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7화 (7/68)

제7장. 입궁

1

“어쩌실 생각이세요?”

“가긴 가야지.”

“그 말씀을 오 일 전부터 들었어요.”

안드레이의 이마와 눈썹 사이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흐음… 벌써 오 일이나 됐나? 그럼 슬슬 나가볼까?”

셀린이 떠난 후 5일이 지나고 나서야 안드레이와 앤디가 밖으로 나섰다.

궁중 예복을 입은 안드레이와 그 뒤를 따르는 앤디는 영락없이 길을 행차하는 귀족과 그를 보필하는 어린 시종의 모습이었다.

앤디는 옷이 여관으로 왔을 때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조용히 입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복을 찾았기 때문이다.

저런 옷을 이런 허름한 여관에서 찾았다는 것 자체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그리고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대체 어째서 그렇게 한 것인지 고심했다. 안드레이가 하는 행동은 숨어 있는 정적들에게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홍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그러고 나서 입궁은 하지도 않고 5일 동안 방 안에서 뒹굴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나가자고 하더니, 태연하게 그 옷을 입고 밖에 나서서 왕궁을 향하는 것은 대체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정말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판단한 안드레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앤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속셈이시죠?”

“뭐가 말이냐?”

“정말 몰라서 되묻는 거예요?”

“네가 이야기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속셈이 뭐냐고 물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냐?”

“옷이요, 옷.”

“옷이 왜? 멋지지 않느냐?”

“그렇게 옷을 입고 활보할 거라면 지금까지 왜 숨어 있었던 거냐구요?”

안드레이가 히죽 웃었다.

“왜, 궁금하냐?”

“네, 많이요.”

“네가 혼자 추론해보는 것이 더 재밌을 듯싶은데 어떠냐?”

역시나 뭔가 속셈이 있었다는 말이다.

“잘난 척 떠들어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너는 역시 기사 체질이구나.”

“제가 언제 마법 배운다고 하던가요?”

그 대답에 안드레이가 속을 긁었다.

“나도 너에게 마법을 가르칠 생각은 없다. 마법은 똑똑해야지만 배울 수 있거든.”

앤디의 속이 울컥했다. ‘내가 어떤데? 그 소꿉장난 같은 마법 따위 당장 가르쳐 줘보슈! 단숨에 다 마스터해주지!’라고 떠들려던 찰나, 안드레이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 입장을 파악해봐라. 그리 생각하면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내가 헤르미아에 들어옴과 동시에 내 신상 명세는 이미 모두 파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질구질하게 숨어서 뭘 하겠느냐? 위치 파악만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나에 대한 존재를 파악했으니 대비를 하려고 발버둥치지 않겠느냐.”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내 존재가 숨어 있으면 숨어 있을수록 그 대비는 커질 것이다. 내 꿍꿍이속을 궁금해하는 녀석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찔리는 것이 많은 녀석들에겐 숨어 있는 적이 드러난 적보다 무서운 법이니까요.”

“왕궁에 들어선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쳐보자. 그런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면?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

앤디가 대답하지 못하자 안드레이는 부연 설명을 붙였다.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 그들은 안드레이 님께서 복수를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생각하겠군요.”

“뭐, 비슷하다.”

‘어쩐지 녀석들이 침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감시만 하더라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녀석도 있을 것 아닌가요?”

“물론 있겠지.”

“그놈들은요?”

“조금이라도 나에 대한 신경을 느슨하게 하려는 목적인 것이다. 이것으로 어떤 사건을 대처하겠다는 것은 아니지. 몇 놈이라도 느슨해지면 그걸로 만족이라는 것이다. 계단은 첫 번째 계단부터 밟아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맞는 말이었다.

“정말 복잡하게 사시는군요.”

“네 녀석이 너무 단순하게 사는 거지.”

앤디는 안드레이의 핀잔에 혼자 구시렁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잇! 더럽게 간지럽네.”

“씻어라.”

