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18화 (18/68)

제7장. 저주

1

“뭐? 돌아간다고?”

발튼 후작의 물음에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이제 가봐야지요.”

“얼마나 있었다고 간다는 말인가.”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즐겁다면 더 있지, 어째서 가는가? 혹시 우리가 뭔가 실수라도 했는가?”

발튼 후작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아쉬워했다.

그러나 앤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실수는 저희가 했지요. 저희가 무슨 낯으로 이곳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네. 그 일 때문이라면 걱정 말게나. 우리들은 모두 잊었다네.”

“그래도 저희의 마음이 무거워 불편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행한 실례는 다음에 꼭 사죄하겠습니다.”

그 말에 발튼 후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드마스터에게 작은 빚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빚이라도 그것은 큰 것이었다. 나중에 자신이 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다시 꼭 놀러오게나. 셀린 양도 가능하면 다시 들러주시구려.”

“알겠습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앤디가 유도했다. 이 정도는 해줘야 귀족들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엘리스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앤디가 엘리스를 향해 미소를 던지며 말했다. 그 모습은 사랑스러운 동생을 바라보는 오라비의 형상을 그리고 있었다.

“엘리스도 재밌게 놀다가 가려무나.”

“예, 오라버니.”

앤디가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소녀들이 우르르 엘리스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엘리스에게 물었다.

“오라버니라고? 대체 언제부터 알았는데?”

“나도 소개시켜 주라. 응?”

“아, 부럽다.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은데. 지금까지 미안했어.”

“맞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가 잘못했던 것 같아.”

그 말에 엘리스가 은은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줬다.

“아니야. 괜찮아.”

“정말 미안해.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고 실수를 했어.”

웰터의 추잡한 진실이 모두 드러나자 소녀들은 엘리스에게 미안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하지만 소녀들은 잘못한 것을 깨끗하게 시인하고 사과를 했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실수를 하긴 했지만, 속마음은 여리고 순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엘리스, 저분은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언제 친해진 거야?”

“그게 그러니까….”

엘리스와 앤디가 눈이 마주쳤다. 앤디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리스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엘리스의 걱정거리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앤디와 셀린은 그렇게 발튼 후작의 저택에서 나왔다. 그리고 쉬지 않고 걸어 헤르만 왕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출발한 지 8일 만의 일이었다.

“오느라 힘들었죠? 수고 많았어요.”

“별로 힘들 건 없었어요.”

셀린이 약간 핼쑥한 얼굴로 대답했다.

둘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생각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앤디는 스스로 조심했다.

셀린에게 상처가 될 만한 질문을 일부러 피하며 배려해주었다. 셀린도 그런 앤디의 마음을 느낀 듯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럼 왕성으로 가죠.”

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앤디가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병이 신분을 확인하고 절도 있는 모습으로 막아서던 창을 거두었다.

“앤디 드 카르미온 백작님의 입궁을 확인합니다.”

그 말에 앤디의 눈빛이 반짝였다. 자신이 이곳을 빠져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앤디의 신분을 시종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발튼 후작의 무도회를 갔다 오자 자신의 풀 네임과 신분까지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경비병들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앤디는 셀린을 놔두고 헤르만 8세를 배알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앤디 경. 수고했네. 피곤할 테니 그만 들어가서 쉬게나.”

“감사합니다.”

앤디는 인사를 마치고 왕의 집무실에서 나섰다. 그리고 귀족 대기실에서 얼음에 가까운 모습으로 굳어 있는 셀린을 이끌고 왕궁 어딘가에 있는 안드레이를 찾아갔다.

“연구실에 없다니 별일인데?”

그때, 지나치던 한 마법사가 앤디를 보고 반겼다.

“앗! 앤디, 아니 이제는 앤디 드 카르미온 백작님이시죠.”

“그렇게 됐군요.”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드레이 공작 각하께서는 조금 전에 방으로 가셨습니다. 찾아가 보십시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드레이는 놀랍게도 셀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지금 모든 정보망이 전 왕국에 깔려 있을 텐데, 이런 이야기는 우스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인자한 표정으로 앤디를 반기는 안드레이였다.

