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21화 (21/68)

제10장. 경매 시작

1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 매매장은 적지 않은 사람들로 들어찼다. 모두들 하나같이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는 가면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가면들이었다. 그 뒤로 수수한 가면을 쓴 수행원들이 적게는 둘에서, 많게는 다섯까지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올 사람이 다 왔다고 생각한 반트레오 백작은 단상에 올라서서 경매 망치를 두드리려 했다.

사람들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한곳으로 집중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반트레오 백작이 망치를 두드리는 것은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같았다.

그때, 저 뒤에서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

가면을 쓴 한 노인이 풍성한 가슴을 지닌 여인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반트레오 백작은 그를 반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인사했다. 재빨리 진행 요원 중 하나가 달려가서 맞이했다.

그러나 생소한 분위기가 느껴져 의아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의 얼굴은 모르지만, 처음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노인은 이곳에 처음 온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는 하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 질문에 노인이 불편한 듯 신음했다.

“으음….”

그러자 진행 요원은 집요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어떻게 온 것인지 바로 대답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노인 뒤에 있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여자 수행원이 나직하고 매섭게 말했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감히 우리 어르신께….”

어째서일까.

그 한마디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순간 모든 의심이 사라진 탓이다.

지금 짧게나마 그들을 의심한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남았다.

어떻게 이들을 의심했는지 자신에게 오히려 의아한 마음이 일었다.

“죄, 죄송합니다. 자리로 앉으시지요.”

“흥!”

“죄송합니다.”

연거푸 사과를 마친 진행 요원은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며, 자신의 뒤를 따라왔던 수하를 붙여 줬다.

“불편하신 점이나 필요하신 게 있으면 여기 있는 요원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제야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

“알겠네. 가보게.”

자연스러운 목소리와 하대에 진행 요원은 송구한 듯 뒤로 물러섰다.

반트레오 백작은 진행 요원이 저자세로 몸을 낮춰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문제없는 손님이라는 뜻이다. 문제가 있는 손님이었다면 그 진행 요원이 바로 경고의 사인을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트레오 백작은 마지막 손님이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차를 드는 것을 보고, 나무 받침대에 망치를 두드렸다. 더 이상 올 사람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탕탕탕!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도 이곳 경매장을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드리고,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상품을 공개하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건장한 두 사내가 한 여인을 툭툭 밀치며 단상 위로 올려 보냈다.

“….”

소녀가 휘청거리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처럼 몽롱한 표정이었다. 마치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히죽히죽 웃는다.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쓴 것이다.

울다가 다시 웃는다.

전신이 휘청거려서 혼자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그러자 진행 요원 하나가 올라와서 그녀의 몸을 잡고 지탱시켰다. 모두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바라보았다.

곧 경매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물건은 열다섯 살의 라일라입니다. 보시다시피 풋풋한 숫처녀이지요. 하자가 없다는 증거인 상품 보증서도 있습니다. 백 골드부터 이십 단위로 시작합니다.”

탕탕!

“백 골드.”

“백 골드 나왔습니다. 백이십 골드 없으십니까?”

“백오십 골드.”

“백오십 골드 나왔습니다. 백칠십 골드 없으십니까?

“백칠십 골드.”

그렇게 시작된 경매가 220골드로 마감이 되고, 두 번째 순서가 시작되었다.

“으으윽!”

순서가 지나갈수록 안드레이의 뒤에서 수행원처럼 시립하고 있던 셀린의 입에서 분노 어린 신음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에서 천불이 일어났다. 셀린은 가면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으로 반트레오 백작과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을 노려보았다.

모두 같은 놈들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은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다. 눈치가 빠른 근처의 몇몇 사람들이 셀린을 향해 의아한 눈빛으로 슬쩍 돌아보았다.

그런 셀린을 향해 안드레이가 조심스레 다독여 주었다.

