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반트레오 백작
1
“하,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발… 백작님. 흑흑!”
“크흐흐흐! 누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느냐?”
“제발….”
부우욱!
“꺄아악!”
이제 갓 소녀티를 벗어난 처녀의 얇은 옷이 거칠게 찢어졌다. 작은 저항을 해보았지만, 남자의 강한 악력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인이 지쳐서 포기하고 결국 흐느껴 울자, 그 두터운 입술로 그녀의 아담하고 귀여운 입술을 덮쳤다.
썩은 음식 쓰레기나 풍길 법한 역겨운 입 냄새가 몰려왔다.
“우읍! 우읍!”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왔다.
서러웠다. 서러워서, 슬퍼서 눈물이 났다.
자신의 작은 가슴에 매달려서 헥헥거리는 백작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자신의 천한 신분이, 아니 모든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더러운 거머리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혀를 날름거린 채 말했다.
“어떠냐? 좋지? 기분 좋지 않으냐? 앙?”
헐떡헐떡! 할딱할딱!
“….”
전혀 좋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족들의 모습에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자신만 참으면 되는 문제다. 그러면 한동안 가족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돈도 들어온다.
‘그래, 이깟 몸뚱이가 뭐가 중요해. 내가 조금만 참음으로 인해 우리 가족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바로 그때, 밖에서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머리, 아니 반트레오 백작이 이마를 잔뜩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이냐!”
신경질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병신 같은 자신의 아들 녀석이 사고를 쳐서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데 방해를 받아서 짜증이 났다.
반트레오 백작의 말에 밖에서 문을 두드렸던 집사가 대답했다.
“작은아씨께서 여행을 마치고 지금 막 돌아오셨습니다.”
“뭐? 셋째 아리엘이? 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반트레오 백작이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옷장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아리엘은 어디에 있느냐?”
“마구간에 계시옵니다.”
“마구간?”
“예.”
“그놈의 다니엘인지, 다구리인지 하는 말 새끼를 보러 간 게군. 일 년 만에 집구석에 들어와서 애비보다 말이 먼저라니. 딸 새끼 키워봤자… 큼! 내 친히 마구간으로 가겠다.”
넓은 방 안에서 찢어진 속옷만 걸치고 있는 여인이 천장을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은 방 안에 누워 있으면서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일까.
이 비참한 상황에 웃음이 입꼬리에 걸린 이유는 말이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눈가를 타고 흘러 귀밑머리를 적셨다.
“왜요? 우리로서는 부족한 것 같은가요?”
“그럴 리가요. 너무 뜻밖의 말인지라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요.”
셀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복수를 도와준단다. 왠지 벌써 복수를 마친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셀린의 들뜬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일까?
물끄러미 셀린을 바라보고 있던 앤디가 미소를 날렸다. 그러자 셀린의 양 볼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그때,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안드레이가 딴죽을 걸었다.
“이젠 여자를 가리지 않고 다 유혹하려는 게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주님께 드릴 이야기가 늘어났다는 게지.”
움찔.
앤디의 표정이 비굴하게 변했다.
“스승님, 사랑해요.”
“사랑한다면서 이를 그렇게 악다물 필요가 있느냐?”
“제가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사랑한다니까.”
“큭큭큭! 됐다. 안 이를 테니 그만해라.”
셀린도, 앤디도, 안드레이도 모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자, 그럼 어떻게 복수를 할지 계획을 짜볼까?”
“계획이요? 그냥 가서 박살을 내면 되지 않나요?”
앤디의 무지막지한 말에 안드레이가 혀를 끌끌 찼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왜 안 되는데요?”
“지금 이게 양아치들 구역 싸움으로 보이느냐? 그냥 가서 때린 다음에 힘으로 누르면 눌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아닌가요? 제가 아는바 정신 못 차린 귀족은 깡패보다 더한 놈들인데 말입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나 다른 게 있다.”
“그게 뭔데요?”
“양아치들은 세금을 내지 않지만, 귀족이란 녀석들은 세금을 내거든.”
“아아!”
이야기를 들은 앤디와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쉽게 이해가 가는 설명이었던 것이다.
“너는 반트레오 백작이 왕국에 내는 세금이 얼만 줄이나 알고 있느냐? 그의 성격은 모르겠지만, 상인으로서의 능력은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그가 내는 세금 때문이라도 웬만한 죄는 덮어질 정도지.”
안드레이의 설명에 앤디와 셀린의 입이 다물어졌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헐!”
“….”
안드레이가 말을 이었다.
