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13화 (13/68)

제2장. 누명

1

두 사람의 경천동지할 만한 전투에 놀라 모두 입을 쩍 벌릴 지경이었다.

뭘 어떻게 주시해서 본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멍한 표정으로 자신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루슬란 역시 상황은 다른 동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전투를 이해하며 보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앤디를 향해 경외심이 일어날 정도였다.

해터슨은 소문 이상의 능력을 보이는 괴물이었다. 그런 해터슨을 앤디라는 저 청년은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승기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슬아슬하게 공방을 이어나가며 빈틈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가서 해터슨을 공략하는 모습은 예술에 가까웠다.

힘과 힘의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저 거대한 오러 파이어에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맞서는 모습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저리도 젊은 나이에….”

앤디가 검에 순수하게 밀집된 오러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순간, 검에 넘실거리듯 피어오르는 오러가 아닌 정형화된 오러 블레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오러 블레이드가 생성되는 모습이 사뭇 신묘했다. 하나의 덩어리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앤디의 검에 맺혀 있던 한 줄기의 실 같은 오러가 수백 가닥이나 뿜어져 오르며 검을 촘촘하게 감싸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뭉쳐지며 하나의 형태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이로써 앤디의 검은 바위건 강철이건 모두 가볍게 잘라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해터슨의 검은 여전히 불꽃처럼 일렁이며 불필요한 소모를 계속하고 있었음에도, 정제 되어있는 앤디의 검과 맞부딪쳐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밀어붙이고 있었다. 쏟아 내뿜어지는 힘이 무식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앤디가 주춤거리며 밀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해터슨은 그래도 불만족스러웠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가볍게 눌러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터슨이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앤디는 약간 싸늘하게 보일 정도로 굳어진 표정으로 그 공격에 대비했다.

쾅! 쾅! 쾅! 쾅!

순식간에 이어진 네 번의 공방.

거대한 오러의 기파로 주위가 아수라장이 될 정도였다.

“크흣!”

처음으로 앤디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며 입 밖으로 신음이 토해졌다.

이 세상에 오고서 처음 느끼는 압박감이었다.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미칠 듯이 기뻤다. 이유나 상황이야 어쨌든 강한 자와 싸울 수 있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밀려오는 강세를 맞아 겨우겨우 방어를 했지만, 전신이 으깨질 것 같은 충격에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었지만 너무나 좋았다. 전신의 세포가 바짝 긴장하여 움찔거리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앤디가 이 세상에 와서 살아온 그 어떤 때보다 스스로가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기뻐서 미칠 것 같았다.

비 오는 것처럼 전신을 타고 흐르는 땀과, 전신을 짜릿하게 만드는 긴장감.

얼마 만의 감각인가.

해터슨의 공격이 다시 한 번 앤디의 목을 노리고 호랑이의 발길질처럼 거칠게 쏟아졌다.

쾅! 콰과광!

앤디는 더 이상 이대로 해터슨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만큼 해터슨의 공격은 패도적이었다.

앤디는 유운검결의 묘리를 활용하여 힘을 빗겨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체가 받고 있던 충격이 40퍼센트 정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앤디는 방도를 모색해야만 했다.

하나 다행스러운 점은 해터슨의 힘만이 무식하게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만일 힘뿐만이 아니라 속도까지 빨라졌더라면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방도를 찾기 위해 수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려 노력했다. 최대한 자신의 빈틈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지만 해터슨은 전혀 자신의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몸에서 터질 듯 품어져 나오는 힘에 취해서 시야가 좁아진 탓이다.

“오우거같이 힘만 센 미련한 녀석.”

그렇다고 몸을 피한다?

그것도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자신이 등을 돌리는 순간 이 미친 오우거에게 물릴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앤디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녀석이 지칠 때까지 이렇게 막고 있는 것 말이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먼저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해터슨의 기색에 변화가 찾아왔다. 오러의 양이 갑작스럽게 줄어든 것이다. 해터슨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한할 것 같았던 마나가 고갈되는 것이 느껴진 탓이리라.

