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6화 (6/68)

제6장. 심연의 눈

1

셀린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목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분명 나쁜 짓이니 말이다. 만일 자신의 행동에 합리화를 부여하게 되면 그때부터 자신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와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셀린은 스스로 각오했다. 언젠가 자신이 저지른 죗값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훗날 어떤 결과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 죗값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그날 이후에 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조금 전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졌던 원초적인 폭력을 목격한 이후로, 자신은 생각보다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셀린은 앞서 걸어 나가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소년은 그런 셀린의 눈빛을 느꼈음인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셀린은 그런 순진무구한 소년의 얼굴을 마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금 전 쓰러진 놈들을 다시 깨워서 악착같이 밟아나가던 그 모습과,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 귀여운 소년의 얼굴은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정체가 뭘까?’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 자신이 이 아이의 뒤를 따라가는 이유가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안드레이는 정보원에게 받은 자료를 두 번이나 꼼꼼하게 살피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급성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과 피로가 몰려왔다.

이 자료대로라면 왕국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이 좁은 왕국도 갈라먹을 것이 있는지 귀족들이 파벌을 나눠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는데, 그 사이에 끼인 늙은 자신의 주군은 아무런 힘없이 풍랑에 휘말린 부표와도 같은 신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왕국에 있을 때 그 단단한 반석과도 같았던 왕이 힘을 잃고 표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선황과 자신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이 저 돼지들의 배와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식량 창고로 전락한 것이 너“쿠렌트….”

안드레이의 가슴에 분노가 가득히 들어찼다.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이 쿠렌트 제국 때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사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쿠렌트 제국이 이 상황을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약해진 조국을 등지고 쿠렌트 제국에 잘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노는 분노일 뿐. 싸늘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안드레이는 다시 헤르만 왕국을 원상 복귀하는 방법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앤디가 들어왔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언제 인상을 쓰고 있었냐는 듯 웃는 낯으로 앤디를 반겼다.

“지금 왔느냐? 이렇게 늦게 들어오다니, 재밌게 놀다 온 모양이구나.”

“예, 생각보다 즐거웠어요.”

“다행이구나.”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문밖으로 돌렸다.

“그런데 왜 문을 닫지 않고 있는 거냐?”

안드레이의 시선을 따라 앤디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스윽 하는 인기척과 동시에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이었다.

앤디는 셀린을 보고 다시 안드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드레이도 셀린을 보고 앤디를 보았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앤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냥 길 가다가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해줬는데 따라오더라구요.’라고 말하기에는 설명이 너무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부가적인 설명을 하기가 귀찮았다. 그냥 이야기하지 않으면 어련히 알아서 생각하지 않겠는가.

앤디의 예상은 적중했다. 안드레이의 눈치는 일반적 상식을 초월했던 것이다.

‘뭐, 그냥 길 가다가 위기에 처한 여인을 구해줬는데 따라오더라구요,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군. 설명하기 귀찮아서 입을 다문 건가?’

곧 셀린이 조심스럽게 들어서서 안드레이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셀린이라고 해요.”

“어서 오시게.”

셀린은 안드레이를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던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앤디에게 통하지 않았던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 순간, 셀린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자신과 눈이 마주친 안드레이의 눈빛이 호감을 띠는 것이 아닌 호기심으로 물들었던 것이다.

“호오?”

안드레이가 자신의 턱을 쓸며 앤디에게 물었다.

“이 아가씨를 어디서 만났다고?”

“그런 이야기 한 적 없는데요?”

“그럼 처음부터 물어봐야겠군. 이 아가씨를 어디서 만났느냐?”

앤디는 후회했다. 그냥 순순히 대답했으면 이렇게 상세하게 파고들어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길 가다가 위기에 처해 있어 보여서 구해줬어요.”

“그놈들이 어떤 놈들이었지?”

“나쁜 놈들이었어요.”

“얼마나?”

앤디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다.

“흠… 독이 올라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저 숙녀 분께 당하고 보복하려던 상황이었나 보군.”

둘의 장난스러운 만담과도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셀린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앤디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안드레이의 날카로운 직관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분명히 그런 상황이었어요.”

