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엘리스
1
프린지 영주는 한순간에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의 행동은 신속 그 자체였다. 죄책감 때문에서 그러했는지 쉼 없이 일을 진행했다.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했고, 평민들과 기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그 결과 앤디와 루슬란 일행들의 무고가 확실히 밝혀지고, 집사와 기사단, 그리고 집무를 수행하는 수하들의 비리까지 모조리 알게 되었다.
그에 맞춰 프린지 영주는 재산을 모두 압류하거나 직위를 해제하여 감옥에 가두는 등 강한 처벌을 내렸다.
거기다 앤디와 루슬란 일행들이 일급 수배자 해터슨을 잡아낸 사실까지 모두 인정하여, 현상금과 영지를 지켜 주어 고맙다는 사례금까지 두둑하게 챙겨 주었다.
그 모든 것이 이틀도 채 되지 않아 끝을 맺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사건들이 추가로 발견되었지만, 그 일을 한다고 앤디와 루슬란 일행들의 발길을 계속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큰 줄기가 마무리된 후, 앤디와 루슬란 일행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프린지 영주님을 뵙습니다.”
루슬란과 클라우저, 그리고 렐리와 쉐리는 정중한 예를 보인 반면, 앤디는 귀족이 귀족에게 하는 반례를 했다.
프린지 영주는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경들 덕에 내 알지 못하던 비리들을 모두 잡아낼 수 있었소. 사건을 알아나갈수록, 그들의 죄질이 드러날수록 나의 무능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소. 눈을 뜨고도 앞을 보지 못했고, 귀를 가졌음에도 듣지 못했소. 다시 사과하오. 미안하오.”
프린지 영주는 반존대를 하며 자신의 깊은 마음을 표현했다.
루슬란 일행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귀족이, 그것도 한 영지의 영주가 용병인 자신들에게 반존대를 한다는 뜻이 어떤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영주님께서 좋은 결실을 맺으신 계기를 저희가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합니다.”
“고맙네.”
프린지 영주가 루슬란의 대답에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대를 하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자네가 클라우저라는 친구인가 보군.”
“그렇습니다.”
프린지 영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클라우저를 한동안 주시했다.
“자네는 행복하겠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동료들이 있으니 말이네.”
그 말에 클라우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점이 하나 있다면 그들의 사랑이 과하다는 점이지요. 하하! 으윽!”
클라우저가 그렇게 말하고 웃다가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제 맞았던 전신이 아직도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그런 클라우저의 속도 모르고 프린지 영주가 혼잣말을 했다.
“하하! 나도 그런 과한 사랑을 받아보고 싶군. 그런데 몸이 많이 상했군. 마치 고문이라도 당한 듯해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건가? 설마 고문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프린지 영주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클라우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하! 이건 동료들이 준 과한 사랑의 증표지요.”
그 말에 루슬란과 렐리, 그리고 쉐리의 입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괜히 미안한 감정이 생겨났다.
프린지 영주는 그 말을 깊이 파고들어 가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혹시 자네들 지금 맡고 있는 일이라도 있는가?”
루슬란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지금 일을 찾아서 떠도는 중입니다.”
루슬란의 말에 프린지 영주가 크게 기뻐했다. 물론 겉으로는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영지에서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프린지 영주의 말에 루슬란이 질문했다.
“전쟁이라도 있습니까?”
“그것은 아니네.”
“그럼 저희를 어디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자네들을 내 수하로 받고 싶다네. 정착을 원한다면 요직에 앉혀서 정착도 시켜 주겠네.”