“그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만일 우리가 그를 건드리면 왕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세금을 내기 때문이지. 그 세금이라는 것은 충성의 뜻이기도 하지만, 이 돈을 주는 이유는 당신이 우리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오, 라는 말이기도 하거든. 하지만 왕실도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방법이요?”
셀린의 물음에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그렇다. 방법. 그 방법이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지. 그게 무엇이겠느냐?”
“우리에게 필요한 것? 혹시 명분 말인가요?”
셀린의 말에 안드레이가 손바닥을 쳤다.
짝!
“옳다. 셀린의 말마따나 우리에게는 명분이 필요하다. 녀석을 벌하기에 충분한 명분. 그 명분이 충분하다면 왕실이 오히려 그를 벌하게 될 것이다.”
“그 명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정보겠군요.”
“정확하다.”
안드레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정보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아느냐?”
2
“…그래서 오긴 왔는데 이게 뭐하는 짓인지.”
앤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앤디의 잘난 얼굴이 너무 튀었기에 안드레이가 마법을 이용하여 얼굴을 평범하게 보이도록 바꿨던 것이다.
그래도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잘난 얼굴은 쉽게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저 뒤에서 누군가 앤디를 불렀다.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뭐하느냐! 변을 다 펐으면 물을 길어 와야 할 것이 아니냐!”
“아직 남았어요! 정말 더러워서….”
다그락! 닥닥! 다그락!
앤디가 신경질적으로 똥 주걱으로 변소 밑바닥을 박박 긁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떠올리며 웃고 있을 안드레이를 생각하니 열불이 터졌다.
“줄 거면 조금 좋은 자리 좀 주든지.”
닥닥닥!
정보 어쩌고 하기에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안드레이의 생각은 이러했다. 반트레오 백작의 성에 직접 들어가 일을 하며 주변 상황을 캐오라는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냐고 물었더니, 안드레이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 것을 몰랐냐며 반문했다.
앤디는 왠지 욱했다.
안드레이가 변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별의별 좋은 말만 잔뜩 했으면서, 지금은 부려먹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저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나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기분 탓이다.”
“처음에는 안 그러셨잖아요.”
안드레이가 앤디의 물음에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처음에는 어땠는데?”
“원하는 것은 다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뭐? 다를 게 있느냐?”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네가 아직도 잘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잡은 물고기에에는 미끼를 주지 않는, 아! 이게 아니군. 지금 네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셀린을 데리고 온 것은 너다.”
“그렇지만 셀린을 탐내하셨잖아요?”
“탐이 나긴 하지. 저런 인재를 앞에 놔두고 가만히 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안 봤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보질 않았느냐.”
“그럼 스승님의 일도 되는 것 아닌가요?”
“그것은 아니다. 내가 고민을 하긴 했지만, 결정을 내린 것은 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네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네가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했으면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내 말이 틀린 것 같으냐?”
“으윽….”
뭔가 속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 따져 생각해보니 안드레이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도와주려는 것 같은 낌새를 보이긴 했지만, 그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네가 벌인 일이다. 그러니까 네가 나서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결국에는 어떻게든 앤디가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승님도 결국에는 얻는 것이 있잖아요.”
안드레이가 셀린을 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나도 너를 따라 도와주겠다고 하였고, 맡은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 있게 말할 만했다.
안드레이의 능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어떤 수를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이곳 반트레오 백작의 저택에 일꾼으로 넣었던 것이다.
모두 앤디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을 하고 있지 않고, ‘올 일꾼이 왔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앤디가 세상을 모른다고 해도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도와줄지에 대해서 조금 더 상세하고 명확하게 들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냥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라는 추상적인 말이 아닌, 어떤 직분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 말이다.
설마 화장실 분뇨 통을 비우는 일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샘을 통하게 해서 물을 흐르게 만들어 강으로 자연스럽게 쓸려나가는 화장실은 귀족들이나 사용하는 곳이고, 이곳은 병사들이나 하인들이 사용하는 공중 화장실이었다. 그런 곳까지 샘을 뚫고 어쩌고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분뇨는 당연히 쌓이고,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인력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일을 처음 일하러 온 앤디가 맡게 된 것이다.
옆에 일꾼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뒤에 서서 인상을 구긴 채 잔소리만 했다.
차라리 없었으면 더 나았을 법한 인물이었다. 조금 전에 저 멀리서 물 길어 오라고 소리쳤던 그 인간이었다. 그가 어느새 다시 와서 짜증 어린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똥 튀잖아! 내가 그렇게 가르쳤냐? 조심스럽게 푸라고 했잖아!”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는 앤디였다.
‘시끄러운데 기절을 시켜 버릴까?’
“이렇게밖에 일을 못해! 이럴 거면 당장 나가버려!”
