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8화 (8/68)

제8장. 헤르만 제국

1

“경이 사 년 전에 말한 그 아이가 이 아이라고?”

“예, 폐하.”

“흐음….”

헤르만 8세가 안드레이와 함께 자리에 앉은 앤디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눈빛에 흥미가 가득 어려 있었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4년 전, 왕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날, 안드레이가 사죄하며 말했다. 자신의 제자가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말이다.

헤르만 8세는 안드레이의 제자라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탓이다.

안드레이가 제자로 삼은 아이다.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에 의해 아직은 드러낼 수 없다고 했다. 그 사정이 어떤 것인지 헤르만 8세는 알 수 있었다. 바로 정적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말이다. 그들에게 방어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겼을 때 보여 주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헤르만 8세는 아쉽지만 그리하라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쯤이 될지 물었다.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언제까지 막연하게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한 사 년 정도면 가능할 것 같사옵니다.’

그 말을 하고 정확하게 4년이 지난 것이다.

“네가 앤디라는 아이냐?”

“예, 폐하.”

“몇 살인고?”

“열여섯입니다.”

“열여섯이라고?”

“그러하옵니다.”

“안드레이 경에게 너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도다. 짐에게 그 능력을 보여 줄 수 있겠느냐?”

그러자 앤디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의 앞에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당당했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거만해 보이기도 했지만, 기개가 있음으로 볼 수도 있었다.

“저는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하지 않았습니다.”

앤디의 말을 들은 헤르만 8세는 그것을 당당한 기개라 평가했다. 안드레이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앞에 당당하게 앉아 있는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짐이 네게 큰 실수를 했구나.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짐의 말에 곡해를 말거라.”

“오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고맙구나.”

기사의 자존심이라니.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헤르만 8세가 앤디에게 기사의 자존심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한 명의 기사로 인정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혹시 대련은 어떻느냐?”

앤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자리를 이동하면서 앤디가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께 무슨 이야기를 한 겁니까?”

“그냥 네 칭찬….”

“그런데 시선은 왜 피하시는데요?”

“누, 누가?”

“이제는 말까지 더듬….”

“….”

모두가 도착하기도 전에 왕실 제1, 2, 3기사단과 근위 기사대가 연무장에 집결해 있었다.

기사단의 소집을 알게 된 많은 이들이 호기심에 근방을 기웃거렸지만, 기사들 외에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다. 엄격한 통제로 다른 이들의 출입을 금한 탓이다.

앤디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정렬해 있는 기사단을 훑어보았다.

4년 동안 홀로 조용히 수련하며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동안 안드레이는 자신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주었다. 최우선으로 부모님과 마을 사람들의 안전까지 책임져 주었고, 화전 마을의 마을 주민들을 모두 평민으로 신분 상승까지 시켜 준 것이다.

화전 마을의 사람들은 대부분 영주의 폭정과 과도한 세금을 이기지 못하고 도주한 영주민들이 대부분이다.

도주한 영주민들은 신분을 박탈당하고 노예로 강등 당한다. 그런 이들을 평민으로 두 단계나 상승시켜 준 것이다. 더군다나 세금까지 면제해주는 특혜를 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앤디는 걱정이 사그라졌다.

안드레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앤디의 편의를 위해 개인 비밀 수련장도 만들어주었고, 자신이 직접 수련함에 모자람이 없도록 뒷바라지까지 해주었다.

그 덕에 앤디는 아무런 사심 없이 수련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4년간 폐관 수련에 들어선 것과 같은 효과였다.

앤디는 전생에 9성의 경지로 천하제일인이라 불렸다. 물론 그 이후로도 더 발전을 해서 12성의 경지를 넘어 고금제일인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9성의 경지만으로도 천하제일인으로 불렸다는 점이다. 그러한 유운신공을 지금 16살의 나이로 4성을 지나 5성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엄청난 발전의 속도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혼자만의 수련은 숨이 막혔다. 상대와 겨뤄보고 싶었다.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통할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옆을 보니 안드레이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누가 네놈 걱정을 한단 말이냐.”