루슬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주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저희는 용병입니다. 한자리에 오래 있는 것보다 떠돌며 세상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와중에 수배된 범죄자를 잡기도 하지요. 저희가 간혹 영지의 일을 맡긴 하지만, 전쟁이나 몬스터 토벌 등의 일로 인해 일하는 짧은 계약만 받습니다. 정착은 저희가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떠돌기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고향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프린지 영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용병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고향이 있으면서 떠도는 이들은 전체 용병의 5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용병이라 해도 가족이 생기면 화전 마을에 들어가 땅을 일구고 살기 일쑤였다. 그들이 모두 원해서 떠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지로 들어가서 안전하게 사는 것을 가장 원하지만, 거친 용병 생활에 익숙한 그들을 받아들이는 영지는 거의 없었다. 각 영지에서 술 마시고 사건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바로 용병들이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애를 낳아 키우는 이들 중 그러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모두 싸잡아서 평가를 내린 탓에 전직 용병들이 영지에 들어가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사실 지금 나는 조금 불안하다네. 이번 숙청 건으로 인해 믿을 수 있는 이들을 많이 잃게 되었네. 내가 자리를 다시 잡고 믿을 수 있는 이들을 측근으로 끌어들일 동안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어떻겠는가? 이 년간 말이네.”
“이 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아직 프린지 영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 후 자네들이 떠나고자 한다면 언제 떠나도 말리지 않겠네. 그리고 자네들 고향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지금 의뢰를 받아준다면, 나중에 떠나고 나서도 시간이 흘러 어딘가 정착하고 싶어 돌아온다면 언제든 정착민으로 받아주겠네.”
프린지 영주의 속은 이러했다. 그동안 이들을 챙기고 보듬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후, 떠나고 싶지 않게 하면 된다고 말이다.
모두 그것을 알았지만, 그의 이야기만으로는 전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치다 못해 과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 안전한 영지의 정착민으로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용병으로서 최대의 유혹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시선을 보고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앤디를 돌아봤다. 앤디는 미소 지은 채 루슬란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루슬란과 일행들이 의견을 교환한 후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이 년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하하하! 잘 선택했네.”
그렇게 말한 영주가 앤디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저는 용병이 아닙니다.”
프린지 영주는 알고 있었지만 혹시 했었다는 듯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 경의 풀 네임이 어찌 되는가?”
“풀 네임?”
그 말에 루슬란과 일행들이 웅성거렸다. 풀 네임을 가진 이들은 귀족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평민 중에서도 풀 네임을 가진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귀족이었다가 영향력과 재산이 모두 사라져 평민으로 직위가 떨어진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민인 이상 풀 네임을 말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과거 귀족이었다고 하면 많은 평민들이 반감을 가지고 괴롭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풀 네임을 지니고 말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은 귀족이라는 말이었다.
모두 의혹과 기대에 찬 표정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앤디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앤디 드 카르미온입니다.”
“카르미온이라? 처음 듣는 성이로군.”
“인사가 늦어서 죄송했습니다.”
“후후! 겉치레 말게나. 내가 묻지 않았다면 자네는 굳이 밝히지 않았겠지.”
앤디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였으니까.
“헉! 귀, 귀족이었어? 아니, 귀족이셨어요?”
쉐리의 물음에 앤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들 패닉에 빠졌다. 자신들이 앤디에게 한 행동들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큰 잘못을 하지는 않았나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영주님이 있는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귀족도 사람입니다. 루슬란 님과 쉐리 양, 렐리 양, 그리고 클라우저 군까지 저를 앤디로 만나고 알았으니 앤디로 계속 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귀족이 아니라 앤디이니까요. 그게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제 이름입니다.”
그 말에 클라우저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그렇습니까. 앤디, 아니 앤디 님의 마음이 그렇다 해도 우리는 그렇게 부를 수가 없지요. 그리고 부모님이 이름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성까지 주셨을 텐데, 귀족이 아니라고 강조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쳇!”
앤디는 클라우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앤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님은 저에게 이름과 육체만 주셨습니다. 직위를 주지는 않으셨지요.”
앤디의 의미심장한 말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 말은?”
“맞습니다. 부모님들은 평민이시지요. 제가 성을 받았다고 부모님들도 성을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모두가 충격을 먹었다.