안드레이가 시선을 돌려서 셀린에게 말을 걸었다.

“육 년 만이로군.”

“안드레이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하하! 굳이 그렇게 어색하면서까지 예를 갖출 필요는 없소.”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 눈에 대해서 잘 아신다고 하셨죠?”

“그렇소.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했지.”

“알려 주세요. 이 저주받은 제 눈의 비밀을.”

“하하하! 저주라….”

“….”

“그건 저주가 아니오. 신의 축복이오.”

“신의 축복이라니 말도 안 돼요! 이건 저주예요! 악마가 심어놓은 저주!”

셀린이 몸서리치며 분노 어린 목소리를 토해냈다.

안드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말을 꺼내서 그녀의 말에 반박하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사연이 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저 눈을 가지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이 더 믿기 어려운 일일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평범한 삶은 불가능 했을 테니 말이다.

의도치 않게 많은 사건에 휩싸였을 것은 보지 않았지만,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사연으로 인해 큰 심적 고통을 겪고,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리라.

안드레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말하는 것과 발튼 후작의 무도회에 숨어 들어간 것. 관련이 있는 것 같구려. 맞소?”

셀린이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반트레오 백작….”

“반트레오 백작? 설마 웰터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오?”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 모든 불행은 그를 만나면서 시작되었지요.”

셀린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2

셀린은 멜톤이라는 작은 영지에 속해 있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렵게 임신에 성공한 부모는 자신의 딸에게 무한한 사랑을 전해주었다. 어째서인지 아이를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행복의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셀린은 커나가면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독식했다.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높았고, 주위 사람들도 셀린의 말이라면 가능한 선에서 모두 들어줄 정도였다. 뭔가 주어야만 할 것 같은 매력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어려서부터 주위의 사랑을 듬뿍 받다 보니 셀린은 그게 당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릇없는 아이로 자라나지 않았다. 셀린은 모든 사람을 자연스럽게 챙겼다. 그런 그녀였기에 더욱더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언제고 변하지 않을 것같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 귀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반트레오 백작. 그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것이다.

셀린이 살고 있는 영지를 지나가던 반트레오 백작은 옆의 영지 영주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폭정을 휘두르는 악덕 영주로 유명했다. 터무니없는 세금은 물론이거니와,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자신의 욕정을 푸는 데 사용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자신의 힘을 발휘해 초야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초야권이란 부부가 연을 맺은 첫날밤에 그 영지의 영주가 신랑보다 먼저 여인과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영지라는 것은 마음대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영지민은 백성이지만, 자신의 권리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탓이다.

영지에 속해 있는 이는 영주의 재산.

그런 재산이 자신의 의지대로 영지를 바꾼다는 것은 사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도망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들은 잡히면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노예로 강등 당한다.

그들에게 왕은 따로 있지 않았다.

바로 영주가 왕이었다.

영주의 말에 반론을 하거나 반항하는 이들은 처형에 처해지거나, 인간 구실을 못할 정도로 고문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눈물을 머금고 영주의 폭정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우선 사는 게 중요한 탓이었다.

반트레오 백작의 보좌관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송했다.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오랫동안 지지부진하게 늘어졌던 멜톤 영주와의 일을 마치고 나오던 반트레오 백작이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큭큭큭! 당연하지. 이제 이곳 멜톤 영지도 내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군.”

“축하드립니다.”

“자네도 수고가 많았네.”

“제가 한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현명하신 백작님께서 진행하신 일 아니옵니까.”

“뭐,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아니라고 하는 것도 모양새가 안 나겠군. 크하하!”

“아하하하!”

반트레오 백작의 기분은 지금 하늘을 날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원하는 것도 얻은 데다, 자신의 간지러운 부분을 살살 긁어줄 줄 아는 녀석이 맞장구를 쳐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액세서리를 하나 구입하기 위해 보석 가게에 가는 와중에, 골목에서 튀어나온 한 여자아이와 부딪친 것이다.

쿵!

“아야!”