피식!

“얼굴에 써 있고만.”

“네가 잘못 보고 있는 거다.”

“고마워요. 저와의 약속을 지켜 주셔서요.”

“….”

“저도 약속을 지킬게요. 제가 얼마만큼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잃어버렸다던 과거의 땅을 되찾기 위해 안드레이 님, 아니 스승님을 따라 폐하를 주군으로 섬기겠습니다.”

안드레이의 가슴으로 감동이 밀려왔다.

사실 그동안 얼마나 속병을 앓아왔던가. 앤디가 조국의 왕에 대한 충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말도 충심에 대한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닌 받아온 것에 대한 보답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안드레이는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주군에 대한 가치관이 바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고맙구나.”

헤르만 8세의 기대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래 기다려 왔던 탓도 있지만, 아직도 4년 전 안드레이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 기사와 대결해도 이길 것입니다.’

실언일 수도 있다. 지금 열여섯이면 당시 12살이었다는 말이 아닌가.

12살짜리 아이가 강해봤자 왕실의 기사를 이길 리가 없었다. 상식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헤르만 8세는 그 상식을 거부하는 현실을 믿어보고 싶었다. 정말 과거에 그런 능력을 지녔었다면 지금은 얼마나 성장해서 어떤 모습을 보이겠는가.

그러나 헤르만 8세는 앤디가 경천동지하는 능력을 보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장 친애하는 안드레이의 제자다. 적당한 능력만 보여도 귀히 써줄 용의가 있었다.

사실 이 자리를 만든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니었던가.

“안드레이 경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단하더구나. 너는 너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직접 보시는 것이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하리라 생각합니다.”

앤디의 대답에 헤르만 8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직접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 만일 네가 저 기사들 중 한 명과 싸워서 어느 정도의 실력만 보여 준다면 왕실 기사로서의 자격을 주겠노라. 그리고 그 후로는 네가 원하는 것들을 내 힘이 닿는 선에서 모두 지원해주도록 하마.”

만일 정말로 이 소년이 이긴다면 어떤 지원이 아까울 것이겠는가.

하지만 앤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미 충분히 원하는 것을 받았사옵니다.”

헤르만 8세가 그 말을 듣고 안드레이를 돌아보았다. 안드레이는 헤르만 8세와 눈이 마주치가 가벼운 읍을 보였다. 그에 헤르만 8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무기와 갑옷을 챙기거라.”

“무기는 어디 있습니까?”

“저곳에 있다.”

수련용 목검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들이 수련한다고 목검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훈련생들을 지도할 일이 있을 시에나 한두 번 사용할까. 앤디를 배려해서 목검을 가져온 것 같았다.

앤디는 목검을 쭈욱 하나 빼들었다. 그리고 연무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헤르만 8세가 말을 걸었다.

“갑옷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갑옷을 착용하지 않거든요.”

앤디가 앞 연무장으로 걸어 나가며 씨익 웃은 채 안드레이를 돌아보았다.

안드레이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네 능력을 마음껏 보여라.”

나지막한 혼잣말이었는데, 듣기라도 한 것일까? 안드레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앤디의 주먹이 강하게 움켜쥐어졌다.

기사들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다. 아무리 왕의 명이라곤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건방진 아이가 어떤 귀족의 자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저런 어린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분노 어린 시선으로 앤디가 나가 있는 연무장 한가운데를 노려보았다.

갑옷도 걸치지 않고, 목검 하나 들고 있는 겉멋 든 꼬마 녀석의 싸가지를 상실한 듯한 자태는 그런 그들에게 더욱 큰 불길을 일으켰다.

기사단의 단장들과 부단장들도 울컥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수하들을 다독이며 위로하기 바빴다. 자신들의 주군 앞에서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헤르만 8세가 기사단을 향해 고개를 쓰윽 돌리며 말했다.

“이젠 상대가 필요하겠군.”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사단의 단장들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온 렌트라는 이름의 소드어웨어 중급의 기사 하나를 호명하여 불러냈다.

“버릇을 고쳐 줘라.”

“충!”