‘그럼 그렇게 잘하는 당신이 하지, 왜 나에게 맡기는 겁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앤디는 어색하게 웃으며 조용히 분뇨 통을 날랐다.
지금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일은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옆에서 떠드는 인간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냄새도 조금 견디기 힘들었다.
옆에서 잔소리하던 인간은 앤디가 일을 마치자 콧방귀를 뀌며 어슬렁어슬렁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덕에 한숨을 돌리게 된 앤디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명한 하늘이 구름을 부지런히 옮겼다.
푸른 산과 하늘.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기분이 많이 풀어졌다.
꼬르륵!
그러고 보니 배가 고파왔다. 일을 하다 보니 점심때를 그냥 지나치고 만 것이다.
‘어디서 식사를 해야 하는 거지? 그걸 안 물어봤네. 그건 그렇고 그 잔소리꾼, 일만 부리고 밥 먹으란 말 한번을 안 하네? 나 참!’
그때, 후덕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앤디에게 다가왔다.
앤디가 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돌리자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너로구나. 오늘 일하러 왔다던 아이가 말이다. 이름이 뭐니?”
“앤디예요.”
“앤디로구나. 좋은 이름이다. 나는 세르핀이라고 한다. 앞으로 세르핀 아줌마라고 부르려무나.”
“예. 처음 뵙겠습니다, 세르핀 아줌마.”
세르핀 아주머니가 웃으며 앤디가 건네는 공손한 인사를 받았다.
“그래그래. 일은 처음이니?”
“집에서 부모님 일은 많이 도와드렸었어요.”
“그래도 많이 힘들지?”
앤디가 웃으며 대답했다.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세르핀 아주머니가 기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앤디를 보더니, 들고 있던 빵을 건네주었다.
“자, 오늘 끼니도 건넜지? 이거라도 먹거라.”
이곳저곳에 고구마도 박혀 있는 큼지막한 빵이었다.
앤디가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저기 우물가에서 물도 먹으며 먹거라. 목이 멜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밥은 저쪽 하인들 전용 식당이 있으니 거기서 먹도록 해라. 정해진 시간에만 먹을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알겠니? 이곳 규율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식사가 안 되게 되어 있거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니다. 누가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참견을 조금 하게 되었구나.”
“참견이라뇨.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가씨 티타임이구나.”
그 말에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요?”
“그래. 이곳 반트레오 백작님 저택에는 한 분의 도련님과 세 분의 아가씨가 계시는데, 큰아가씨와 작은아가씨는 벌써 시집을 갔고, 막내 아가씨인 아리엘 아가씨가 남아 계신단다. 도련님도 결혼은 하지 않으셨는데,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서 지금은 저택에 안 계시지.”
앤디는 그 불미스러운 일이 뭔지 묻지 않았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실수로라도 웰터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신경 쓰며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던졌다.
“셋째 아리엘 아가씨요?”
“그렇단다. 참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분이시지. 어떻게 그런 아가씨가 우리 백작님 같은 분의 자식으로 태어났는지….”
세르핀 아주머니는 혼잣말을 내뱉듯 뒷말을 흐리더니, 안타깝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앤디는 그녀가 하는 말에 끼어들지 않고 경청만 했다. 묻지 않아도 알아서 설명해주는데 괜히 끼어들어서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바쁘다고 말해놓고도 이렇게 급히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의 수다는 대단했다.
“하여튼 아리엘 아가씨가 일 년 전에 여행을 떠났다가 이번에 돌아오셨는데, 그것 때문에 저택이 조금 어수선하단다. 혹시나 실수할까 봐 하는 이야긴데, 아가씨를 보거든 조심하거라. 백작님께서 아가씨를 너무 사랑하시는 게 조금 과하시니 말이다. 네가 작은 실수라도 할 경우 경을 칠지도 모른단다. 알아듣겠니?”
이야기를 듣는 앤디의 눈빛이 반짝였다.
세르핀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끝난 듯하자 앤디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충고 감사합니다, 세르핀 아줌마.”
“그래그래. 똘똘하게 생긴 게 알아서 잘할 것 같구나. 그럼 이 아줌마는 이만 가볼 테니 수고하거라.”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3
그날 이후, 앤디는 아리엘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묻지 않아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슬쩍 말문을 트면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둑이라도 뚫린 것처럼 아는 것들을 모조리 이야기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생긴 앤디가 걱정된다는 듯 하지 말아야 할 것과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든지, 이곳의 유래라든지 기타 등등 잡다한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어서자 이번에는 ‘소문’이라든지, ‘백작에 대한 험담’도 잔뜩 흘러나오게 되었다.
