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17화 (17/68)

제6장. 웰터

1

앤디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서자 엘리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앤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더 이상 춤을 출 상황이 아닌 것 같군요.”

“네, 괜찮아요.”

대답과 달리 엘리스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쉽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귀족의 무도회에서 도난 사건은 정말 설명이 필요 없는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기사들이 입구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발튼 후작이 미안함과 분노 어린 복잡한 느낌의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죄송하오. 내 저택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된 점을 사죄드리겠소. 번거롭겠지만 출구를 봉쇄하고, 신원 확인을 할 것 같소. 빨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를 바라겠소이다.”

모두들 약간 불만 어린 표정을 보이긴 했지만, 드러내 놓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날고 있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발튼 후작의 저택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미 발튼 후작이 직접 사죄까지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최대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빠른 속도로 신원 확인이 정리되어 갔다.

곧 앤디 차례가 왔다.

앤디를 조사하기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웰터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미 신원 확인이 끝난 웰터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말했다.

‘어서 네 진정한 정체를 밝혀라! 그 가면을 벗고 허접한 모습을 보이란 말이다!’

하지만 앤디는 웰터와 다른 이들의 혹시나 하는 기대와 다르게 통과되었다. 신분이 확실하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을 확인한 웰터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근처에 있던 친구들이 웰터에게 물었다.

“웰터,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야?”

“아, 잠깐 졸았나 봐. 아무것도 아니야.”

웰터의 말에 친구들이 피식 웃었다.

“녀석, 싱겁긴. 그건 그렇고, 대체 범인이 누굴까?

“그러게 말이야. 흥을 다 깨놓고 말이지. 잡히기만 하면 단칼에 그냥!”

웰터는 친구들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조금씩 짜증이 피어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람들도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남은 사람의 수가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아직까지도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결과에 신경을 쏟았지만,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범인을 찾을 확률이 거의 없음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원 확인을 하는 것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만일 범인이 귀족 중에 있다면 어쩌겠다는 말인가.

신원 확인이 범인을 잡는 일이라면 평민은 모두 범죄자라는 공식인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연회장에 있는 많은 이들이 귀족인 탓이다. 귀족들의 감정을 상하게까지 하면서 파고들 수 없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도둑맞은 물건을 찾기 위해 뭔가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야 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신원 확인이라는 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때, 한 여인이 신원 조회 중에 잡혔다. 그녀가 밝혔던 신분이 거짓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넌 누구냐!”

“나는 오드레 백작의 둘째 딸인….”

“아직도 우기다니! 네년이 도둑이 확실하구나!”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몰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귀족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사건의 중심부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파티가 즐거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같이 파티에 참여하다 보면 웃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지루함을 외칠 수밖에 없다.

같은 사람과 같은 인사를 나누며, 변하지 않는 가식과 거짓으로 중무장하여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기를 쓰는 이곳.

그렇다고 오지 않을 수도 없다. 사람과 만나 거래선을 여는 것도, 정보를 교환하는 일들도 대부분이 이런 연회장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귀족들에게 즐거운 유흥거리가 생긴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외쳤다.

“나는 도둑이 아니다!”

그러자 주위에 자리하고 있던 수많은 귀족들이 소곤거리거며 분노를 토했다.

“도둑이 자신보고 도둑이라고 하는 거 봤어?”

“아니, 못 봤지.”

“흥! 멀쩡하게 생긴 년이 도둑질이나 하다니.”

“그것을 떠나서 신분을 위조하다니! 요망한 것!”

“귀족 사칭 죄는 즉결 사형 아닌가?”

그녀가 분노 어린 시선으로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귀족들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빛을 받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와 눈빛이 마주 닿았던 그들이 두려운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간혹 오는 적막감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달랐다.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앤디가 고심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셀린.’

지금 도둑으로 잡힌 그녀는 바로 앤디가 신경을 끊겠다고 결심했던 셀린이었던 것이다.

앤디는 고심했다.

‘어떻게 하지? 흐음.’

도와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처음에 결심했던 대로 그냥 무시해야 하는지 사이에서 말이다.

사실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의 만남도 없었고, 인연을 이어갈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귀족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이곳에 좋은 의도로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시하는 것도 걸렸다.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이야 어찌 되었든, 앤디는 셀린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자신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안드레이가 떠올랐다. 그녀를 제자로 삼고 싶어 하던 모습과 말이다. 만일 안드레이가 이 현장을 자신이 그냥 지나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다.