부딪친 여자아이가 튕겨 나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기분 좋게 웃고 있던 반트레오 백작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것을 본 호위 기사가 분기 어린 표정으로 검을 뽑아들더니, 여자아이의 목에 겨누며 소리쳤다.

“넌 뭐냣!”

“저, 저….”

여자아이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어린아이에게 칼까지 뽑아든 것은 사실 오버하는 것임을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아이 하나를 막아서지 못했다는 이유로 호위하는 기사로서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작은 꼬맹이 때문에 문책을 받을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난 것이다.

“평민 나부랭이가 감히….”

“자, 잘못… 해….”

“시끄럽다!”

그때였다.

여자아이가 튀어나온 골목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밀려나온 것은 말이다.

“셀린! 같이 가아아!”

골목에서 뛰어나온 아이들이 곧 우뚝 멈춰 섰다. 기사가 인상을 쓰며 아이들을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살벌한 분위기에 놀라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 기사에게 잡혀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신음처럼 그녀의 이름을 흘렸다.

“세, 셀린…?”

기사가 입을 열었다.

“더러운 평민 녀석들이 감히 고귀한 반트레오 백작님께 먼지를 묻히다니! 이건 죽어도 용서가 되지 않는 중죄다!”

순식간에 주위로 사람들이 몰렸다. 정확하게는 보는 시선이 많아졌다고 해야 옳다. 가까이 다가가 봐야 해코지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몇몇이 다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는 것이 보이더니, 곧 저 멀리서 셀린의 부모가 달려왔다.

“셀린!”

셀린의 부모는 자신의 딸이 한 귀족의 발아래서 기사에게 잡힌 채 목에 칼이 드리운 모습을 보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놀라고 말았다.

부모는 동시에 반트레오 백작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나으리! 제발 제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 한 번만 용서를 해주십시오! 흑흑흑!”

“….”

하지만 반트레오 백작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부모를 노려볼 뿐이었다.

칼 앞에서 덜덜 떨고 있던 셀린의 눈 속에 놀람과 두려움, 슬픔으로 가득한 엄마의 얼굴이 들어왔다.

놀라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있던 셀린의 입에서 나직하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엄마.”

엄마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최대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왠지 셀린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셀린의 아버지가 말했다.

“나으리, 제발 용서를 바랍니다. 저 미천한 어린 것을 죽여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저에게 벌을 내리시옵소서.”

기사가 검을 부모에게 겨누며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흥! 아주 웃기고 있구나! 그래, 네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도 죄. 네 녀석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주마.”

“나으리!”

순간, 셀린이 무슨 용기가 났는지 자신의 앞에 자리하고 있던 반트레오 백작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외쳤다.

“사, 살려 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우리 부모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뭐든지 할게요! 엉엉!”

“아니, 이년이!”

기사가 다급하게 셀린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뒤로 당겼다.

“악!”

셀린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가 젖혀졌다. 그럼에도 반트레오 백작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당황한 기사가 더욱 강하게 머리를 잡아당겼다.

셀린이 머리가 빠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제, 제발요….”

그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반트레오 백작이 말문을 열었다.

“그만해라.”

“저의 불찰로 백작님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놈들을 끌고 가서 죗값을….”

호위 기사가 하는 말에 반트레오 백작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만하라니까. 오늘같이 좋은 날 굳이 피를 봐야 하겠느냐. 물럿거라!”

“죄송합니다.”

그제야 뒤로 물러서는 호위 기사였다.

하지만 두 눈을 번뜩이며 셀린과 부모들을 노려보고는 주위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흘렸다.

마치 이 근처에 누구라도 오기만 하면 단칼에 베어버리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셀린의 부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혼자 남게 된 딸을 재빠르게 자신들의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셀린과 부모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해와 같은 이 은혜 어찌 갚겠습니까?”

반트레오 백작이 웃으며 대답했다.

“갚겠다고?”

“물론입니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예?”

뭔가 예상과 다른 대답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반트레오 백작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에게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느냐?”

“그, 그렇습니다.”

셀린과 부모는 서서히 불안한 감정을 지우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라.”