“저 여린 여인이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녀석들을 독이 오를 정도로 엿을 먹였을까.”

안드레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셀린을 바라보았다. 셀린은 가슴이 덜컥거리며 두려움이 밀려왔다. 자신의 기운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또 만난 것이다.

“제,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저를 희롱하려고….”

셀린의 변명에 안드레이가 히죽 웃었다. 마치 알 거 다 알았다는 듯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하긴 예쁜 게 죄라오. 그런 외모로 밤늦게 돌아다녔으니 희롱을 당하는 거지. 옷차림에도 약간 문제가 있고 말이오.”

셀린이 안드레이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난 가슴골을 손으로 가렸다.

안드레이는 천연덕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밤도 늦었고, 마땅히 갈 곳이 없다면 이곳에서 쉬시구려. 갈 곳이 있다 해도 거리가 멀다면 저녁은 위험할 것이니 말이오.”

그 말에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앤디의 뒤를 따라온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혼자서 무사하게 귀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 밖은 위험했다. 다른 무리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때, 눈에 들어온 앤디의 작은 등이 어째서인지 자신의 앞을 막아주는 든든한 방패막처럼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앤디는 자신이 뒤를 따르는 것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었다.

셀린이 고개를 숙여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어르신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허허! 인지상정이라 하지 않나. 그럼 쉬고 계시게. 나는 잠시 밖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서 말이지. 그리고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게. 만일 누군가 우리의 허락 없이 이곳에 침범한다면 그 대가로 목숨을 잃을 테니 말이네.”

웃으면서 하는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날카롭게 반짝이는 안드레이의 눈빛은 지금 이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안드레이의 존재감에 압도당한 셀린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앞에 있던 침대에 몸을 누였다. 어째서인지 심신이 가누지 못할 정도로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안드레이와 앤디가 밖으로 나섰다.

2

“그렇다고 그렇게 마나를 이용해서 심령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잖아요.”

앤디의 날카로운 말에 안드레이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

앤디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낮도깨비 같은 녀석.”

“왜요?”

“너를 보면 이 대륙의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제가 사람이 아니면 뭐로 보이시나요?”

“마치 우주 저편 어딘가에서 온 성인이 아닐까 싶다.”

앤디가 피식 웃었다. 안드레이의 말이 어떻게 보면 전혀 틀린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슬쩍 고개를 들고 별을 바라보았다.

안드레이는 앤디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모습에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앤디를 닦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작은 신경전으로 앤디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도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아는바 앤디가 먼저 물어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쩝!’

입안이 썼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안드레이가 입을 열었다.

“저 아이, 재밌는 아이더구나.”

“뭐가 재밌으셨나요.”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는 앤디를 보며 안드레이가 대답해주었다.

“저 아이의 눈 말이다.”

“눈이 어쨌는데요?”

“정말 전혀 모른단 말이냐?”

“저는 모르겠는데요?”

“모르는 녀석이 마음의 문이 아직도 닫혀 있어?”

앤디가 입맛을 다셨다.

“그게 보여요?”

“눈을 보면 다 보인다.”

앤디가 자조 어린 말을 내뱉었다.

“아직 멀었구나.”

“뭐가 멀었단 말이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은 안드레이가 자신보다 몇 수 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신이 그보다 고수라면 그런 흔적 따위가 드러날 리 없었다.

강하다, 약하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로 배운 공부가 전혀 다른 것이지만 만류귀종이라 했다. 시작점이 다른 것이지, 가는 길까지 다른 것은 아니란 말이다.

순수하게 그가 지금 올라 있는 공부의 수준이 자신보다 높을 뿐이란 말이다.

앤디 역시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니 말이다.

그런 앤디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안드레이가 말문을 열었다.

“심연의 눈을 지니고 있더구나.”

“심연의 눈이요?”

앤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안술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심연의 눈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심안술은 사람을 홀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술을 연마한 것이라면, 심연의 눈은 작위적이나 타의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기운. 한마디로 타고났다는 말이었다.

심안술이 억지로 타인의 마음을 흔드는 것과 달리, 심연의 눈의 능력은 굳게 닫혀 있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뿐이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사람은 순수해진다. 그 순수함으로 인해 곧이곧대로 눈앞의 사람을 믿게 되는 것이다.