안드레이라면 이 상황을 보고 어떻게든 그녀를 구해줬을 것이다.

인재를 발굴하여 키워야 한다는 지론하에 말이다.

앤디는 결국 힘겹게 결론을 내렸다.

“도와줘야겠군.”

단순히 안드레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좋지 않은 마음으로 왔다고 해도 그녀가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사건으로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서 뻔한 누명을 쓰고 있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고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 이 사건이 어째서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구해줘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앤디의 시선이 슬쩍 이동하여 누군가를 주시했다.

그 순간 웰터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초점이 어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예의 일어나는 시선 처리가 아님이 확실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그가 앤디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흠….”

보면 볼수록 밉상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개도 없었다. 앤디의 속에서 사악한 생각들이 하나둘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니 정확하게는 전생을 포함하여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 이에게 자비를 베푼 역사가 없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그때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슬쩍 앤디를 향해 시선을 돌리던 웰터는 그가 아직도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태연을 가장하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앤디가 그것을 보고 마주 미소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네가 감히 누구를 건드렸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2

앤디가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아직도 실랑이를 하고 있는 셀린과 조사관을 보았다.

셀린은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따가울 정도로 주시하고 있는 감각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한 사내가 있었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지금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신흥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라고 했던가?’

셀린은 사실 처음 저 사내를 보면서부터 지금까지 의아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어디서 본 것 같다는 기분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머릿속에 저런 사내와 만났던 기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처음보는 사내를 보면서 느끼게 된 것인데 어째서인지 안드레이라는 이름도 친숙했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단순한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그런 고위 귀족을 만날 일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자자한 귀족이니 돌아다니다가 한두 번 들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저 앤디라는 사내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들처럼 호기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반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이 어찌 되었든 간에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의념을 담아 그를 향해 눈빛을 던졌다.

“….”

이상한 일이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눈빛을 전혀 개의치 않고 마주 보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자신의 의념이 담겨 있는 시선에 반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의념을 담아 시선을 던지면 화를 내든지, 무서워하든지, 아니면 반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여 왔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순간 셀린에게 잊혔던 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야!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이 있었어!’

6년 전, 한 소년에게서 구출되었던 사실을 생각한 것이다.

‘서, 설마!’

셀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바로 그때, 셀린의 귓가에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

움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소리가 들려오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집어 부르고 있지 않는가. 자신은 이곳에서 가명을 썼기에 본명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없었다. 마치 자신만 그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이 말이다.

셀린, 들리나요?

다시 셀린의 몸이 가볍게 떨려 왔다. 주위의 분위기를 보니 역시나 아무도 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텔레파시?’

셀린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녀는 다시 앤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나에게 말을 건 것이 맞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다시 이야기가 들려왔다.

제가 말 거는 것 맞습니다. 반응을 보니 잘 가고 있는 것 같군요. 오랜만에 하는 거라 크게 자신은 없었는데…. 그런 의아한 표정 짓지 않아도 돼요. 셀린이 생각하고 있는 게 뭔지 알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라 전음이라고 하지요. 대충 설명한다면 소리를 마나에 실어 근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인데, 멀리 떨어져서 하는 귓속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 말에 셀린이 눈을 깜빡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앤디는 그런 셀린을 보며 감탄했다.

눈치가 무척 빨랐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자신이 어째서 전음을 했는지 벌써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움을 원하시나요?

껌뻑.

그러면 저와 거래를 하시면 됩니다. 물론 강압적인 것은 아니에요.

껌뻑.

좋아요. 그럼 이야기를 듣고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 눈을 두 번 연달아 껌뻑이시면 돼요.

껌뻑.

그 와중에도 셀린은 자신의 무고함을 토하며 다른 상대와의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 덕에 누구도 셀린과 앤디의 상황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제가 누군지 기억하시죠? 그럴 것 같았어요.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네요.

앤디는 자신도 모르게 스승을 따라가고 있었다. 표정으로 남의 생각을 읽는 버릇 말이다.

매일같이 붙어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 짧은 기간 동안 닮은 것이다.

스승님이 뵙고 싶어 하세요. 저와 함께 스승님을 만나신다면 제가 도와드리죠. 저번과 달리 조금 이야기를 나눠보세요.

앤디의 말을 들으며 셀린은 놀라는 중이었다.

