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9화 (9/68)

제9장. 소드마스터

1

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헤르만… 제국?”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들과 달리, 헤르만 8세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다.

과거에는 자신이 이뤄야 할 꿈이었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힌 후 가슴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된 그 이름.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잊히고, 지워졌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이다.

어째서인 것일까? 저 어린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에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나다니.

옆에 있던 안드레이가 조용히 헤르만 8세를 불렀다.

“폐하.”

“내가 주책이었군.”

헤르만 8세는 안드레이가 건네는 손수건으로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쳐 냈다.

“인간이 맞소?”

“설마 제가 마족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보죠?”

“….”

파블로는 부정하지 않았다.

“파블로 님이 약한 것이란 생각은 어째서 하지 않는 건가요?”

“강함은 상대적인 것이오! 나는 약하지 않소!”

“파블로 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가 약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아닌 것 같은데요?”

앤디의 지적에 파블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휘청거리는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난 파블로가 다시 말했다.

“나는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기사요. 어딜 가도 약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소.”

“곧 죽어도 큰소리칠 분이군요.”

“으득!”

다시 검을 움켜쥐는 파블로를 무시하며 앤디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소드익스퍼트 중급이라…. 그럼 처음에 나왔던 저 기사의 경지는 어느 정도죠?”

“소드어웨어 중급에 약간 못 미치는 실력으로 알고 있소.”

“그럼 나는 어느 정도의 능력인 거지?”

앤디의 혼잣말에 파블로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경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저는 지금까지 산골에서 검만 수련하며 살았거든요. 비교할 상대가 없었지요.”

“스승이 누구요?”

앤디가 고민하더니 안드레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혼자 수련을 했다고 말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공작?”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법사가 아니오?”

“그거야 저랑은 알 바 없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법사냐, 아니냐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말에 파블로가 수긍했다.

그런 그의 시선은 안드레이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눈빛은 뭔가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었다.

‘하긴 이십 년 동안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이야. 그동안 놀고 있지는 않았겠지. 뭔가 새로운….’

앤디는 그 모습을 보며 한동안 안드레이가 피곤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기사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가 아니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목검이 부서지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이오?”

“참 궁금한 것도 많군요.”

“미안하오.”

말은 미안하다지만, 표정은 미안해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러의 사용 방법의 차이라 할 수 있지요.”

“오러의 사용 방법?”

“파블로 님은 마나를 쏟아 부어 오러를 만들었죠. 그렇지 않나요?”

파블로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 마나는 통제가 되지 않기에 사방으로 뻗어나가려고 하죠. 그 힘은 적지 않지요. 강철로 만들어진 검과 달리, 목검의 결집력은 그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가는 마나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폭발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말이죠.”

퍼엉!

갑작스러운 폭음에 모두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경지가 낮은 기사들의 경우고, 어느 정도의 경지의 기사들은 지금 그것이 마나의 힘을 견디지 못해 터져 나간 것임을 깨닫고 경악했다.

목검을 터트릴 정도의 마나라면 익스퍼트 중급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를 눌렀으니 그 정도는 될 수 있겠지만, 예상하고 있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극명했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 중급이라니. 그것도 못해도 그 정도라는 말이 아닌가.

많은 기사들의 가슴속에 질투가 피어났다.

반면에 저 소년의 10년 후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앤디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자유분방하게 난무하는 마나 자체를 다스려 통제를 하면 목검의 부담감을 줄일 수 있게 되죠.”

“그,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저와의 대련을 통해 몸으로 직접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나를 직접 다스리다니.

마른침이 삼켜졌다. 만일 저 소년의 말이 맞다면 마나를 효율적으로 더 강하게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와 쇠가 부딪치는데 나무가 멀쩡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파블로 님의 검과 부딪친 것은 나무와 쇠가 아닙니다. 오러와 오러가 충돌한 것이지요.”

앤디가 새 목검을 들고 거기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조금 전 전투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오러가 이번에는 눈에 띄게 모습을 드러냈다.

검에 맺힌 자신의 오러보다 더 선명한 오러가 아닌가.

파블로가 신음을 흘렸다. 눈앞의 소년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믿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미 현실이 그러했다.

그것을 본 앤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헛들었군요. 다시 누차 말하지만, 이깟 오러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말에 파블로의 눈에 핏대가 섰다.

“이깟 오러! 네가 하는 말은 기사를 꿈꾸는 수백만의 소드 유저들을 무시하는 말이다! 강하면 강한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아직도 말이 안 통하는군요. 그럼 보여 드리죠. 하압!”