앤디는 그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이 이후의 상황이 예측 가능한 탓이다.

악에 받쳐 폭주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녀석의 장단에 맞춰서 놀아줄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는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였다.

앤디는 검의 충돌을 이용하여 그 반동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상체를 푹 숙이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해터슨의 하단을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해터슨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앤디의 뒤꿈치가 녀석의 아킬레스건을 강하게 강타하며 파고들었다.

빠악!

해터슨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쿵! 하고 바닥에 자빠지고 말았다.

앤디의 검에서 순간 1미터가 넘는 오러가 솟구쳐 올랐다. 그것을 거침없이 해터슨을 향해 쏘아냈다.

이것은 누가 봐도 빼도 박도 못하는 해터슨의 패배였다. 그러나 해터슨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파악하고, 죽어라 몸을 굴려 내어 모면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다시 몸을 일으켜 앤디에게 반격하려 했지만, 앤디는 절대 녀석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앤디의 검이 해터슨의 가슴과 옆구리, 허벅지 등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해터슨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크아악! 이럴 수는 없어!”

해터슨은 자신의 검에 절반도 맺히지 않은 오러를 보며 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충돌이 한 번씩 있을 때마다 오러가 눈에 띄게 흐려졌다.

앤디의 검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자 해터슨이 몸을 틀어 왼팔을 내줬다.

서걱!

해터슨의 굵은 왼팔이 매끄럽게 잘려 나갔다.

순간, 해터슨은 자신의 왼쪽 팔뚝이 불로 지져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닥에 떨어진 왼팔이 펄떡거렸다. 마치 물속에서 뭍으로 올라온 잉어처럼 말이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고통으로 핏대가 선 해터슨은 그 피분수를 앤디에게 쏘아냈다. 앤디가 피분수를 피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최후의 공격을 감행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해터슨의 머릿속은 그 어떤 때보다 선명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기 때문인지 이미 폭주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앤디는 해터슨의 계략과 달리 그 피분수를 피하지 않았다.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몸으로 그의 피를 받았다.

해터슨의 눈에 서서히 절망이라는 감정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자신의 머리 위에서 사타구니까지 일자로 스며드는 것을 봄과 동시에, 그 빛이 닿은 곳이 화끈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해터슨은 알았다.

이것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것을 느낀 해터슨은 흩어져 가고 있는 마나를 최후의 힘으로 끌어안으며 질문을 던졌다. 너무 궁금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 너는 누구냐?”

“앤디. 너를 쓰러트린 자의 이름이다.”

“…앤디….”

해터슨이 웃음을 짓기 위해 입꼬리를 올렸으나, 그때까지 그의 몸이 버티질 못했다. 그 전에 그의 몸이 대각선으로 미끄러지며 붕괴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바닥에 쓰러진 해터슨을 바라보며 앤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험한 상대였어.”

2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루슬란의 물음에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하나만 질문해도 되겠는가?”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자네는 대체 누군가?”

앤디가 그제야 해터슨의 시신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루슬란을 바라보았다.

앤디의 아름다움은 이 핏빛으로 물든 폐허 속에서조차 빛을 뿜었다. 아니, 피로 물든 그의 모습이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가 옳을 것이다.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있는 앤디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자에게 대답했을 때 듣지 않았습니까?”

“…앤디라고 했지.”

“맞습니다.”

“내가 질문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저는 제 이름 이상으로 저를 소개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름이라….”

당당한 기개가 어려 있는 말투였다.

자신의 이름을 이처럼 드러내며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루슬란은 자신의 직위나 명호 따위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수없이 봐왔지만, 자신의 이름 앞에서 이름만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이는 앤디가 처음이라 단연 말할 수 있었다.

그제야 루슬란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자신의 질문 자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들을 속이고 정체를 숨겨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앤디는 자신들에게 속인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루슬란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 영지의 기사단이 느긋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혀를 찼지만, 겉으로 드러내 놓고 감정을 표현하는 이들은 없었다. 목숨은 하나뿐인 탓이다.