프린지 영주가 받은 충격은 루슬란들이 받은 것 그 이상이었다. 성은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과 미들 네임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왕의 권한이니 말이다.
“설마 자네, 폐하와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가?”
“그분이 성을 내리셨습니다.”
“헐!”
프린지 영주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갔다.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금 자신의 눈앞
에 있는 사내는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보물이었던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왕의 눈에 들어 직접 성을 받은 사내다. 차후 시간이 흐른다면 정권의 중앙에 서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때 루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앤디 군이라면 폐하의 눈에 들 만도 했겠지요.”
루슬란의 말에 클라우저가 눈치를 줬다.
“앤디 군이라고 하면 안 되죠. 우리가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앤디 님이라고 해야죠.”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앤디 군이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은 자신이라고. 그리고 귀족인 것을 알았다고 살살거리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우리의 그런 모습을 앤디 군도 별로 원할 것 같지 않은데?”
“맞습니다.”
앤디의 대답에 루슬란과 렐리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프린지 영주가 루슬란에게 물었다.
“사정은 그렇다 치고, 조금 전 그 이야기는 무슨 소리인가?”
“앤디 군이라면 폐하의 눈에 들 만도 했다는 이야기 말인가요?”
“그렇다네.”
“그럴 수밖에요. 앤디 군은 소드마스터입니다.”
“소, 소드마스터!”
프린지 영주는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렇다면 평민들이 했던 증언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더했죠. 그들이 그것을 설명할 능력이 안 되어서 설명을 못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겁니다.”
루슬란의 말에 프린지 영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는 갈망하는 눈빛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앤디는 남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지만, 헤르만 8세 앞에서 대련을 하고 난 2년 동안 많은 생각의 변화가 찾아왔다.
굳이 고집을 부려 사람의 오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행동을 하느니,
그냥 보여 주는 것이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말이다.
앤디가 태연하게 자신의 검을 쥐었다. 그러자 그의 검에 넘실거리는 오러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 오러 파이어!”
2
앤디는 프린지 영주의 극진한 대우를 받고, 루슬란들과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하며 이별의 인사를 한 후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프린지 영지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되었기에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서둘렀다. 그러다 프린지 영주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럼 지금 혹시 타르카스 영지의 발튼 후작의 영애인 로리나 영애의 생일 파티를 가는 것이오?”
프린지 영주의 머리는 생각 이상으로 똑똑하여, 앤디가 안드레이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기 무섭게 이 사실을 유추해낸 것이었다.
앤디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모르겠소. 왕국과 이곳을 일직선으로 그어 생각해보았소.”
“단순히 선을 긋는다고 목적지를 맞힐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약간만 생각하면 답이 나오오. 앤디 경이 어째서 이곳에 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이오. 처음에는 모르겠더이다. 그때 안드레이 공작 전하의 제자라는 말을 듣고 알 수밖에 없었소. 친국왕파이자 가장 많은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는 발튼 후작이 공작 전하를 초대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테니 말이오. 분명 안드레이 공작 전하께서 거절하실 것이라 짐작을 했지만, 그래도 발튼 후작의 영향력을 떠올렸을 때 그냥 무시는 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런데 만일 제자가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 아니겠소.”
앤디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린지 영주의 정황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날짜와 왕국에서 이곳의 거리와 방향,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 전하의 제자.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따로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발튼 후작의 영애인 로리나 영애의 생일 파티밖에 없지 않겠소.”
“놀랍군요.”
“사실 놀랄 것은 없소. 아마 다른 귀족들도 이 정도는 다 유추할 테니 말이오.”
“그런데 어째서 제가 그곳에 가는지 물어보신 겁니까?”
그러자 프린지 영주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딸이 하나 있소. 이름은 엘리스라고 하오.”
“그런데요?”
