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황의 이름으로 1권
‘…아! 그렇구나!’
중원 전체를 아우르던 절대지존 남궁용민.
깨달음의 극의를 깨우쳐 그의 성신이 지금까지 자신을 가두었던 육체를
떠나 하늘을 날아올랐다.
“아버지!”
“여보!”
“스승님!”
가족과 제자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기쁨과 슬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을 향해 깨우침을 내려 주던 그가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날아오른 탓이었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또 다른 남궁 용민의 흐릿한 형체가 육신을 버리고 떠오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우화등선. 신선이 되어 선경에 오르는 것임을 말이다.
문제는 주변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스승님께서 신선이 되다니….”
“순수한 자만이 신선이 될 수 있는 것 아니었던가….”
첫째 제자와 넷째 제자의 탄식에 첫째 아들인 남궁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순수 악도 순수하긴 하죠.”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염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그의 마수에서 해방인 것이다
한참을 오른 용민이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자신의 껍데기와 혈육, 그리고 전신에 중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붕대나 부목을 대고 있는 제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금의 상황에 와서 보니 약간의 죄책감이 일었다.
‘…흠흠! 내가 조금 심하긴 했지.’
그 죄책감은 드러날 때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오욕칠정을 잊어야만 할 수 있다는 우화등선을 한다는 핑계로 소소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잔상들을 모두 깨끗하게 지운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 제자들이 얼마나 억울하고 열 받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남아 있는 그들의 사정.
‘그래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지. ’
10명의 제자들과 3명의 아들, 2명의 딸,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 그들의 얼굴을 한 번씩 돌아보고 다시 시선을 올렸다.
선경으로 가는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용민은 한 걸음씩 하늘로 내디뎠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존경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며 말이다.
‘이제 모두 끝났구나. 후후! 응? 끝나?’
멈칫.
그 순간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왜 저곳에 가고 있고, 가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도가도비상도(말로 형상화된 도는 원래의 도가 아님).
‘나는 정말 신선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던데.
하필 왜 자신이 지금 이승을 떠나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아직 2백 살밖에 살지 못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선경에 가면 저런 존경 어린 시선을 받을 수 없지 않는가. 과거 한가락 하던 이들이 모두 올라간 곳일 텐데 말이다.
하나둘 떠올리다 보니 지금 이 상황이 진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누군가의 답답한 외침이 들려왔다.
어리석은 녀석! 어찌 편한 길을 돌아서 오려 하느냐.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은 네가 택한 선택의 결과일 것이다. 이 일로 인해 너는 다시 인간이 될 것이다. 오욕과 칠정을 지웠던 너이기에 누구보다 더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너는 누구보다 슬퍼할 것이고, 고통스러울 것이며, 외로울 것이고….
용민은 더 이상의 말을 들을 수 없게 되 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어딘가로 강력한 힘에 의해 끌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장. 앤디
1
현 헤르만 왕국은 32만 헥타르의 땅을 지니고 있는 작은 왕조 국가다.
약 20년 전, 헤르만 왕국은 이곳 베리오스 대륙의 5분의 1을 지배할 정도
로 막강한 힘을 지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벤디오 신성 제국의 광기 어린 성전이 일어났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이웃에 위치했던 쿠렌트 제국과 손을 잡고 벤디오 신성 제국을 맞상대했다.
오랜 전쟁 끝에 미친 벤디오 신성 제국의 성황이 숙청당한 후, 전쟁은 서서히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때 손을 잡고 있던 쿠렌트 제국이 방심하고 있던 헤르만 왕국의 뒤통수를 쳤다.
마치 토네이도처럼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휘몰아친 쿠렌트 제국은 한순간에 헤르만 왕국의 식량고인 클라우드 평야와 마르덴 평야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땅을 빼앗았다.
그것도 모자라 주변국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오싹할 정도였다.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왕국에서조차 존속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급하게 평화 의원회를 개최한 남아 있던 미드로 왕국, 라훔 왕국, 하이네스 왕국, 루나 성국과 그 외 변방의 수많은 나라가 쿠렌트 제국의 침략 전쟁을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붕괴된 나라는 되살릴 수 없었다. 빼앗긴 땅도 돌려받을 수 없게 되었다.