감히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도 없는 상관의 명에 기합이 바짝 든 신입 기사 렌트가 진열대의 목검을 들더니, 보무도 당당하게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자신이 질 것이라곤 감히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여유로운 시선으로 앤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건방진 녀석. 볼기짝을 때려 주마.”

“볼기? 당신이 나를 때리는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고작 당신의 능력으로는 꽤 힘들 겁니다.”

앤디가 건넨 한마디에 렌트의 속이 울컥했다. 자신도 모르게 아귀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최대한 혼구멍을 내주지.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런 상황을 모르는 기사단원들 쪽에서는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렌트 저 녀석, 폐하 앞에서 긴장했는지 몸에 기운이 바짝 들어섰는데?”

“혼내는 것까지 좋은데, 이거 무슨 사고라도 나는 것 아냐?”

심판으로 1기사단의 부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그리고 물러서자 렌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앤디의 앞에서 목도를 휘두르는 순간, 텅! 하는 굉음과 함께 렌트의 신형이 달려 나왔던 속도보다 빠르게 뒤로 날아가더니, 바닥에 떨어져 몇 바퀴 구르다가 축 늘어졌다.

“어?”

“어라?”

적막이 흘렀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사람들이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결과였다.

이들은 한참 동안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렌트와, 그런 그를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앤디를 번갈아 보았다.

2

연무장에 도착한 앤디는 기사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중갑을 걸친 채 롱 소드 같은 무거운 중검을 착용하고 있었고, 그에 걸맞게 우람한 체구를 자랑하고 있었다. 외공에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 무거운 중갑을 착용하고, 무거운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근육의 힘이 필수 요소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이들의 무기와 갑옷 종류가 전생에서 보았던 군부의 것과 비슷한 것을 보아하니, 전쟁에 특화되어 발전한 것임이 짐작 가능했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힘으로 승부를 보는 단순한 검식이 주를 이룰 것 같았다.

하지만 몸집이 크다고 둔할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무림의 무공이 외공과 내공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것은 범인들이 말하기 좋게 나눈 것에 불과하다.

외공이라고 내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공이라고 힘이 달리는 것이 아니다. 수련의 방식이 다른 것일 뿐.

중검이 우세하다, 쾌검이 우세하다 누가 평가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일장일단이라고 했다. 하나의 좋은 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 반하는 단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전투의 결말은 어떤 검식이 우세하냐보다 누구의 실력이 더 뛰어난가로 판가름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근거렸다. 이쪽의 검식을 어서 보고 싶었다.

그때, 헤르만 8세가 말했다.

“이젠 상대가 필요하겠군.”

그리고 얼마 후, 기사 하나가 앤디의 앞에 자리하더니 도발했다.

“건방진 녀석. 볼기짝을 때려 주마.”

당연히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앤디가 대응했다.

“볼기? 당신이 나를 때리는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고작 당신의 능력으로는 꽤 힘들 겁니다.”

“최대한 혼구멍을 내주지. 후회하게 될 거다.”

앤디는 눈앞의 기사의 능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척 봐도 애송이 티가 나는 것이, 기사들 중 가장 말단을 자신의 상대로 내보낸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이 단단하고, 눈의 정광이 밝은 것을 보니 수련을 성실히 하는 이 같아 보였다.

‘이곳에는 어웨어와 익스퍼트, 그리고 마스터 순으로 경지가 나눠져 있다고 했었지? 저 정도 실력이면 어느 정도일까. 무림의 무사로 치자면 대충 이류 무사보다 조금 떨어지는 경지 같은데….’

자신의 능력 중 절반 정도 사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내력의 양과 진도로 상대를 짐작하는 것보다, 어느 경지인지 알 수 있는 상대와 한번 검을 대는 것이 더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때 심판이라고 기사 하나가 다가와서 한마디를 던지고 사라지자, 상대 기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앤디의 예상대로 변화나 빠름과 거리가 먼 무거운 기운이 가득한 솔직한 검식이었다.