기사들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인상을 구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건물들이 무너져 내려 있었으며,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살해당해 죽어 있는 모습이 즐비하게 눈에 들어왔다.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난자당한 사체도 있었다. 조금 전의 참혹한 참상을 연상시켜 주는 핏자국과 피 웅덩이가 사방에 즐비했던 것이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동안 자신들이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영지의 주인인 프린지 영주가 알게 되면 어떤 잔소리를 듣게 될지 머리가 다 지끈거려 왔다.

물론 무슨 별일이야 있겠냐며 늦장 부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것을 절대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위에서 웅성이고 있는 저 어리석기 그지없는 평민 놈들에게 분노의 불길을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결코 자신들이 늦어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가 아니라, 이들이 대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사건이 커진 것이라고 말이다.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진 기사가 한 평민 사내를 잡고 질문을 던졌다.

“뭐냐?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거지?”

평민 사내는 최대한 정확하고 상세하게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모두 들은 기사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갑자기 흙먼지가 날리고, 강력한 돌풍이 불고, 검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그가 초절정의 고수들이 싸우는 전투를 어떻게 볼 수 있었겠는가. 설명을 하는 데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축소시킬 만한 건수를 발견할 수는 있었다. 이야기의 모든 중심이 앤디와 루슬란 일행들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맞는가?”

기사들의 물음에 평민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듯 이야기했다.

“예, 저분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던 살인마들을 모조리 잡아주신 분들이시지요.”

하지만 기사들의 귀는 편협했다.

살인자들을 잡아준 이들로 들리지 않고, 이 상황을 연출한 범인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네 녀석들이 이곳을 이렇게 만들었나?”

“해터슨이라는 살인마가….”

루슬란이 대답하려 하자 기사단장은 버럭 화를 내며 말을 막았다.

“시끄럽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네 녀석들이 영지를 파괴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말도 안 되는 억지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그 모습이 범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앤디와 루슬란 일행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녀석들을 모두 연행해! 그리고 평민 몇몇을 증인으로 끌고 와!”

“알겠습니다.”

정렬해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앤디와 루슬란 일행을 둘러쌌다.

“이게 대체 무슨 짓들이죠!”

“뭐라고 하는 거예요!”

렐리와 쉐리가 기가 막혀서 한마디씩 내뱉었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역시 범죄자 녀석들은 조용히 끌려오는 법이 없군.”

“누가 범죄자라는 거야!”

결국 쉐리의 입에서 막말이 튀어나왔다.

“누구긴 누구야. 네 녀석들이지. 만일 조사 후 죄가 없다고 판단이 되면 풀려날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따라와라.”

하지만 루슬란과 쉐리, 그리고 렐리와 클라우저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들을 어떻게든 범인으로 몰아넣을 것이 확실했다.

“그 말을 누가 믿습니까?”

그러자 기사단장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녀석들이 믿지 않으면 어쩔 건데?”

쉐리의 몸 주위로 물방울 입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렐리의 손은 품속으로 들어갔고, 루슬란의 검이 가볍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나가 주입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클라우저도 부상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자신의 검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한 손이나마 거들어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기사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반격에 대응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용병 따위들이 자신들을 이길 리 없다는 자신감이다.

용병들 중 익스퍼트 급의 오러 유저인 강자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 수는 한정 되어 있고, 유명한 편이라 대부분 얼굴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기사들은 오러 유저가 되어야만 기사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물론 그 수가 한정되어 있어 어웨어급의 기사들도 많이 있지만, 기사단과 용병단의 전력은 감히 비교가 우습다.

더군다나 자신들의 수는 열다섯이 넘었고, 용병들은 다섯으로 판단되었다. 이들이 여유를 부리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가만히 있던 앤디가 씨익 웃더니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그냥 따라가 보죠.”

루슬란이 놀라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건 위험하네. 저들은 우리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 분명하네.”