“내 딸도 지난주에 그곳을 향해 출발하였는데, 아비 마음으로 조금 걱정이 되어서 말이오. 혹여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는 할지, 외톨이가 되지는 않을지 등등 말이오.”
그 말에 앤디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했다. 어색한 미소로 이야기를 정리하며 앤디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신경 쓰도록 하죠.”
자신의 말에 환하게 웃던 프린지 영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왠지 낚인 기분이 들어 찝찝했지만, 뭐 이미 허락한 일. 지금 무효로 돌릴 수도 없고, 만나보고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앤디는 다시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눌러쓴 상태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걸어서 로리나 영애의 생일 파티 전날 타르카스 영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영지 입구에서 경비병이 앤디를 멈춰 세웠다.
“서라. 수상한 녀석이군. 후드를 벗어라.”
앤디는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마치 빛이라도 뿜어지는 것같이 느껴졌다.
경비병들이 멍하니 서서 앤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비병뿐만이 아니었다. 입구에 자리하고 있던 수많은 이들이 모두 밀랍 인형처럼 굳어버렸으니 말이다.
앤디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말했다.
“그럼 들어가도 되겠죠?”
경비병들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앤디는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앤디는 숙소를 잡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러자 한 사내가 앤디를 향해 다가왔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앤디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보았는데, 그가 건넨 한마디에 경계심을 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앤디 드 카르미온 경이시죠? 안드레이 공작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앤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낯선 사내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궁금해졌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찾았습니까?”
“안드레이 공작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파티 전날 카르미온 님께서 도착하실 거라 하셨습니다.”
“앤디라고 불러주세요. 그 이름은 아직 낯설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래서요? 뒷이야기는요?”
“아 참, 얼굴이 어떻게 생겼냐고 여쭤보았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큭! 보면 알 거다.’라고 말이죠. 처음에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정말 보니까 단번에 알겠더군요.”
사내가 희희낙락하며 이야기했다.
앤디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참으로 스승다운 대답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저를 보셨다면서 늦게 오셨군요.”
“아, 잠시 넋을 잃고 멍하게 서 있는 동안 눈앞에서 사라지셨더라고요. 뒤늦게 허둥지둥 찾아서 뛰어다녔죠. 죄송합니다.”
조금 전, 밀랍 인형처럼 굳어 있던 사람들 중에 끼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앤디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사내도 웃었다.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앤디가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빌립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파티가 끝나는 날까지 앤디 님을 모실 시종입니다. 편하게 생각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빌립? 알겠습니다.”
빌립을 따라 도착한 곳은 넓고 화려한 저택이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로비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생일 파티에 초대되어 온 손님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우중충하게 로브를 뒤집어쓰고 안으로 들어선 앤디를 보며 수군거렸다.
이 로브는 일부러 앤디가 가장 평범한 것을 산 것이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입은 것인데, 너무 화려한 곳이다 보니 평범한 로브가 오히려 더 눈에 띄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긴 어디죠?”
“발튼 후작님의 여름 저택입니다. 지금은 초대받으신 귀족 분들의 숙실로 사용되고 있지요.”
빌립을 따라 3층으로 올라서자 화려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쉬시면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저는 앤디 님께서 내일 파티에서 입으실 의복을 가져오겠습니다. 급하신 일 있으면 침대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시면 됩니다. 그럼 이곳을 관리하는 하녀들이 와서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빌립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앤디는 방 안을 돌아보고 침대에 누웠다. 폭신한 침대가 자신을 반겨 주었다. 스르르 눈이 감길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났다.
“아 참, 씻고 자야지.”
3
“내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왜?”
“지금 그년을 본 것 같아.”
“엘리스? 어머! 정말 왔네에! 여우 같은 년! 저년이 여기 왜 왔지?”
“그러게 말이야.”
화사한 옷을 입을 소녀들이 모여서 계단 끝에 서 있는 한 소녀를 흉보고 있었다. 바로 프린지 영주의 딸 엘리스였다.
