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10화 (10/68)

제10장. 애매한 기분

1

앤디의 능력은 2년 동안 꾸준히 발전해왔다.

그 결과, 놀랍게도 앤디의 유운신공이 5성의 경지를 깨고 6성을 바라보게 되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발전 속도였다. 못해도 6년은 족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2년 만에 뛰어넘었던 것이다.

앤디는 속으로 궁리했다.

‘한 번 갔던 길이라 하더라도 그때 느끼는 깨달음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거늘, 발전의 속도가 너무 빨라. 대체 이유가 뭐지? 내가 영약을 먹으면서 수련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좋긴 좋은데 불안하단 말이지.’

너무 잘 풀리니, 오히려 그것이 걱정이 되었다.

원래 5성을 목표로 5년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4년 만에 5성을 넘었고, 또다시 2년 만에 6성을 바라보고 있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다.

원래 유운신공은 도가의 심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내력을 쌓는 속도가 다른 무공들에 비해 현저히 느리다고 할 수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이렇게 강해진다는 것은 좋지 않다. 이유도 모르게 한 번에 휙 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무공이란 계단으로 치면 한 칸씩 올라가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앤디는 두 칸, 세 칸도 아니고 다섯, 여섯 칸을 껑충껑충 올라가는 듯 발전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은 위험하다는 뜻이다.

올라갔을 때는 좋지만, 올라가는 과정은 중심이 잡히기 힘들다. 짧은 부주의로 옆으로 중심이 쏠려 넘어지면 그대로 계단 아래로 떼구루루 구를 수도 있다.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말이다.

그래서 잠시 수련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물론 수련을 해서 경지가 올라가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겠느냐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수련이 좋다고 목숨까지 바쳐서 할 생각은 없었다.

쉬엄쉬엄하며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한 후에 다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흠… 그럼 오늘은 뭘 하지?”

수련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보니 막상 할 일이 없었다.

심상 수련도 지겹고, 그렇다고 방 안에서 뒹굴거리다가 듣게 될 안드레이의 잔소리도 싫었다. 머릿속으로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곧 지웠다. 자신이 목적한 결과를 이룰 때까지 찾아뵙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

…그래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호기에 차서 내뱉었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고지식한 부모님들이다. 가봤자 혼만 날 것이 뻔했다.

왜 이렇게 싱숭생숭한 것일까. 어디론가 휙 여행 좀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에잇! 모르겠다.”

앤디가 연무장 한가운데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하얀 구름을 싣고 유유히 흘려보낸다.

단지 그뿐이거늘, 어째서인지 하늘을 보는 시간 동안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구름이 변화 없이 흘러가는 듯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능청스럽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도 신기하고, 이대로 하늘을 무작정 올려다보고 있으면 중력을 잃고 그대로 저 하늘에 빠져들 것만 같은 오묘한 기분도 즐거웠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며 만들어졌다는 유운신공인 탓인 걸까? 앤디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유운신공의 요결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단전에 가라앉아 있던 진기가 꿈틀거리더니, 스스로 유운신공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앤디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운기를 멈추었다.

“뭐, 뭐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진기가 움직인 탓이다.

“아,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이러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병이라니까. 머릿속에서조차 무공 수련이 떨어지질 않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습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해지고자 발광을 하는데, 지금 앤디는 강해지고 있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는 다시 상체를 일으켜 주저앉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드레이였다.

사실 이 수련실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존재는 안드레이뿐이기도 했다.

헤르만 8세가 오면 못 올 이유는 없지만, 그는 앤디를 위해 한 번도 이곳을 자발적으로 찾은 적이 없었다.

다가오는 안드레이를 보며 생각했다.

‘뭔가 일이 있는 건가?’

“수련은 하지 않고 뭐하느냐?”

“조금 쉬려고요.”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쉰단 말이냐?”

“큰일이 생겼거든요.”

앤디의 말에 안드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큰일이 생겼단 말이냐?”

“생각보다 너무 빨리 강해지고 있어서 그게 큰일이에요.”

앤디가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안드레이는 울컥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착각한 탓이다.

“세상 별게 다 큰일이다! 기사가 강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강해진다고 큰일이면 기사 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느냐!”

“진짠데….”

“진짜고 나발이고, 이놈을 그냥 확!”

“아이 참, 그런 게 아니에요. 스승님은 제 속도 모르시고.”

앤디는 언젠가부터 안드레이에게 무공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했던 말도 있고, 그에게 마음을 배운다 생각하여 스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네 속이야 봐봤자 뻔하지.”

