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안드레이
1
헤르만 왕국을 품에 두른 듯한 바론 산맥. 동북으로 수천 킬로미터나 뻗어나간 험준한 산이다. 몬스터들의 출몰 지역으로 위험하다고 알려져 있는 파랜스 산도 거대한 바론 산맥의 작은 줄기에 불과했다.
어느덧 무더위가 끝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푸름으로 가득하던 바론 산맥이 단풍으로 물들어, 불이라도 일고 있는 듯한 화려함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 바론 산맥의 깊은 산중.
무성한 숲을 지나고 넘어, 인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그곳에 작은 오두막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옆을 거대한 덩치의 미노타우르스가 쿵쿵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크릉? 푸릉! 푸릉!
잠시 오두막 근처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녀석이 이내 발걸음을 돌려서 떠나갔다. 녀석의 눈에 오두막은 거대한 바위로 보일 뿐이었던 것이다.
오두막 안은 창을 통해 밝은 햇살이 떨어져 내려 고요하기 그지없는 방 안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방의 벽면에는 엄청난 수의 책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창가 쪽에 놓여 있는 책상 앞에서 한 노인이 책을 읽고 있었다. 티끌 하나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순백의 로브를 입은 노인이었다.
진중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던 노인이 곧 책을 덮었다. 머릿속에 책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피로로 물들어버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윽고 눈을 뜨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20년 전.
쿠렌트 제국의 정복 전쟁에 패퇴하자, 모든 신료들은 희생양으로 당시 황실 마법사였던 노인을 택했다. 자신들에게 책임이 내려오기 전에 누군가에게 잘못을 전가하긴 해야 하는데, 마땅찮은 사람이 없었다. 지휘관들이 모두 전장에서 죽은 탓이다.
그 결과가 안드레이였고, 모두가 입을 모아 상소를 했다.
“폐하! 안드레이 경이 작전만 똑바로 짰다면 우리가 이토록 패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폐하! 나라를 이끌어나가야 할 아까운 인재들의 죽음은 또 어찌할 것입니까!”
“….”
사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안드레이가 앞서서 나섰기에 최악의 상황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말을 입에 담지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싸잡혀서 같이 묻힐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패하고 왕성으로 복귀하는 안드레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시밭길이었다.
그때 왕은 신료들의 추궁에서 안드레이를 구하기 위해 한 가지 선택을 했다. 전장에서 입은 깊은 상처로 인해 오는 와중에 숨을 거뒀다고 공표한 것이다.
“폐하, 신의 목숨은 아깝지 않사옵니다. 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어찌 그런 망발을 하시오! 경의 목숨은 경의 것이 아니오! 이 모든 것이 쿠렌트 제국의 음모임을 경은 정말 모른단 말이오!”
사실이 그러했다. 쿠렌트 제국에서 미운 가시로 낙인찍힌 안드레이의 목숨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나라로 송환하여 사형을 시키고자 했으나, 그게 쉽지 않게 되자 헤르만 왕국의 신료들을 흔들어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폐하….”
“보중하시오! 그리고 차후에 나라를 위해 다시 일해주시오! 그게 바로 경이 말한 죄를 갚는 방법이오!”
그렇게 안드레이는 은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왕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 모든 일이 정리가 되었으니, ‘가능하면 빨리’ 왕궁으로 돌아와 달라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말이다. 하지만 막상 들으니 마음이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모든 일이 정리가 되었다는 말이 걸렸다.
무슨 일이 어떻게 정리가 되었다는 말인가?
일이 잘되었다면 잘된 것이지, ‘가능하면 빨리’라는 수식어는 왜 붙은 것인가.
주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것에 대한 도움 요청을 이런 식으로 돌려서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뭔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고 말이다.
우선 헤르미아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 대륙에 이상한 징조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안드레이는 몬스터들의 움직임에 주시했다. 마치 누군가의 지시로 움직이는 듯한 획일한 움직임이 포착된 탓이다.
그것을 알아보는 와중에 호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이 일은 차후로 미루는 수밖에….”
안드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로브를 벗은 후 그동안 봉인해두었던 순백의 로브를 걸쳤다.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았지만….