그때 무리에 속해 있던 한 소녀가 말했다.
“온 지 며칠 됐을걸?”
“어머! 그래? 그런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질 못한 거지?”
“흥! 자신도 양심이 있으면 부끄러운 게 뭔지 알겠지.”
“엘리스 온다. 모두 모르는 척해.”
엘리스가 다가오자 모두들 고개와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엘리스는 태연하게 그들을 스쳐 가며, 도도한 발걸음으로 테라스를 향해 걸었다. 마치 처음부터 너희에게는 관심이 없었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소녀들이 다시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잘났다고 저렇게 뻗대는 거지? 정말 꼴 보기 싫다니까.”
“지가 잘못한 걸 알았으면 사과해야 하는 거 아냐? 뭐, 사과를 해도 받아주진 않았겠지만.”
“앞으로도 저 계집애가 다가오면 무시하자. 인사도 받아주지 마. 알겠지?”
“당연하지.”
소녀들의 이야기는 테라스 밖까지 다 들려왔다.
지금까지 도도한 표정을 짓고 태연하게 있던 엘리스의 표정이 슬프게 변했다. 몸은 밖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저 소녀들과 함께 수다를 떨며 놀고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힘들 것 같았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그때,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청년이 다가왔다.
“후훗! 원래 여자들이 화나면 남자들보다 더 무섭다고들 하지.”
“웰터!”
엘리스의 표정이 징그러운 뱀이라도 본 것처럼 변했다. 웰터라는 사내가 다가오자 몸서리를 치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뭐지, 그 눈빛은?”
“몰라서 물어!”
“그러게 그날 그냥 같이 즐겼으면 좋았잖아.”
“꺼져! 더러운 손으로 날 만지지 마!”
작은 소란에 할 일 없이 수다를 떨고 있던 이들이 테라스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뭔가 사건이 터졌는가 싶은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자 웰터가 눈치를 살피더니, 안쪽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무슨 일이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시 대화를 하다가 말다툼이 일어난 것뿐입니다.”
“오오! 웰터, 오랜만이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웰터에게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웰터는 사람 좋은 웃음을 던지며 일일이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웰터, 자네가 말싸움을 했다니 별일이군.”
그때 소녀 무리가 다가왔다.
“웰터 오라버니가 말싸움을 했을 리가 없잖아요. 분명히 저 여자가 문제였을 거예요.”
“맞아요. 언제나 쟤가 문제죠.”
“남자만 보면 살랑거리며 꼬리 치는 년.”
주위의 소녀들이 단체로 웰터를 옹호하며 엘리스를 욕하자, 다른 사람들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엘리스는 더욱 자신이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웰터 오라버니, 여기에서 뭐하세요?”
“아, 샤론 양, 오랜만이에요.”
“샤론 양이 뭐예요. 그냥 샤론이라고 부르세요.”
소녀 무리의 중심에서 엘리스를 따돌리자고 선동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조금 전의 엘리스를 욕하며 보였던 표독스러운 얼굴은 어디 갔는지, 암고양이 같은 눈동자를 던지며 웰터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이었다.
샤론이 웰터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번에 그렇게 당하시고도 또 저 애한테 오신 이유가 뭐예요?”
“아, 저번에 있었던 일을 사과할 생각이었지요.”
“저 애가 잘못한 일이었는데 무슨 사과요. 사과를 받으셔야죠.”
“하지만 남자로서 마음이 편치 못하더군요. 반대로 생각해보면 제가 단순히 오해를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감탄했다. 사람들에게는 웰터가 끝까지 엘리스를 보호하려고 저렇게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샤론은 한술 더 떴다.
“아아! 오라버니는 너무 착해요. 그렇게 착하기만 하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시려고 그러세요.”
“아하하! 그런가요.”
“물론이죠. 오라버니, 저희와 함께 저기로 가서 놀아요. 저런 질이 좋지 못한 애와 어울리면 함께 욕을 먹는 법이에요.”