“오늘 아침에 머리 감았다구요. 저 녀석들이 자꾸 쏘아봐서 간지러운 건데 어쩌란 말입니까.”

“아, 그냥 참고 긁어라. 지금 움직이면 죽 쑤어 개 주는 꼴 된다.”

“저도 안다구요. 칫!”

벅벅!

앤디는 안드레이의 말을 듣고 자신들을 향해 쏟아지는 눈길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감시가 대놓고 본다의 뜻이라면 저들의 감시는 성공일 것이다. 미행의 뜻이 그냥 뒤를 따라다닌다는 것으로 바뀌었다면 저들의 미행은 성공일 것이다.

정말이지 형편없는 실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앤디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 말은 안드레이를 향한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행인을 잡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울지 마. 뚝!”

“그건 무슨 소리냐?”

안드레이의 물음에 앤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주먹이 울어서요.”

그 말에 안드레이가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하하핫!”

대로변의 모든 사람들이 멈춰 서서 안드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럼에도 안드레이는 뭐가 그리 통쾌한지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앤디는 쪽팔린지 옆으로 슬쩍 빠지며 남인 척했다.

그리고 둘은 얼마 가지 않아 왕궁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드레이의 입궁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안드레이와 앤디는 왕실 경비대장의 호위를 받으며 왕성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귀족 대기실로 들어서자근위 기사단의 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드레이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설마 쿼드로 경?”

쿼드로라 불린 그가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공작 전하.”

“경도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모두가 놀랐었지요. 폐하께서 공작 전하께서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를 퍼트리신 후 말입니다.”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정리되었으니 왕궁으로 돌아와도 좋다던 그 말이 이런 뜻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옷을 보니 근위대 단장이 되신 듯하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정확히 이십 년 만이오. 폐하께서는 강녕하시오?”

“잠시 후 직접 뵈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렇겠지.”

“지금 폐하께서 급한 업무를 처리 중이시라 죄송스럽게도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십 년을 기다렸소. 조금 기다리는 것이 무에 대수가 되겠소.”

“그럼 여장을 푸실 객실에서 잠시 쉬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안드레이는 잠시 고심했다. 그리고 앤디를 돌아봤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주군을 기다리고 싶었지만, 앤디와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앤디를 그곳에서 쉬게 하고, 자신 혼자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그러도록 하지.”

“이 소년은?”

“내 시종일세.”

앤디가 힐끔 안드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안드레이가 자신을 정적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그리 말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이 아이의 거처는 어찌하면 좋으시겠습니까?”

“눈치가 빠른 아이네. 내 일을 봐야 하니 내가 쉴 곳과 가까웠으면 싶군.”

“그럼 작은 방이 딸린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세.”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앤디는 큰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폭신폭신한 비단 이불에 오리털로 만들어진 베개까지. 마음이 흡족했다.

쪼오오옥!

시녀가 가져다놓은 주스를 침대 위에 누운 채 빨대로 빨아 마시며 흥얼거렸다.

“이런 이부자리가 얼마 만이지?”

전생에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는데….

역시나 잃어버려야 귀한 것을 안다고 했던가.

한참을 뒹굴거리던 앤디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창이 열려서 커튼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테라스로 발길을 돌렸다.

“와우!”

속이 탁 트일 정도로 시원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손이 닿아 아름답게 꾸며진 넓은 정원, 저 멀리 시계탑과 마을의 중심부도 한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 이어진 그림 같은 산맥과 하늘. 인공 구조와 자연의 언밸런스한 조화로움이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장관은 연출해냈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뱉으며 호연지기를 쌓았다. 그러고 보니 마음 놓고 수련한 지 얼마나 되었던가. 수련을 쉰 적은 없지만, 제대로 된 수련을 한 것은 안드레이를 만나기 전의 일이었다. 안드레이를 따라나선 이후로 기초적인 수련을 진행했을 뿐이었다.