베리오스 대륙의 절반에 가까운 영토를 가지게 된 쿠렌트 제국은 명실 공히 세계 최강의 대국이 되었다. 그 존재 자체가 거대한 위협이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각 왕국은 서로의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 왕국의 연합 전선에 헤르만 왕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헤르만 왕국은 그 휘황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로 명맥만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헤르만 왕국의 수도 헤르미아 근교 산맥에 34가구가 모여 있는 카렌이란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에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죽었다고 생각한 5살배기 소년이 화장을 하기 직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다.
“앤디!”
앤디의 부모는 기절초풍했다.
이윽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부모는 살아난 앤디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되살아난 앤디의 행동과 눈빛이 이상했다.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기까지 했다.
쫑알거리며 질문도 많이 하고, 말도 많이 하고, 노래도 즐겨 하던 과거의 앤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앤디의 아버지가 촌장에게 물었다.
“촌장님, 우리 앤디가 어떻게 된 걸까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네. 심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선은 건강한 것으로 위안하게나. 죽었다가 살아난 것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겠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신 베르스께서 우리 앤디를 돌봐주실 것이라네.”
촌장의 말에 앤디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하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냐.”
용민은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상황이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님을 말이다.
현실에 대한 감을 찾기에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가 있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선계에 올라가기 전에 겪어야 하는 최종 시험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착각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용민은 자신이 선계의 입구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슬퍼할 것이고, 고통스러울 것이며, 외로울 것….’
‘대체 누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용민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해석될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는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죽자고 달라붙어도 문제가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언젠가 그 문제의 답이 나올 것이라 믿으며, 용민은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이 어떤 곳이고, 이 어린 몸을 지니게 된 자신은 누구인지를 알아봐야 했다.
그러려면 먼저 말이 통해야….
‘….’
“이거?”
앤디가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의문을 표현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앤디야, 이것은 ‘물’이라고 하는 거야. 저것은 우리가 사는 ‘집’이고.”
앤디의 어머니 클레오는 성심을 다해 가르쳐 주었다.
며칠을 두고 본바 앤디의 기억력이 상실되었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반짝이고 깊고 푸르며 현명한 눈을 가진 아들. 지금이라도 입을 열어 즐기던 노래를 부를 것 같은 아들. 엄마,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며 놀아달라고 할 것 같은 아들.
과거를 잃었다는 것이 너무나 슬펐지만, 자신은 아들의 과거를 잃지 않았다. 모자란 기억은 다시 채우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는지, 앤디는 클레오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이것, 물, 저거, 집… 우리?”
“우리 아들 똑똑하기도 하지. 우리라는 것은 앤디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포괄하여 말하는 것이란다.”
앤디, 아니 용민은 정말 빠르게 이들의 언어를 습득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과거 무림의 절대지존이었던 용민은 상단전을 뚫고 자연경에 들어선 상태였다.
상단전이 열리면 영성이 열려 귀신의 존재도 볼 수 있으며, 팔문의 기운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팔문이란 휴문, 생문, 상문 두문, 경문 사문, 경문, 개문을 말한다.
놀랍게도 다른 몸으로 영이 옮겨 왔음에도 상단전이 닫히지 않고 있어, 상시 촉으로 모든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오성과 오감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이들에 비해 뇌의 활용량이 수십 배가 높다는 뜻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일반적인 문장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신이 한번 배웠던 단어의 뜻을 전혀 오인하지 않고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모습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단지 빠르게 정신을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기쁨이 너무 컸기에 사람들은 앤디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찾을 틈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한 사고와 행동 말이다.
하지만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앤디의 행동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앤디가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씩이나마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과 융화되어 잘 어울려 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탓이다. 친구들이 놀러오면 조용히 따라 나가긴 하나, 외진 자리에 앉아 그들이 노는 모습을 멀건이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을 오랜 기간 유심히 지켜보던 촌장이 앤디에게 다가서서 말을 걸었다.
“너는 어찌하여 아이들과 놀지 않고 이곳에 있는 게냐.”
‘그럼 이백 살이나 먹고 아이들하고 놀으랴?’
촌장의 물음에 앤디는 속마음과 달리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저는 지금 저들과 함께 놀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할아비의 착각인 게냐?”
“저들의 흥겨움에 제가 그 흥을 느끼고 있으니, 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앤디의 대답에 촌장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들의 흥으로 흥을 느낀다라.”
“예.”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거라. 네가 느끼는 흥을 저 아이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느냐?”