셀린의 아버지만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순간 아버지의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반트레오 백작과 그 주위의 사내들이 음흉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내와 딸을 주시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마땅하게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던 와중, 반트레오 백작이 한마디 더 뱉었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뭔가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셀린과 그녀의 어머니는 그 말에 불응했다. 그러자 결국 기사들의 강압적인 힘에 의해 고개를 들고 말았다.

하지만 최대한 시선을 피했다. 느물거리는 백작의 눈빛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반트레오 백작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후후! 생각보다 반반하군.”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셀린의 아버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짐작을 하기 무섭게 확인 사살을 하는 반트레오 백작이었다.

“저 두 년들을 오늘 밤 내 방으로 보내거라.”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나으리! 그, 그것만은!”

“이놈!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하, 하지만 이건….”

“아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셀린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가슴을 찢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셀린과 자신의 부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치 놔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반트레오 백작의 보좌관이 앞으로 나서며 호통을 쳤다.

“지금 뉘 앞에서 번복을 하는 것이냐! 네놈이 지금 백작님을 능멸하고 있음을 알고 있느냐!”

“능멸이라니요. 제가 어찌….”

“지금 네가 하는 짓이 바로 능멸이다!”

“아, 아닙니다!”

“너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백작님께서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용서해주셨다! 그런데 너는 네가 하겠다고 한 말도 지키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저, 저는 그, 그런 말을… 하, 하지 않았습니다요.”

“그럼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무엇이냐! 정녕 귀족 모독죄로 단칼에 죽고 싶은 게냐! 지금 빨리 선택하여라!”

순간, 눈에서 눈물이 두둑 하고 바닥을 내리쳤다.

“으흐흑!”

“여보!”

“…아빠.”

“크흐흐흐흑!”

셀린의 눈가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좋아. 저년들을 끌고 가거라.”

보좌관의 명에 기사들이 다가가 아버지의 품에 있던 셀린과 부인을 억지로 끌어냈다.

평범한 이에 불과한 아버지가 단련된 기사들의 완력을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기어서라도 다가서려 했지만, 곧 기사들의 발에 차여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더러운 새끼가 감히 은혜도 모르고 기어올라!”

퍼억!

“커허헉!”

기사들이 아버지를 미친 듯이 밟아댔다.

“더러운 새끼!”

“쓰레기 같은 놈!”

퍽! 퍽! 퍽!

아버지는 더 이상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빠! 엉엉!”

“여보! 흑흑흑!”

반트레오 백작은 유쾌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왠지 오늘 밤도 즐거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앙탈 부리는 맛이 있어야 정복하는 느낌이 난다니까.”

“맞습니다, 백작님. 큭큭큭!”

벌써부터 밤이 기대되어 마음이 설렜다.

그 말을 들었는지 하염없이 울던 셀린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반트레오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반트레오 백작이 즐거워서 미치겠다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마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조롱해줄 목적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여인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찢어 죽일 듯한 눈빛을 던지지만, 나중에는 모두 하나같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순응하게 된다.

반트레오 백작은 그게 좋았다. 자신의 힘을 거기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곧 셀린과 반트레오 백작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반트레오 백작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하얗게 변해버렸다고 해야 하나?

오만가지 상념들로 가득 차 있던 반트레오 백작의 머릿속이 조용해진 것이다.

그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느낀 것은 보좌관이었다.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

“백작님?”

보좌관이 백작의 시선을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셀린과 눈을 마주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

지금까지 없었던 분노와 슬픔 등이 자리를 잡아 확장하며, 이미 존재하고 있던 기쁨과 행복이라는 감정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둘이 엉키며 싸우는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가 기사의 발에 맞아서 쓰러졌다.

순간 셀린은 속에서 뭔가 변화하는 것이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빛이 팍! 하고 터지며, 어떤 기운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뭐지?’

하지만 의문을 떠올리는 것도 잠시… 지금 상황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셀린의 고막을 반트레오 백작의 목소리가 자극했다.

“여자는 앙탈 부리는 맛이 있어야 정복하는 느낌이 난다니까.”