“참아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

셀린이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자신 하나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을 망칠 수 없었다.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길고 아름다운 손톱이 손바닥을 찔러 들어왔다. 피가 배어나진 않았지만, 살 안쪽에 상처가 생겼는지 따가웠다.

다시 조용해지자 사람들은 셀린에게서 시선을 떼고 단상 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상품, 아니 희생자가 다른 돼지에게 팔려 가고 있었다.

그녀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저 불행한 여인들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안드레이가 헛기침을 했다. 그 덕에 정신을 차린 셀린이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왠지 자신을 부른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드레이가 자신이 돌아봤음에도 보지 않고 다시 헛기침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셀린은 안드레이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셀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약속된 장소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사인이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목격한 셀린이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셀린이 조용히 빠져나가 도착한 곳은 납치당한 이들이 가둬져 있는 곳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몇몇의 가드가 셀린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녀는 심연의 눈을 사용하여 길 안내를 받았으니 말이다. 그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녀를 자신의 상관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밝혔으니까.

셀린이 도착해서 주위를 돌아보니 2명의 가드가 철창을 지키고 서 있고, 1명의 여성이 다른 이들을 치장하고 있었다. 셀린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흠칫 놀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철창을 지키고 있던 가드 둘이 무기에 손을 대며 외쳤다.

“누구냐!”

셀린이 대꾸를 하기 전에 그들의 뒤로 음영이 드러났다.

“네 애비다.”

녀석들이 의문을 드러내기도 전에 날아든 손날이 녀석들의 목 뒤를 향해 날아갔다.

퍼퍽!

“캑!”

경추를 가격당한 두 녀석이 눈을 까뒤집고 그대로 쓰러졌다. 납치되어 온 이들을 치장하고 있던 여인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 못하고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상품을 꾸미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낯선 여인의 등장과 가드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그 가드들을 죽인 존재가 자신의 등 뒤에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딸꾹! 딸꾹!

놀라서 딸꾹질이 나왔다.

저 가드들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단숨에 제압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두려움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당연히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간 저기 쓰러진 가드들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살고 싶었다.

아직 죽기 싫었다.

두려움에 전신을 덜덜덜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사, 사, 살려 주세요. 딸꾹! 살려… 딸꾹! 주, 주, 주세요.”

개미 발 구르는 소리만큼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바로 그때, 그녀의 뒷목에 강한 충격이 밀려왔다.

퍽!

“…!”

그녀는 다른 가드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전신을 축 늘어트린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2

셀린이 말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되었잖아요.”

음영이 대답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앤디였다.

“이놈들은 작은 일에도 소란을 피우도록 훈련을 받은 녀석들이에요. 셀린이 어떻게 할 때쯤에는 다른 놈들이 달려왔을 거란 말이죠.”

앤디가 자신의 등 뒤를 가리키며 눈치를 주자 셀린이 그 뒤를 보았다.

“오면서 숨어 있던 다른 녀석들을 정리하긴 했지만, 다른 곳에도 숨어 있는 녀석들이 있을 거예요.”

사내 4명이 겹겹이 쌓여 자리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셀린은 앤디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이 오기 전에 일 처리를 마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왔을 무렵, 철창 앞에 있던 가드들은 태연하게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은 바로 근처에 있는 이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무런 잡음도 없이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말이 아닌가!

4명씩이나 있었는데 누구 하나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게 했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번거로울 정도로 일을 한 이유는 하나였다. 셀린 자신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사이에 경매 물품들이 제때 나오지 않는다면 경매장의 이들이 의심을 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앤디가 말했다.

“서두르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납치되어 온 이들의 상태가….”

셀린과 앤디는 자신들 앞에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풀려 있었다.

셀린이 분노로 어깨를 가늘게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을 사용한 것 같아요.”

셀린의 말에 앤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던 것이다. 창살 안에 갇혀 있는 이들의 상태도 여기 있는 소녀의 상태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셀린이 냉정하게 말했다.