“됐어요. 말을 말아야지.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앤디의 의문은 당연했다. 아무리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안드레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수련하는 시간에는 모습을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 일이 있지 않고서야 말이다.

안드레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타르카스 영지의 발튼 후작의 영애가 이번에 생일인데 나를 초청했더구나. 그 자리를 빛내달라고 말이다.”

“스승님이 가면 퍽이나 빛이 나겠네요. 우중충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앤디는 안드레이가 울컥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잘난 너를 찾아오지 않았느냐?”

“저를 왜요?”

“너를 보내려고.”

“에엑?”

앤디가 경악 어린 표정을 안드레이에게 던졌다.

“그 표정은 뭐냐? 자고 일어나서 바퀴벌레 더듬이를 이 사이에서 뽑은 것 같은 표정은?”

놀랍게도 그럴듯한 묘사였다. 앤디의 표정은 보기 좋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앤디는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안 돼요. 싫어요.”

“이놈아, 그게 무에 어려운 일이라고 싫다는 거냐?”

“저는 아직 사교계에 진출할 생각이 없단 말이에요.”

“그건 네 생각이고. 이제 슬슬 나이도 찼고, 왕국의 지역도 돌아다니며 너와 마음이 맞는 귀족들과 면식도 넓혀야 할 때이니라.”

“몰라요. 저는 아직 생각이 없어요. 아까 제가 실언을 했어요. 스승님이 가서 빛내지 않으면 누가 빛낼 수 있겠어요? 스승님이 갔다 오세요.”

“내가 지금 얼마나 바쁜지 몰라서 하는 말이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밤낮으로 충혈된 눈을 비비며 일을 하고 있는 안드레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혀 있던 기억이 담배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몰라요.”

안드레이의 속이 뒤집어졌다.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데 왜 그러세요!”

“이이! 시끄럽다! 네가 싫다고 해도 가야 한다!”

안드레이가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이자, 앤디가 한풀 꺾인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정말 싫은데…. 레오나가 싫어할 텐데….”

앤디의 말에 안드레이가 발끈했다.

“레오나가 뭐냐! 레오나가! 공주 마마의 성명을 함부로 부르다닛!”

“끄응! 정말 가야 하나요?”

앤디가 기죽은 표정으로 한숨을 토하며 한발 물러섰다.

“꼭 가야 한다. 그가 우리 왕권파에 대고 있는 자금이 얼마나 큰 줄 아느냐? 그런 그의 부탁을 무시한다면 누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생각을 하겠느냐.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사람을 다루는 한 가지 방편이다. 한데, 나는 지금 바빠서 내가 둘이 되어도 모자란 판국이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그러니 어찌하겠느냐. 너무 강해지다 보니 걱정이라 수련도 때려치워서 한가해진 네 녀석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느냐?”

말에 가시가 듬뿍 담겨 있었다.

“에효! 제가 대신 가면 뭐 달라지나요? 기사단과 폐하 외 몇몇 주요 인사만이 제 존재를 알고 있는데, 그들이 생판 모르고 있는 저를 반기기나 하겠어요?”

“그래서 더욱더 네가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는 네 녀석을 알릴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

“벌써요?”

“벌써는 무슨. 너와 만난 지 육 년이 흘렀다, 육 년.”

“그렇게 오래됐나?”

“지금 우리 왕국은 엄청난 속도로 안정세에 돌입하고 있다. 이미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지. 이제 굳이 움츠리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단 말이다. 땅속에서 새싹이 흙을 밀고 올라오듯 우리도 조금씩 힘을 보여 줄 때가 되었다, 이 말이지. 서서히 준비를 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향해 경각심을 갖지 않게 하나둘 드러내야 한다. 새싹이 자라 거목이 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과, 다 자란 거목이 갑자기 나타나 하루아침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 더군다나 서서히 내 후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 정권의 중심에 내가 있지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아하하하! 지금까지 스승님이 하신 농담 중에 가장 웃겼어요. 누가 죽는다고요? 캬하하하!”

순간 앤디는 움찔했다. 안드레이의 손끝에서 엄청난 기운이 응집하며 폭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난이에요, 장난! 정말 하나뿐인 제자를 죽일 작정이에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 크크!”

“그럼 어서 치우라고요!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요!”

“네가 이 정도로 안 죽을 걸 아니까 하는 거다. 안타깝지만서도….”

“안타깝지만이라니, 무슨 의미예요!”

“글쎄다.”

슈우우웅!

“아, 진짜! 으아아악!”

쿠콰과과광!

저 멀리서 터져 나온 폭발의 섬광에 눈이 부셨다.