“알겠어요.”
“저희가 먼저 가서 자리 잡아놓을게요.”
웰터가 사람 좋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별일 아니었구만, 하는 느낌으로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그러자 웰터의 얼굴에 음영이 지기 시작하며 일그러졌다.
엘리스는 겉으로는 당당하게 서 있었지만, 사람들의 무심한 눈빛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니, 당당하게 서 있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얼어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저쪽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독한 년. 그렇게 사람들이 노려보는데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도도한 척하는 것 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거야.”
“반면에 웰터 님을 봐. 얼마나 사내답니. 자신을 그렇게 모욕한 여자에게 도리어 사과하러 다가가는 모습. 웬만한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거야.”
“맞아, 맞아.”
“정신 나간 년. 그런 오빠가 사과를 해주면 오히려 고마워하며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하는데 싸움이나 걸고. 흥!”
그 반대쪽에서는 사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저년이 그렇게 꼬리를 치고 다닌다지?”
“생긴 건 얼음 그 자체인데, 사내만 보면 환장한다더군.”
“나도 한번 먹어볼까?”
“큭큭! 아서라.”
“왜?”
“네가 먹기는커녕 잡아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게?”
“정말 예쁘게 생기긴 했지? 전신을 쪽 빨아도 비린내 하나 안 나게 생겼으니. 킥킥킥!”
엘리스에게만 들리는 목소리가 아닐 것이다. 웰터 또한 그 자리에 있었으니 같이 들었을 것이다. 웰터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때? 네 평가가?”
엘리스가 웰터를 째려보았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더 예뻐졌는데?”
“역겨운 놈!”
엘리스가 욕을 하자 웰터가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그럴수록 나는 더 흥분된다고. 더 욕해봐. 어서.”
“너 같은 자식에게는 욕도 아까워!”
“큭큭큭큭큭! 어때, 밖에서 너를 욕하는 소리가? 들려? 들리지? 기분이 어때? 저 이야기가 듣기 싫지 않아? 그럼 한번 대줘. 그럼 네 평판을 다시 돌려놔 주지.”
“죽여 버리겠어.”
엘리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때 저편에서 소녀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라버니 뭐하세요! 어서 오세요!”
“아하하! 네, 금방 갈게요.”
웃으며 손 인사까지 한 웰터가 엘리스를 향해 다가갔다.
엘리스는 뒷걸음질 치다가 난간에 걸려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안쪽에서 보이지 않는 테라스의 가시 지역을 벗어난 상태였다.
웰터가 주위를 보고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이곳에 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곤 엘리스의 등 뒤에 있는 난간에 팔을 뻗어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웰터의 상체가 엘리스 쪽으로 서서히 밀착되었다.
엘리스는 바짝 긴장했다.
웰터는 그런 엘리스를 공포에 떨고 있는 귀여운 강아지를 보는 듯한 악동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더럽게 비싼 척하네. 네년 아니어도 놀아줄 여자는 많으니까 걱정 마. 크큭! 그리고 내 복수는 끝이 아니야. 이제 시작이지.”
그 말을 마치고 혀를 쭉 내밀어 엘리스의 목덜미를 핥았다.
엘리스는 당황하여 양팔로 웰터를 밀었다. 웰터의 몸이 밀려났다. 그는 태연하게 엘리스를 향해 윙크하며 밖으로 나갔다.
웰터가 테라스를 나서자 엘리스는 그대로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의 고운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흐윽! 흑흑흑!”
테라스에서 한참을 울던 엘리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잠이 오질 않아 창문 난간에 거꾸로 매달려서 사과를 먹고 있던 앤디가 중얼거렸다.
“엘리스라고?”
아삭아삭!
“설마 저 아인가? 참 피곤한 아이를 맡게 되었구만. 으차!”
앤디는 난간에 거꾸로 매달리고 있던 몸을 가볍게 일으켜서는 자신의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