“이미 당한 일이에요.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여기서 구해주고 난 후에 치료해도 늦지 않아요. 그들을 다시 깨워주세요.”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하는 셀린이었다.

앤디가 자신이 지금 막 기절시킨 여인을 깨웠다. 여인이 신음하며 정신을 차렸다.

곧 상황을 파악한 듯한 여인이 두려움에 떨며 앤디와 셀린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셀린과 그녀의 눈빛이 마주쳤다. 순간 여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셀린이 말을 걸었다.

“우리를 의심하지 마라. 우리들은 당신들의 상관이다. 일을 어떻게 하나 보러 온 것일 뿐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인의 눈빛이 두려움에서 아무런 의심이 담기지 않은 순종 어린 상태로 변화했다.

“아,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지금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눈앞의 셀린이 정말로 직속상관임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셀린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서두르도록 해라. 반트레오 백작님께서 조금 전 나온 여인의 상태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던 눈치셨다.”

순간 여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잘 설명을 드렸다. 그러니 그 문제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백작님께서 나에게 이곳으로 가서 도움을 주라고 하셨다. 내가 왜 직접 여기까지 왔겠느냐.”

“아아! 그러셨군요!”

셀린의 부드러운 미소를 받은 여인의 얼굴에 감격과 고마움이 어린 충성심이 걷잡을 수 없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셀린이 나가 죽으라고 명하면 그대로 할 것처럼 말이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앤디가 혀를 찰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상대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셀린의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말 심연의 눈이라는 거… 무섭군.’

셀린이 앤디를 보고 눈짓을 하자, 앤디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녀석들을 깨웠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발로 복부를 걷어차자 캑!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으니 말이다.

물론 입으로 말을 내뱉으며 행동했다.

“이 녀석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자빠져 자고 있는 거야! 군기가 빠져 가지고!”

그 말을 들은 여인이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몹시도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녀석들이 자꾸 치근덕거려서 일이 더 늦어지고 있었어요! 잠시 조용한가 했더니 자고 있었다니! 진짜 쓰레기 같은 놈들이네요!”

정말로 화가 난 모습이었다.

셀린이 다독여 주었다.

“저들의 상관에게 혼내라고 전할 테니 걱정 말고 일하도록 해라. 서둘러라. 지금 다음 경매가 시작되려 하니까.”

“알겠습니다.”

여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두 가드는 지금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과 같이 일하고 있던 여인이 처음 보는 셀린 앞에서 공손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드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조심스럽게 셀린과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셀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지금같이 바쁜 시간에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너희 두 녀석의 상관에게 이야기하겠다!”

“허억!”

“그, 그것만은 제발!”

순간, 두 가드는 농땡이 피워서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내뱉으며, 잔뜩 군기 잡힌 표정으로 철창 앞에 우뚝 섰다. 곧 진행 요원들이 오더니 셀린과 앤디에게 경례를 한 후에 단장이 끝난 소녀를 끌고 나갔다.

그것을 보며 앤디가 셀린에게 말했다.

“정말 셀린의 능력은 대단하네요. 무서울 정도예요.”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제가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몰랐어요.”

앤디가 당황했다. 이렇게 말해도 되냐는 눈치였다.

셀린이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마 이들은 우리 대화를 모를 거예요.”

“헐! 정말이요?”

“네.”

셀린의 말에 앤디는 슬쩍 가드와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변화가 없음을 확인하자 편하게 대놓고 물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 말은 지금까지는 이런 능력이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예, 아니었어요.”

“원래는 어땠는데요?”

“원래라고 하시면 저도 애매하네요. 현 상황과 굳이 비교를 해보자면, 과거에는 사람들이 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마음이 흔들리는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발튼 후작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 이건 거의 완벽한 최면 수준 아닌가요?”

“비슷하지만 최면하고는 다르다고 하더라구요.”

“다르다고 한다구요? 누가요?”

“안드레이 님께서요.”

“안드레이 님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무슨 일은요. 단지 저는 안드레이 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수련을 했을 뿐이에요.”