갑작스러운 폭음과 엄청난 폭발력이 가져온 후폭풍에 놀란 왕성의 사람들이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헤르만 8세는 그 돌풍에 읽고 있던 책장이 후르르 넘어가자, 그대로 책을 덥고 데워놓은 찻잔을 들며 혀를 찼다.

“쯧쯧! 안드레이 경이 또 제자를 잡는구만. 그러다 우리 왕국의 보물이 진짜 죽으면 어쩌려고. 그건 그렇고, 연무장을 고칠 기술자나 보내줘야겠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수련장이었던 거대한 크레이터 외각에 안드레이와 앤디가 나란히 서서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으며 투덜거리는 앤디의 모습은 한결 다소곳해져 있었다.

하지만 속은 꼬일 대로 꼬인 상태였다.

‘이러니까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지.’

“사부, 이번에는 너무했어요. 설마 헬 부스터를 직격으로 날리실 줄은….”

“그것을 막아선 네 성장이 무척이나 기쁘구나. 설마 막을 줄이야….”

“그 여운을 남기는 듯한 말의 진의가 무엇이냐고요!”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저는 죽을 뻔했다고요! 그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요!”

“중요한 건 마음이겠지….”

“그 마음 두 번 받다간 목숨이 아홉 개라도 모자라겠네요. 에효!”

“응? 뭐라고 했느냐?”

순간 거대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스승님의 마음이 너무나도 잘 이해가 간다고 말했습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앤디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안드레이였다.

“이번에 네 역할이 중요하다. 네가 사교계에 어떻게 데뷔하느냐에 따라 내 차후 진행될 계획의 성공 여부가 갈릴 것이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사교계라는 것이 지금은 과거와 달리 많이 퇴폐하고 그 가치가 추락하였지만, 아직도 무시할 수 없기도 하다. 왕국의 수많은 귀족들이 무도회장에 모이는 탓이지. 그곳에서 어떤 언행과 행동과 기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너를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에 따라 너의 가치가 달라지게 된다. 그것을 무시할 수 없지.”

“저는 별로 그들의 평가가 필요 없는데요?”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는 것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네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제한되어 있단다. 아무리 잘나도 혼자 왕이 될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한 손으로 열 손 막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너를 보내려고 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나 때문이다.”

“스승님이 가는 것보다 제가 가야 하는 이유가 스승님 때문이라고요?”

“그렇단다. 내가 홀로 늙어가는 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어야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나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너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로 인해 네가 돋보일 수도 있듯이 너로 인해 내가 단단해질 수 있다.”

“….”

“이제는 네가 내 얼굴이다.”

2

“칫!”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드레이가 그렇게 정색하고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었더니, 준비가 다 되었으니 바로 출발하라는 것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더 놀라운 이야기는 준비가 되었다고 했으면서 그 흔한 마차나 말도 없이 가라는 것이 아닌가.

“지금 그냥 가라고요? 마차는요?”

“없다.”

“아니, 하다못해 말은요?”

“그것도 없다.”

“저는 스승님 얼굴이라면서요.”

“훗! 어찌 그리 생각이 없느냐.”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마차를 탄다면 왕궁의 마차가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지금 안드레이 공작의 제자가 간다고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터인데….”

“그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어요? 스승님께서 바쁘시니 급히 대신 가는 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안드레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앤디는 안드레이의 불호령에 따지는 것을 멈췄지만, 어째서인지 자꾸만 속았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여하튼 그들은 지금 잔뜩 신경을 쓰고 있을 것이다. 네 녀석을 찾기 위해 말이다. 그것의 허를 찔러야 하는 것이야.”

“그러니까 사교계 따위를 가서 왜 허를 찔러야 하는 거냐고요.”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모든 일을 해야 하는 법이다. 네 잘나빠진 얼굴을 활용해야 할 것 아니겠느냐.”

“얼굴하고 능력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앤디가 투덜거리자 안드레이가 다독이듯 설명했다.

“네가 모르는 모양인데, 외모도 능력이다. 사람들은 첫인상을 보고 호감과 비호감에 대한 감정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모에 대한 것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지. 모든 것은 전략이다. 네가 마차를 타고 일찍 가게 되면 사람들과 더 많이 마주치게 될 뿐이지 않겠느냐. 그것은 사람들이 너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나는 너에게 도보를 추천하는 것이란다.”

“그들이 인식하든 말든 그게 중요한가요? 이왕 알 것이라면 빨리 아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리고 도보로 가도 어차피 볼 사람은 볼 거잖아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묘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안드레이의 이야기에 앤디가 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어리석은 녀석. 화려한 파티로 인해 수많은 마차가 움직일 것이다. 몇몇 평민들이야 네 녀석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귀족들이 마차도 없이 돌아다니는 녀석에게 관심이나 줄 것 같아 보이느냐?”

