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다시 만난 그녀
1
엘리스가 거울 앞에 앉아서 자신의 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었다. 벌써 1시간째 같은 행위를 하고 있었다.
스르륵! 사라락!
“엘리스 아가씨….”
유모의 부름에도 엘리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거울을 보며 여전히 머리를 빗을 뿐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는 유모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나 순진하고 상냥한 아가씨였던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신이 엘리스가 어째서 저렇게 아파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가씨를 욕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 욕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모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는 말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말은 엘리스 아가씨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크리스털처럼 맑고 투명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엘리스 아가씨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모는 그런 음담이 엘리스에게 달라붙어 있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파하면서도 엘리스는 파티장에 찾아왔다. 파티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항상 다니던 파티를 갑자기 가지 않으면 자신의 아버지가 걱정할까 봐 온 것이다.
그렇게 속이 깊은 아가씨였다. 지금의 이 모든 이야기는 분명 누군가의 누명이었다.
엘리스가 자신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유모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가벼운 입을 놀려서 자신의 아가씨를 괴롭히는 저 계집애들 주둥이를 속 시원하게 꿰매주고 싶었지만, 그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무슨 힘이 있다고 날고 기는 저 귀족 자제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벙어리 냉가슴이라고 했던가.
지금 유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엘리스가 일어나서 주위를 돌아볼 때 혼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렇게 등 뒤에 서 있어 주는 일밖에 없었다.
‘아가씨….’
한때는 자신도 소녀들과 같이 웰터라는 사내에게 열광을 했던 적이 있었다. 잘생긴 것도 그렇고, 좋은 매너에 지금 중앙 상권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반트레오 백작’의 아들이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라 또래를 넘어서는 수준의 뛰어난 검술까지 익히고 있었기에, 소녀들이 꿈꾸는 백마 탄 왕자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 소녀들에게 스타였다. 자신에게도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웰터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너무 행복했다. 모든 소녀들이 부러워했다.
그 느낌이 좋았다. 자신이 다른 소녀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웰터가 자신에게 술을 건넸다. 아무런 의심 없이 마셨다. 즐겁고 기뻤다.
그때부터 기억에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낯선 방 안이었고, 웰터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열다섯밖에 되지 않은 엘리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자신이 정신을 차린 것을 깨달았음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씨익 웃으며 적극적으로 옷을 벗기려 들었다. 아니, 거의 찢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엘리스는 두려웠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웰터를 차고 때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웰터는 더욱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팔을 강한 악력으로 움켜잡고,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헐떡거렸다.
징그러웠다.
소름이 돋았다.
그의 혀가 자신의 가슴을 핥을 때마다 거머리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꿈꾸던 왕자는 이곳에 없었던 것이다.
엘리스의 얼굴선을 타고 눈물이 흘러 귀밑머리를 적셨다. 눈을 질끈 감고 이 상황이 단순한 악몽이길 바랐다. 그러나 악몽이 아니었다.
악몽보다 더 끔찍한 현실이었다.
그때 웰터가 엘리스의 얼굴을 잡고 자신의 물건을 비볐다. 물컹거리는 그 역겨운 기분에 욕지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엘리스의 눈동자에 독기가 어렸다. 바로 그 순간 웰터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가, 감히 내 보물을!”
녀석이 피로 물든 자신의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엘리스는 놀랐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웰터가 갑자기 저러는 것이었다.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자 얼굴에 더욱 넓게 번져 갔다.
그때, 웰터가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더니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망할 년! 죽여 버리겠어!”
그는 검을 들고 달려들다가 멈칫했다. 밖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몇몇은 문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밖에서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안에 무슨 일 있습니까!”
그때 엘리스가 말했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쾅쾅거리며 들썩였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컹거렸다.
웰터는 이대로 있다가는 좋지 않은 꼴을 볼 것 같았다. 재빨리 자신의 옷을 챙겨서 그대로 창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 순간, 문이 박살나며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엘리스의 찢겨져 있는 옷가지 사이로 드러난 알몸을 보고 당황해서 시선을 회피하거나,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엘리스의 몸을 자신의 겉옷으로 가려 주었다.
엘리스의 머릿속은 텅 비어서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냥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엘리스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충격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자신을 자신의 몸보다 더 아껴 주시는 아버지는 얼마나 고통 받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미어졌다.
사건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상처 입은 마음을 어느 정도 달래고 몇 개월 만에 파티장을 찾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했다.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숙덕거리고 있었다. 그중 자신과 어울렸던 소녀들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들이 놀라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요사스럽게 웰터를 덮치기 위해 약을 먹이고, 강간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서 전신의 힘이 풀리고 말았다.