“수련이요? 어떤 수련을 했는데요? 며칠이나 됐다고 이런….”

“자세한 이야긴 나중에 하도록 하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 말에 앤디가 수긍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대단한 늙은이야.’

안드레이도 안드레이지만 셀린도 셀린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놀라운 능력이다.

지금에야 어째서 안드레이가 셀린을 탐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셀린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아니, 차고도 넘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가드와 단장을 시키고 있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대놓고 대화를 했지만, 정말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아무도 의심도, 의문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의 상관이 있으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열심히 하려고 할 뿐이었다.

앤디가 감탄에 감탄을 했다.

셀린이 말했다.

“이제 준비가 끝났군요. 그럼 시작할까요?”

앤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구석을 가리켰다. 셀린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두 가드를 돌아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너희 둘.”

“예?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 전에 상품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언제요?”

“네 두 녀석들이 졸고 있을 때 ‘상인’들이 와서 하나 더 추가하고 갔다.”

두 가드 녀석들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알아서 잘했어야 했는데….”

“추가 상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셀린이 대답해주었다.

“저기 구석에 있으니 끌고 와라.”

“예.”

두 가드 중 한 녀석이 움직여서 구석으로 갔다. 동료들이 나란히 포개어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녀석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이 새끼들 뭐야? 여기서 처자고 있네.”

그 말에 철창 앞에 자리하고 있던 가드가 반응했다.

“뭐? 어떤 새끼들이야?”

“이 조 가드 녀석들 같은데?”

“그 새끼들이면 그럴 만도 하지. 깨울까요?”

철창 앞에 있는 가드가 셀린을 보며 질문하자 그녀가 대답했다.

“놔둬라. 내가 잠시 후에 상부에 이야기할 테니까. 저런 새끼들은 혼이 한번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 말에 두 가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야, 상관님 말씀 잘 들었지? 내러벼 둬. 괜히 시비 붙지 말고. 어차피 잠시 후엔 고생을 할 테니까. 큭큭! 재수 없는 새끼들. 잘 걸렸다. 큭큭큭!”

“에이! 양아치 같은 새끼들! 퉤! 너흰 오늘 다 뒤졌어!”

그렇게 말을 하면서 태연하게 그들 앞을 지나가는 가드였다.

그것을 본 앤디와 셀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상황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구석에 간 녀석이 한 여인을 끌고 온 탓이다.

그 여인은 입이 막힌 채, 두려움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여인이 앤디를 보고 독기를 내뿜었다.

앤디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여인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앤디를 욕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셀린이 그런 그녀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보며, 가드와 열심히 상품을 꾸미고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저 물건은 특별한 상품이니까 약은 사용하지 말도록 해라.”

“그럼 꾸미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그렇다면 저 상태로 보내도 상관없다.”

셀린의 명에 여인이 가드에게 잡혀 있는 ‘추가된 상품’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최고 품질이군요. 알겠습니다. 힘들면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우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셀린이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다. 모두 수고들 해라.”

“살펴 가십시오.”

“더 이상 걱정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그래.”

앤디와 셀린은 그들의 존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그곳을 유유히 벗어났다.

3

가면을 쓴 셀린이 태연하게 자신의 주인으로 분한 안드레이의 뒤에 가서 섰다.

여섯 번째 경매가 시작되고 있는 중이었다.

안드레이가 셀린을 향해 말했다.

“수고했다.”

“….”

셀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대답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셀린은 지금 소리 없이 울먹이고 있었다. 가면 뒤에 흐르고 있는 눈물이었지만, 안드레이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반트레오 백작에게 짓밟히고 있는 부모님과 친구들,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들의 처참한 고통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고막을 자극했다.

모두 자신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생각에 수많은 날을 눈물로 보냈다.

자신이 그와 부딪치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골목에서 뛰어놀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집에서 가만히 공부만 하고 있었더라도,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감히 반트레오 백작에게 복수할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함이 더욱 가슴 아팠다.