앤디는 유운신보의 종횡보를 사용하여 몸을 이동했다. 그러자 몸이 였가락처럼 쭉 늘어나듯 보이더니, 그대로 검식의 사각지대로 신형이 이동했다.

기사는 빈 허공에 검을 내리긋게 되었고, 자연히 중심이 흐트러졌다.

앤디는 그 흐트러진 힘을 받아 기사의 전신을 자신의 작은 품 안에서 회전시키는가 싶더니 그대로 튕겨 냈다.

그 결과, 기사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저 멀리 바닥에 처박히게 되었다.

모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이제 갓 소년의 티를 벗은 듯한 아이가 기사단의 기사를 이겼기 때문이다.

“이, 이게 뭐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누구도 이 소년이 렌트를 상대로 어떻게 이겼는지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달려가다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인가?”

“그건 아니지. 발이 걸려 넘어졌으면 앞으로 튕겨져 나갔어야지. 지금 렌트는 달려오던 방향 쪽으로 튕겨지듯 날아가지 않았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 기사단의 기사가 졌단 말이야. 그것도 핏기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에게 말이야. 이게 무슨 망신이지?”

기사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자랑스러운 헤르만 왕국의 기사단의 기사가 어린 소년에게 패할 것이라고 말이다.

아니, 사실 패한 것인지 아닌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간 이해는 안 가지만, 렌트라는 신입 기사가 실수를 해서 쓰러진 것이라고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대련을 다시 해야 한다고 기사들이 입을 모았다. 기사단장들은 그들의 말을 말리지 않았다. 자신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머저리의 실수로 인해 자신들의 격까지 떨어지게 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폐하, 이 대결은 무효입니다.”

“저 얼간이 하나로 우리들의 능력을 시험받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기사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사들의 무리에서 투기가 흘러나왔다.

헤르만 8세는 그런 기사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어린아이에게 지고도 뭐가 잘나서 항의를 하는지 분이 치밀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뭔가 이율배반적인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앤디가 이겼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하지만, 반면에 기사들이 진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그만!”

순식간에 기사들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헤르만 8세는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안드레이와 앤디를 번갈아 보았다.

앤디가 헤르만 8세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은 어떻게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헤르만 8세가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짐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기사들이 일목요연하게 대답했다.

“충!”

그들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그리고 짧은 의논 끝에 2기사단의 부단장이 나서기로 결정을 내렸다.

“파블로, 저 어린 녀석에게 높은 하늘을 보여 주게.”

파블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2기사단 부단장 파블로는 소드익스퍼트 중급의 검사였다. 전체 기사단 중에서 수위권을 차지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파블로가 연무장으로 걸어가자 기사단은 자신들의 깎인 체면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한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2기사단 부단장 파블로다.”

“앤디입니다.”

파블로를 보고 있는 앤디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파블로는 저 어린 녀석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의 요행은 없을 것이다.”

“그거 상당히 기대가 되는군요.”

앤디가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목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짧은 대립.

서로의 움직임을 경시하지 않고 지켜보던 와중, 파블로가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신형이 앞으로 쭈욱 달려들더니, 검을 종횡으로 휘둘렀다.

힘이 가득 실린 검이 앤디를 향해 날아갔다.

슈왁!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매서운 검격이었다.

앤디의 상체가 뒤로 슬쩍 물러섰다.

파블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을 들어올리더니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앤디 역시 이미 그 공격을 예비하고 있었다. 군부의 검식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파블로가 시도한 발차기는 훌륭한 공격이었다. 무거운 중갑의 무게가 파괴력으로 바뀌어 상대를 공략하기 때문이다.

보통 상대였다면 그 발차기에 맞아서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몸이 가벼운 앤디는 보법으로 중심을 잃지 않고 몸을 교묘하게 틀어낼 수 있었다.

그대로 신형을 꼬아 몸을 한 바퀴 돌린 앤디는 공격을 피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격을 노렸다. 발차기를 시도한 파블로의 발목을 손목으로 쳐 중심을 잡은 후 곧바로 상체를 숙여 다리 걸기를 시도한 것이다.

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는 상태일 것이기에 걸리기만 하면 바로 나자빠질 것이 확실했다.

