마워요.”

“네 녀석의 눈에는 사부는 보이지도 않느냐?”

둘의 대화에 끼어든 안드레이의 말에 앤디가 대꾸했다.

“뿅뿅거리면서 잘 도망치시더만요. 셀린 좀 도와주시지.”

“내가 움직이면 피 보는 사람 많다니까.”

“비싼 몸이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데요.”

“제자 도우려고 왔지.”

“칫! 말이나 못하면….”

앤디가 투덜거렸다.

그때 안드레이가 앤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수많은 수식어 중에 뿅뿅이 뭐냐, 뿅뿅이! 왠지 내가 얍삽하고 간사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뿅뿅이 어때서요.”

“조금 그렇지 않느냐.”

“별걸 다 따지시네. 그건 그렇고, 이야기하다 보니 입에 달라붙는군. 뿅뿅이라. 뿅뿅뿅뿅.”

앤디의 말에 안드레이가 자신도 모르게 함께 뿅뿅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말과 달리 나름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그러한 둘의 모습을 보며 셀린은 현재의 다급한 상황도 잊고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 둘과 있으니 지금의 급박한 상황도 별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탓이다.

하지만 한 사내는 그 셋의 알콩달콩한 상황을 보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바로 반트레오 백작이었다.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어?”

기가 막혀 한숨만 터져 나왔다. 왠지 혼자만 심각한 자신이 바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반트레오 백작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지 염두를 굴린 것이다.

민첩한 상황 판단력과 벼룩과도 같은 빠르기의 눈치가 없었다면 자신이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죽어 나자빠졌을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았다. 40명에 가까웠던 자신의 가드 중 11명이 바닥에 누워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죽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전력으로 쓰기에는 불가능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 있거나 검상으로 피칠갑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가드는 26명.

듬직한 머릿수였다.

하지만 반트레오 백작은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머릿수로 저들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말이다.

저들이 보여 주고 있는 여유는 허세가 아닌 진짜 여유로움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진짜였다.

‘대체 저런 녀석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런데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했다.

녀석들의 능력을 보건대 자신을 잡는다면 이미 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2가지 추론이 가능했다.

자신과 거래를 트자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반트레오 백작은 고민을 해봤다. 한참의 고민 끝에 거래 쪽에 가능성이 조금 더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럼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마지막은 엉망이 되었지만 팔 물건들은 이미 다 판 상태였고,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큰 손해는 없었던 것이다.

‘저들로서도 거래를 하기 위해 일부러 내가 입을 피해에 대한 고려를 한 것이겠지. 내가 피해를 입은 만큼 저들이 얻을 것이 줄어들 테니까 말이야.’

한 번 좋게 생각하면 한없이 좋게만 보이는 법이다.

막연하기만 했던 반트레오 백작에게 조금씩 여유가 돌아왔다. 저들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 탓이다.

자신의 딸 아리엘을 달래는 것도 그렇고, 아리엘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지만 그것은 차후에 해결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비해서 극히 소소한 일에 불과했다.

저들이 거래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반트레오 백작은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저들에게 조바심 어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으면 저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 것이다.

그런 반트레오 백작의 생각이 옳은 것일까?

가만히 있던 앤디가 반트레오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무슨 일이지?”

반트레오 백작의 대답에 앤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은 꿈은 다 꿨나 보지?”

“뭐, 뭣?”

앤디의 눈빛이 마치 반트레오 백작의 속을 다 읽고 있었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2

반트레오 백작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몰라서 묻는 건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모르겠군.”

반트레오 백작은 시치미를 뚝 뗐다. 하지만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앤디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면서 반트레오 백작을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어. 그리고 우리가 기다린 것은 당신의 생각이 정리되는 시간이 아니야. 바로 밖에서 안쪽의 상황 파악을 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을 뿐이지.”

“바, 밖?”

반트레오 백작의 눈동자가 벽 쪽을 향해 굴러갔다. 벽을 보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은 바깥의 상황을 그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반트레오 백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이 캄캄해진 탓이다.

앤디가 말을 이었다.

“걱정 마라. 너 혼자 가는 것은 아니니까.”

“무슨 말이지?”

“조금 전에 이곳을 빠져나간 녀석들 모두가 하나도 빠짐없이 붙잡혔을 테니까. 큭큭!”

“그, 그게 대체….”