모두가 어떻게 된 이야기냐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스스로 추측하며 기정사실화했다. 그리고 모두가 엘리스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 보니 웰터가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선수를 쳐서 이야기를 퍼트렸던 것이다.
“엘리스 아가씨.”
“아, 유모, 시간이 어떻게 됐지?”
“이제 파티가 시작할 시간입니다. 힘드시면 굳이 나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야. 내 옷을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아가씨….”
파티에 나가려는 엘리스도, 옷을 준비하는 유모도 파티 시간이 다가올수록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마치 고문실로 끌려가는 죄수의 모습과 같았다.
2
오늘 하루 종일 파티 준비로 인해 어수선하던 발튼 후작의 저택이 저녁이 되자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그 웅장함을 드러냈다.
파티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하나둘 발튼 후작의 중앙 저택에 자리하고 있는 연회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타르카스 영지의 기사들은 깨끗하게 닦아 번쩍거리는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저택의 곳곳에 배치되었다.
정문 입구에서 이곳의 집사가 들어오는 귀족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발렌타인 자작 내외분께서 입장하십니다!”
“카렌스 백작님과 영애 아르세린 양께서 입장하십니다!”
“로드로 남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마차 행렬이 줄어들었다.
연회장 안에는 조용한 음악과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저 멀리 성당에서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때, 연회장 2층에서 한 기사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발튼 후작님과 오늘 생일을 맞으신 로리나 영애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2층 계단 위에서 발튼 후작과 그의 여식인 로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튼 후작의 손을 가볍게 잡은 로리나가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름다운 로리나의 모습에 감탄했다.
1층에 내려온 로리나는 수많은 청년과 소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찬사를 들으며, 기쁜 미소를 아낌없이 뿌렸다.
그때, 웰터가 로리나 앞에 나서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저에게 함께 춤을 추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로리나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고 허락했다.
“물론이죠, 웰터 님.”
자신의 딸 로리나가 연회장 중앙에 나가 아름답게 춤을 추는 모습을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발튼 후작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
“예 후작님.”
“안드레이 공작 전하께서는 오셨는가?”
“아직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발튼 후작은 약간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와주길 바랐던 탓이다.
그때였다.
연회장 정문 입구 쪽에서 부집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가벼운 떨림이 담겨 있었다.
“안드레이 공작님의 제자이신 애, 앤디 드 카르미온 백작 니,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순간, 파티 주인공의 등장으로 떠들썩하던 연회장 안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부드러운 음악에 몸을 맡겨 춤을 주던 사람들도, 오랜만에 만나 가벼운 정담을 나누던 사람들도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듯했다.
현 헤르만 왕국의 중심 권력자이자 실세인 안드레이 공작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 제자라니! 모두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입구에 모습을 드러내자 연회장에 있던 여인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180 정도의 키에 마른 듯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 샹들리에 빛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과 조각과도 같은 얼굴. 거기에 어울리는 세련된 디자인의 하얀 연미복에 검은 와이셔츠를 정갈하게 받쳐 입은 그의 모습은 감히 압도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 당당한 여유, 눈빛에 깊이 갈무리되어 있는 자신 어린 몸짓.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앤디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앤디의 주위에 반짝반짝 빛이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앤디가 계단에 내려오기 전에 발튼 후작이 그 아래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앤디는 발튼 후작을 발견하고 예를 보였다.
“영애 분의 생신을 경축 드립니다.”
“어서 오시구려. 경이 진정 안드레이 공작 전하의 제자란 말이오?”
앤디가 여유 어린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직접 오시고 싶어 하셨습니다만, 왕실 내에 급히 처리하실 일이 생겨 저를 보내셨습니다.”
앤디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오오! 잘 오셨소!”
발튼 후작은 진정으로 기뻐했다.
안드레이 공작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을 써줬는지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드러내지 않고 꽁꽁 숨겨 두었던 제자를 자신의 영지 연회장에 첫선을 보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을 실세로 인정해준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보인 성의가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눈치가 빠른 몇몇 귀족들이 발튼 후작을 향해 축하의 인사를 던졌다.
“경하 드립니다, 후작님.”
“경하 드립니다.”
발튼 후작은 눈빛으로 인사에 답례하며 앤디를 끌고 중앙으로 갔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춤을 추고 있던 로리나와 웰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님.”
“오냐. 여기 이분이 바로 앤디 드 카르미온 백작이시다.”
로리나가 눈을 반짝이며 앤디에게 예를 보였다.
“앤디 드 카르미온 백작님을 로리나가 뵙습니다.”
“발튼 후작님의 아름다운 영애 로리나 양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기품으로 넘쳐났다.
발튼 후작이 진심으로 기쁜 눈빛을 앤디와 자신의 딸 로리나에게 던지며 번갈아 보았다.