“맞습니다, 백작님. 큭큭큭!”

이윽고 정신을 차린 셀린이 분노가 가득히 담긴 시선을 가지고 반트레오 백작을 노려보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힘이 없는 자신도 싫었고, 자신의 권력만 믿고 설쳐 대는 반트레오 백작도 싫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평온한 삶이 깨진 것이 더욱 싫었다.

살의를 담아 반트레오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반트레오 백작이 시선을 돌려 마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반트레오 백작이 얼어붙어 버렸다.

그때 셀린은 자신에게 뭔가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변화가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힘과 관련되었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반트레오 백작의 옆에 자리하고 있던 보좌관이 인상을 구겼다.

“네 이년! 감히 네년이 어떤 분을 노려보고 있는 줄 알기나 한단 말이냐! 당장 시선을 돌리지 못할까!”

그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이었을까.

셀린이 고개를 돌려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도와주세요!”

“미친년! 당장 주둥이 닥치지 못할까! 누가 네년을 해코지라도 한단 말이냐!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하지만 셀린은 그런 보좌관의 말을 무시하며 목 놓아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주세요!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흥! 그럴 일은 없겠지만, 누구든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인다면 반란의 죄목으로 처벌할 것이다!”

그때였다. 사람들이 뭐에 홀린 듯한 모습으로 한 걸음씩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홀린 듯한 표정은 서서히 지워지고 의무감으로 변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셀린과 그녀의 부모를 억압하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셀린을 구해야 해!”

“나도 도와주마!”

그 목소리를 들은 보좌관과 기사들이 놀라고 말았다.

평민들이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자신들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하지만 놀란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사람들의 가족들도 놀라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이에요!”

“여보! 어서 돌아와요!”

그러나 그들은 가족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셀린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몸을 던졌다.

셀린이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선을 회피했다.

상황에 엮이기 싫었던 것이다.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이지만, 자신들까지 그 피해를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몇몇은 안쓰러운 시선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셀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들 역시 반트레오 백작과 마찬가지로 멍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그때 그들의 귓가에 셀린의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제발 저희 좀 도와주세요!”

그들은 순간 셀린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꼭 들어줘야만 하는 일과 같이 느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미친 녀석들! 그래, 원한다면 죽여주지! 모두 반트레오 백작님을 보호하라!”

“충!”

기사들과 병사들이 검과 창을 뽑아들었다. 살기가 넘실거리며 위압감이 조성되었다. 그럼에도 이미 달려들기 시작한 이들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때, 기사 하나가 맨 앞에 달려들던 평민 사내에게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크헉!”

그는 상체에 깊은 검상이 드리우며 바닥에 쓰러져 즉사했다.

그러나 덤벼드는 이는 그 한 사람이 아니었다. 족히 수십은 되었으니 말이다.

또한 셀린을 구하겠다고 달려든 평민들은 사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이 든 노인에서부터 여인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있었다.

“죽어라! 죽어!”

푸우욱!

서걱! 서걱!

“커흐헉!”

“으악!”

기사들과 병사들은 서슴없이 그들을 베고 찌르며 죽였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순식간에 도시 한복판은 피바다가 되었다.

그럼에도 셀린은 계속 도움을 요청했고, 그녀의 눈빛과 맞닿은 이들은 어김없이 사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사람들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 마녀? 마녀다! 마녀야!”

“마녀라고?”

웅성웅성!

뒤에서 남아 있던 이들이 경멸과 두려움의 시선으로 셀린을 주시하게 된 것이다.

그 소리가 기사들에게도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소녀가 마녀라면 이 상황이 이해가 갔다. 아무리 모자란 평민들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좌관이 소리쳤다.

“저 소녀, 아니 마녀를 죽여라!”

그 명을 받들기 위해 기사들과 병사들이 셀린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면서 몇몇 기사와 병사들도 셀린과 시선이 마주치게 되었다.

“도와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셀린과 눈이 마주친 그들이 쥔 검을 돌려 동료의 등에 쑤셔 박거나, 목을 베어 넘겼다.