“그것도 그렇네요.”

“사람들이 너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단 한 번이면 충분하다. 바로 무도회 당일 말이다. 네 얼굴이 미리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너에 대한 존재감이 줄어들게 된다. 이미 알게 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미리 듣고 예상을 하며 기대하기 때문이지.”

“그래서요?”

“하지만 모두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네 녀석의 얼굴에 놀라고, 내 제자란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 두 개가 함께하며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생기는 것이지.”

“스승님 자신의 얼굴에 너무 금칠하시는 것 아닌가요?”

안드레이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축소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아, 네. 그러시겠지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중요한 대목이다. 너는 결코 일찍 무도회장에 들어서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너무 늦어서도 안 되고 말이다.”

“어째서 일찍 가지 말라는 거죠?”

“처음에야 사람들이 너를 반기겠지만, 먼저 가서 할 일 없이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점수가 깎이기 마련이다. 그 이후로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내야 하기에 자연스럽게 네 관심은 멀어질 수밖에 없지. 그러니 사람들이 모두 모였을 예정된 시간에 맞춰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가 가네요. 그럼 아주 늦게 가는 게 좋지 않은가요? 그럼 더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관심을 줄 것 아니겠어요? 늦게 가는 것은 어째서 피하라는 말씀이시죠?”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늦게 가면 이미 모여서 만난 사람들끼리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게 된다. 그때 네가 나타나봤자 사람들이 너에게 모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느냐. 이미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았는데 말이다. 물론 오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크지 않을 것이다. 적절한 시간의 중요성을 알겠느냐?”

“그건 그렇고, 그곳까지 갈 제 짐은요? 설마 그 짐들을 제가 혼자 들고 가라는 것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곳에 가면 네가 입을 옷과 필요한 소모품들을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미리 그리되도록 준비를 해놨기 때문이다.”

뭔가 이야기가 자신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착착 진행이 되어 있었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잘 알겠느냐? 타이밍이다! 타이밍! 적절한 타이밍!”

“예에에….”

“그래, 알았으면 됐다. 어서 준비하거라.”

앤디는 서둘러 자신을 끌고 자리를 이동하는 안드레이의 뒤를 따르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흘려보냈다.

“뭔가 억울한데….”

“….”

그 억울함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커졌다. 안드레이에게 휘둘려 뭔가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하겠다고 한 후라 번복하기도 뭐했다.

“젠장! 말이라도 못하면….”

무슨 마차하고 말 타고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저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화도 화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의 대단한 말발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쫓겨나듯이 왕궁 밖으로 나오다 보니 레오나 공주에게 말도 못한 것이 뒤늦게 떠올라 마음에 걸렸다.

“레오나가 또 삐치겠네. 뭘 사줘야 하려나.”

벌써부터 비위 맞출 생각을 하는 앤디였다.

하지만 곧 머릿속에서 잡다한 모든 것을 지워버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왕궁 밖으로 나온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왕궁에 들어온 이후, 수련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나올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밖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가슴이 들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너무도 오랜만에 보게 된 탓이다.

“뭐, 이렇게 나온 것도 크게 나쁘진 않군.”

앤디는 기꺼운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장 한가운데로 태연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는 군것질거리를 보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시장에서 나온 앤디의 한 손에는 꼬치구이가 들려져 있었고, 반대 손에는 손바닥만 한 막대 사탕과 빵이 들려져 있었다.

우물우물.

“맛있군.”

그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조각 같은 외모의 사내가 고급 옷을 걸친 채, 군것질거리를 들고 거리를 다니면서 먹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고기를 모두 뽑아먹은 꼬치를 버린 후, 빵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

“냠냠냠!”

3

깊은 산중.

두꺼운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가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곧 깊은 산중에 갇힌 것을 확인한 사내는 장작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오늘은 밖에서 자야겠구만.”

이미 수화불침과 한서불침의 경지에 올라 있었기에,

노숙을 하겠다면 그냥 높은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 자도 충분했지만 아직도 따뜻한 불이 좋았다. 불이 있어야 음식도 구워먹을 테고 말이다.

아직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보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서둘러 간다면 열흘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사내는 최대한 여유를 가지고 지나가는 마을을 꼬박꼬박 들르며 음식을 먹는 식도락을 즐겼다. 그러다 거리와 시간 계산에 실수를 해서 이렇게 노숙을 하게 된 것이다.