앤디가 촌장의 물음에 대답도 하기 전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중 밴트라는 소년이 앤디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대장, 저 아랫마을 해리슨 녀석들이 자꾸 우리 아지트를 노리고 도발하는데 어쩌면 좋겠어?”
‘대장?’
촌장은 놀란 눈빛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밴트는 11살로 이제 막 9살이 된 앤디보다 2살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앤디는 뭔가를 밴트에게 설명해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밴트의 얼굴이 환하게 변해갔고, 옆에서 주워듣고 있던 촌장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밴트는 신이 나서 아이들을 끌고 사라지고, 앤디가 그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촌장이 일어난 앤디를 불렀다.
“그게 모두 네 생각이란 말이냐?”
“싸움은 분쟁만 만들 뿐입니다. 분쟁은 화를 부를 뿐이고, 화는 적개심을 키워 다른 싸움을 불러오지요.”
촌장은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의 빛을 띠었다.
“네 말이 옳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니까.”
앤디가 웃으며 말했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적당한 타협으로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도 각자가 원하는 만족도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힘으로 빼앗는 것이 이렇게 번거롭게 하는 것보다 더 쉬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힘으로 누군가를 누르는 방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치 네가 더 강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한 어투구나.”
앤디는 별다른 대답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촌장은 그것을 앤디의 자신감 어린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 강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강하다는 말의 공허함을 알기에 싸움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강함의 공허함이라?”
“한번 이겼다고, 그것이 강하다고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강한 존재가, 또 그 존재보다 강한 존재가 자리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강함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꺼내는 말 하나하나가 어린아이가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오랜 삶을 살며 겪어온 경험이 배어난 듯한 말이 아닌가.
현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촌장은 앤디의 말에 연방 감탄사만 흘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싸우며 발전의 계기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이지?”
“싸움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못 됩니다. 좋은 것은 싸우지 않음에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은 싸움을 하지 않으며 서로 융화되어 사는 것입니다.”
“네 말이 틀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그러나 현실은 다르단다. 네가 말하는 것은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에 더욱 아이들에게 그런 현실도 존재할 수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차가운 현실만을 깨닫기 전에 조금은 따뜻한 현실을 꿈꾸게 해주고 싶다고 해야 할까요?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그런 이상이 현실이 될 날도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촌장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런 세상이 올 수 있다면 좋겠구나.”
“무엇보다 제가 싸움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또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그렇지 않아도 사이가 좋지 못한 우리 마을과 아랫마을입니다. 어른들의 싸움에 아이들을 끼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힘들다고 해도 자신들이 어째서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 정도는 품을 수 있게 되겠지요.”
“….”
촌장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앤디라는 아이는 놀랍게도 먼 미래까지 생각해서 벌써부터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저는 아이들에게 싸움을 조장하는 것보다 서로의 만족감을 올려 주는 일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경쟁심을 심어주는 것도 좋지만 아이들이지 않습니까. 서로 만족하여 즐겁게 놀고, 건강하게만 자라준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아랫마을 너희와 윗마을 우리들은 다르지 않다는 유대감을 형성해준다면, 성인이 되어서 그 둘의 이상이 융화되어 큰 마을이 될 수도 있겠구나.”
뻔뻔하기 그지없는 앤디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촌장은 감탄에 감탄을 이어 탄성을 내뱉었다.
“너의 깊은 생각이 놀랍구나!”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아니다. 대체 너에게 어떤 이가 이런 가르침을 주었더냐?”
촌장이 아무리 몰라도 이 생각은 단순히 아이의 머리에서 나올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실천하여 아이들에게 인정까지 받고 있을 정도다.
하루 이틀 만에 이런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착실하게 고등 지식을 배웠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촌장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그런 가르침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가르치겠습니까? 모두 제가 훌륭한 탓입니다.’
앤디는 대답하지 않고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2
유운신공.
앤디의 단전에 자리 잡은 내기가 사지백해로 흘러들어간다.
그 신공의 이름처럼 자유롭게 흘러가는 구름인 양 전신을 아우른다.
소주천을 시작으로 대주천에 들어갔다. 대주천이란 소약이 주천하는 것을 말한다.
고요히 앉아서 소약이 움직이는 기틀을 잡아, 코와 입에 바람이 없는 고요한 진식으로 주천을 행한다.
진식이란 내호흡으로, 몸속 깊은 곳의 기혈 호흡이다.