앤디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별다른 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짙은 갈색 계열의 벨벳으로 만들어진 메이드복을 걸친 하녀 셋이 들어왔다.

그녀들은 안에서 멀뚱히 서 있는 앤디를 보고는 안으로 들어서더니 각자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 명은 침대로 가서 엉클어진 자리를 원상 복귀했고, 한 명은 꽃병의 물을 갈았으며, 나머지 한 명은 주변의 먼지를 걸레로 훑었다.

그런 하녀들을 향해 앤디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러자 하녀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돌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중 한 명이 앞에 나서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그녀들의 반응을 보건대 앤디가 시종이라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하녀와 시종의 차이는 컸다. 그렇기에 나이가 어린 앤디였지만, 존대를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도 왕궁의 하녀라는 자존심이 있었다. 정체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귀족의 시종에게까지 허리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이 약간 어색한 듯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부탁이 있어서요.”

“말해보세요.”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가능하면 자리 좀 비워주실 수 있겠어요?”

“얼마나 말이죠?”

“흠… 한 다섯 시간 정도? 그동안 이곳에 안 들어와 주셨으면 싶어서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하녀들이 밖으로 나갔다.

앤디는 바로 문을 걸어 잠그고 방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운기를 시도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깊고 길며 끊이지 않도록 고르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유운신공의 흐름을 따라 거대한 기운이 전신을 아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앤디의 주위로 온화한 미풍이 가볍게 일었다.

2

“폐하.”

“안드레이 경….”

헤르만 왕국의 왕, 헤르만 베르 디세르카 8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을 잊지 않고 달려와 준 하나뿐인 친우.

안드레이가 그런 자신의 주군을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린 후, 푸근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강녕하셨습니까?”

“미안하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폐하의 곁을 보필할 수 없었기에 죄송할 따름입니다.”

헤르만 8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어서 일어서게나.”

헤르만 8세의 손짓에 이끌리듯 안드레이가 꿇었던 한쪽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앞서 걷기 시작하는 헤르만 8세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자리를 옮기세.”

“예, 폐하.”

“자네가 왔다는 소식에 서둘러 달려오고 싶었으나, 사람들의 눈이 너무 많아 치우느라 시간이 걸렸다네.”

“이해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안드레이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 자신을 쫓아낸 것도 모자라, 주군에게까지 칼을 드리운 더러운 정적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 앉게나.”

안드레이가 헤르만 8세의 말에 가볍게 예를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 맞은편에 헤르만 8세가 앉았다.

안드레이는 헤르만 8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안색을 살폈다. 분명히 웃고 있음이 확실한데, 그 속에 근심이 가득 서려 보였다.

“왜 그렇게 빤히 보는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가?”

허허! 웃는 헤르만 8세의 웃음소리를 듣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순간 어렸을 적 천진난만하던 헤르만 8세의 모습과, 세상의 덧없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지금의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아… 닙니다.”

가슴의 아픔을 억누르며 말하느라 말이 어눌하게 흘러나왔다.

그런 안드레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음인지, 헤르만 8세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 얼굴에 속이 다 드러나는 것 같구만. 웃는다고 웃었는데…. 허허!”

말 그대로였다. 근심으로 일그러져 그대로 굳어버린 인상이었다. 잠시 웃는다고 지워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보기 좋사옵니다.”

“그러한가? 다행이로구만. 그동안 무얼 하며 지냈는가.”

“저야 어디 간들 다를 게 있겠습니까?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자네를 짐이 아는데 말이네.”

안드레이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고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정말 미안하네. 그것도 모자라 부덕한 짐을 다시 도와달라며 이렇게 경을 부르다니. 내 경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구만.”

“그렇지 않사옵니다. 저를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망극할 뿐이옵니다.”

“경의 자리를 다시 복귀할 준비를 모두 마쳤네.”

안드레이는 조금 전, 쿼드로 근위대장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어떤 준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짐은 현재 힘이 없다네. 미안하네….”