뒤늦게 자신의 힘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이용해 복수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후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결국 꼬리가 잡혀 위기에 처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겨 가며 겨우 이 자리까지 왔다.

사실 복수를 꿈꾸고 실행하기 위해 행동하면서조차 복수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산이 너무 높았던 탓이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복수를 눈앞에 둔 지금, 수많은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 속에는 지금 저 앞에서 마약에 취해 아무런 사고도 하지 못한 채, 귀족들의 노리개로 팔려 나갈 저들에 대한 슬픔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이미 자신이 머뭇거리던 사이에도 수없이 팔려 나가 고통 속에서 죽임을 당했을 그들에 대한 애환도 담겨 있었다.

‘이제 곧….’

시간이 하염없이 느리게 흘렀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확실한데,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는지.

‘내가 겪은, 나와 같은 처지의 그들이 겪었을 그 이상의 고통을 네 녀석에게 돌려주마.’

셀린은 다짐했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의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돌아왔다.

마지막 순서였던 열두 번째 경매가 끝나고 사람들이 일어나려 할 때, 한 사내가 반트레오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반트레오 백작이 화색이 도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경매 망치를 두들긴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직 경매 물품이 남아 있습니다. 제 착오로 실수가 일어났습니다.”

그 말에 일어나고 있던 이들이 다시 제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던졌다.

앉은 이들 중에는 추가로 이루어진 경매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있었다.

이미 구매한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처음에 나오는 물건들은 끝에 나오는 물건들보다 급수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뒤로 가며 급이 높아지게 되는데, 그것도 넘어서 이렇게 추가로 이어지는 경매들은 대부분 특등급 이상의 물건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자, 고대하고 고대하시던 마지막 상품입니다. 오늘의 특상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열여덟 살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닌 아리엘입니다!”

반트레오 백작이 수하가 가져온 쪽지를 거창한 목소리로 읽은 후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쪽지를 살펴보았다.

“…응? 아리엘? 아리엘이라고?”

하지만 잘못 읽은 것이 아니었다.

반트레오 백작의 기분이 조금 찜찜했다. 하필이면 자신의 딸과 같은 이름을 지닌 상품인 탓이었다.

나이까지 동일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그때, 뒤에서 소란스러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진행 요원들이 상품을 가져오며 작은 소란이 생긴 모양이었다.

반트레오 백작은 짜증이 났다.

대체 일을 어떻게 했기에 이런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다.

우선 족치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웃으며 손님들의 눈치를 살폈다.

약간 짜증이 어려 보이는 눈빛들이었다.

반트레오 백작이 다급히 사과의 말을 남겼다.

“죄송합니다. 뭔가 작은 트러블이 생긴 모양입니다. 제가 잠시….”

그때 진행 요원들이 한 여인을 질질 끌고 올라왔다. 그 여인이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놔! 놓으란 말이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지!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나 이러는 거냐! 당장 놔!”

반트레오 백작은 인상을 구긴 채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여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리엘!”

그녀는 놀랍게도 자신의 딸 아리엘이었던 것이다.

아리엘도 그대로 굳은 채 반트레오 백작을 맥없이 올려다보았다.

“아, 아빠! 아빠?”

“아, 아니, 네, 네가 여길 어, 어떻게…!”

반트레오 백작의 눈의 초점이 흔들리며, 몸이 떨려 왔다. 말도 더듬게 되었다.

아리엘이 반트레오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여긴 어디예요!”

“여, 여기는….”

“그건 그렇고, 아빠가 여기에 왜 있는 거죠!”

“아빠는….”

반트레오 백작이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경매인석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 골드에 사겠소.”

그 말에 반트레오 백작이 얼어버렸다. 다급히 상황을 정정했다. 얼마나 급했던지 금액을 말한 사람의 얼굴도 보지 않고 설명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딸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에 얼굴을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이, 이 상품, 아니 이 아이는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아리엘이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반트레오 백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천 골드? 아버지, 지금 이게 무슨 말이죠? 제가 상품이라는 말은 대체 뭐예요!”