장작을 모두 구하고 내공으로 불을 피운 후, 잠자리를 평평하게 다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고구마나 구워볼까? 전 마을에서 혹시 몰라 베이컨하고 육포를 사놓길 잘했군.”

사내가 콧노래를 부르며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고구마를 캐야 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사내가 눈을 반짝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땅을 파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땅을 파고 있는데 쑥쑥 잘도 파졌다. 어떻게 한 것인지 손에 흙도 묻지 않았다.

큼지막한 고구마 3개를 캘 수 있게 된 사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불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부지깽이로 사용하고자 가져온 기다란 나뭇가지로 장작불 중앙을 쑤셔서 고구마들을 밀어 넣었다. 그 후, 잘 챙겨 넣었던 육포와 베이컨을 꺼내서 기다란 나뭇가지에 꿰어 불가에 늘어놓았다.

열기에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육포와 베이컨 냄새에 회가 동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사내는 눈을 부라리며 어서 익기만을 기다렸다. 어디서 꺼냈는지 사내의 손에는 어느새 건빵과 건포도가 들려서 쉬지 않고 입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우걱우걱!

사내의 모습은 정말이지 행복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그때, 숲 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분이 언짢아진 것이다. 자신의 만찬을 방해받을 것 같았다. 자신이 어떻게 구운 것들인데 재수 없으면 나눠주게 생겼다.

‘뺏길 수 없다.’

사내는 손을 빠르게 놀려 자신이 늘어놓은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저기야. 저기서 불빛이 보여.”

“이 산중에 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그렇지 않으면 불빛이 왜 비치고 있겠어.”

잠시 후, 수풀이 들썩거리더니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일행 중 푸른색의 단발머리를 한 10대 후반의 소녀가 말했다.

“어, 정말이네? 클라우저 말대로 여기 사람이 있어.”

클라우저라 불린 검을 든 20대 초반의 사내가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말했잖아. 쉐리, 너는 내 말을 안 믿더라.”

“믿음이 가야 말이지. 그렇죠, 루슬란, 렐리?”

그 뒤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긴 흑발이 매력적인 글래머러스한 여인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듬직한 근육질의 민머리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글래머 여인의 이름이 렐리고, 민머리 사내가 루슬란인 모양이었다.

“아하하! 싸우지들 마라.”

“이젠 좀 친해질 때도 되지 않았니?”

루슬란의 말을 렐리도 받아주었다.

“킁킁!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지? 맛있는 고기 냄새네. 내가 좋아하는 베이컨 냄샌데!”

“쉐리, 다 큰 처녀가 킁킁이 뭐냐, 킁킁이. 그래서 시집을 어떻게 가려고 그래.”

“남 이사. 신경 끄셔. 댁한테 갈 생각 없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되셔.”

쉐리의 말에 클라우저가 말했다.

“그런데 저 사람 혼자야?”

“그런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우리가 이렇게 떠들고 있는데 시선 한번 안 주네. 뭐지?”

쉐리가 기분 나쁜 듯한 어투로 말하자 동료들이 말렸다.

“그럴 수도 있지. 사실 우리는 불청객이잖아. 예의도 없이 인사를 하지 않고 떠든 우리 잘못도 크지 않겠어?”

렐리의 말에 쉐리가 입을 쭉 내밀었다. 맞는 말 같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저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오는 것을 느끼자 자신들을 향해 오히려 등을 돌리고 앉은 듯한 느낌의 각도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일행들은 생각했다.

‘혹시 도주하는 범법자인가?’

그렇게 생각해볼 만도 했다. 하지만 대놓고 얼굴을 보이라며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만일 아니라면 엄청난 실례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렐리가 일행의 대표로 앞에 나서며, 후드를 눌러쓰고 손을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이봐요, 미안한데 불 좀 같이 써도 될까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너무 늦어서 장작을 구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요. 부탁해요.”

그 말에 후드를 쓴 사내는 고민을 하는 것인지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셨어. 모두 이리 와.”

렐리의 말에 쉐리와 루슬란이 먼저 와서 앉고, 클라우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행은 후드를 뒤집어쓴, 자리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자신들이 앉았음에도 말없이 자신의 음식만을 우물거리며 먹고 있었던 것이다.

시선을 집중해 주시해보았음에도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후드로 인해 생긴 깊은 음영에 얼굴이 가려져 있는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음식들이 후드의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음식을 먹는 속도를 보니 마치 며칠 굶은 사람 같았기에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목이 메었는지 캑캑거리며 기침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렐리가 자신의 수통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이봐요, 천천히 먹어요. 여기 물 좀 마실래요?”