그때 만나서 자신에게 마법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하던 그 정신이 나가 보이던 귀족이, 지금 정계를 움켜쥐고 있는 핵심 인물인 안드레이 공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셀린은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지푸라기든 뭐든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렸다.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셀린의 속마음이 앤디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제안에 수락을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제자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까지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계기만 충족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둘이 전음과 눈 깜빡거림으로 대화를 하는 동안 상황은 많이 악화되었다.

“이년! 도저히 실토할 생각을 하지 않는군! 어쩔 수 없다! 우선 가둬라!”

발튼 후작의 명에 기사들이 셀린을 붙잡았다.

바로 그때 앤디가 앞으로 나섰다.

“발튼 후작님.”

“앤디 경, 그래, 무슨 일이오?”

발튼 후작이 분기 어린 표정을 애써 지우며 앤디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만큼 앤디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처벌을 늦춰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발튼 후작의 이마가 슬쩍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범인이 따로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발튼 후작은 진중한 표정으로 앤디를 주시하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말에 책임질 수 있소? 확실하지 않다면 아무리 안드레이 공작 각하의 제자라 할지라도 그에 합당한 값을 물어야 할 것이오.”

“제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앤디의 확고한 말에 발튼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을 보고 앤디가 좌중을 돌아보며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우선 가장 중요한 도난당한 물품을 확인해야겠군요.”

사람들이 그 말에 큰 반응을 보였다.

“지금 그 물품들이 모두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앤디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까지 태평하게 주위를 살피며 앤디를 어떻게 깎아내릴지를 고심하고 있던 웰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막 꺼낸 앤디의 발언 때문이었다.

‘흥!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괜히 튀어 보이려고 저러는 거야. 어디 한번 망신이나 당해봐라.’

처음에는 속으로 설마설마했다. 자신이 그렇게 신중을 기울였는데 그가 알 수 있을 리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물품을 숨겨 놓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동했다.

그가 한 걸음 이동할 때마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리고 긴장한 탓인지 손발이 찼다.

만일 정말로 도난 물품의 위치를 앤디가 알고 있다면,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어찔하며 혼란스러워졌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대체 어떻게?’

이러다가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이 확실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어!’

웰터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는 동안 앤디는 자신이 숨긴 물품을 찾아냈다.

사람들은 앤디의 모습에 열광했다. 그리고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대체 범인이 누구냐고 말이다. 그러자 앤디가 웰터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히죽 웃었다.

바로 그 순간, 웰터가 검을 뽑아들고 앤디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3

사람들이 경악했다.

갑자기 가만히 있던 웰터가 검을 뽑아들고 앤디를 향해 신형을 쏘았기 때문이다.

“죽어라!”

그의 외침과 거침없는 손속에 모두가 앤디의 죽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웰터는 그의 나이대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기사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해했다. 안드레이의 제자가 죽었으니, 그의 분노가 어떻게 폭발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앤디가 어느새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 웰터의 검을 막았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웰터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범인이라고 시인을 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자신을 망친 녀석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그리 먹자 검에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웰터의 눈에는 앤디가 몸이 절반으로 갈라진 시체의 모습으로 보였다.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검을 막을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나이대에서 자신이 최고라 불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검이 날아가다가 중간에 걸렸다.

차창!

웰터가 이죽거렸다.

“운이 좋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크큭! 관에 들어가야 눈물을 흘릴 녀석이구만.”

웰터가 거침없이 검을 쏘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최선을 다해서 검을 휘두르는데 어김없이 막혔다. 마치 자신의 앞에 하나의 막이라도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창! 챙!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지만, 그 보이지 않는 막을 파고들어 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웰터의 이마에 땀방울이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했다. 앤디의 검이 뱀처럼 자신의 팔을 파고 들어왔다. 웰터는 다급하게 팔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아차 싶었다.

자신의 허점이 너무도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위기감에 찔끔하고 몸을 떨었지만, 웰터는 의아했다. 앤디의 반격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고 앤디를 보니 그가 여유롭게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자신에게 어서 더 덤벼 보라고 도발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웰터의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앤디가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음이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다시 전력을 다해서 검을 휘둘렀다.

앤디의 검이 부드럽게 반원을 그렸다.

웰터는 자신의 공격이 어이없게도 무위로 돌아간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공격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힘이 쭉 빠졌다.

검에 맺히고 있던 오러가 사라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처음에는 어떤 사술에 빠져서 오러를 빼앗긴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마나의 양을 느꼈을 때 평소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엄청난 힘의 차이에 본능이 스스로 포기를 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머릿속에서 지금의 상황의 불합리함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사기라고 외쳤다.