발튼 후작의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 같이 느껴졌다. 그때 발튼 후작이 가볍게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 내가 젊은 사람들의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군. 집사!”
발튼 후작은 집사를 찾으며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러자 앤디와 로리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앤디의 중심으로 은은한 빛이 흩뿌려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와 한마디라도 나눠보기 위해 다가왔다.
앤디는 모두와 정중히 인사를 하며, 신경을 저 뒤에서 혼자 외로이 창가에 서 있는 엘리스에게 쏟았다.
이곳에 와보고 싶고, 어울리고 싶지만 입술을 잘근 깨물며 쓸쓸히 참는 그녀의 모습은 앤디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게 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짓는 미소라 생각하며 가슴 떨려 했다.
앤디는 이 자리를 조금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로리나에게 손을 내밀어 춤을 청했다.
“저에게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로리나가 작은 망설임도 없이 앤디의 손끝을 잡았다.
순간, 웰터의 속이 좋지 못했다.
아직 자신과의 춤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다른 파트너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자리였다면 흠이 될 수 있겠지만, 파티의 주인으로서 그것은 크게 흠이 될 만한 것은 아니다. 파티장의 주인공에게 예를 보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춤을 청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흠이 된다. 용기를 내서 춤을 청했는데 거절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뭉개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웰터는 앤디가 들어오면서 모든 여성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들의 시선은 언제나 자신만을 향하던 것이었고, 앞으로도 자신만을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놓고 반감 어린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짧은 치기로 자신이 쌓아온 것을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앤디의 손에 이끌려 춤을 추는 로리나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발이, 다리가, 몸이, 손끝과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의도하고 순서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앤디가 이끄는 대로 몸이 반응했다.
강하게 파도치다가 약하게 흘렀다.
마치 물이 된 것 같았다. 아니, 바람이 된 것처럼 공기 중에 어우러졌다.
이토록 춤이 즐거운 것이었나?
로리나의 얼굴에 행복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앤디를 올려다보았다. 앤디가 부드러운 미소로 로리나의 시선을 받아주었다.
로리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로리나에게 남자는 그냥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자일수록 다른 여인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액세서리.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오로지 이 앤디라는 사내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을 부드럽게 안고 있는 손과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강인한 팔, 그리고 탄탄한 가슴.
그때 음악이 끝났다.
‘말도 안 돼! 무슨 음악이 이렇게 짧게 끝나!’
속에서 천불이 일어났다.
이렇게 음악을 짧게 끝내버린 악사들을 다 때려잡고 싶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악사들은 억울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최상의 연주를 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앤디의 손길에 이끌려 연회장 외곽으로 나온 로리나는 아버지인 발튼 후작에게 넘겨졌다.
“선남선녀가 따로 없더구만.”
“하하하! 제가 어떻게 로리나 양의 아름다움에 빗댈 수 있겠습니까.”
앤디의 겸손한 말에 발튼 후작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네. 정말이지 자네와 로리나가 춘 춤은 이 세상의 춤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네. 어떻게 그런 춤을 출 수 있다는 말인가. 저기 보게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네와 로리나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발튼 후작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를 너무 띄우지 마십시오. 훨훨 날아가 버리겠습니다. 하하!”
앤디는 겉으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답설신보와 무흔신법을 혼합하여 내력을 퍼다 부은 춤인데, 그 정도 효과는 나와야지.’
발튼 후작이 말했다.
“내가 성급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내 딸 어떠한가? 다른 마음이 있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춤추는 둘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에 하는 말이라네. 웬만큼 서로에게 맞지 않고서는 그런 춤을 출 수 없지 않겠나!”
“아버지도 참….”
‘아빠가 웬일로 예쁜 소리만 골라서 하지? 방에 돌아가서 칭찬 좀 해줘야겠다. 그런데 뭐해요! 더 밀어붙이지 않고! 눈치 없긴!’
속마음과 달리 수줍게 몸을 꼬며 부끄러워하는 로리나였다. 반면에 발튼 후작은 흠칫했다. 평소 알고 있는 딸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름 끼칠 정도의 완벽한 내숭.
이런 내숭을 보일 정도라니. 딸이 앤디라는 사내에게 보통 빠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딸의 모습에 힘을 얻어 더욱 밀어붙이고자 마음먹은 발튼 후작이었다.
그때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왜 그런가? 무슨 일 있는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곳에 있는가?”
발튼 후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가. 하하하!”
웃으며 넘어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던 앤디의 눈빛은 말과 달리 반짝이고 있었다.
3
앤디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날로부터 6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의 인상이 뚜렷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성인 상태에서 6년이 지난 것과, 아이가 6년 동안 자라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여길 어떻게 온 거지?’