루슬란의 말에 앤디가 반응하기도 전에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괜한 추측으로 우리를 모욕하지 마라! 조용히 따라온다면, 그리고 죄가 없을 시에는 조용히 풀려날 것이다!”

쉐리가 말했다.

“당신들이 잡은 자들 중에 풀려난 자들이 있었나요?”

“그들은 모두가 흉….”

“모두가 흉악범이었죠? 그럴 수밖에요.”

“그건 무슨 뜻이냐!”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은 아니겠죠?”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쉐리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제 친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증인이 되어 불려 갔다가 흉악범이 되어 사형을 당했었죠.”

이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여기저기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기사들은 부정했지만, 주위에 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기사들은 뭐라고 말도 못하고 분노로 인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타이밍이 늦은 지금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비겁한 변명으로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끄럽다! 감히 기사단의 명에 항명하다니! 이곳 영지의 대리자로서 즉결 심판권을 사용하여 처형을 하겠다!”

그때 앤디가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충분히 소란스러웠지요. 그냥 저들을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

“알겠네. 자네의 뜻대로 하지.”

앤디가 고맙다는 듯한 고갯짓을 보였다. 그러자 렐리가 반대 의사를 비췄다.

“루슬란 오라버니!”

“어차피 앤디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지 않는가. 그에게 무슨 생각이 있는 듯하네. 조용히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그 말에 모든 일행이 무겁게 고개를 움직여 수긍을 표현했다.

모두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기사단장이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잘 생각했다.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없지.”

“흥!!”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정말 아무런 죄가 발견되지 않을 시에는 네 녀석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없이 순순히 풀어주겠네.”

모두 대답 없이 기사들에게 포위당한 채 따라가기 시작했다. 순순히 가겠다고 한 이상 포박을 하기 위해 손을 쓰는 것은 괜한 분란을 불러오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3

“망할 기사 놈들! 역시 말뿐이었어!”

쉐리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이곳 감옥에 들어온 지 3일이 지났다. 하지만 녀석들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몇 시간째 투덜거리는 쉐리를 향해 루슬란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곧 연락이 오겠지.”

“흥! 올 리가 없어요. 우리들은 이제 엿 됐다고요.”

루슬란은 쉐리의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풀려날 일이었으면 벌써 풀려나고도 남았을 테니까.

믿고 있었던 앤디는 이곳에 들어와서는 조각상처럼 부동의 자세로 앉아서 잠만 잤다.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없었고, 가까이 다가서면 알 수 없는 기운을 뿜어 다가서지 못하게 막았다.

일행들은 앤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밥 먹을 때였다. 밥이 입맛에 안 맞는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결국 싹싹 다 먹은 후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혼자 잘 논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그래도 잘생기긴 했다. 그치?”

렐리의 말에 쉐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응. 그건 그래.”

왠지 양쪽 뺨이 붉어진 쉐리였다.

루슬란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클라우저는 잘 있는 건가?”

그들이 순순히 따라준 대가라며 부상을 입은 클라우저는 감옥에 넣지 않고 치료해주겠다고 데려갔다.

“잘 있겠지. 있을 거라고 믿어.”

모두가 한숨을 토하며 답답한 심정을 대변했다.

이곳에서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케헤헤헤! 거기, 아가씨, 이리 와봐. 내가 즐겁게 해준다고.”

“어서 내 그것 좀 만져 줘. 하악! 하악!”

감옥에 먼저 자리하고 있던 녀석들이 탱탱한 쉐리와 렐리를 보고는 발정난 개처럼 발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못해! 거시기를 다 잘라버릴라!”

쉐리의 욕설에 녀석들은 더욱 발광했다.

“하악! 잘라준다는 말은 내 거시기에 손이 닿는다는 이야기? 어서 잘라줘! 잘라줘! 하악! 하악!”

“나도! 나도!”

딸랑딸랑!

“으윽! 저것들 보기 싫어서 빨리 나가고 싶다니까!”

“그럼 잘라버려.”

“어떻게?”

“정령술 있잖아.”