푸우우욱!

1명의 기사와 3명의 병사가 등 뒤에서 당한 불의의 일격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숨을 거두었다.

다급히 그들의 범위에서 벗어난 한 기사가 동료를 죽인 기사에게 소리쳤다.

“어, 어이! 뭐하는 짓이야!”

“저 불쌍한 소녀를 지켜 줘야 해! 넌 저 소녀가 불쌍하지도 않냐!”

“이 새끼도 홀렸구나! 미친놈아, 어서 정신 차려! 저년은 마녀라고!”

“시끄러워! 네가 저 미친 백작한테 홀려 있는 거야!”

“무슨 소리냐! 저분은 우리의 주군이시다!”

“퉤! 저런 더러운 돼지비계 같은 주군은 이제 버리겠다! 저 가녀린 소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리 핍박을 한단 말이냐! 더군다나 마녀라니! 저 녀석들의 더러운 폭정에 지쳤다! 너도 나와 함께 저 더러운 백작을 욕하지 않았었더냐! 그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이냐!”

그 말에 기사가 다급한 시선으로 뒤를 살피더니 목청을 더 높였다.

“노옴! 말을 함부로 내뱉다니! 아무리 마녀의 최면에 걸렸다고 해도 용서하지 않겠다!”

“그럼 어디 용서하지 말아봐라!”

챙! 채챙!

기사들의 검과 검에서 불꽃이 튀었다. 병사들 사이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한 기사가 동료와 맞상대를 하며 분기 어린 목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저 마녀를 죽여!”

“마녀를 죽여라!”

하지만 그 분란이 일어난 사이, 셀린과 그녀의 부모 앞에는 많은 이들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기사와 병사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셀린은 우리가 지킨다! 더러운 귀족과 기사들은 당장 여기를 떠나라!”

“너희의 폭정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우리 착한 영주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너희 영지로 떠나라!”

셀린에게 홀린 동료 기사와 병사들을 해치운 이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살기로 충혈된 그들은 거침없이 아무런 방비도 못하고 서 있는 평민들을 베어 넘겼다.

그사이에 다시 기사와 병사들이 셀린의 눈빛과 닿았고, 또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서서히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셀린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피해가 커진 것은 차치하고, 자신이 저 최면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 반트레오 백작이 입을 열고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저 소녀를 지켜야 해. 저 소녀를 지켜야 해.”

그 말에 놀란 보좌관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백작님!”

“너도 어서 저 소녀를 지켜라. 어서. 나와 같이 지켜야 한다.”

보좌관이 질린 표정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백작님께서도 마녀에게 당했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피에 절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뒤로 빠졌다. 호위 기사가 10명이었고, 병사가 오십을 넘어섰던 위풍당당한 병력이 기사 둘과 병사 여덟로 줄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물러나고, 셀린을 보호하던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 기쁨의 환성도 잠시.

참혹한 주위의 상황에 뒤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 있는 자신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자식들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셀린과 부모를 지켜 주겠노라 다가왔던 이들은 강제적으로 가족들에게 끌려갔다.

자신의 가족들을 챙기는 이들이 셀린과 그녀의 부모를 경멸과 두려움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자리를 피하고자 했다. 그 자리에는 자신들이 예뻐했던 사랑스러운 셀린이라는 소녀는 없었다. 정체를 드러낸 무서운 마녀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셀린이라는 마녀에게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셀린은 멍한 표정으로 시체 사이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에야 이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참상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흠.”

“…그리고 저는 마을 사람들에게 잡혀 이교도 심판관에게 끌려갔지요. 하지만 제 능력에 휘말린 사람들이 다시 갈라서서 싸움을 시작했고, 저는 그 틈에 자리를 벗어나게 되었지요. 제 부모님을 찾아서 집으로 갔는데,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어요. 반트레오 백작의 기사들이 찾아와서 보복을 했던 거예요. 저는 재빨리 영지를 벗어나게 되었죠. 그러던 와중에 반트레오 백작이 직접 나서서 영지민들을 잔인하게 살인했다고 해요. 저를 숨겨 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하에 말이죠. 저는 그 반트레오 백작을 피하기 위해 도망 다니게 되었죠. 하지만 저주는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그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저와 엮이며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까요.”