2
앤디의 상식을 초월하는 무력을 확인한 아이들. 모두가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앤디는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뿌듯한 무엇인가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래그래. 이 느낌이야.’
한마디로 우월감. 누구보다 뛰어나기에 받을 수 있는 특별한 감각.
앤디는 더욱더 그 눈빛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감춰야 했다. 낮춰야 했다. 스스로 낮춰야 더 올라갈 수 있음을 전생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드러내 보여야 했다.
이 감정을 느끼기 위해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힘을 감춰오지 않았던가.
아쉽지만 지금 이 기분을 맛본 것으로 족했다.
오랜 고심 끝에 다음을 기약하기로 마음먹은 앤디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를 어른들에게는 비밀로 해줘.”
“어째서?”
“대장이 강한 것을 알면 어른들이 더 좋아할 것 아냐.”
아이들의 대답에 앤디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밴트가 나름 짐작한 표정으로 앤디를 보다가,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알았어. 모두 대장 말 잘 들었지?”
“왜 그래? 밴트, 어째서 숨겨야 하는데?”
“생각을 해봐. 우리가 떠들어봐야 어른들이 믿을 것 같아?”
“하지만 사실이잖아.”
“사실이긴 하지만, 대장이 번거로워질 거라고. 그렇지 않겠어?”
그 말에 아이들이 수긍하기 시작했다.
“하긴….”
“알았어, 대장. 대장 말대로 비밀 꼭 지킬게.”
“걱정하지 마. 우리들은 입이 무겁다구.”
밴트가 말했다.
“이건 우리들만의 비밀이야. 모두 꼭 지켜야 해. 누구 하나라도 이 사실을 발설할 시, 더 이상 우리들의 친구가 아니게 되는 거야. 알겠지!”
끄덕끄덕.
마을에 도착한 아이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이 생긴 탓이다.
다시 생활은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약초를 캐고, 재배와 사냥을 했다.
앤디 역시 자신의 부모를 따라 자식으로서 충실했다.
그사이에도 앤디의 능력은 일신우일신하며, 발전의 발전을 거듭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날이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유지될 것 같았다.
“몬스터다! 몬스터가 몰려온다!”
땡땡땡땡!
마을의 첨탑에 올려져 있는 비상종이 미친 듯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근래 한 번도 울린 적이 없던 놈인지라 종소리가 들리자 마을 사람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정신없이 손에 익은 무기를 들고 자신의 일터에서 벗어났다.
순식간에 62명의 마을의 사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어느 지점을 주시했다. 청년에서 노인까지 아이들을 제외한 남자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저 멀리 이곳을 향해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는 오크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모두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오크 무리를 주시했다.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아무리 못해도 족히 1백여 마리는 되어 보이는 대군단이었다.
그들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사내들은 자신의 손에 익은 무기들을 꼬나 쥐었다.
사냥을 주업으로 하는 대부분의 사내들은 활을 들고 오크들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거리가 멀었음에도 재어놓은 화살을 풀지 않았다. 언제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방어책이 형성되자 촌장이 뒤에 자리하고 있던 사냥꾼 켄스에게 말했다.
“우리 중 가장 다리가 빠른 자네가 아랫마을로 가서 몬스터가 몰려온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을 다해 아랫마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집안에 숨긴 후 스스로를 보호할 무기를 찾아 들었다. 그들의 눈치를 보니 여차하면 밖으로 나서서 남편들과 함께 싸울 기세였다.
아이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란다. 금방 끝날 거야. 엄마가 와서 나오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 그곳에서 나오면 안 된다. 알겠지?”
“아, 알았어요, 엄마.”
아이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의 어머니도 다른 어머니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앤디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에서 꼼짝하지 말거라. 알겠니?”
앤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보였던 예의 바른 아들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서슬 퍼런 어머니의 음성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앤디는 자신의 신경을 밖으로 쏟으며 기운을 살폈다. 그리고 동시에 진기를 끌어올렸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어른들의 손에서 끝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자신 역시 힘이 되어야 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숨겨 온 것들이 드러난다 해도 세상에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단전에서 이끌어 올라온 4성의 유운신공의 기운이 전신 경락으로 퍼져 나갔다. 가득히 들어차는 진기가 앤디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앤디의 눈 깊은 곳에서 금광이 번뜩였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들은 내 사람들이다. 미물 따위에게 내 사람들을 잃을 수 없다. 결코 그들의 침입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사이에도 몬스터들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촌장이 말했다.