“싫어. 내 정령들 썩어. 오염돼.”

그 말에 일행들이 피식 웃었다.

렐리가 말했다.

“놔둬. 불쌍한 놈들이야.”

“저런 놈들이 뭐가 불쌍해?”

“앞으로 평생 동안 여자도 만나지 못하고 저러다가 썩어 죽을 팔자야.”

순간, 쉐리의 머릿속에 평생 동안 저렇게 딸랑거리다가 늙어 죽는 모습이 떠올랐다.

피식!

웃음이 입가로 터져 나왔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녀석들의 반응이 시들해졌다. 아니, 시들하다 못해서 침울해지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신나게 흔들거리던 녀석들이 갑자기 쪼그리고 앉아서 바닥에 그림을 그리거나, 심지어는 흐느껴 우는 녀석들까지 있었다.

그런 녀석들을 보며 쉐리가 렐리를 향해 말했다.

“언니 좀 잔인해.”

“응? 내가 뭘?”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나가보도록 하죠.”

쉐리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잘 잤나요?”

“아가씨 덕에 잘 잤습니다.”

쉐리의 말에 앤디가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쉐리는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고 하다가 그 미소에 넘어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루슬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 철창을 나설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

“그냥 나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꺼내주지 않는데 어찌 나갈 수 있단 말인가. 무기도 모두 저들에게 압수를 당한 상태고 말이….”

철컹!

순간 문이 열렸다.

루슬란은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묻는 것처럼 놀란 눈빛으로 앤디를 보았다.

앤디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고는 철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쉐리와 렐리를 먼저 내보낸 루슬란이 뒤늦게 철창을 잠그고 있던 두터운 자물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물쇠의 고리 부분이 검으로 짚단을 베어낸 것처럼 매끄럽게 잘려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걸….’

하지만 의문을 오래 담지 않았다. 자신들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범죄자들을 뒤로하고 앤디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앤디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을 쓸었다.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행동했다.

철창의 쇠사슬을 자르기 위해 무리하게 내공을 운용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정도 내력도 사용을 못하다니. 지금 힘을 사용해도 안전한 선은 여기까지인가?’

속으로 한숨을 토했다.

앤디가 얌전하게 감옥으로 들어온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해터슨과의 대결로 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전투가 끝나고 바로 그 순간부터 앤디의 상태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누가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았다.

앤디는 당장 자리에 앉아 운기를 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보는 이들이 너무 많았고, 누군가 호기심에 건드리면 자신은 주화입마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앤디로서 감옥은 최고의 요양 시설이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단 몇 시간이라도 운기를 한다면 더 이상 악화되지 않을 정도로 치유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앤디는 순순히 감옥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뒤집어버리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앤디는 안전하게 자신의 몸을 돌볼 수 있었고, 그 시간도 충분했다.

3일 동안 앤디는 먹는 것 외에 운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내상이 모두 다스려졌다. 엉킨 실뭉치처럼 꼬여서 흐르던 내기가 모두 제 길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무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완벽하게 완치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그저 길만 잡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운기를 하여 몸 상태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치료를 받게 해주겠다며 다른 곳으로 데려간 클라우저가 걱정되었다.

이들은 생판 남으로 걱정할 이유가 없었지만, 자신을 위해서 함께 감옥으로 동행하기로 결정해주었다.

만일 이들이 없이 자신 혼자 지목을 당했더라면, 자신은 감옥에 오기 전에 기사들의 고문을 받고 주화입마에 빠진 상태로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믿고, 위험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감옥으로 들어갈 것을 결정해준 이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만일 앤디가 혼자의 몸이었고, 걸리는 것이 없었다면 그의 성격상 완치가 될 동안 이곳에서 운기를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3일간 연락이 없는 동료를 무시할 수 없었다. 면식이 얼마 되지도 않는 자신도 걱정을 하는데, 동료였던 저들은 속이 바짝바짝 타오르고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무리하여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 앤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행들은 기쁨이 완연한 기색으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앞서 나서던 앤디가 우뚝 멈춰 섰다.