그 말에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가 움찔하더니 음식 먹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는 머뭇거림 없이 수통을 받아들더니 쭈욱 들이켰다. 그 후 시원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자신이 굽고 있던 베이컨 꼬치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따스한 열기를 내뿜고 있는 베이컨 꼬치는 정말이지 맛있게 보였다.

그건 그렇고,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그 꼬치를 건네는 사내의 손이 가볍게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렐리는 그 모습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더니 조심스럽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설마 아까워하고 있는 건가?’

그녀는 받아든 꼬치를 들고 쉐리와 루슬란, 클라우저에게 하나씩 돌렸다.

“잘 먹을게요. 우리도 음식이 있으니 같이 나눠서 먹도록 해요.”

그 말 때문일까. 자신 앞에 음식을 쌓아놓고 먹던 사내가 움찔하더니, 렐리들이 있는 쪽으로 꼬치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속이 뻔히 보이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보인 불편한 모습은 자신들에게 음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효! 치사하다, 치사해.”

후드 사내의 속 보이는 행동에 쉐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그런 쉐리를 향해 루슬란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쉐리!”

“칫!”

하지만 사내는 다행스럽게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단란한 식사 시간이 그렇게 형성되었다. 모두가 든든하게 식사를 하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깊은 산중에서 화기가 닿은 맛깔 나는 베이컨과 주먹밥, 그리고 수프까지 먹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프야 자신들이 재료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너무 늦은 밤이었기에 요리를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후드 사내가 장작더미를 쑤시더니 시꺼멓게 생긴 큼직한 덩어리 3개를 끄집어냈다.

일행들이 관심을 돌리자 사내는 그 덩어리를 툭툭 쳐서 재를 털어내더니 반으로 쩌억 갈랐다. 그러자 맛깔스럽게 생긴 노란 속살이 드러나며 단내를 풍겼다.

“고구마다!”

쉐리가 기쁜 낯으로 고구마를 반겼다.

사내는 반으로 쪼갠 것을 쉐리와 루슬란에게 건넸고, 다시 하나 더 쪼갠 것을 클라우저와 렐리에게 건넸다.

그리고 사내는 한 개를 통째로 까서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불만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렇게 챙겨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던 탓이다.

써늘한 밤공기를 맞으며 먹는 뜨거운 고구마는 진정 별미였다.

“앗 뜨거! 앗 뜨거! 후아! 맛있다!”

“정말 달다. 이런 고구마를 얼마 만에 먹는지 모르겠군. 앗 뜨거!”

쉐리와 클라우저가 신이 나서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쉐리가 후딱 먹어치우고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클라우저 것을 넘보자 그가 말했다.

“꿈도 꾸지 마셔.”

“쳇! 네가 그러니까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라고.”

“너한테 장가갈 생각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셔.”

쉐리는 자신이 했던 공격을 가지고 그대로 반격을 당하자 울컥했다. 클라우저는 자신을 놀리면서 고구마를 깔짝깔짝 먹어댔다.

그래서 바닥의 모래를 움켜쥐고 클라우저에게 확 뿌리려던 찰나, 자신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고구마 반쪽을 보고 멈칫했다. 후드를 쓴 사내가 자신에게 먹고 있던 반쪽은 나눠서 건넨 것이다.

쉐리는 손에 쥐고 있던 모래를 슬며시 털었다.

“고맙… 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나 무안했던 탓인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고구마를 받아들었다.

든든한 음식에 맛깔 나는 후식까지 먹으니 정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모두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아마 또 다른 손님이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 행복한 시간이 길게 유지되었을 것이다.

4

“저기다. 저기서 불빛이 보이는군. 큭큭!”

“두목님, 오늘은 이대로 공치는가 싶었는데, 역시 죽으란 법은 없군요.”

“큭큭큭큭! 그러게. 이게 웬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이냐.”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 11명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쉐리 일행이 있는 노숙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쉐리 일행은 바짝 긴장한 채 무기를 잡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는 그런 그들과 산적을 쓱 훑어보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품 안에서 찻주전자를 꺼내고 수통에 물을 부어 불가에 올려놓았다.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가 지금 무엇을 했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산적들이 다가오며 말문을 열었다.

“큭큭! 여기서 주무시는 겨?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주무시는 겨? 여기서 잘 거면 자릿세를 내놓아야지.”

마르고 키가 작으며, 음침하게 생긴 녀석이 지껄인 말이었다.

그러자 쉐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가야, 처맞고 집에 가서 엄마 찾으며 울고 싶지 않으면 그냥 조용히 가려무나.”

“아, 아가? 처맞아? 엄마?”