“십팔 년 만인가? 몬스터들이 우리 마을을 습격할 줄이야.”
“그때보다 놈들의 수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수선한 시기라 치안이 좋지 못해 간간이 몬스터들이 출몰하곤 했었지.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몬스터들에 대한 대규모 토벌전을 벌이고 치안을 바로잡은 이후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촌장님은 뒤로 물러나시지요.”
한 젊은 청년의 말에 촌장이 코웃음을 쳤다.
“흥! 자네, 나를 물로 보는 건가? 내 수염이 세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근력까지 쇄한 것은 아니라네. 아직 현역이라고.”
촌장이 뼈만 보이는 팔뚝을 걷어 알통을 만들자, 볼록하고 메추리알만 한 알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보며 모두 하하! 하고 웃었다.
그때, 앤디의 아버지 벤존스가 촌장에게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농을 던졌다.
“이제는 적당히 은퇴하십시오. 밤마다 시달리는 사모님의 소리에 제가 얼마나 와이프 앞에서 풀이 죽는 줄 아십니까?”
“흠흠! 앞으로 내 적당히 하도록 하겠네. 한데 어쩌겠는가. 내 와이프를 볼 때마다 녀석이 성을 내는 것을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촌장의 너스레에 다시 사람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보다 더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와하하하하!”
그 덕에 전투를 앞에 두고 마을 사람들의 긴장이 적당히 풀어졌다. 처음 접하는 대규모 전투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이들의 몸이 조금 유해진 것이다.
집 안에서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여인네들의 입가에서도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촌장의 안방마님 얼굴에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홍조가 내려앉고 말았다.
“이이는….”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저 앞에서 오크 무리가 우뚝 멈춰 섰다.
마을 사내들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려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가시거리 앞에 멈춰 선 상대방을 주시하던 촌장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사냥용 활을 들고 있던 40명의 사내들이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기다렸다. 아직 녀석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오크들이 킁킁거리며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돌격을 시도했다.
꾸익꾸익!
꿰이이이이익!
멱따는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오크들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녀석들이 가까워질수록 전신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 하나 화살을 쏘지 않았다. 촌장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80미터… 70미터… 50미터를 지나 40미터.
“지금이다!”
촌장의 목소리가 터지기 무섭게 화살이 허공을 날아갔다. 마지막 ‘다’라는 말을 듣고 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푸슈슈슈슈슛!
수십 개의 화살이 하늘을 장악했다.
퍼퍼퍼퍼퍽!
꾸익!
꾸이이이익!
화살이 오크들의 몸을 강타하며 틀어박혔다. 하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오크는 불과 5마리밖에 되지 못했다. 3마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나머지 둘은 쓰러졌다.
화살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다른 여러 오크들은 눈을 뒤집어 까고 달려들었다. 아픔이 분노가 된 것이다.
벌써부터 상처를 입은 오크들이 잇몸까지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크와아앙!
그리고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들을 거침없이 뽑아내거나 부러트렸다.
“징그러운 새끼들.”
한 사내가 자신의 심정을 나직하게 씹어 내뱉었다.
이어, 다시 재어놓은 화살이 시위를 튕기며 날아갔다. 이번에는 5마리의 오크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10여 미터가 남았을 무렵, 활을 재빨리 바닥에 던지고는 동료들이 건네주는 창과 곡괭이를 들었다.
무기를 고쳐들었을 무렵 접전이 시작되었다.
차창! 챙!
푸부부북!
“내, 내 팔!”
꾸위이익!
몇 분도 아니었다. 접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아악!”
오크들은 거침없이 자신들을 막아서고 있는 사내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전투력은 일반 평민들이 감당하기 힘들다. 하물며 머릿수에서 이미 2배가량 밀리고 있지 않는가.
뛰어난 전투 능력으로 벌써 3마리의 오크를 눕힌 벤존스가 이를 악물며 욕을 내뱉었다.
“제기랄! 끝이 없군.”