그때 앤디가 말문을 열었다.

“이봐, 언제까지 그럴 생각이지?”

웰터가 고개를 들어 앤디를 보았다. 앤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관객들이 지루해하잖아.”

“빠득!”

웰터는 자신의 검에 모든 전력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앞뒤 상황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러의 색이 처음보다 조금 더 짙어졌다.

‘일격필살! 이번 한 번의 공격에 내 모든 것을 걸겠다!’

웰터가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앤디의 검과 웰터의 검이 충돌하며 충격파가 형성되었다.

차창!

웰터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 압력에 말려서 휘둘러지는 자신의 오러가 자신의 몸 내부를 진탕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으으으윽!”

다시 검을 떼고 이번에는 찔러 넣기를 시도했다.

그때 앤디의 발차기가 웰터의 복부를 가격했다.

퍼억!

“커헉! 울컥!”

웰터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나더니 피를 토했다.

“대체 무, 무슨 일이….”

하지만 의문을 더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앤디의 검이 뱀처럼 몸을 휘어 감듯이 파고들어 왔기 때문이다.

웰터는 바닥을 구르면서 가까스로 앤디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파팡!

앤디의 검이 웰터가 서 있던 곳의 심장을 정확하게 찔러갔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늦게 반응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웰터의 머릿속에는 이미 자신의 심장이 저 검에 꽂혀 있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이이이! 이럴 수 없어!”

파팟! 팟! 팟! 팟!

채챙! 챙! 챙! 챙!

웰터의 검날이 앤디의 검과 충돌할 때마다 움푹움푹 파이며 망가졌다.

마치 진흙으로 만든 찰흙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웰터의 눈이 뒤집어졌다. 자신의 오러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검에 밀려 작살이 나고 있으니 정신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자시익! 대체 무슨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냐! 죽여 버리겠다아아아!”

“그런 말은 이기면서 해야 무서운 거란다.”

앤디는 너무 태연하게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대답해주었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저렇게 복잡하고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와중에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있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크아아아! 이건 악몽이야!”

웰터의 잘생긴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푸억!

“…꺼어어어억!”

그러다 그는 자신의 복부를 움켜잡고 그대로 쓰러졌다.

앤디가 발튼 후작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발튼 후작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반트레오 백작의 아들 웰터가 범인이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군.”

그 말에 말도 안 된다며 소녀들이 울기 시작했다.

소녀들의 울음 폭풍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앤디가 자신의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저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네는 이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나? 나는 분명 사건이 터지자 모든 곳을 봉쇄했네. 자네는 그제야 저 아가씨와 춤을 멈췄지. 그런데 어떻게 물건을 숨긴 장소를 찾고, 범인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지? 아니, 그것보다 우선 그 고강한 검술은 대체 뭔가? 안드레이 공작 전하의 제자라면 마법사가….”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하나씩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추태를 부렸음을 깨달은 발튼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저는 안드레이 스승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마법사로서 검술을 배우지는 못하셨지만, 검술의 이론을 정립하셨지요.”

“오오오!”

사람들의 입에서 지레짐작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앤디는 그 호흡을 적당히 잡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만들어낸 그 검술의 이론을 실험하고 싶으셨지요.”

“자네가 그것을 배웠다, 이 말이군!”

“맞습니다.”

“하지만 마법과 검술은 확연히 다를 텐데 대체 어떻게…. 혹시 자네도 마법을 배우고 있는가?”

“저는 마법을 할 줄 모릅니다.”

“정말 놀랍구만. 역시 안드레이 공작 전하시군.”

“제 스승님은 이미 인간으로서 넘을 수 없는 팔 클래스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계십니다.”

“그, 그 말이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어째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오오! 우리 헤르만 왕국의 홍복이로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감탄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은 그분이 검술의 이론을 세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의 설명은 답을 내기에 턱없이 모자랐지만, 왠지 이해가 갈 것 같은 귀족들이었다. 발튼 후작이 앤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자네의 경지가 대체 어느 정도인가?”

앤디는 대답대신 자신의 마나를 끌어올려 검에 흘리기 시작했다. 검에 작은 진동이 일어나더니 푸른 잔상이 검신 전체에 맺혓다.

우우우우웅!

순간, 앤디의 검에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오러 파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 마스터!”