앤디가 단전에 있는 마나를 목검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대한 마나의 용트림이 시작되었다.

고오오오오오!

목검의 빛이 밝아지다 못해 짙은 푸른색으로 변하는 것도 모자라 계속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오, 오러 블레이드?”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야! 잘 봐!”

“서, 설마!”

앤디의 목검이 푸른빛이 아니라 일렁거리는 푸른 불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주위에 있던 기사들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커지고, 입이 쩌억 벌어졌다.

“오러 파이어?”

바로 마스터의 증거인 오러 파이어였다.

“마, 마스터란 말인가!”

“소, 소, 소, 소, 소드마스터?”

“저 꼬마가!”

“말도 안 돼!”

덜덜덜덜덜!

갑자기 연무장이 난리가 났다. 최연소 소드마스터의 현신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 자빠질 것 같은 것은 헤르만 8세도 마찬가지였다.

“안드레이 경.”

“예, 폐하.”

“대체 저 소년은 누군가? 소드마스터라니!”

안드레이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설마 앤디가 마스터급의 능력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체 저 아이는 자신을 얼마나 더 놀라게 할 생각이란 말인가!

마스터라는 경지는 인간이 경외하는 경지 중 하나였다. 지금 나이에 마스터라면, 30대 40대에는 초인의 경지에도 오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초인! 그랜드마스터!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의 중심! 현 대륙에 단 2명만이 존재한다는 그 초인!

그 또 하나의 초인이 이곳 헤르만 왕국에서 태어난다면!

정말 헤르만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헤르만 8세는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냉정을 찾았다.

“안드레이 경!”

안드레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새롭게 태어날 헤르만 제국의 주춧돌이 되어줄 원석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어리기 시작했다.

2

앤디는 주위의 술렁거림에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이 왜 이래? 남은 힘들어 죽겠구만.”

파블로는 앤디의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허탈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자신이 정말 바보라도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건가?’

스스로 반문해보았지만,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말 같지도 않은 현상을 직접 목격하다 보니 진이 다 빠졌다. 이제는 분노도, 질투도 나지 않았다. 경외심만이 자리 잡을 뿐이었다.

그때, 앤디가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말했다.

“이건 만들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후우! 보시다시피 이렇게 진이 다 빠져서 그렇지.”

앤디가 오러를 풀기도 전에 목검이 폭파했다.

퍼벙!

가루로 흩어진 목검 손잡이를 들고 앤디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말하고자 싶은 것은 바로 이겁니다. 힘을 뽑아내서 크기를 키우는 것은 진력을 짜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문제는 효율이죠.”

“효율?”

“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마나를 뽑아내는 것은 낭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약하더라도 자신의 통제하에 사용이 가능한 것이, 이런 쓸데없이 마나만 잡아먹는 녀석보다 만 배 낫죠. 조금 전에 파블로 님은 저와 싸우실 때 그토록 마나를 쏟아 부어 오러를 만들었는데, 제 검에 맺혔던 이 작은 오러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죠.”

“으음….”

파블로의 이마에 주름이 모여 깊은 골이 생겼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오러는 위협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그뿐이에요. 쉽게 설명하자면 손가락 두 마디만한 나뭇가지 묶음보다 손가락 한개 굵기의 나뭇가지 하나가 더 강한 법이지요.

아시겠나요? 이 싸움의 승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제가 강해서? 아니에요. 그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힘도 조절하지 못하는 자에게 힘 조절이 가능한 제가 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이죠.”

“….”

파블로는 할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프라이드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바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파블로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많은 기사들이 앤디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리 생각했고, 또, 많은 것을 깨닫는 중이었다.

그때, 헤르만 8세가 다가왔다.

“경들, 수고가 많았네.”

헤르만 8세가 다가오자 앤디와 파블로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보였다. 구석에 도열해 있던 기사단 역시 예를 보였다.

헤르만 8세가 앤디의 앞에 가서 섰다.

“앤디.”

앤디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자애로웠다.

“예, 폐하.”

“쿼드로 경, 검을 주게.”

헤르만 8세 뒤에 자리하고 있던 쿼드로 근위 단장이 검을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검을 건네받은 헤르만 8세가 앤디를 향해 검을 누였다.

“짐에게 충성의 서약을 하겠는가?”

앤디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앤디는 헤르만 왕국의 헤르만 베르 디세르카 8세 폐하를 받들어 모심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앤디의 말이 끝나자 헤르만 8세가 검면으로 앤디의 머리와 좌우 어깨를 한 번씩 건드리며 말했다.