앤디의 기억으로 그녀는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바로 안드레이와 헤르미안 왕성에 들어선 첫날 자신이 구해줬던 여인이었다.
‘이름이… 셀린이었던가?’
안드레이가 탐내던 심연의 눈이라는 능력을 지녔던 여인.
‘어떻게 하지? 그냥 무시하는 게 나은 걸까?’
앤디는 짧은 고민 끝에 못 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셀린의 일에 끼어들게 되면 피곤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앤디의 상념이 길었던 것일까. 앞에 있던 발튼 후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잠시 로리나 영애님과 함께 춤을 췄던 순간이 떠올라서…. 죄송합니다.”
앤디의 말에 발튼 후작과 로리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닐세, 아니야. 뭐, 그럴 수도 있지. 허허! 내 딸이라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말 괜찮은 아이라네.”
“후후!”
그때 발튼 후작의 주위로 사람들이 다가왔다. 발튼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이었다.
그들을 본 발튼 후작이 앤디를 향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즐겁게 즐기게나. 나는 일이 있어서 말이네.”
앤디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착실하게 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엘리스 앞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짧은 거리를 가장 긴 시간에 이동한 기록을 세운 앤디였다.
“뭐하고 계시나요?”
“저, 저요?”
엘리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엘리스 양 외에 누가 있다고 그러시나요. 후후!”
“제, 제 이름을 어떻게?”
“프린지 자작님께서 엘리스 양을 부탁했거든요.”
“아… 버님께서요?”
엘리스의 물음에 앤디가 미소로 답했다.
순간, 엘리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정말 힘든 와중에 아버지의 이름을 듣자 가슴이 짠해왔던 것이다.
앤디가 말했다.
“안 돼요.”
앤디의 말을 이해 못한 엘리스가 그 큰 눈을 껌뻑거리며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눈이 껌뻑여지자 눈가에서 밀려난 눈물이 엘리스의 뺨을 타고 흘렀다.
앤디가 가슴 주머니에 꽂혀 있던 포켓치프로 엘리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즐거운 파티에서 울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앤디의 배려가 가득한 말에 엘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도 눈물이 났다. 누군가의 따뜻한 배려가 주는 기쁨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앤디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물을 모두 쓸어주었다. 그리고 춤을 권했다.
엘리스는 앤디의 권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 모습에 주위의 여자들이 질투 어린 시선으로 엘리스를 주시했다.
“흥! 여우는 여우라니까. 대체 또 언제 꼬리를 쳤데?”
“우리 앤디 님은 저 여우한테 넘어가시면 안 되는데!”
“그러게 말이야.”
“아아, 앤디 님!”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웰터의 속이 뒤틀렸다.
‘앤디 님! 앤디 님! 칫! 망할 계집년들! 내가 좋다고 설칠 때는 언제고 저런 녀석에게! 저렇게 가벼운 녀석이 안드레이 공작 전하의 제자일 리가 없어. 분명히 비리가 있어. 내가 네 녀석의 그 가면을 벗겨 주지.’
웰터는 계획이 하나 있었다. 이곳 연회장에서 도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발튼 후작은 신분 조사를 하게 될 것이다.
웰터가 원하는 것은 바로 그 신분 조사였다.
앤디가 안드레이의 제자라는 것을 그는 전혀 믿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신분 조사만 하면 앤디라는 저 녀석의 진짜 신분이 밝혀지겠지. 그렇게 되면 내 검으로 당황하고 있는 저 녀석의 목을 치는 거야.’
웰터가 씨익 웃었다.
그리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모든 여성들이 앤디를 바라본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자신들의 로망이었던 웰터의 춤을 거절하는 여인은 없었다.
그녀들은 황홀한 시선으로 웰터와 춤을 췄다.
웰터는 그런 허점을 노리고, 춤을 추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시도하여 여인들의 귀금속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발품을 팔자 상당수의 귀금속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웰터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서 자신이 훔친 귀금속을 땅에 묻고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큭큭큭! 이런 일도 나쁘지 않군. 수입이 짭짤해. 이대로 저 녀석도 엿을 먹을 테고. 이런 걸 일석이조라고 하는 것이겠지?’
웰터는 자신의 행동에 만족했다. 아무도 의심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한 쌍의 눈이 있음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 여인이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터트렸다.
“꺄아아아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비명을 지른 여인이 현기증 나는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외쳤다.
“목걸이! 내 목걸이!”
“목걸이?”
사내들이 의아한 어투로 묻자, 그 여인이 다시 한 번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목걸이가 사라졌다구요! 아아아!”
수다를 떨고 있던 한 여인이 대화를 나누던 상대방의 지적에 자신의 목걸이가 사라진 것을 깨닫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그 비명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액세서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발적으로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내 액세서리도 사라졌어!”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