자리를 찾아주지만, 이름뿐인 자리라는 말이다.

안드레이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그것으로 충분하옵니다. 다른 걱정은 하지 마시옵소서.”

죽었다고 알려진 안드레이다. 그런 자신을 원상 복귀시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정적들도 그러하고, 과거 자신을 노리던 쿠렌트 제국의 시선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죽었다고 위장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모든 것을 무마하고 다시 자리에 앉힐 방법을 마련했다는 것은, 헤르만 8세가 위험한 도박을 해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헤르만 8세의 입지가 더 좁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도박을 할 정도라면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헤르만 8세는 그 다른 길보다 안드레이 자신을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선왕의 유지를 이어 끝까지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안드레이는 분명 그러한 사람이었다.

또 역시나 그것이면 충분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좋지 않게 보면 자신이 살고자 무리를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자신의 주군인 것을.

그 주군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그 이상 뭐가 더 중요하겠는가.

안드레이는 가슴속으로 선왕이었던 헤르만 7세의 근엄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서거하기 전, 자신의 손을 잡으며 어린 헤르만 8세를 부탁하던 그때 그 상황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저만 믿으십시오. 다시 폐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겠습니다.”

헤르만 8세가 믿음직한 시선으로 안드레이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주시하던 그가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말만이라도 고마우이. 역시 자네밖에 없구만. 허허! 이십 년 전 그때…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네를 지켰어야 했는데…. 그때는 정말 미안했네.”

“무슨 말씀이시옵나이까, 폐하.”

“더 이상 무리를 하지 않아도 좋다네.”

“예…?”

이해가 안 되는 주군의 말에 안드레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헤르만 8세는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사실 짐이 경을 부른 것은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짐작하고 있을 그것은 결코 아니라네. 단지 마지막으로 경을 보고 싶어서였을 뿐이니 말일세. 더 이상 경을 위험에 휩싸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네.”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경의 성격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고 자부하네. 자네란 사람은 짐이 보고 싶다고 오란다고 올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네. 처음부터 도와달라고 하지 않으면 자네가 과연 이 자리에 왔겠는가?”

안드레이는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침묵을 지키자 헤르만 8세가 말을 이어나갔다.

“늦었지만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묻어진 경의 이름만이라도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싶었다네. 짐의 실책으로 잃은 경의 자리를 다시 찾게 해주고 싶었다네. 그게 짐이 경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짐의 자리를 걸고 도박을 하게 되었지. 무슨 도박인지는 묻지 마시게. 여하튼 다행스럽게도 그게 성공했다네. 그래서 자신 있게 자네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이지. 이곳에 온 이상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를 건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네.”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격동했다.

“폐하! 폐하!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시옵나이까!”

“아닐세. 난 지금 새삼 깨닫게 되었네. 세상 모두가 짐을 버려도 경만은 끝까지 내 곁에 남아줄 사람이란 사실을 말이네. 그런데 짐이 살겠다고 자네를 버려서 그런 시련을 남기며 배신을 했으니, 입이 열 개라 한들 짐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지금 짐의 처지는 자네가 겪었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안다네. 이런 자네를 버렸기에 하늘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짐의 고통은 합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이는구만.”

안드레이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굵은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여기 와서 눈물을 흘릴 생각도, 마음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 몇 마디에 몇십 년간 굳어서 돌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흔들린 것이다.

헤르만 8세의 진심을 알게 되자, 이럴 것이라고 짐작하며 자신이 하고 있었던 오만한 추론들로 인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헤르만 8세를 마주 보며 예를 갖추었으면서도, 속으로는 선황의 유지를 잇기 위해 억지로 돌아온 것이라고 은연중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았던가.

그 사실이 너무나 창피했다.

알고 보니 헤르만 8세는 자신을 그리 보내며, 자신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아, 나는 말뿐이었구나. 스스로 주군을 주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단지 생각뿐이었던 모양이구나.’