대주천 할 때에는 우주의 기운이 상응한다. 그렇게 오행의 기운이 우주의 기운과 조화를 이루고 신을 마주하게 되면 대약을 완성하게 된다.
곧 진양화가 시작되었다. 진양화란 뜨거운 순양지기가 독맥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그 후, 임맥을 통해 니환궁에 이르며 순음지기로 변한 기운이 하단전에 들어간다.
주천의 횟수가 그렇게 수없이 반복되고, 순수한 청음지기가 단전에 머문다.
“후우우….”
기운이 극한으로 갈무리된 호흡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눈에서 금광이 번뜩였다. 또한 가득 들어찬 내력으로 인해 단전이 든든했다.
벌써 유운신공을 4성까지 익힌 것이다.
현재 앤디의 나이는 11살.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앤디의 몸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앤디가 아닌 바로 용민이었으니까.
그는 생전 천하제일인으로 칭송받기도 했으며, 인간의 벽을 넘어 선인지경에 들어섰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앤디의 발치에서 튀어 오른 돌멩이가 그의 손가락에 의해 튕겨져 날아갔다.
터텅!
쏘아져 나간 돌멩이는 성인이 양팔로 안아도 안을 수 없는 거목을 가볍게 뚫고 반대로 튀어나갔다. 그럼에도 힘이 남았는지 수풀 속을 넘어 사라졌다.
앤디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발전 속도라면….’
과거 천재로 불리던 유년 시절부터 조부께 선택받아 직접 배운 유운신공을 4성까지 올렸을 때 나이는 18살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었는데, 지금은 11살의 나이로 4성에 오른 것이다.
아무리 한 번 갔던 길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상식을 벗어난 발전 속도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이런 속도로 발전한다면 아마 18살이 되기도 전에 유운신공을 6성까지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태양이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뭐하고 있어!”
“대장! 어디에 있어! 빨리 와!”
앤디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아차 싶었다. 오늘 아이들과 함께 토끼 사냥을 하기로 했었던 것이 떠오른 탓이다.
수련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아이들과 만나고자 했던 약속 시간을 넘기게 되었다.
앤디는 다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외침으로 대꾸했다.
“지금 가!”
아이들은 초조한 모습으로 토끼를 잡을 준비를 하고 앤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앤디가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에 손을 흔들며 반겼다.
“오늘은 어디로 갈 거야?”
아이들의 물음에 밴트가 대답했다.
“파랜스 산.”
“헉! 거긴 몬스터들이 나오는 곳이잖아?”
“오늘 토끼 잡으러 간다며? 토끼 잡으러 가는 거 아니었어?”
밴트가 말했다.
“파랜스 산에도 토끼는 있어.”
“그야 그렇겠지만….”
“어른들이 싫어하실 텐데.”
“걸리면 분명히 크게 혼날 거야.”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파랜스 산이 그렇게 먼 곳은 아니었지만, 몬스터 출몰 지역으로 위험 지대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호기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 모습에 밴트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어른이라고. 아니야?”
“….”
“왜? 가기 싫어? 몬스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지 않아?”
“그, 그렇긴 하지만….”
“겁쟁이들.”
그 한마디에 아이들이 울컥했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게 외쳤다.
“거, 겁쟁이 아니야!”
하지만 말을 하고는 막막해했다. 은근슬쩍 아이들의 시선이 앤디를 향하기 시작했다. 실질적으로 아이들을 이끄는 것은 밴트였지만, 아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는 앤디였던 탓이다.
밴트도 자연스럽게 앤디를 바라보았다. 앤디는 밴트를 보고 한참 고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생각이 깊고 성숙한 행동으로 이미 마을 어른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앤디다. 그런 그가 허락했다는 것을 어른의 허락과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사실 앤디는 반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앤디에게도 호기심과 호승심이 일었다. 이곳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몬스터라는 존재를 한번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허락을 하게 된 이유는 유운신공을 4성이나 익히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 힘이 이곳에서 얼마나 통용될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용을 해보고 싶었다가 옳을지도 모른다.
밴트를 필두로 아이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 파랜스 산 입구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파랜스 산의 수풀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카렌 마을 부근의 지역은 수도와 가까운 탓에 치안이 좋은 편이라 몬스터들의 출몰이 거의 없다. 간혹 있긴 했지만 아이들이 몬스터를 볼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몬스터들이 출몰하면 어른들이 대거 모여 쫓아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몬스터들에 대한 환상이 컸다. 무섭다고는 생각하지만, 몬스터로 인한 큰 피해를 겪어보지 못하다 보니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거의 없는 것이다.