“왜? 자신이 짐작하고 있던 사실과 다른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가 보지? 희망이 클수록 붕괴되었을 때 아픔도 크다고 하던데. 당신 표정을 보니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군. 얼마나 좋은 꿈을 꿨던 거야?”

앤디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

으득!

반트레오 백작의 이가 강하게 갈렸다.

앤디가 건들거리며 앞으로 한 발 움직이자, 반트레오 백작의 가드들이 조심스럽게 검을 꼬나 쥐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이동하며 앤디를 중심으로 공격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방위를 점해나갔다.

그때, 그들을 뒤에서 지휘하고 있던 대장급의 가드가 반트레오 백작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백작님! 어서 이 자리를 피하십시오!”

다른 가드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가 이곳을 막을 동안 영애 분과 빠져나가십시오!”

녀석은 그 말을 내뱉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 앤디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앤디는 가뿐하게 녀석의 검을 막아서며 말을 내뱉었다.

“녀석들 눈치가 백작 당신보다 낫군. 그리고 양아치들 주제에 꼴에 의리도 있어 보여. 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친구들. 이미 이곳과 관련된 모든 출입구는 막혀 있을 테니까! 크하하하!”

앤디의 목소리는 사이하기 그지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셀린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던 안드레이도 음침하게 웃음을 흘렸다.

“큭큭큭큭!”

셀린은 이 상황 속에서 뭔가 약간의 괴리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분명 악당에게 복수를 하러 온 사람인데, 지금에 와서 보니 오히려 자신들이 악당처럼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철면피 같은 반트레오 백작이 오히려 선량한 귀족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의 딸을 불한당들에게 보호하겠노라고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왠지 저 모습을 보니 짜증이 났다.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해야 할까?

정확하게 지금 이 심정이 어떤 것인지 말로, 이성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게 화가 났다.

그 화를 풀고 싶었다.

결국 마음을 굳힌 셀린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한 발 앞으로 나서려 하는데,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움켜쥐었다. 뒤를 돌아보니 안드레이가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

셀린은 그 작은 주먹을 꾸욱 움켜쥐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몰아치고 있는 앤디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앤디의 신위는 경외 그 자체였다. 양 떼 사이로 뛰어든 사자와도 같았다.

가드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앤디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지면 검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줄기 빛이 보일 뿐이었다.

“크악!”

“커헉!”

어떻게 방법이 없었다. 앤디를 막아내는 것은 자신들의 실력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등을 돌릴 수도 없었다.

등을 돌린다고 도망칠 수 있었다면 벌써 도망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앤디가 말하지 않았던가. 밖은 모두 포위된 상태라고 말이다.

그것을 듣고 가드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비밀 통로.

그래서 반트레오 백작에게 이곳을 자신들이 맡을 테니 도망치라고 했던 것이다.

비밀 통로가 있다면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개나 소나 알면 비밀 통로겠는가?

만일 그가 움직인다면 눈치껏 그 뒤를 따라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답답하게도 반트레오 백작은 자신의 딸만 부둥켜안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비밀 통로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동귀어진.

녀석들은 이를 악물고 자신들의 전력을 쥐어짜 검에 마나를 몰아넣기 시작했다.

오러가 한 줄기씩 피어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어를 포기하고 모든 전력을 공격에 퍼붓겠다는 마음을 검에 드러낸 것이다.

우웅! 우우웅!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것과 달리 그 빛에서 딸려 오는 소리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앤디는 그들의 진심을 읽고 웃었다.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앤디의 검이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휘둘러진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 작은 동작으로 탄력을 주어 검을 튕겨 냈다.

녀석은 자신의 검이 아무런 힘도 싣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나 그 경악은 복부의 엄청난 통증으로 보답 받았다. 앤디의 강력한 옆차기가 녀석의 복부를 후벼 팠기 때문이다.

“꺼어어억!”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앤디가 혀를 차고는 신형을 박찼다.

잠시 한자리에 머문 사이 수많은 검들이 자신을 노리고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제길! 이번에는 어디로 사라진 거지!”

“네 뒤.”

퍼억!

“캑!”

앤디의 위치가 파악되자 녀석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나 이미 앤디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더 그가 녀석들에게 파고 들어가, 주먹과 발을 휘두르고 차며 하나하나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녀석들은 검에 맺힌 오러가 부끄럽게도 손을 쓰지 못하고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때, 반트레오 백작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냅다 뛰기 시작했다.