‘내가 괜한 오해를 했던 것이구나.’

불순한 마음으로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 능력을 익힌 게 아니라는 사실 하나를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어째서인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앤디였다.

“그런데 어째서 심령을 흔들어 재운 것이죠?”

“저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심연의 눈을 가졌다는 사실이 말인가요?”

“물론이다.”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데 재웠는데요?”

“내가 저 아이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다.”

“어떤 도움 말입니까?”

“왕궁에 불순한 자들이 있다. 그들을 구분해내는 데 심연의 눈만 한 것이 없지.”

앤디 역시 그 말에 수긍했다.

“그런데 저 여인은 자신이 심연의 눈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요?”

“아마도 모를 것이다. 자신에게 사람을 유혹하는 어떤 마력 따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심연의 눈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은 많지 않거든. 아마 십중팔구 저 여인은 살기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면서 여인의 매력을 살리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그대로 행동했을 뿐일 거다.”

“저런 야시시한 옷을 입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란 말이군요.”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남자가 가장 순수에 가까워질 때는 성욕이 발휘되었을 때이니 말이다. 성욕이 발휘된 남자는 목적이 단순해지니 이용해먹기 좋지.”

“어떻게 아셨나요?”

“조금 전 우리가 심연의 눈에 당하지 않자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느냐. 그것만 봐도 저 여인의 본질 또한 어떠한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지.”

“아아….”

“….”

앤디가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다.

“정말 어르신의 말마따나 그런 식으로 힘을 사용하며 살았다면 놈들에게 마녀라는 소리를 들을 만도 할 테지….”

“뭐라고?”

“아, 아니에요. 저 여인이 안타깝다고요.”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안타깝게도 저 여인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큰 능력을 썩히고 있었던 것이지. 그래도 저 능력이라면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껏 남자들을 등쳐먹고 살았을 테니 말이다.”

“그 말을 어떻게 확신하시죠?”

“나를 보자마자 심연의 눈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짐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몰랐던 게지. 깊은 수련을 통해 자신의 절제가 가능할 정도의 위인은 어설픈 심연의 눈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말이지 안드레이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뼈가 있었다. 너무나도 정확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속이라도 읽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앤디는 그의 입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올 때마다 놀람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대체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단 말인가.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우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애매했다.

“그럼 심연의 눈은 여인에게는 효과가 없는 것인가요?”

“물론 효과가 있다. 심연의 눈이란 남녀를 떠나 인간의 마음을 열고, 순수하게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옷이 저래서야 불가능하지. 일부러 남자를 이용하기 위해 도발하여 이득을 보려고 저렇게 입은 것일 테니 말이다. 여자가 여자를 보고 흥분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이지…. 그건 그렇고….”

스윽

“내가 어린 너와 무슨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건 그렇고, 심연의 눈에 걸리지 않은 것을 보니 네 녀석의 심지도 누가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튼튼하다는 말이겠지?”

안드레이가 마치 자신의 속을 읽겠다는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자, 앤디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순수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음 지었다.

“여하튼 저 여인은 복 받은 거다.”

“어째서요?”

“나 같은 훌륭한 존재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화자찬은 조금 아니지 않나요.”

“흥! 능력이 있으면 그래도 돼.”

“친구 없으셨죠?”

움찔.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저 아이에게도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전 수석 궁중 마법사이자, 칠 클래스 마스터이자, 팔 클래스 익스퍼트 마법사 제자가 되는 것은 말이다.”

마치 당장이라도 셀린이 자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확답을 들은 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말에 앤디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이가 당당하게 저리 말할 만한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중원에서는 이것을 그리 말할 것이다. 기연이라고.

“그런데 심연의 눈을 사람들에게 사용한다고 하셨잖아요. 심연의 눈을 다른 이들이 알아보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그런 걱정할 필요 없다.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심연의 눈이라는 것에 대한 존재 자체를 아는 이가 거의 전무할 것이다. 나이기 때문에 알아본 것이지, 다른 동태 눈깔들이 알아볼 리 만무하다.”

“확신하십니까?”

“물론이지. 확신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드레이였다. 그는 다시 시선을 앤디를 향해 쓰윽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너는 심연의 눈을 어찌 아느냐?”