주민들 중 가장 뛰어난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는 벤존스의 도끼는 정말이지 무섭게 휘몰아쳤다. 오크들이 감히 다가서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신음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동료들이 보인 탓이다.
“카알! 스미스!”
벤존스의 목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 명이라도 구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도끼를 휘두르다 보니 정확도까지 줄어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 맞서고 있는 상대 외의 존재를 주시하며 서두르다보니 손과 발이 헛돌았다.
또한 질퍽일 정도로 흐르거나 고여 있는 핏물들이 흘리는 비린내에 후각이 마비될 정도였다.
그때, 결국 갑자기 튀어나온 오크가 휘두른 글레이브에 왼쪽 팔이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크악!”
벤존스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도끼는 거침없이 휘둘러지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오크의 목을 그대로 틀어박았다.
뀌이이익!
목에서 도끼를 뽑자 오크의 뜨거운 피가 강한 심장의 펌프질로 인해 세상 밖으로 거침없이 뿜어졌다.
푸슈슈슈슉!
그렇게 여섯 번째 오크를 잡아낼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벤존스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왼쪽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흘린 피, 그리고 잦은 호흡으로 인해 현기증이 몰려왔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풀렸다. 그럼에도 벤존스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바로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 사람들 절반 정도가 바닥에 쓰러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곳곳에 여인들의 시체도 보였다. 몇몇 담이 큰 여인들도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슬픔보다 분노가 컸던 탓이다.
다시 동료를 유린하고 있는 오크 떼의 사이로 달려들었다.
바로 이곳이 지옥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이곳이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머릿속이 멍하고, 주위에서 들리는 소음이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헉헉헉!”
숨이 턱까지 차오른 사냥꾼 켄스.
전신이 흙투성이에 이곳저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달리다가 넘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결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 앞에 아랫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조금만 더!’
켄스는 어금니를 강하게 깨물며 슬픔을 억누르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창창창! 챙챙!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리는 무기들의 충돌음, 그리고 비명.
그것은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사, 살려….”
오크들의 글레이브에 하반신이 찢겨져 나간 젊은이가 나직하게 흘린 신음 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자신을 도와줄 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혈육과 같았던 주민들 모두가 하나같이 오크 무리에 유린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길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저 앞에 지금까지 용케 버티고 있던 촌장이 위기에 처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달려가는 것은 고사하고 일어설 다리가 없었다.
가슴이 먹먹하고 비참했다. 젊은이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죽음의 공포와 절망감에 빠진 젊은이의 눈빛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여보….’
털썩.
결국 젊은이는 누군가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에 그대로 얼굴을 박고 숨을 거뒀다.
바로 그 순간…
타다닷!
거침없이 바닥을 두드리는 굉음이 울렸다. 하지만 그 굉음에 신경 쓰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확하게는 신경을 쓸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때, 작은 신형이 허공으로 달궈진 프라이팬 위의 작은 콩처럼 튀어 올랐다. 그리고 지금 막 쓰러져서 팔을 뒤로 뻗어 바닥을 딛고 있던 촌장을 향해 녹슬어 있는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 오크의 안면 한가운데를 정확히 발로 가격했다.
뻐어어억!
얼마나 강력한 차기였는지, 전투로 인해 소란스러운 마을 한복판을 쩌렁쩌렁 울렸다.
꾸에에에엑!
두개골이 함몰된 오크가 최후의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소리가 워낙 요란했던 탓일까. 모든 오크들의 시선이 굉음의 중심지로 쏠렸다.
위급한 전투 중이었던 마을 주민들의 시선도 자연히 그곳을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중심에 분노 어린 표정으로 오크들을 쏘아보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촌장은 입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아이의 이름을 놀라운 목소리로 흘려보냈다.
“애, 앤디?”
전장의 중심에 모습을 드러낸 소년의 이름은 바로 앤디였다.
3
“앤디!”
뒤늦게 자신의 자식을 보게 된 벤존스가 목이 터져라 아들의 이름을 외쳤다.
앤디가 그 목소리를 듣고 벤존스를 향해 슬쩍 시선을 줬다가, 바닥을 박차고 다시 튀어 올랐다.