“큭!”

파블로의 입에서 가벼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를 찔린 공격을 당한 탓이다.

다리가 걸리긴 했지만, 파블로는 노련한 몸놀림으로 걸린 다리의 발목을 틀고, 재빨리 허공에 떠 있는 발을 바닥에 내디뎌 흐트러진 중심을 가까스로 잡아낼 수 있었다.

그사이에 앤디는 몸을 빼내서 파블로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잡고 설 수 있었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파블로의 인상이 구겨지자 앤디가 씨익 웃었다.

그사이, 연무장 주위의 사람들 사이로 적막이 흘렀다.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공방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 기사의 입을 시작으로 경악 어린 탄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 꼬마, 대, 대체 뭐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파블로 부단장님과의 공방 속에서 밀리지 않은 것 맞지?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아까 렌트를 이긴 것이 정말 요령이나 렌트의 실수가 아니라, 정말 저 아이의 능력이었단 말이야?”

웅성웅성.

헤르만 8세도 경악 어린 시선으로 연무장에서, 아니 앤디와 파블로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연무장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안드레이만이 이미 이런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태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3

쒜에엑!

집요하게 따라붙는 검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하지만 앤디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그 공격을 상쇄시켰다.

그는 그런 식으로 한참 동안 파블로의 공격을 피하며 그의 검식을 바라보았다.

츠츳!

이번에는 검이 깊이 찔러 들어왔다. 목검을 랜스의 차지 공격 방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파블로는 이 공격이 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살기가 가득한 검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앤디에게는 아쉬웠다. 그나마 이번에는 조금 봐줄 만한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앤디는 파블로의 검면을 자신의 검면으로 비스듬히 쳐서 밀어내고, 그 반동으로 몸을 허공에 띄워 신형을 피했다.

“이런 날다람쥐 같은 녀석!”

파블로의 이마와 목에 핏대가 일어섰다. 그는 다시 자신의 간격 안에 여유롭게 안착하는 앤디를 보며 숨을 헐떡였다.

“헉! 헉!”

이마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착각인 것일까?

믿을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앤디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참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주위의 시선들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앤디가 나지막하게 말문을 열었다.

“느려요.”

“이 자아시익!”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익스퍼트 중급의 검사다! 대체 이 꼬맹이가 뭐기에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단 말인가!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휘둘러보았지만, 이번에도 앤디는 미꾸라지처럼 피해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손발이 어지러웠다.

그 순간, 앤디가 우뚝 멈춰 서더니 이죽거렸다. 마치 도발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끝인가 보군요. 시시하게시리.”

그러자 파블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뚝!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파블로의 전신에서 지금까지 상상하지도 못했던 투기가 끓어올랐다. 동시에 목검에 희끄무레한 빛이 어림과 동시에 팍! 하고 터져 나갔다.

파블로는 손잡이만 남은 목검을 바닥에 팽개치듯 버리고, 자신의 검 손잡이를 움켜쥐더니 뽑아들었다.

스르르릉!

“장난은 이제 여기까지다.”

앤디는 시시했다. 나름 재미는 있지만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파블로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을 누르고 자신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존심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상대로 근력으로만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 힘을 다 끌어올리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도발을 시도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느려요.”

“이 자아시익!”

“이제는 끝인가 보군요. 시시하게시리.”

앤디의 계략은 제대로 먹혔던 것 같았다. 순간 파블로의 기세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이다.

거센 마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가 들고 있던 목검이 거대한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애검을 뽑아 올렸다. 진검을 뽑기 위해 일부러 폭파시킨 것이다.

파블로가 이를 악문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은 이제 여기까지다.”

우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죽여주마.”

화악!

쩌릿쩌릿한 기운이 앤디의 전신을 강타했다.

이런 기운을 대면하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가.

‘검기라. 이 정도면 검기상인의 경지인가? 내 힘을 시험해볼 상대로 나쁘지 않군. 이제야 제대로 하려는 마음이 든 모양이지? 크크!’