“….”

그에 앤디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드레이 역시 그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3

날이 밝자 여관 주인이 예복을 가져왔다. 주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예복을 넘겨주었다. 이토록 고급스러운 옷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위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옷이었다.

제대로 옷을 전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주인이었다.

“수고했소.”

“아, 아닙니다요, 나으리.”

어제와 달리 여관 주인의 허리가 깊이 숙여졌다.

옷을 보면 직위를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눈앞의 노인이 결코 호락호락한 직위를 지닌 사람이 아님을 짐작하게 된 탓이다.

“그만 가보시오.”

쩔쩔매던 여관 주인이 그제야 반응했다.

“아, 예예.”

앤디가 방 밖으로 나선 여관 주인을 보며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저 사람 왜 저래요? 어제하고 전혀 반응이 다른데요?”

“글쎄다. 옷이 뭐라고 한마디 했나 보지.”

안드레이의 말에 앤디가 피식 웃었다.

그때 셀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응….”

기지개를 마친 그녀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안드레이가 말을 걸었다.

“잘 잤소?”

셀린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다가, 안드레이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듯 대답했다.

“덕분에 편안하게 쉬었습니다.”

“다행이군. 여기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차 좀 들겠소?”

곧 셀린은 안드레이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마셨다.

“향이 좋네요.”

“걱정했는데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군.”

앤디는 둘이 대화 나누는 사이, 남아 있던 한 자리에 앉았다.

셀린이 그런 그를 보며 부드러운 인사를 던졌다.

“도와줘서 고마워.”

“뭘요. 당연한 일을 한 건데요.”

자신을 향해 쑥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는 순진무구한 앤디의 얼굴은 영락없는 소년 그 자체였다. 어제 자신이 봤던 그 모습들이 꿈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일 정도였다.

그러나 셀린은 바보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꿈이었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 있을 일이 없었을 것이니까.

안드레이가 말했다.

“이곳에서 사시오?”

“네, 지금은 그렇지요.”

“과거에는 아니었다는 말인 듯하구려. 뭐,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혹시 마법을 배워볼 생각이 있소?”

“예? 그게 무슨….”

셀린이 의아한 눈빛으로 안드레이와 앤디를 바라보았다.

앤디는 자신의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답답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마치 무슨 말을 저렇게 하냐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면에 안드레이는 당연히 내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야, 라는 듯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셀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상황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어나자마자 생각의 정돈을 할 여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은 이야기였다.

“제게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셀린이 머뭇거리며 대답하고는 어색함에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벽에 걸려 있는 옷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썰미가 있는 셀린이 황실 예복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실과 관련된 사람들? 귀족?’

뭐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었다.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황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니….

옷의 재질과 형태만으로도 고위 귀족에 속해 있는 자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귀족….’

셀린의 가슴속에서 분노가 슬금슬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귀족에 대한 적개심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반발심 그 이상의 것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도 귀족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모든 귀족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 귀족들은 모두 똑같았다.

귀족은 싫다. 경멸한다. 귀족과 엮여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셀린에게 귀족이란 언젠가 복수를 해야만 하는 상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귀족을 이용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동네 양아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적대감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다. 셀린은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았다.

싫은 자일수록 더욱 웃는다. 그게 바로 셀린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둘은 귀족이다. 부드럽게 걸쳐 있던 셀린의 미소가 짙어졌다. 가슴은 뜨겁되 머리는 차게 해야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다.

안드레이는 셀린이 지어 보이는 그 미소를 보며 생각, 아니 착각했다. 생각보다 일이 더 잘 풀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설마 마법에 관심이 없소?”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마법에 관심이 없다면 거짓이겠지요. 그런데 어째서 그런 질문을 던지시는 거죠? 정말로 저에게 마법을 가르치시겠다는 건가요?”

“당연하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런 말을 꺼내고 있겠소.”

“누가 저를 가르치신단 거죠?”

“당연히 나요. 이래 봬도 7서클을 마스터 한 8서클 익스퍼트의 마도사라오.”

왠지 안드레이의 콧대가 높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셀린은 날카롭게 변한 눈매로 안드레이를 주시하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후후! 저를 놀리시나요?”