“본 헤르만 베르 디세르카 8세가 평민 앤디에게 카르미온이라는 성과 성스러운 뜻의 미들네임 드를 내림과 동시에, 헤르만 왕국의 기사가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앤디 드 카르미온 경은 고개를 들라.”

앤디가 고개를 들자 헤르만 8세가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건네줬다.

앤디는 양손으로 그 검을 받아들었다.

“망극하여이다.”

앤디는 쿼드로 근위 단장이 마저 건네주는 검집을 받아, 들고 있던 검을 그곳에 넣었다.

의식이 끝나자 헤르만 8세가 앤디에게 물었다.

“작위 의식은 누구에게 배웠는가?”

“안드레이 님께 배웠습니다.”

헤르만 8세가 안드레이를 돌아보자,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헤르만 8세가 말했다.

“경은 이리될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이렇게 빨리 그날이 다가올 줄은 몰랐지요.”

“경의 노고가 컸네.”

“아닙니다. 모두 폐하의 은덕이지요.”

헤르만 8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앤디 드 카르미온 경, 경이 원하는 것이 있는가? 물론 이미 안드레이 경에게 받았다고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묻는 것이네.”

“지금은 그다지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미 충분한 탓입니다.”

“정 그렇다면 알겠네.”

헤르만 8세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딱히 생각이 안 난다 하더라도 나중에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때 다시 말해도 좋다네. 내가 경들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나 보군. 그럼 각자 업무를 보게나.”

그 말에 제1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기사단 전체 차렷! 경례!”

“충!”

안드레이가 헤르만 8세에게 말을 걸었다.

“폐하, 소신이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앤디의 존재를 극비로 해주십시오.”

그 말에 헤르만 8세도 수긍했다.

“그렇지 않아도 짐 역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네. 만일 타국에서 그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피곤해지겠지.”

“맞습니다. 그는 지금 수련을 하고 성장할 중요한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얼마나 더 발전할지 소신도 알 수 없사오나, 번거롭거나 위험한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짐도 경의 그 말에 공감하네.”

“그리고 타 귀족들에게도 비밀에 부쳐 주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속이라고 했네. 이보다 좋은 것은 아군도 모른다면 적도 모른다는 것이지. 짐도 그리 어리석지 않다네. 기사단의 입을 단단히 막겠네.”

“망극하옵니다.”

“그러하다면 그동안 부를 그의 직위는 어떻게 하지? 다른 이들 앞에서도 앤디 경이라고 부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앤디를 저의 시종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사옵니다. 그냥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렇겠군.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언제까지고 시종으로 알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언젠가 그의 면목을 드러내야 할 테니 말이네.”

“열여덟 살이 될 동안만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기사단에 넣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알았네. 그와 관련된 일은 모두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헤르만 8세가 안드레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폐, 폐하?”

“고맙네, 고마워.”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안드레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드레이의 눈가가 반달이 되자, 자글자글한 그의 주름이 부드럽게 자리 잡았다.

3

“뭐야! 앤디!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미안. 조금 바빴어. 그 망할 늙은이가 시키는 게 많아서.”

“흥! 칫!”

“왜 삐친 거야?”

“누가 삐쳤다고 그래? 흥! 칫!”

“삐친 것 같은데?”

“네가 삐쳤다고 하니까 삐치지! 그리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서 그래?”

“아,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용서해주라.”

“안 돼! 용서 못해!”

“내가 어떻게 하면 풀리겠니?”

“몰라! 흥! 칫! 핏!”

어느덧 두 해가 훌쩍 지나 18살이 된 앤디가 미안하다며 사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말과 달리 능청맞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그러나 결코 밉지가 않았다. 아니, 미울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어렸을 적에도 귀여웠는데, 지금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180 정도의 키에, 금발에 가까운 연한 갈색 머리카락과 짙은 갈색 눈동자, 날카로운 눈매와 매끈한 눈썹, 부드럽게 올라온 오뚝한 콧날과 갸름한 얼굴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거기다 단련되어 자리 잡힌 부드러운 근육은 이상적인 몸매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줄 정도였다.

“레오나, 그럼 내가 뽀뽀해줄까?”

순간, 소녀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흥! 내가 아직도 그깟 뽀뽀에 넘어가는 어린앤 줄 알아?”

“옛날엔 좋아했잖아.”

“그건 옛날이고! 지금은 안 좋아해!”