셀린의 이야기가 끝나자 안드레이가 침음을 흘렸다.

“그런 상황을 겪었다니. 저주라고 생각할 만도 하겠군. 그래서 반트레오 백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발튼 후작의 무도회로 가서 웰터와 접촉을 가질 기회를 노렸다, 이 말이군.”

“….”

셀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언의 긍정임을 안드레이와 앤디가 모를 리 없었다.

앤디가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심연의 눈에 최면 효과가 있습니까?”

“정확하게는 최면이 아니지.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을 뿐이니까.”

“마음이요?”

“양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양심이 그런 행동을 유도한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불만을 겉으로 드러나도록 한 것이다. 이야기만 들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논리적 사고를 가지고 셀린을 지키려 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는 셀린을 지킨다고 하는 것보다 마을을 저 나쁜 귀족들에게서 지켜야 한다는 그 마음가짐이 컸던 모양인 듯하지만 말이다. 반트레오 백작의 기사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있었기에 검을 돌려 들은 것이겠지. 한마디로 셀린의 심연의 눈은 계기가 되었을 뿐, 상황을 그렇게 유도했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겠지.”

“그렇군요.”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시 셀린의 강력한 감정의 움직임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발휘한 것은 사실인 것 같구나. 감히 최면으로 보일 정도의 강력한 힘을 보였으니 말이다. 심연의 눈의 효과란 그 사람이 상대방의 말을 조금 더 진솔하게 듣고, 받아들이는 정도의 수준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는 말인즉, 심연의 눈도 수련에 따라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내 가설이 옳을 수도 있겠군.’

안드레이의 가슴은 새로운 지식의 깨달음으로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셀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제 능력의 이름이 심연의 눈이라고 하셨나요?”

“그렇소.”

셀린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앤디와 안드레이의 대화를 토대로 셀린은 많은 사실을 깨닫고,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둘의 대화에서 조금 더 자신의 힘의 근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심연의 눈은 저주가 아니오. 놀라운 재능이지. 사물의 본질을 뚫어볼 수 있으니까.”

“사물의 본질?”

“그렇소. 사물의 본질. 사물의 본질을 꿰뚫기에 상대방의 본질을 뚫어보고 마음을 여는 것이오. 본질을 뚫어본다는 것. 그것은 마법을 배울 때 엄청난 도움이 된다오. 그것이 재능이 아니면 무엇이겠소.”

그제야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힘들게 하는 고갯짓이었지만, 납득을 했다는 사실에 안드레이는 만족스러웠다.

“그때 셀린 양이 나에게 재능이 있어야만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오?”

“네, 기억이 납니다.”

“셀린 양은 재능이 차고도 넘치오. 육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나의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소. 나의 제자가 될 생각이 있소?”

안드레이가 셀린의 의중을 물었다.

셀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어째선가? 아직도 나의 설명이 부족한가?”

안드레이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은연중 말을 놓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안드레이 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모두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습니다.”

셀린이 아름다운 손바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안드레이가 물었다.

“아직도 반트레오 백작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인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리하는가?”

“힘들다고 포기하면 저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은 누가 달래준단 말입니까?”

“끄응….”

안드레이가 인상을 구겼다.

그것을 본 앤디가 질문했다.

“왜 그러세요?”

안드레이는 앤디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넌지시 셀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의 고심 어린 표정 끝에 말했다.

“흠… 그럼 이렇게 하지. 그 일을 해결하고 나면 그때는 내 제자가 되겠는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복수를 하고 난 후에도 저를 기다려 주신다면 안드레이 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 말에 안드레이가 주름진 얼굴을 구겨 가며 환히 웃었다.

“그래. 분명 약속한 것이네.”

“물론입니다.”

안드레이가 앤디를 보고는 한쪽 눈을 찡끗 감으며 윙크했다.

앤디는 왠지 지금 저 말로 인해 자신이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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