순간, 녀석이 충격 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동료 산적들이 웃기 시작했다.

“프헷헷헷! 아가란다, 아가.”

“그러게 키 좀 크지 그랬냐. 저 핏기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 년한테까지 무시를 당하고 그러냐.”

이번에는 쉐리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애송이 년?”

“그래, 애송이 년아.”

“이런 불 보고 좋아라 달려드는 겁대가리 상실한 나방 같은 새끼들을 봤나! 너희는 오늘 다 뒤졌어!”

쉐리가 선공을 취하려 하자 클라우저가 막았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혀. 네가 흥분해서 어쩌자는 거야.”

쉐리가 자신을 막아선 클라우저를 한 번 노려보더니, 그의 말대로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슬란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묻겠소. 당신들은 누구요?”

위압감 어린 덩치의 소유자가 앞으로 나서자 속으로 슬쩍 찔끔했던 그들이었으나, 점잖은 그의 어투를 듣고 곧 기세를 찾고 깐족거렸다.

“큭큭큭! 보고도 모르겠냐? 이 산의 주인이시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군.”

“그게 무슨 말이냐.”

“산적이었군.”

그 말에 녀석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걸 알았으면 어서 있는 것 다 털어놓아라. 걱정 마라. 네 녀석 불알은 털지 않을 테니까. 우리들은 워낙 자비롭거든.”

“낄낄낄낄!”

산적 녀석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 웃어댔다.

하지만 그런 무시를 당하면서도 루슬란은 태연했다.

그 모습이 산적들에게는 무서워서 졸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루슬란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그냥 돌아가는 것은 어떻겠나?”

“왜, 돈을 눈앞에 두고? 미쳤냐? 그건 그렇고, 너 너무 까부는 것 같다?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거냐?”

산적들의 웃음이 뚝 끊어졌다.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루슬란과 일행들을 노려보았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 마지막 경고다.”

루슬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적들이 한마디씩 내뱉으며 살기를 내뿜었다.

“마지막 경고? 백날 해봐. 그래서 어쩔 건데?”

“이 새끼들이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잠자기 전에 칼춤 좀 쳐야 하는 건가?”

그때,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르릅! 후릅!

차 같은 것을 마시는 소리였다. 그것도 모자라서 기분 좋은 한숨까지 토해냈다.

“하아….”

그 모습은 마치 자신과 현 상황은 전혀 무관하다고 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여유를 어찌 부릴 수 있겠는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양쪽으로 대립해 있던 이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쉐리는 너무 기가 막혀서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허! 참 나!”

나머지 일행들도 대놓고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 같은 심정이었다.

산적들도 반응했다.

“뭐, 뭐야, 저건?”

“대체 뭐하는 새끼야?”

모든 이들의 관심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에도 후드를 쓴 사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들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렐리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저 찻잔은 어디서 났지?’

산적들은 자신들이 말을 하는데 아직까지도 태연하게 씹고 있는 수상한 사내를 보며 광분했다.

“저 새끼 뭐야!”

쉐리가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야.”

“모르는 새끼랑 왜 같이 밥을 먹어?”

“이 새끼! 너는 뭔데 내가 누구랑 밥을 먹든 뭘 먹든 뭔 상관이야! 이런 또라이 같은 새끼를 봤나!”

“뭐? 또라이? 이런 그지 깽깽이 같은 년을 봤나!”

“뭐 그지 깽깽이?”

그때, 지금까지 태연하게 주위에서 떠들든 말든 차를 마시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흘렸다.

“아, 정말 더럽게 시끄럽네.”

“뭐얏!”

“뭐라고!”

순식간에 산적들과 쉐리들의 눈빛을 독식하게 되었다. 그러자 사내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

“왜 자꾸 떠들기만 해. 좋은 칼 놔두고.”

그 말에 산적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네. 우리가 왜 말로 광분을 하고 있지?”

“그건 그렇고, 저 새끼 대체 뭐하는 새끼야! 짜증나 미치겠네!”

산적들의 말을 쉐리가 받아쳤다.

“그건 나도 너희하고 동감이다.”

조금 전에 고구마 나눠줄 때는 조금 좋게 생각했는데, 다시 영 글러먹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쉐리가 사내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 편이에요?”

그러자 사내가 막힘없이 대답했다.

“나? 내 편.”

“뭐라구요? 허! 참!”

쉐리가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치미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산적들은 이를 갈며 말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웃기는 새끼들을 다 보겠군. 저 녀석들 꼴 보니 순순히 주기 싫은가 보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군.”

“죽이고 뺏어야지.”

“크헤헤헤헤헤!”