“정말로?”

“정말!”

가볍게 부풀은 볼과 뾰로통하게 입을 내민 채 토라진 레오나 공주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앤디는 킥!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왜 웃어!”

“미, 미안.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어.”

“흥! 농담하지 마!”

하지만 그 말에 조금 누그러든 모습을 보이는 레오나 공주였다.

“아니야. 정말 예뻐. 예뻐서 그런 거야.”

“…정말?”

“응, 정말.”

앤디의 말은 사실이었다.

비단 같은 머릿결과 자체 발광 중인 우윳빛 피부, 그리고 그로 인해 더더욱 빛나는 금발의 머리카락, 선명한 이목구비와 체리 빛을 흘리는 입술까지. 마치 미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앤디의 연이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레오나 공주가 배시시 웃었다.

“에헤헤!”

혀를 날름 내밀며 웃는 레오나 공주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자, 여기.”

“이게 뭐야?”

“오늘 너에게 주려고 내가 틈틈이 만든 거야.”

상자를 받은 레오나 공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머?”

그러다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각품이었던 것이다. 아름답게 웃고 있는 한 소녀를 조각한 형태였다.

상당한 실력이었다. 마치 작은 요정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야?”

“응, 너야. 오늘이 우리가 만난 지 육 년째 되는 날이잖아.”

앤디의 말에 그녀가 웃었다.

“헤헤헤헤!”

“좋아?”

“응, 좋아.”

둘은 그렇게 한참을 실없이 웃으며 노닥거렸다.

“에구구! 허리야.”

지난 6년간 안드레이는 정계의 중심에 다시 서는 데 성공했다. 엄청난 카리스마로 다시 황실 마법사들을 누르고 수석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리고 헤르만 8세를 따르는 이들을 끌어들여 힘을 키운 후, 살생부를 만들어 한순간에 정적들을 처리했다.

귀족 파벌이라고 다 처리한 것은 아니다. 자신과 사이가 나쁘다고 무작정 쳐낸 것도 아니다. 왕에게 적대감을 드러낸 존재들을 쳐낸 것이니까.

능력이 있고, 회유가 가능한 사람은 회유를 했고, 중립을 외친 이들까지도 넘어갔다.

그렇다 하더라도 엄청난 수의 목숨이 형장 위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그들의 반항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던 안드레이는 노련하게 그들을 공략했다. 그렇게 생긴 공석을 최대한 빨리 측근으로 메웠다.

그 작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가장 큰일이 이제 끝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제 큰일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부터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의 큰 줄기의 맥락을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왕궁 내 어느 곳에선가 자연스럽게 녹아, 태연하게 일을 하고 있을 첩자들의 제거였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골머리를 썩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라 안의 인재들을 끌어 모아 비밀리에 육성까지 진행했는데, 벌써 5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인재 육성은 이제 궤도에 올라 자신이 손을 놓아도 돌아갈 수준이 되었다.

하나하나 뭔가 진행이 되고 있으니 다행이긴 한데, 조금 짜증이 나긴 했다. 이제 큰일을 벌여야 하는데 그들의 이목을 피해 많은 부분을 비밀리에 진행하려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탓이다.

‘망할 첩자 놈들!’

답답함에 조금 쉬고자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산책을 하기 위해 숙소를 벗어나 밖으로 나와서 왕궁의 정원을 돌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 익숙한 형태의 사람 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앤디와 헤르만 8세의 금지옥엽 막내딸인 레오나 공주였다.

둘이 만나고 있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저렇게 눈에 띄게 만나니 조금 걱정은 되었다.

“쯧! 녀석, 어쩐지 시키는 일도 팽개치고 달려 나가더라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앤디를 바라보는 안드레이의 시선은 평온했다.

마음이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하루하루 몰라보게 발전하는 앤디의 모습은 마법사인 자신이 봐도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마나의 움직임.

확실했다. 뷰 오브 마나 디텍팅을 사용하지 않아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앤디가 이미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섰음을 말이다. 진정 초인의 가능성이 눈에 보였다.

자신이 아는바 세상 그 어떤 초인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이러다 최연소 초인이 세상에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이지 자신이 복덩어리를 주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앤디에게 잔소리를 했다.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에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자신을 종종 피해 다니는 앤디를 볼 수 있었다.

혼자 알아서 잘하는 아이지만, 안드레이는 앤디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항상 불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만큼 안드레이의 애정이 앤디를 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안드레이는 자신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그가 등 뒤에서 헛기침을 해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다.

“흠흠!”