딸 아리엘도 뭔가 사전에 사인을 받았는지 부리나케 옆을 따라 달렸다.

“저들이 도망쳐요!”

셀린이 다급하게 외치자 모두의 시선이 반트레오 백작을 향해 휙 돌아갔다.

가드들이 이를 갈며 반트레오 백작에게 저주 어린 시선을 던졌다.

그런 가드들을 향해 앤디가 말했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정신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군. 내가 우습지?”

가드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3

싸움은, 아니 싸움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일방적인 구타였다.

얼마 후, 가드들 모두가 신음하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앤디가 신음하는 가드들 사이에서 심호흡을 하며 상태가 좋아 보이는 녀석들을 조금씩 더 손보면서 비슷한 상태로 균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셀린은 그런 앤디를 보며 변태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할 자격이 없었다.

퍼억!

“죽어! 죽어버렷!”

셀린이 자신의 다리에 걸린 가드 하나를 미친 듯이 밟아댔던 것이다. 앤디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끄어어어어어!”

“꾸에에에엑! 사, 살려….”

주위의 가드들을 미친 듯이 밟고 차고 까는 셀린의 표정은 딱 마녀스러웠다.

오죽했으면 앤디가 와서 셀린을 말렸겠는가.

“진정해요, 진정! 워워!”

“후우… 후우….”

셀린이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퍽퍽퍽!

한참이나 뜯어 말린 후에야 셀린이 다급한 어조로 앤디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하죠? 백작이 도망쳤어요.”

‘빨리도 말하는군.’

앤디는 속으로 혀를 차며 불안해하는 셀린을 달랬다.

“이미 스승님이 따라갔어요.”

“공작님께서요?”

뒤를 돌아보니 안드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위험하지 않겠어요?”

“위험하긴 하겠죠.”

“그럼 빨리 따라가야죠. 안드레이 님을 보호해야 하잖아요.”

“엥? 스승님을 왜 보호해요?”

“위험하다면서요?”

“그 인간이 위험하다고요? 푸헤헤헷!”

“왜 웃으세요?”

“코끼리가 개미한테 밟혀 죽는 것 봤습니까?”

“그게 무슨…?”

“반트레오 백작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죠. 제발 스승님을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할 텐데….”

“….”

“뭐, 알아서 하시겠죠. 반트레오 백작을 생포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고,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사람….”

바로 그때였다.

콰과광!

저 안쪽에서 거침없는 폭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앤디와 셀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앤디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이 아니었지! 제길! 죽이면 안 되는데!”

타탓!

앤디가 다급하게 신형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시위를 벗어난 화살과도 같아 보였다.

“가, 같이 가요!”

셀린의 말이 끝났을 무렵에는 이미 앤디는 그 자리, 아니 이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안드레이의 분노가 폭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트레오 백작을 향해 마법을 날리지는 못했다. 분풀이라도 하듯 마법을 사방에 날리며 애꿎은 벽만 아작 낼 뿐이었다.

쾅! 쾅!

안드레이가 갈을 내질렀다.

“이 썩어빠진 자식!”

“무, 물러나라! 물러나지 않으면 이 아이를 죽일 것이다!”

“아, 아버지!”

반트레오 백작이 자신의 딸 아리엘을 인질로 잡고 선 탓이다.

“이런 더러운 녀석! 자신의 딸을 인질로 잡다니!”

딸을 인질로 쓰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반트레오 백작도 반신반의하며 사용한 수단이었다.

반트레오 백작은 앤디들이 아리엘을 이용해 이곳에 끌고 왔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음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 앤디와 아리엘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상황에 눈치를 챘던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아리엘을 챙겨서 도망쳤다. 최후의 수로 자신의 딸을 이용하기 위해 말이다.

함께 도망칠 수 있다면 좋은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안드레이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반트레오 백작은 친딸 아리엘을 방패로 사용했다.

그의 판단이 먹혔다. 안드레이가 더 이상 섣불리 움직이지 않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아버지….”

아리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반트레오 백작 역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이 있고 나서 딸의 목숨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는 그였다.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며 분노를 토하기까지 했다.

“흥! 나를 이렇게까지 만든 것은 네 녀석들이 아니더냐!”