루슬란이 통로를 울리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는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제길! 기사들인가?”

앤디가 대답했다.

“병사들입니다. 산만한 분위기를 보니 순찰을 도는 것 같군요.”

“어쩌면 좋지? 우리는 무기가 없는데?”

“그럼 저들의 무기를 빌리면 되지요.”

앤디의 장난기 어린 미소에 일행들의 무거워졌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뭐, 뭐냐!”

“너희는 누구냐!”

경비병들이 서로 음담을 내뱉으며 희희덕대다가, 처음 보는 이들의 등장에 당황하여 버벅거렸다. 지금까지 범죄자들이 탈출한 경우가 없었던 터라, 한순간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곳이 얼마나 군기가 빠졌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3일 전에 범죄자들이 대거로 탈옥했던 사건이 있었지만, 여기와 다른 임시 초소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피부에 와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쉐리와 렐리가 혀를 찼다.

“나 참, 어이가 없군.”

“이런 허접한 곳에 갇혀 있었다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 탈출을 한다고 두근거리며 좋아했던 자신에게 혐오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쉐리의 말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깨달은 한 녀석의 입에서 ‘타, 탈옥?’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병사 둘이 자신들의 검을 앞으로 뻗으며 단호하게 외쳤다.

“이 자식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탈출을 한단 말이냐!”

“여기가 어딘데?”

그러자 병사가 어리어리하게도 대답을 했다.

“감옥이지.”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

“뭔 잡소리냐?”

쉐리 특유의 말장난에 넘어간 병사가 일일이 반응하며 대꾸하기 시작했다. 루슬란과 렐리는 무슨 연극배우들의 유치한 콩트라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쉐리는 신이 나서 더욱 병사를 놀렸다.

“감옥이니까 탈출을 하지, 집에서 나오는 것을 탈출이라고 하지는 않잖아.”

“그, 그렇지.”

“사람이 살면서 탈출하는 경험을 얼마나 해보겠어. 너희는 탈출해봤어?”

“….”

“그것 봐. 우리가 언제 탈출을 해보겠냐고. 이렇게 감옥에 갇힐 때가 아니면 말이지.”

경비병들이 그 이야기에 생각을 하며 서로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렇겠군, 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을 보자 갑갑하다 못해 한심하고 불쌍하기까지 했다.

“에효! 이런 어리어리한 것들도 경비병이라니….”

녀석들이 발끈했다.

“누가 어리어리하단 말이냐!”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냐?”

“어떤 상황인데?”

“우리가 탈출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이 바보들아!”

결국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렐리가 푸웃!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루슬란과 앤디도 키득거릴 정도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창피하고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는 두 경비병이었다.

쉐리가 더 이상 말장난도 지겨워서 끝내기 위해 결정타를 날렸다.

“솔직히 말해.”

“무엇을 말이냐!”

“너희, 낙하산이지!”

그러자 두 녀석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가로저었다.

“나, 난 아니야. 하지만 이 녀석은 확실해.”

“이 자식이! 어디서 사돈 남 말 하고 있냐! 너야말로 아버지 백으로 들어온 거 마을 사람들이 다 알아! 짜샤!”

둘은 탈출하고 있는 탈옥수를 앞에 두고도 본분을 망각했는지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 앤디가 말을 걸었다.

“저기 말입니다.”

“뭐냐! 어서 말을 해라! 난 이 자식하고 끝장을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내가 다른 놈은 몰라도 네 녀석한테는 안 져!”

“그러니까 어디 한번 붙어보자고!”

다시 앤디가 말했다.

“저기요.”

“빨리 말하라니까!”

두 녀석이 분노로 물든 눈을 부릅뜨고 앤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앤디의 신형이 녀석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녀석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안 들렸나 보죠?”

“…!”

“무기 좀 빌려 달라고요.”

퍼벅!

“캑!”

“끄억!”

어리어리했던 두 경비병은 두 눈을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앤디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