옛날이야기 속의 귀신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8살 꼬마 숙녀 로즈는 아이들 틈에 숨어, 왕방울만 한 눈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가득 담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곳 파랜스 산의 숲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봐왔던 곳들과 달리 수풀이 무성하고 우거진 곳이었다. 거대한 잎사귀가 하늘을 뒤덮듯이 가리고 있었기에 어둡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잎사귀 틈으로 태양빛이 부서지듯 흩어지며 스며들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아갔다.
앤디 역시 그들을 따라가며 모든 신경을 주위에 쏟았다.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자신의 미숙한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지만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아이들의 긴장이 풀리고, 푸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칫! 이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몬스터가 있긴 뭐가 있어.”
“괜히 겁먹었잖아. 어른들은 거짓말쟁이야.”
아이들의 말에 앤디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이들의 투정이 귀엽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해봐도 이 숲이 크게 위험하다 느껴지지 않았기에 적당한 여유가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때, 한 아이가 외쳤다.
“아! 저기 토끼다!”
“어디! 어디!”
아이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초롱초롱한 눈빛을 머금었다. 그리고 다급히 그곳으로 뛰어갔다. 토끼는 아직 아이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태연하게 양발로 서서, 양 앞다리로 자신의 귀를 다듬기 시작했다. 코를 찡끗거리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운지, 로즈가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토끼를 훔쳐보았다.
“아이, 귀여워.”
그 목소리를 들었음인가. 토끼가 움찔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자신이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여동생인 로즈가 토끼를 보고 좋아하자 12살인 로이가 말했다.
“오빠가 잡아줄까?”
“응!”
로이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로즈를 바라보다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밴트가 로이의 어깨를 툭 쳤다.
이어, 아이들이 토끼잡이 도구들을 들었다. 밴트를 필두로 토끼 유인을 계획했다.
곧 아이들은 사방으로 퍼지더니 망을 펼쳐 든 후 언덕 부분을 장악했다. 그리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토끼가 그대로 굳은 표정을 짓고는 머뭇거리다가 눈치를 살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일부러 만들어낸 틈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겅충겅충.
내리막길을 뛰다 보니 토끼의 달리는 속도가 둔했다. 토끼는 언덕을 올라갈 때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신체의 특성상 위에서 아래로 뛰는 것은 수월하지 못한 탓이다.
아이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래쪽에 덫을 깔고 있을 로이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석에서 로즈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로이는 구석에 숨어서 자신을 응원하고 있는 로즈를 보며 히죽 웃어주었다.
로즈도 오빠 로이를 보고 마주 웃어주었다.
바로 그때, 로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어, 어!”
토끼는 자신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보고 몸을 꺾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토끼가 바로 옆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로이는 꼼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숨죽이고 잘 참고 있던 로이의 갑작스러운 모습에 아이들이 짜증 어린 시선을 던졌다.
“로이, 뭐해!”
“지금 장난해!”
아이들의 분노에도 로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로즈가 있는 곳을 가리킬 뿐이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로이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함께 굳어버렸다.
호랑이 같은 몸체에 표범을 닮은 머리를 지니고, 꼬리가 둘 달린 샤벨 타이거 한 마리가 모두에게 보란 듯이 로즈를 향해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벌어진 아가리 사이로 어른 팔뚝만 한 날카로운 어금니가 번뜩였다.
로즈 역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거친 숨결과 살의에 놀라 굳어버린 상태였다.
샤벨 타이거는 마치 아이들의 공포에 질린 눈빛을 즐기는 듯한 행동을 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강자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혀를 내밀어 로즈를 핥았다. 거칠고 강한 샤벨 타이거의 혀가 로즈를 유린했다.
놀란 로즈가 소리쳤다.
“꺄아아아아악!”
그때, 어디선가 놀라운 속도로 돌이 날아왔다. 그것은 샤벨 타이거의 얼굴에 직격했다.
퍼억!
깽!
여유를 부리던 샤벨 타이거의 얼굴이 획 돌아갔다. 샤벨 타이거는 한참을 낑낑거렸다. 맞은 부위가 아팠던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녀석은 자신의 앞에 있을 작은 인간을 향해 입을 다물었다.