앤디가 조용히 말을 잘 들어주고 맞장구도 쳐주자, 신이 난 이들은 그를 최고의 수다 상대로 생각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얼굴도 반반하게 생겼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던 그녀들이다.
그렇다고 여자들만 앤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또래의 청년 하인들은 벌써 앤디를 따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 청년들은 앤디를 중심으로 자연히 모여들었다. 앤디는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결과, 며칠이 되지도 않아서 앤디는 이곳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일을 마치고 온 듯한 하인들 다섯이 우르르 앤디를 향해 다가왔다.
“앤디, 뭐해?”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앤디가 청년으로 보이는 사내들을 반갑게 맞이해줬다.
“일 마치고 쉬고 있어.”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앤디의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공교롭게도 저 멀리 성당의 시계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대앵! 대앵! 대앵!
그 소리에 놀란 것일까, 아니면 마침 하늘을 날아가던 것일까? 수많은 새 떼의 무리가 마을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날아갔다.
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일도 적당히 쉬면서 하라고. 주는 것도 없는데 뭣하러 그렇게 열심히 일해?”
앤디는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으로 넘겼다.
식당으로 이동하면서 사내들은 쉬지 않고 앤디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에도 사내들은 앤디에게 많은 말을 했다.
앤디는 귀찮아하지 않고,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다 듣고 대답해주었다.
그러다 자기들끼리 의견이 갈려 말싸움이 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앤디가 나서서 그들의 논쟁을 정리시키곤 했다.
“오늘은 반찬이 뭘까?”
“달라봤자 거기서 거기지.”
앤디는 투덜거리는 사내들의 뒤를 따라서 식당에 들어섰다.
그런데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달랐다. 왁자지껄 시끄러워야 할 그곳이 고요에 가까울 정도로 조용했던 탓이다.
앤디의 앞에서 들어서고 있던 사내들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얼었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지경이었다.
앤디는 함께 왔던 사내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아가씨, 이런 천한 것들이 있는 곳은 오실 곳이 못 됩니다.”
“한번 와보고 싶었어.”
“이제는 만족하셨습니까? 그럼 이만 나가시지요. 더 볼 것이 없습니다.”
집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아리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어떻게든 이 고집불통 아가씨를 이런 누추한 곳에 오래 있지 못하게 하는 것 말이다.
반면, 아리엘은 그런 집사에게서 신경을 끊고 고개를 숙인 채 얼어 있는 하인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식사들 해.”
“….”
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같이 눈치를 살피며 상황을 주시할 뿐이었다.
괜히 움직였다가 저기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집사에게 찍혀 무슨 고초를 겪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하인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문가에서 서성이다가 안으로 들어와 식판을 들고 주방에 갔다.
“밥 주세요.”
그 한마디에 차갑다 못해 싸늘했던 이곳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저, 저런 미친!’
‘어디서 굴러온 개뼈다귀 같은 녀석이!’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세르핀이 다급하게 말했다.
“집사 어르신, 죄송합니다. 이자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시끄럽다!”
집사의 외침에 아리엘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더 소리쳤다.
“시끄러운 건 집사야! 왜 그래! 밥 먹겠다고 하는데!”
“그, 그래도 아가씨….”
“내가 먹으라고 해서 먹는 건데, 왜? 내가 하는 말이 우스운 거야?”
“그, 그럴 리 있겠습니까?”
집사가 쩔쩔맸다.
아리엘이 그런 집사를 보고 콧방귀를 뀐 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사내를 보며 세르핀에게 말했다.
“세르핀, 그 하인에게 식사 주지 않고 뭐해?”
“아, 예! 아가씨.”
세르핀이 사내에게 식사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사내가 식판을 들고 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아리엘이 사내에게 다가가 마주 앉았다.
“이름이 뭐지?”
“앤디라고 합니다.”
“앤디? 얼굴이 반반하게 생겼구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서슴없이 대답하는 사내의 모습에 또 다른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까지 집 안에 있는 하인 중 자신의 질문에 이렇게 당당히 대답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그럼요. 셋째아가씨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너는 내 앞에서 참으로 당당하구나.”
“저는 잘못한 게 없거든요.”
“그럼 저들은 잘못한 게 있어서 저렇게 굳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느냐?”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럼 어째서 저들이 저렇게 굳어 있는 것 같으냐?”
“아가씨 탓인 것 같아요.”
순간, 분위기가 쩡하고 깨질 것처럼 얼어붙었다.
집사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며 분기 어린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고, 하인들은 모두 심장이 오그라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앤디와 함께하고 있던 사내들 중 둘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반면에 이 상황을 연출해낸 두 사람은 주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은 앤디 한 사람뿐이었다.