산적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내뱉으며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클라우저와 렐리, 그리고 루슬란은 자신의 무기들을 꺼내들고 반격을 준비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클라우저였다. 검을 휘두르며 맨 앞에서 달려오는 녀석과 맞섰다.

채챙!

클라우저의 실력이 더 좋았다. 그의 검이 산적 녀석의 검을 튕겼다. 그에 산적은 당황해서 허둥거리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게 운이 좋았다. 그대로 멍하니 서 있게 되었으면 클라우저의 검이 녀석의 목과 몸의 영원한 안녕을 고하게 해줬을 테니까.

클라우저는 재빨리 검격을 틀어 쓰러진 녀석을 향해 검을 찌르려 했지만, 다른 동료 산적이 그 앞을 막아섰다.

그 뒤로 다른 녀석 둘까지 합세해서 클라우저를 향해 덤벼들려고 했다.

아찔한 그 순간 루슬란이 앞으로 나서더니 들고 있던 창을 휘둘러 산적 하나의 허리를 강하게 후려치고, 그 반동으로 튕기는 힘을 그대로 활용하여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던 나머지 산적의 허리도 후려쳤다.

“케헥!”

“꾸엑!”

렐리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산적들을 향해 단검을 집어던졌다.

쉐리는 어느새 올라갔는지 나무 위에서 손짓을 했다. 그 손끝이 닿는 곳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물기둥에 당한 산적들은 어김없이 허공에 붕 떠서 땅 위로 나가떨어졌다.

“뭐, 뭐야, 이 녀석들은!”

“보통 녀석들이 아니잖아!”

“이런, 제길!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산적들은 푸념을 하며 연방 검을 휘둘렀다. 이러다가 패하면 자신들이 죽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적 중에 겁이 많은 두 녀석은 뒤에서 서성이고 있다가, 뭔가를 우물거리며 태연자약하게 싸움 구경을 하고 있는 사내를 보게 되었다. 조금 전 자신들에게 좋은 검 놔두고 어쩌고 했던 바로 그 사내였다.

뭔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이 녀석이라면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 녀석이 손가락을 입가에 대자 다른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녀석은 단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 사내 뒤로 다가갔다. 단숨에 찔러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녀석들은 심호흡을 하고는 들고 있던 단검을 그대로 찔러 넣었다.

속으로 환호했다. 성공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손끝이 허전했다.

그때 등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살기가 짙어서 무슨 살인을 하겠다고. 지렁이도 피하겠다.”

“히익!”

두 녀석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한발 껑충 뛰었다.

로브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내가 자신들의 등 뒤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에게 등을 보이고 있던 그 사내가 확실했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 싶었다.

두 녀석은 눈빛으로 대화했다.

녀석이 움직이는 것 봤어?

아니, 못 봤어.

둘은 순간 오싹했다.

‘고, 고수!’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상대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곧 그 정체불명의 사내가 녀석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사내를 피하기 위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들고 있던 단검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사내가 허리를 굽혀 그 단검을 쥐어들었다.

두 녀석은 긴장감으로 인해 숨이 차오르고 목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사내가 허리를 펴고 상체를 세우자, 저쪽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빛으로 인해 후드 안쪽의 그의 입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입가는 웃고 있었다.

불빛의 일렁거림 때문일까. 그 웃음이 음영에 흔들리며, 너무나도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섭게 느껴졌다.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이봐들, 내가 하나 알려 줄 테니 잘 들어.”

“….”

녀석들은 공포에 찬 눈동자로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죽일 때는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안 돼. 그냥 찔러. 상대가 나무 기둥이다 생각하고 말이야. 아니, 가능하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생각하지 말고 검을 뻗어. 이렇게.”

슈욱!

“헉!”

사내가 뻗은 단검이 한 녀석의 목젖을 향해 나아가더니, 그 옆에 있는 나무 기둥을 찔렀다. 그러자 단검은 놀랍게도 마치 무라도 찌른 것처럼 두꺼운 나무를 파고들어가더니, 손잡이만 남긴 채 덜렁거렸다.

산적 녀석은 죽음에 다다른 듯한 공포를 느끼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자신의 귓가에 그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의 입김이 느껴진 탓이다.

그 입이 한참 동안 뜨거운 열기를 내뱉으며 달짝거리더니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그래야 내 머리카락이라도 스칠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남기며 상체를 뒤로 빼자 후드로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조각과도 같이 매끈한 얼굴에 자리하고 있는 싸늘한 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입가에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히죽.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려운, 아름답고 무서운 미소였다.

그 미소를 마주한 산적이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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