벤존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시선을 마주친 짧은 순간 앤디가 씨익 미소를 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미소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자신감을 읽었기 때문이다.
마치 앤디가 자신을 향해 이제 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한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
벤존스는 이 다급한 상황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는 자신이 다친 것도 잊고, 아들인 앤디를 구하기 위해 도끼를 다시금 꼬나 쥐며 오크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갑자기 허공으로 튀어 오른 오크가 벤존스의 앞에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죽지는 않았지만 뇌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녀석의 눈이 돌아가 있었다.
벤존스는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갑자기 멀쩡한 오크가 하늘로 치솟다니.
그러나 한 마리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어김없이 뻑! 빡! 퍽! 같은 소음과 함께 오크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앤디는 도저히 가슴 깊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길 수 없었다.
“…감히! 감히!”
어떠한 상황이었다 해도 자신이 앞에 나섰어야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상황을 봐서 나간다는 안이한 생각이 이런 처참함을 낳았다는 생각에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이곳저곳에 낯익은 이들의 얼굴과 체형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앤디는 이를 빠득 갈았다. 분노로 인해 단전에서 내기가 들끓었다. 회오리치듯 사지백해로 흘러들어가는 거대한 기운들이 느껴졌다.
타탓!
발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용천혈로 내력을 쏘아 보내자, 앤디의 신형이 마치 비상하는 독수리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렇게 전장을 파고든 앤디는 폭풍과도 같은 공격으로 사방을 휘몰아쳤다.
퍼억!
꾸익!
첫 번째 희생양으로 마을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뒤통수를 보이고 있던 오크 녀석이 눈알을 절반이나 뽑아내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털퍼덕!
앤디는 눈앞에 자리하고 있는 오크들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넓은 시야로 주변 상황을 확보하고, 위기에 처해 있는 주민들을 먼저 구하는 데 주를 뒀던 것이다.
오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앤디를 보고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앤디는 오크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앤디의 발차기는 오크가 휘두른 글레이브를 그대로 부러트리며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푸억!
마치 북이 터져 나가는 듯한 소음이 터졌다.
앞으로 깊이 수그러든 오크의 눈은 튀어나올 듯했고, 입에서는 침이 질질 새어나왔다.
복부에서 장기가 터져 나가며 밀려오는 고통에 뇌는 잠시 정지했다. 그러다 이윽고 오크의 입에서 거품이 밀려나오더니 앞으로 쓰러졌다. 즉사한 것이다.
일격일살
앤디는 자신의 공격에 손속을 낮추지 않았다.
“네깟 녀석들이 감히!”
앤디는 오크가 쓰러지는 것을, 아니 몸을 앞으로 수그리는 것조차 보지 않았다.
이미 다른 곳에 달려 나가 다른 오크의 명치를 후비듯 찔러 넣거나 주먹, 무릎, 팔꿈치, 발꿈치 등 신체의 모든 부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공격을 주도했다.
순식간에 10마리의 오크가 쓰러졌다. 전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술렁술렁.
절망감과 슬픔에 물들어 있던 마을 사람들이 희망과 놀람으로 앤디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하나같이 믿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작은 아이의 무력으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움직임과 파워를 보이며 전쟁을 압도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때 사방에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역시 대장이야!”
“대장! 저 녀석들, 혼구멍을 내줘!”
“대장! 힘내!”
어떤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우리 아버지 복수를 꼭 부탁해!”
어른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들은 마치 앤디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꾸위이이이이익!
대장 오크의 거침없는 외침에 오크들이 시선을 돌렸다.
오크들의 주적은 앤디로 귀결되었다.
앤디의 움직임은 시간이 갈수록 기기묘묘해졌다.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전투하는 방법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오크 2마리가 동시에 휘두른 글레이브와 낡은 검을 기이한 움직임으로 피하며, 뒤에서 덮치려고 달려든 녀석의 다리를 걸고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앤디과 오크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앤디를 향해 공격하고 있던 오크들의 무기가 그대로 자리 바뀐 오크에게 직격했다.
퍼버! 퍽! 푸욱!
꿱! 뀍! 꾸익!
동료들의 거침없는 공격을 당한 오크가 부들부들 떨다가 즉사했다.