아리엘은 주위의 반응을 모두 받아들이며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아리엘은 지금 어색한 감정을 추스르는 중이었다.
눈앞에 자리한 앤디라는 하인의 당돌하고 솔직한 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항상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 하인이 자신과 눈을 맞대고 대답하는 게 조금 못마땅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실 가지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이 편하게 하라고 해서 편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한다면 하인들에게 트집 잡으려고 이 자리에 와서 설친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할 정도로 상냥하게 앤디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감추기 위해서 그런 모습이 흘러나오게 된 것이다.
“어째서 내 탓이라는 거니?”
“모르세요?”
“뭘 말이니?”
아리엘의 연이은 물음에 앤디는 짧은 망설임도 없이 말을 내뱉었다.
“이곳에 오면 하인들이 어려워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오신 거잖아요. 정말 모르셨어요?”
“그, 그건….”
순간, 아리엘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왔다.
자신은 대체 어째서 온 것일까.
이들을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혹시 은연중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당돌한 하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약간 언짢았던 이유가 자신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모습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원한다고 이성이 생각하면서 본능이 거절했다는 말인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은 정말 무슨 생각으로 여기를 온 것이었을까?
그때 앤디가 다시 물었다.
“아니에요?”
“그건 아니야.”
아리엘의 입에서 힘겹게 나온 대답을 앤디가 맞받아쳤다.
“그럼 뭔가요?”
“나, 나는….”
“나는 다른 귀족과 다르게 좋은 사람이니까 이런 지저분한 장소에서조차 하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나는 하인들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이들, 혹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아가씨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뭐, 이런 거였나 보군요?”
“….”
편안하고 정중한 어투의 목소리와 다르게 그 말의 내용은 독하고 신랄한 독설에 가까웠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앤디의 눈빛이 잘못을 채찍질하는 연장자의 눈빛으로 바뀐 것은 말이다.
눈빛만 바뀐 것이 아니다.
본질적인 기운까지 바뀌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리엘이 기어오르는 하인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심지어 화조차 내지 못하고 경청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은 말이다.
놀랍게도 주위의 모든 이들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집사조차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전혀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앤디를 보며 속 시원하다는 생각을 하고, 속으로 아리엘을 향해 핀잔을 던지기까지 했다.
‘저런 말 들어도 싸다, 싸. 속이 다 시원하네.’
‘저러니 철부지 아가씨라는 소리를 듣지. 쯧쯧!’
앤디가 결국 결정타를 날렸다.
“소설책을 많이 보신 모양이군요.”
“…!”
아리엘은 자신의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더니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앤디의 말을 듣고 보니 뭐랄까, 자신의 잘못이 하나씩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뭐라 반박하고 싶지만 반박할 말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해야 할까?
자신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어째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일까.
‘내가 이들에게 이토록 큰 피해를 주고 있었던 것이라는 말인가?’
결국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그게 어떤 사인이라도 된 것일까?
사람들의 머릿속에 천둥이라도 내려친 것처럼 쾅! 하며 뭔가 터진 것 같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이 상황이 분별되기 시작했다. 마치 최면에 걸렸다가 풀어진 것처럼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앤디의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던 집사가 화들짝 놀라 분기를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이 수긍하며 들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기에, 그것을 더욱 숨기기 위하여 더 큰 목소리를 내질렀다.
“발칙한 놈! 네 녀석이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까부는 것이냐!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아리엘이 그런 집사를 말렸다.
“집사 할아범, 그만….”
집사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은 혼을 내야 합니다!”
그러자 아리엘이 더욱 큰 눈물을 흘리며 나직하게 내뱉었다.
“…그만해. 내가 더 비참해지잖아.”
“아가씨….”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엘이 억지로 눈물을 훔치고 미소 짓더니, 하인들에게 한마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미안해요. 여러분들 생각을 못하고 제 생각만 했네요. 모두 맛있는 식사 하세요.”
집사가 하인들을 쭉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앤디를 노려본 후에 그녀의 뒤를 따라 다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지나간 이 폭풍과도 같은 상황에 놀라 어찌해야 좋을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들의 시선은 시간이 지나며 하나둘 앤디를 향해 모였다. 생각이 정리될수록 이 사태의 원흉이 바로 앤디라고 결론을 내린 탓이다.
놀랍게도 그 원흉인 앤디라는 소년은 자신이 벌인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마치 이 사태와 자신은 전혀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놓인 음식을 태연하게 먹고 있었다.
“후루룩! 냠냠냠!”
그것도 너무나 맛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