앤디는 신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이런 대결을 너무나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껏 힘을 써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주위에 자신의 힘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자신의 힘을 사용해도 충분히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신의 혈관이, 근육이, 세포가 환희의 기쁨을 내질렀다.

앤디는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거렸다.

파팟!

파블로의 육중한 몸이 바람처럼 날아왔다.

오러를 사용했기 때문일까? 처음의 무거운 움직임과 달리 지금은 마치 새털과도 같은 가벼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검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쩌엉!

충격파가 터지며 파블로와 앤디의 몸이 뒤로 세 발자국씩 밀려 나갔다.

파블로의 표정에 경악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오러가 앤디의 목검을 베지 못하고 동등한 힘의 격돌을 보이며 뒤로 밀려났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셔.”

앤디의 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파블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머뭇거림 없이 본능이 시키는 대로 검을 들어올렸다.

파칭!

목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똥을 튀어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을 한다는 것은 배부른 여유였다. 앤디의 공격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제법이군요. 이번 것도 막아보시죠.”

쒜엑!

앤디의 검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파블로는 검을 치켜들어 앤디의 검을 막았다.

“크흑!”

엄청난 파괴력이 가져온 무게감에 막아선 팔이 찌르르 저려 왔다.

그러나 엄살 부릴 틈이 없었다. 다음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블로가 바닥을 굴러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바닥이 움푹 파이며 파블로의 몸이 뒤로 빠졌다.

앤디는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의 단전에서 내공이 회오리치듯 솟아오르며 용천혈로 쏘아졌다.

발바닥으로 쏘아진 기운에 앤디는 신형을 쏘아 보냈다.

곧 파블로의 바로 앞까지 단숨에 날아간 그는 검 손잡이로 가슴을 내리찍었다.

텅! 우직!

플레이트 갑옷이 찌그러지며 엄청난 충격이 파블로를 강타했다.

쿠우웅!

뒤로 빠져나가지 못한 파블로의 신형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재빨리 일어나 몸을 피했다. 살기가 느껴진 탓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헐떡거리며 쓰러져 있던 자리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 누워 있던 그 자리에서 거대한 폭음이 일어났다.

콰광!

“히익!”

씨익.

앤디가 악귀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파블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파블로의 등골이 오싹거렸다. 아니,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니 인정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눈앞의 꼬맹이, 아니 상대는 감히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조금 전에는 건방진 꼬맹이였는데, 지금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산악처럼 느껴졌다.

“왜 그래요? 벌써 지친 건가요?”

스캇!

앤디의 검이 파블로의 목을 노리고 날아갔다.

“크흑!”

지금까지 공격을 하며 앤디를 잡기에 몰입했던 파블로가 이번에는 입장이 바뀌어서 앤디의 강공을 피하기 위해 허덕이기 시작했다.

결국 무릎을 꿇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학! 학! 학! 학! 학!”

땀으로 범벅된 얼굴에서 땀방울이 연방 바닥을 향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정말 끝난 모양이군요. 약간 아쉽군요.”

그 말에 파블로가 고개를 들어 오만하게 서 있는 앤디를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달리 앤디의 이마에는 한 방울의 땀방울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 대체 넌 누구냐!”

“너언?”

앤디가 인상을 슬쩍 구겼다. 파블로는 재빨리 타협을 봤다.

“아, 아니, 당신은 누구요?”

앤디가 이쯤 해두지,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앤디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니지 않소. 정체가 무엇이냔 말이오.”

그것은 파블로만의 질문이 아니었다.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이목이 앤디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어 있었다.

“기사죠.”

“기사?”

“뭐, 아직은 아니지만….”

앤디가 슬쩍 헤르만 8세와 안드레이를 보고는 눈웃음을 짓더니 말문을 열었다.

“곧 헤르만 제국의 기사가 될 몸이라고나 할까요.”

쿠궁!

하늘에서 날벼락이라도 친 것일까?

‘헤, 헤르만 제… 국?’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져 있던 헤르만 8세의 심장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쥐어짜질 듯 수축함과 동시에 강하게 펌프질을 시작했다.

두쿵! 두쿵! 두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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