자신은 지금까지 헤르만 8세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오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드레이는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겨우 내뱉은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폐하….”

“고맙네. 짐을 아직도 잊지 않고 찾아주어서.”

“그렇지 않사옵니다. 제 주군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오로지 폐하뿐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마음이 한결 놓이는구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헤르만 8세였다.

가슴이… 심장이 뛰었다. 그런 헤르만 8세를 보며 안드레이는 진심으로 다짐했다. 저 미소가 앞으로 지워지지 않게 하겠노라 말이다.

‘저를 믿어주신 은혜, 그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 드리고 보답하겠습니다.’

3

앤디는 자신의 경락을 타고 흐르는 기운을 느끼며 상큼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단전이 든든할 정도로 내력이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니 5시간은 훌쩍 넘은 듯했다. 앤디는 휴식을 취하고자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그렇게 1시간이 다시 흘렀다. 그럼에도 안드레이는 아직까지 기별이 없었다.

앤디는 심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상 수련을 할까 싶었지만, 안드레이가 언제 올지 몰랐기에 접어두었다.

“뭘 하는데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기별이라도 주든지.”

꼬로록!

배도 고파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저녁때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서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이이이

문이 열리고, 앤디의 머리가 빼꼼히 밖으로 드러났다. 넓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발 앞으로 내디디며 복도로 나섰다. 그리고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넓은 복도를 걸어가는데 심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흥미롭다고 해야 하나? 온갖 장식품과 미술품으로 가득한 복도는 하나의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을 떠나서 왕이 사는 궁전이라는 그 이유 하나로 흥미진진했다. 전생에 황궁에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추구하는 미와 그곳에서 추구하는 미의 차이점을 비교해보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그 긴 복도를 지나자 넓은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앤디는 태연하게 그 사이를 걸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앤디의 앞을 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누구냐?”

“아, 저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시종입니다.”

“시종이라고? 누구의 시종이란 말이지?”

앤디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눈치를 한번 살피고, 경비병들의 뒤쪽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응?”

경비병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차 싶었던 경비병들이 재빨리 시선을 돌려 시종이라던 소년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눈앞에 서 있던 그 소년이 사라진 후였다.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기척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경비병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곳은 왕이 살고 있는 왕궁이다. 헛것을 봤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비상벨을 다급히 울린 병사들이 사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기사 한 명이 남아 그곳에서 대기했다. 모여들 경비병과 기사단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 저 앞에 수십 명의 병사와 기사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소란이냐!”

헤르만 8세의 목소리에 문밖에서 근위 기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별일 아닙니다.”

“별일이 아니기에는 너무 소란이 크지 않느냐.”

근위 기사는 헤르만 8세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앞에 앉아 있는 안드레이를 슬쩍 보았다.

“괜찮느니라. 말해보아라.”

“지금 침입자가 들어왔습니다.”

“침입자?”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안드레이도 귀를 기울였다. 침입자가 왕실에 침투했다면 정말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어떤 자인가?”

“한 어린 시종의 모습을 한 소년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안드레이는 몸을 휘청거리고 말았다.

근위 기사가 그런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안드레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중심을 잘못 잡아서 그런 것이라는 어색한 시늉을 해 보였다.

미심쩍은 안드레이의 행동을 보며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헤르만 8세가 설명을 이어보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발견되었는가?”

“삼 층 중앙 로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겼는가?”

그사이에도 안드레이는 설마설마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 조금씩 상세한 설명이 나오자 할 말을 잃게 되었다. 그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창백하게 질린 안드레이의 안색을 살핀 헤르만 8세가 의아한 눈길을 던지자, 안드레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보았다.

앤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생각 없이 저지른 행동으로 인해 일이 커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궁전 안의 소란스러움을 밖에서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피해서 갈 걸, 하는 후회가 일었다. 처음부터 나오지 않았으면, 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앤디였다.

뭐, 이미 저지른 후니 어쩌겠느냔 말이다.