텁!
그런데 허전했다.
입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짧은 시간에 불과했는데 그새 사라진 것이다. 샤벨 타이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조금 전 자신이 봐두었던 작고 부드럽게 생긴 먹잇감을 찾았다.
다른 아이들 사이에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쩝!
화가 났던 것도 잠시, 다시 입맛이 돌았다.
길고 거친 혀로 입 주위를 핥은 샤벨 타이거는 한 걸음씩 아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어떻게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달라질 것도, 변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먹을 먹이의 수를 확인한 샤벨 타이거는 콧김을 크게 내뿜으며 흥분했다.
아이들과의 거리는 10미터 정도. 단숨에 달려 나가 물어뜯을 수 있는 거리였다.
바로 그때, 다시 돌이 날아왔다. 샤벨 타이거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것을 피했다.
그리고 돌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공격한 녀석부터 잡아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본 그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
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뒤통수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뭘 봐?”
뻐억!
캥!
3
아이들이 샤벨 타이거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것이 샤벨 타이거임은 잘 알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맹수와 몬스터들에 대해서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샤벨 타이거는 몬스터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그 이상의 포악함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두려움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떨고 있는 그때, 어디선가 바람같이 나타난 앤디가 순식간에 샤벨 타이거의 뒤통수를 발길질로 후려 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에 아이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앤디!”
모두들 앤디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두려움이 한 겹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희망이 솟았다. 앤디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경력이 담긴 발길질이었다. 샤벨 타이거의 뇌가 큰 충격에 흔들렸는지 거대한 몸체를 휘청거렸다.
앤디는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냉정하게 샤벨 타이거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조금 전 기습한 자신의 공격이 타격점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샤벨 타이거에게 충분한 타격은 갔다.
그러나 앤디로서의 삶을 살며 실질적인 전투는 지금이 처음이다. 전투의 감각이 많이 무뎌진 상태. 작은 방심이 큰 실책으로 다가올 것이다.
무엇보다 작은 아이의 몸이다. 신체도 작고, 공격 범위도 작다. 생각하고 있는 움직임과 속도를 내기에 한참이나 모자라다.
그러나 뒤로 물러설 생각은 하지 않고 조금 더 앞으로 한발 나가 섰다. 오랜만에 맛보는 타격감이 쾌감으로 승화되어 뇌리를 스치며 등골을 자극한 탓이다.
그때, 샤벨 타이거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중심을 잡았다.
상태를 보아하니 앤디의 생각대로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녀석이 이를 드러내며 목울음을 흘렸다.
크르르르!
앤디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샤벨 타이거를 마주 보았다.
앤디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자 샤벨 타이거가 약간 주춤거렸다. 자신의 기억으로 한없이 약해야 할 녀석이다. 부드러운 육질을 가지고 있는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녀석의 눈빛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마치 상위 몬스터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사냥하는 상위 몬스터의 여유 어린 눈빛과 같았다.
샤벨 타이거는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 모를 공포를 지우기 위해 포효했다.
크와아아앙!
그리고 두툼한 발바닥으로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흉포한 녀석의 공격을 보면서도 앤디는 흔들림이 없이 마주했다.
샤벨 타이거의 앞발이 바람을 거칠게 가르며 강하게 휘둘러졌다.
크와앙!
앤디는 기다렸다가 왼발로 축을 두고, 오른발로 바닥을 크게 굴렀다. 상체가 깊이 숙여지며 녀석의 앞발을 피해 안으로 파고들었고, 동시에 오른 주먹이 쭉 뻗어나갔다.
슈우욱!
송곳처럼 뻗어나간 앤디의 주먹이 샤벨 타이거의 명치를 후볐다. 그러자 강한 타격음이 흘러나왔다.
퍼억!
깨갱!
샤벨 타이거가 데굴데굴 굴러가며 구석에 처박혔다.
그것을 본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마을인 카렌에서 가장 덩치가 큰 렌서스 아저씨 덩치의 2배는 되어 보이는 샤벨 타이거가, 조그만 앤디의 주먹질 한방에 나가떨어졌기 때문이다.