“놀리다니, 누가 놀린단 말이오?”

“제가 아무리 모자라도 그런 뻔한 속임수에 속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요.”

안드레이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단도직입적으로 다가선 것은 실책이었다. 무작정 좋은 이야기는 피했어야 했던 것이다.

셀린을 살펴본바 그녀는 달고 쓴 맛을 다 보며 살아온 것이 확실한 여인이다. 좋은 말을 해도 걸러서 듣는 것이 생활이 된 여인이란 말이다.

사내라는 인간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달짝지근한 말과 칭찬, 그리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퍼부었을 것이다.

또한 가장 많이 들었을 말이 ‘못 믿어도 상관없지만 이건 진심이다.’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자신의 말도 왜곡해서 들을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셀린의 표정을 보건대, 자신이 어떤 대가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속임수가 아니라오.”

“그렇다면 어째서 초면의 여인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을 하신 거죠? 그런 분들을 많이 봐왔어요. 저에게 뭔가 원하시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요.”

“뭐, 없다면 거짓이겠지.”

안드레이는 솔직했다.

“뭘 원하시는 거죠? 제 몸? 마법사들이 여인들을 가지고 성적 유흥, 혹은 실험 도구로 쓴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어요. 마법사님께서도 지금 저를 그런 목적으로 원하고 계신 건가요?”

식은땀이 나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자신의 이야기가 저렇게 꼬여서 셀린의 귀에 들어갔는지 답답할 따름이었다.

안드레이는 쩔쩔매며 대답했다.

“그, 그건 사람들이 지어서 하는 이야기들일 뿐이오.”

“그렇다면 뭐죠? 저는 더 이상 귀족들의 노리개 같은 것은 되고 싶지 않네요.”

“지금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해요. 그런 식의 생각은 하지 않고 있소.”

“그 말을 어떻게 믿죠? 마법이라는 것은 재능이 중요하다고 알고 있어요. 아무에게나 가르친다고 배울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앤디는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곤란해하고 있음이 분명한 안드레이와 차가워진 분위기의 셀린을 번갈아 보며 흥미진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안드레이는 힐끔 앤디를 쳐다보았다.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앤디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차를 마실 뿐이었다.

결국 안드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바로 그 재능 때문에 관심을 보인 것이오.”

“재능이라고요? 훗! 무슨 재능 말이죠?”

안드레이는 나직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 눈.”

흠칫!

셀린이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한참 후, 그녀가 대답했다.

“제 눈이 어떻다는 말인가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과 다르게 말투나 목소리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안드레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나 짐작했던 것처럼 보통이 아니었다. 그게 더욱 마음에 들었다. 너무나도 말이다.

“그렇게 봐도 나에겐 그 눈빛이 통하지 않는다오. 정심한 수련을 하여 어느 단계에 오른 이에겐 통하지 않으니 말이오.”

그제야 날카롭게 서 있던 셀린의 목소리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제 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 거죠?”

“아마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아니지, 대륙에 있는 그 어떤 이보다 많이, 더욱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소.”

셀린이 갈등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처음으로 자신의 속을 겉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저에게 이 눈의 비밀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나에게 마법을 배운다면 얼마든지.”

셀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 다시 눈을 떴는데, 극심한 피로가 느껴질 정도로 충혈된 눈이 드러났다. 지금 이 한순간의 갈등이 준 스트레스가 작지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짧은 순간동안 그녀가 느낀 시간은 안드레이가 예의주시 바라보고 있던 시간과 괘를 달리했음이다.

셀린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뭐,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 역시 싫다는 사람 억지로 잡고 제자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으니까.”

안드레이는 그 말 그대로 셀린에 대한 모든 미련을 털어버린 표정으로 차를 들어서 잔을 비웠다.

셀린은 다시 갈등 어린 시선으로 안드레이와 앤디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소.”

“잘 가요.”

안드레이와 앤디의 인사를 뒤로하고 셀린이 문밖으로 나섰다.

그때, 안드레이가 한마디 덧붙였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나를 찾으시구려.”

셀린이 주춤하다가 대답했다.

“안녕히….”

뭔가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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