“에이, 뭐, 큰일이야 일어나겠어?”

시간이 지나가면 조용해지겠지, 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소란스러워졌지만, 앤디는 이미 신경을 끈 상태였다.

사람들이 눈을 까뒤집고 뛰어다니든 말든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살포시 노을을 머금고 저물어가는 하늘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은 정말이지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정원에 주저앉아 자신의 잘못도 잊고 경치를 구경하고 있던 앤디 옆으로 인기척이 났다.

“넌 뭐니?”

“응?”

옆을 돌아보니 많게 봐야 10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금발 머리카락에 통통한 볼이 매력적인 소녀였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지?”

“어떻게 들어오긴. 걸어서 들어왔지.”

“여긴 내 정원이야! 어서 나가!”

그녀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말했지만, 그럼에도 귀여울 따름이었다.

씩씩거리는 소녀를 향해 앤디는 부드러운 미소를 던지며 태연하게 말했다.

“네 정원이라고? 이 정원 정말 예쁘다. 내 마음에 쏙 들어.”

그러자 지금까지 까칠하게 날이 서 있던 소녀의 표정이 조심스레 밝아졌다.

“저, 정말?”

“응!”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칭찬하자 기분이 급상승한 것이다. 어떻게 들어왔냐고 따지던 사실도 잊고 자랑하기에 바빴다.

“여기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장소야. 매일 여기 나와서 책도 보고, 주스도 먹고, 과자도 먹고 그래. 이 꽃도, 저 꽃도 내가 심은 거야!”

이 넓은 화원에 꽃 몇 송이 심은 것 가지고 뿌듯해하는 소녀를 보며, 앤디는 감탄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와! 대단한데?”

“그치? 그치? 그치?”

“응, 정말 대단해.”

앤디의 칭찬에 소녀는 기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한껏 뿌듯해했다. 그리고는 앤디를 주시하며 말했다.

“너, 마음에 들었어. 앞으로 여기 놀러 와도 좋아. 너에게만 특별히 허락해주는 거야. 아무한테도 허락해주지 않았다구.”

‘허락해주지 않았는데도 막 들어오긴 하지만….’이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하는 소녀였다.

앤디가 대답해주었다.

“고마워.”

앤디의 대답에 소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너, 내가 누군 줄 아니?”

“아니, 모르는데?”

“난 공주야.”

“아, 그래?”

“아, 그래? 그게 끝이야?”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에게 존대를 해야 할 것 아냐.”

그 말에 앤디가 미소 지으며 소녀의 눈을 마주 보고 말했다.

“왜?”

순간, 소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가볍게 상기되었다.

“난 공주니까.”

“내가 존대해줬으면 좋겠어?”

소녀는 왠지 모르게 망설여졌다. 그리고 한참 고민 끝에 대답했다.

“…아니.”

“그럼 됐잖아. 그런데 공주 넌 몇 살이니?”

“나? 열두 살.”

“나는 이백열두 살이야.”

그 말에 소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치! 그런 게 어딨어!”

“정말인데.”

앤디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소녀가 킥킥킥! 하고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나 앤디가 지금 말한 나이가 단지 거짓은 아니라는 사실을 소녀가 알 리 없었다.

앤디가 다시 질문했다.

“이름이 뭐야?”

“나? 레오나. 너는?”

“앤디.”

그때, 저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오나 공주님!”

“헉! 유모다!”

“왜 그래?”

“나 몰래 나왔거든. 공부하기 싫어서. 잡히면 분명 혼날 거야.”

레오나 공주가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디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래. 어서 가봐.”

그러자 레오나 공주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일도 나올 거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순간, 어째서인지 레오나 공주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앤디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내일 보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오나 공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꼭이야.”

“그래.”

레오나 공주는 배시시 웃더니, 유모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리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뒤뚱거리며 사라지는 레오나 공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앤디가 하늘로 시선을 돌리더니 나직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나도 슬슬 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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