모두 환호를 하려고 하다가 호흡을 깊이 들이켜고 멈추었다. 샤벨 타이거가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소리쳐서 녀석의 신경을 자신들에게 돌릴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모두들 속으로 앤디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샤벨 타이거는 일어서려다가 휘청거렸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숨을 쉬기 힘들었던 것이다. 뻐근한 것을 넘어 가슴뼈가 부서진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모습에 앤디가 피식거렸다.
“왜 그래? 설마 그거 맞고 엄살이냐?”
앤디의 도발에 샤벨 타이거의 눈빛이 번쩍였다.
크르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저 작은 인간이 자신을 모욕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샤벨 타이거가 고통을 뒤로하고 서서히 앤디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캬오오옹!
녀석은 앤디에게 섣불리 다가설 수 없었다. 구석에 숨어 있는 아이들의 걱정과 달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순수하게 앤디를 강자로 인식한 탓이다. 자신이 틈을 보이면 분명히 치고 들어와 치명상을 남길 존재라 확신했다.
그로 인해 지금 녀석의 눈에는 앤디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반면에 앤디의 몸에는 여유가 생겼다. 그렇다고 집중력이 흩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더 넓은 시야와 깊은 관찰력으로 샤벨 타이거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녀석의 호흡과 시선, 발의 위치,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 모든 것이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파앗!
기다림이 길어지자 녀석이 그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앤디를 향해 접근한 녀석의 앞발이 휘둘러졌다.
앤디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뒤로 피했다.
녀석은 앞으로 몸을 쏘아대며 양발을 번갈아가며 휘둘렀다.
퍼억! 퍼억!
우지직!
녀석의 두툼한 발길에 닿은 작고 큰 나무들이 부러지거나 움푹 파였다.
아이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눈에는 앤디가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앤디가 저 거대한 앞발에 휘말려 조각나 죽을 것 같았다.
샤벨 타이거 역시 조금만 더 하면 저 작은 괴물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심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그것이 앤디가 노리는 것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앤디의 표정과 시선은 다급히 움직이고 있는 몸과 다르게 차분했다.
“느려.”
앤디의 움직임에 따라 샤벨 타이거의 중심이 조금씩 어긋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앤디의 신형이 기기묘묘하게 변하며 그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수신영환보라는 보법이었다.
닿을 듯이 닿지 않는 안타까움에 샤벨 타이거는 무리해서 공격해나갔다. 녀석의 혀가 턱밑까지 흘러내렸다.
학학학!
“놀 만큼 놀았냐? 그럼 맞아야지.”
앤디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곧 앤디의 발끝이 기묘하게 틀리더니 바닥을 찼다.
퉁!
바닥에 자리하고 있던 짱돌이 쏘아져 나가, 샤벨 타이거의 중심을 가까스로 잡고 있던 앞발을 강하게 쳤다.
샤벨 타이거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뭔가를 보고 본능적으로 앞발을 빼려고 했다.
평소였다면 두 앞발을 허공에 들고 휘둘러도 중심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 신체의 중심이 거의 어긋나 있었다.
무리해서 든 발이 문제를 일으켰다.
쿠당탕!
아차 하는 순간 육중한 몸이 쓰러지며 바닥을 쳤다.
앤디의 움직임이 바뀐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왼발 끝을 축으로 상대방의 눈을 속이는 수신영환보의 움직임을 시작함과 동시에 전방 위로 몸을 쏘아 보내는 배룡타승신법으로 바꿨다. 그러자 뒤로 흘러가고 있던 움직임이 처음부터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봤는지 모르겠다는 듯 휘둥그레 변한 눈으로 앤디를 주시했다. 앤디의 움직임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이했다.
다가오는 살기에 샤벨 타이거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녀석의 몸이 절반쯤 일으켜졌을 때, 앤디의 발끝이 녀석의 하악골의 관절을 후벼 팠다.
“뭘 일어나! 더 자!”
뻐걱!
턱에서 엄청난 충격이 밀려듦과 동시에 머리가 크게 울리며 뇌가 흔들렸다.
크엉!
다시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털푸덕!
“우아아아아!”
아이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그사이에도 앤디는 깐족거리는 말과 달리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몸을 신속하게 움직이며, 강력한 경력을 담아 샤벨 타이거를 후려쳤다.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했던 샤벨 타이거는 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사혈이 찍힌 채 즉사했다.
확실하게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앤디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환호하고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이야아아!”
아이들이 그런 앤디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장! 대장!”
“역시 대장이야! 우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