“죄를 짓고 산 네 녀석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는 것이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는 것이냐!”

“인신매매는 큰 죄다! 대륙 공용법으로도 명시가 되어 있는 사항이다! 그 사실을 몰랐단 말이냐!”

“웃기지 마라! 내 소유물을 판 것이 어째서 죄가 된단 말이냐!”

“백성들이 어찌 네 녀석의 소유물이란 말이냐!”

“폐하가 나에게 주신 것이다!”

“이 어리석은 녀석! 백성들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라의 재산이다! 그 재산을 잘 보호하라며 맡긴 것이다! 어찌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 재산을 이용한단 말이냐!”

안드레이의 말을 들은 반트레오 백작이 이죽거렸다.

“지랄하고 있군.”

“뭣이? 지랄!”

“말이야 그렇지! 나라가 내게 해준 것이 뭐가 있단 말이냐! 내가 나라에 얼마를 퍼다 주었는데, 그것에 대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이냐!”

“네 녀석 따위를 배부르기 하게 위해 지킨 나라가 아니다!”

안드레이의 두 눈에서 안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주위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사방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쿠궁! 퍼펑! 퍼퍼펑!

“꺄아아아악!”

“크으윽!”

아리엘의 비명과 반트레오 백작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 너를 발기발기 찢어 죽이리라!”

안드레이의 음산한 목소리에서 살기가 배어 나왔다.

그때 마침 등장한 앤디가 당황해하고 있는 반트레오 백작의 뒷목을 내리쳐서 기절시키고, 경악하고 있는 아리엘을 마법이 닿지 않는 안전 지역에 놔둔 후 안드레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급하게 외쳤다.

“사부! 정신 차리세요! 이대로 가다간 동굴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고 만다고요!”

“…앤디구나.”

앤디를 본 안드레이가 주위를 살피더니 상황이 정리되었음을 목격했다.

반트레오 백작이 제압당해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치솟아 오르고 있던 살기를 누그러트릴 수 있게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흥분했어요?”

“인륜을 벗어던진 것도 모자라 폐하와 나라를 모욕했다.”

앤디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과 나라의 안위는 안드레이의 삶의 지향점이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이다.

그런데 녀석이 그 모든 것을 부정했던 것이다.

안드레이의 분노는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셀린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잡았군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셀린의 말에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의외의 눈빛으로 셀린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죠?”

“아니, 생각보다 차분해서요.”

셀린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럼 제가 저 쓰레기를 죽이겠다고 방방 뛸 것이라 생각했었나요?”

앤디가 그 말을 듣고 뜨끔했다. 너무 정확하게 맞힌 탓이다.

“아하하하! 전혀 아닙니다.”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처럼 경직된 목소리였다. 그런 앤디를 보며 셀린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요. 원래 제 마음이 그러했으니까요.”

“그럼 지금은 어째서?”

“제가 죽인다고 했으면 놔뒀을 건가요?”

앤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이더라도 나라에 보내 죄목을 따진 후….”

“후훗! 그러면서 뭘 물어보세요.”

“그런가요?”

앤디가 질문을 그만두고 시선을 돌리려 하자 셀린이 말을 이었다.

“저도 생각이 바뀌었어요.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죠.”

“그 의문에 결론을 내렸나요?”

셀린이 짧은 침묵 끝에 대답했다.

“죽음은 너무 편한 거예요.”

앤디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죽음보다 살아 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저자도 곧 알게 될 거예요.”

셀린의 시선을 따라 앤디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반트레오 백작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리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셀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앤디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조금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셀린이 말했다.

“이만 정리하고 가죠.”

“그럴까?”

안드레이의 대답에 앤디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런 앤디와 안드레이를 향해 셀린이 인사를 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아닐세. 결과적으로 우리가 도움을 받은 것이지. 저자가 이 왕국을 좀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네. 진즉에 나서서 해결하지 못해 자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우리들이 미안하구만.”

셀린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딱히 웃음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었다. 그 웃음 진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아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긴 그 표정 속에 말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앤디와 안드레이가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셀린의 어깨를 끌어당겨 가볍게 안아주며 등을 다독여 주었다.

“으흑! 흑흑흑….”

셀린의 어깨가 가볍게 떨려 오듯 들썩이는 것을 느끼며 앤디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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