“그러니까 그건….”

식은땀이 났다. 자신이 살면서 이토록 당혹스러웠던 일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객석이 웅성거렸다.

긴장한 반트레오 백작이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딸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때 조금 전 물건을 사겠다고 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죽거리는 어투로 다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팔지 않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경매 상품을 보여 줘놓고서 가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안 파는 게 말이 되는가?”

그 말에 경매인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반트레오 백작의 이마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이러다가 일이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저 사내가 교묘한 말장난을 섞어서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격이 마음에 안 든다고 안 판다니.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자신을 망하게 할 작정인가? 하는 의문이 일 정도였다.

아니, 그것을 떠나서 정신이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넘어가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혼란스러웠다.

조바심이 나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쌓아온 탑인데. 한순간의 실수로 이 공든 탑을 날릴 수는 없는 탓이다.

“제가 언제 팔지 않겠다고 했습니까? 그러나 지금 올라온 여인은 파는 물건이 아…”

“그럼 그 물건을 팔겠다는 건가?”

결국 반트레오 백작의 분기가 폭발했다. 조심스러워하던 존댓말은 어디 가고 욕설이 튀어나왔다.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한 탓이다.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물건이라니!”

그 말에도 대응하는 사내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팔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은 팔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지?”

“이 아이는 내 딸이라고! 세상에 자신의 친딸을 파는 부모도 있단 말인가!”

그러자 사내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지금까지 네가 판 상품들은 뭐지?”

“흥! 그까짓 것들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지? 내 자식이 아닌데 말이다!”

“그 상품들하고 지금 올라와 있는 상품하고 다를 게 뭐가 있나?”

“상품이 아니라 내 딸이라고!”

“그래, 네 말대로다. 저 상품이 네 딸인 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난 상품이 보여서 사겠다고 했을 뿐이라고. 안 그런가?”

그제야 반트레오 백작이 자신의 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육감이 위험을 경고한 탓이다. 그곳을 돌아보니 마지막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조용히 경매를 지켜만 보고 있던 그 노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친 늙은이! 늙으면 곱게 늙을 것이지!”

“왜? 꼴에 너도 부모란 말인가? 그렇다면 네가 팔아 넘겼던 그들의 부모 마음은 헤아려 봤나?”

“내가 그딴 걸 왜 헤아려 봐! 그건 그렇고, 네 녀석은 누구냐! 말하는 것을 보니 경매를 하러 온 새끼는 아니구나!”

“나? 경매를 하러 오긴 왔지. 그러니까 산다고 하지 않았겠나?”

“너 같은 새끼한테는 안 팔아! 그리고 이 자리에서 순순히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늙은이,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큭큭큭! 네게 과연 그런 능력이 있을까?”

반트레오 백작과 말싸움을 하던 늙은 경매인, 아니 안드레이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반트레오 백작이 이를 갈았다.

“크크!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얘들아! 저 노인을 당장 죽여라! 아니다! 죽이지 말고 산 채로 잡아서 끌고 와라!”

하지만 자신이 기대하고 있던 수하들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낯선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과연 두고 볼 시간이나 있을까?”

“뭐, 뭐냐!”

반트레오 백작이 다급하게 시선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그 자리에 곱상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가 환하게 웃음을 머금은 채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사내아이의 뒤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3명의 가드가 눈을 까뒤집은 채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쿵! 쿠쿵! 털썩!

반트레오 백작은 그 장면을 보고 움찔했다.

가드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사내아이의 입꼬리가 더욱 깊이 올라갔다.

이유 모를 상황을 접한 탓에 얼어 있는 반트레오 백작을 사내아이가 마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뭐긴 뭐야? 저승사자시다.”

바로 앤디였다.

검황의 이름으로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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