“소드마스터!”

“맞습니다. 저는 소드마스터입니다. 저는 춤을 추던 와중 우연찮게도 귀금속을 훔치고 있는 저 사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소드마스터의 감각이라면 능히 파악할 수 있었겠지. 모든 기감이 열려 있을 테니 말이네.”

발튼 후작이 자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의 지식을 뽐냈다.

앤디가 발튼 후작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맞습니다.”

“뛰어난 검사는 기감으로 넓은 범위를 탐색이 가능하다고 들었네. 자네도 그러한가?”

“잘 아시는군요. 저는 춤을 추던 와중 그 감각이 발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저 사내가 여인들의 귀금속을 훔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는 것이죠.”

“이해가 가는군. 그렇다면 귀금속을 어디에 숨겼는지 아는 것도.”

“제 기감이 퍼지는 범위 내에서 그가 움직였기 때문이지요.”

“그, 그렇게 멀리까지 감지가 가능하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소드마스터가 인간으로 보이지 않기 시작하는구만.”

그때 갑자기 웰터가 검을 움켜쥐고는 분노의 함성을 터트리며 튀어 올랐다.

“누가 그따위 거짓말에 속을 것 같으냐!”

“눈은 어디다가 두고 왔냐.”

“뭔 개소리냐!”

웰터는 눈을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눈알이 부라려지는 것을 보니, 있긴 있는데 쓸모가 없는 눈알이군.”

“뭣이!”

“보고도 못 알아보는데 뭣하러 착용하고 다니냐.”

“이런 씹어 먹을 놈!”

웰터의 검이 빨라졌다.

하지만 다급한 그의 마음이 보이는 허술한 공격이었다. 앤디는 그의 공격을 모두 막았지만, 웰터는 현실을 수긍할 수 없다는 듯이 연속 공격을 가했다.

웰터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히더니, 머리카락을 타고 바닥으로 흩어져 내렸다. 이른 아침에 나뭇잎에 매달리다 무개를 견디다 못해 떨어지는 이슬처럼 말이다.

앤디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검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판이하게 다른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휘리리릭!

웰터는 앤디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데 피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것 같은데,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검으로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

본능적으로 양팔을 들어 방어를 시도했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웃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앤디의 검이 뒤집어지며 검과 손잡이의 위치가 바뀌었다.

앤디가 쥐고 있던 검 손잡이가 그대로 웰터에게 날아갔다.

퍼벅!

“끄어어어어억!”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충격이 전신을 엄습해왔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웰터는 결국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앤디가 날린 손잡이 끝이 웰터의 사혈을 사정없이 가격했기 때문이다.

“죽었는가?”

발튼 후작이 씁쓸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앤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오! 잘했네! 잘했어!”

“하지만 일어나는 데 조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포박하여 묶으십시오.”

“여봐라! 이놈을 당장 묶어서 저 감옥에 처넣어라!”

“빠른 대화를 원하시면 물이라도 두세 번 끼얹으시면 될 겁니다.”

“굳이 지금 대화를 할 생각이 없네.”

그렇게 사건이 해결되자 사람들이 모두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범인도 잡고, 자신들의 보석들도 찾았기 때문이다.

그때 발튼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여자의 집행을 다시 시작한다.”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모든 사건은 정리가 된 것 아닙니까?”

“물론 아니라네. 저 여자는 도둑질은 하지 않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귀족 사칭 죄를 지었다네. 귀족 사칭 죄는 답이 없네. 무조건 사형이네.”

“귀족 사칭 죄가 아닙니다.”

발튼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무엇인가?”

앤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정말 마지못한 듯한 표정으로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셀린 누님은 귀족이 맞습니다.”

“귀족이 맞… 아니 누님이라고!”

“정확하게는 사저이지요. 같은 스승님을 모시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또 놀라고 말았다.

지금 셀린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라고 있는데, 사람들의 놀람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신분을 속이고….”

“사실 어쩔 수 없어서 밝히는 것이지만, 지금 사저는 스승님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지요.”

발튼 후작은 미칠 것 같았다.

폭력은 가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저 여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음에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앤디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저, 이제 걸렸으니 사과드려요.”

그 말에 셀린이 태연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신분을 속여 죄송했습니다. 스승님의 엄명이 있었던지라….”

사람들은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냥 웃을 뿐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웃는 얼굴에 침 안 뱉겠지.’

“하하하하하!”

“호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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