자신의 동료를 공격했다는 당혹감과, 앤디에게 농락당했다고 느낀 분노에 잠시 갈팡질팡한 오크들.
앤디는 그사이도 놓치지 않고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는 오크 2마리 사이에 들어가 손끝으로 갈비뼈 사이를 후비고, 목뼈를 부러트렸다.
어느새 오크들에게 마을 사람들의 존재는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앤디가 그 자리에 서서 오크들을 상대했다면 뒤에 남아 있는 오크들이 마을 사람들을 공격했을 법도 하건만, 사방을 뛰어다니며 방심하고 있는 오크들을 급습하는 전략을 사용함으로 인해 오크들이 앤디에게서 시선을 놓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한데 뭉쳐서 전력을 정비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앤디가 어떻게 저리도 강할 수 있는 거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앤디가 맞는 건가?”
“기사도 저리 강하지 않을 것이야.”
“앤디는 대체 어디서 저런 능력을….”
의문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때 촌장이 입을 열었다.
“의문이 많을 것이다. 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고.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앤디를 도와서 오크들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궁금한 것은 나중에 오크 녀석들을 물리치고 나서 앤디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닌가!”
“하긴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지.”
“촌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촌장의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 마을 사람들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오크 무리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단합해서 외쳤다.
“앤디를 도와서 오크 무리를 물리치자!”
“와아아아!”
기세가 등등해진 마을 사람들의 전투력이 높아졌다. 머릿수에 각개격파 당하던 조금 전 상황과 달리, 뭉쳐서 외각부터 치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가 우월하게 많은 오크들이었지만 앤디에게 신경 쓰랴, 마을 사람들에게 신경 쓰랴 전투가 쉽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격해 들어오는 마을 주민들을 상대하기 위해 오크들이 부분적으로 움직였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앤디가 마을 사람들을 상대하는 오크들에게 집중 공략을 시도하게 되면서 오크들은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냥 앤디를 공략하며 마을 사람들은 견제만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뭔가 잡혀야 공략을 하지. 자신들의 공격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하나하나 착실히 쓰러트리는 앤디는 오우거보다 무서웠다.
그것도 모자라서 앤디가 오크 대장을 쓰러트리더니 녀석의 글레이브를 빼앗아 드는 상황이 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맨손으로 자신들을 공격하던 앤디도 무서웠는데, 무기까지 들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그 무거운 글레이브를 나무젓가락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오크 셋의 목을 동시에 따는 것은 장난이었다. 무기를 들고 있는 오크를 무기와 함께 몸통까지 베어 넘기는데, 그 강력한 무위는 보고 있는 오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서걱! 서걱! 쩌어억!
결국 오합지졸이 된 오크들이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후, 후퇴하라! 꾸이이익!”
“꿔익! 꿔익!”
오크들은 뒤뚱거리며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치 후퇴하라는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60여 마리의 오크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사신처럼 움직이던 앤디가 멈춰 섰다.
뒤쫓아 가서 마무리를 할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녀석들을 향한 살기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다. 무엇이 선인지를 파악하고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앤디가 들고 있던 글레이브에 맺혀 있는 붉은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는 도망치고 있는 오크들을 향해 들고 있던 글레이브를 투창하듯 던졌다.
슈우우우욱!
푸욱!
꾸익!
맨 앞에서 열심히 달려가던 오크 한 마리의 등이 꿰뚫린 채 앞으로 고꾸라지며 즉사했다.
그것만으로는 앤디의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뭐지? 이 강력한 열양지기는?”
앤디가 의문을 가진 순간 저 멀리서 불공이 날아 들어왔다.
후우우웅!
콰과과광!
꿰억!
꾸이익!
동시에 거대한 폭발음과 섬광이 터져 나왔다.
단발적인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연속적으로 흘러나왔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이미 그곳을 보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일어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도저히 저 악독한 오크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화염구가 도망치고 있는 오크 무리 사이로 날아가 폭발했다.
오크들은 그 거대한 폭발에 한 놈도 남지 않고 통구이가 되어 전멸하고 말았다.
그 폭발로 인해 일어난 검은 연기 사이를 가로지르며 백색의 로브를 입은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