친숙한 목소리에 안드레이가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폐, 폐하!”

“안드레이 경, 이곳에는 무슨 일이오?”

안드레이가 앤디와 레오나 공주가 있는 쪽을 슬쩍 보며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곳으로 시선을 보내지 않도록 나름 신경을 썼다.

헤르만 8세가 저 장면을 보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헤르만 8세가 자연스럽게 안드레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일을 하다가 잠시 쉬려고 산책을 나왔습니다.”

“하긴 일은 적당히 쉬면서 해야 하지. 요즘 안드레이 경이 너무 정신없이 일해서 그렇지 않아도 조금 걱정을 하고 있었다오.”

“하하! 제가 알아서 잘 조절하고 있습니다.”

“그러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짐이 보기엔 너무 고되게 일하는 것 같소. 조금 적당히 줄여 보도록 하시오. 물론 지금이 가장 급하고 바쁜 시기인 것은 알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소.”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안드레이의 정중한 예를 받으며 헤르만 8세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도 그리 딱딱하게 짐을 대하니 짐은 조금 섭섭하오.”

“폐하, 딱딱하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사옵니다.”

“아무도 없이 단둘일 때는 그 궁중 예법을 조금 버릴 수 없겠소?”

“폐하, 소신이 어찌 폐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나이까. 하나, 군과 신의 관계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옵니다. 소신이 마음이 해이해져 실수를 할까 두렵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헤르만 8세가 약간은 섭섭하지만 흐뭇한 시선으로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짐이 어찌 안드레이 경의 마음을 모르겠소. 괜히 충신의 마음을 심란하게 시험한 듯한 기분이 드니 미안하구려. 앞으로도 짐이 실언을 하거나 실수를 한다면 지금과 같이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시길 바라오.”

“충고라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미흡함에도 소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군의 은덕에 항상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됐소, 됐소. 하하! 무슨 말을 못하게 하시는구려. 그건 그렇고.”

움찔.

안드레이는 말을 이어나가는 헤르만 8세의 어투를 듣자 불안한 생각이 엄습해왔다.

“저 둘 말이오.”

“예?”

“어허! 저기 둘 말이오.”

안드레이가 속으로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지금 헤르만 8세의 시선이 정확하게 자신이 원치 않는 방향을 바로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르는 척했다.

“소신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헤르만 8세가 피식 웃었다.

“경도 농을 하실 줄 아는구려. 저 둘 말이오.”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안드레이는 허리를 급히 숙이며 헤르만 8세에게 용서를 구했다.

“폐하, 소신이 죄를 지었나이다. 소신이 책임지고….”

“그게 무슨 말이오?”

“소신이 관리를 소홀히 하여….”

“아니오, 아니오. 짐의 말을 곡해하지 말고 끝까지 들으시오.”

“예, 폐하.”

헤르만 8세가 흡족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 둘, 너무도 잘 어울리지 않소?”

“예, 잘 어울립나이… 예?”

“선남선녀 같지 않소이까?”

안드레이도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대놓고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름다우신 공주 마마와 모자란 제 제자 녀석을 같은 선상에 놓고 말씀하시다니요. 어불성설이옵니다.”

“모자라다니요. 앤디 경이 모자라다면 다른 이들은 대체 어떻게 산단 말이오.”

안드레이가 당황해 에둘러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공주 마마께 한참 모자란다는 말이옵니다.”

“하하하! 아니라오. 짐이 보기에는 저 둘만큼 어울리는 이들도 없다 생각하오.”

그제야 안드레이도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소신도 조금은 그리 생각하였사옵니다.”

“어떻소? 짐은 저 둘이 맺어지길 바라는데 말이오.”

“쿨럭! 예? 소신이 잘못 들었사옵니다. 둘이 맺어지길 바란다는 요상한 말을….”

“경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오. 짐은 분명 그리 말했소.”

“….”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 미래의 초인을 사위로 두는 것처럼 남는 장사가 어디에 있겠소.”

“….”

안드레이는 섣부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일국의 왕이 장사의 도를 말하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별로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스스로도 인정하는 팔불출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앤디가 마법사의 길을 이은 제자가 아님이 약간 섭섭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그 말에 맞장구치는 것은 힘들었다. 자신의 시커먼 속이 다 드러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앤디만 한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하며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던 터였다.

“경은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오?”

“아하하…. 소신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에잉! 됐소. 안드레이 경과 이야기를 하면 짐의 속이 터지는구려.”

“송구하옵니다.”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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