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99화 결 (1)
온몸이 무겁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얇디얇은 눈꺼풀조차 누군가 아교를 발라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덜컥 불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순간 가위에 눌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가위는커녕 그 비슷한 일도 겪어 본 적이 없었기에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이럴 때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했었나? 아니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기다리면 풀린다고 했던가?’
시후는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손끝에 감각을 집중했다.
다만, 분명 제 손가락임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없었다.
‘침착하게. 집중해서.’
조급한 마음에 속이 타들어 갔지만, 이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집중을 이어 갔다.
그로부터 얼마쯤 지났을까.
아무런 감각도 없던 손끝에 짜릿한 느낌이 전해지더니, 그와 동시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온전히 움직인 건 아니었다.
고작 움찔거리는 정도에 불과했으니깐.
하지만, 움직임을 보였다는 게 중요했다.
시후는 조금 전 느낀 감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했다.
그리고 극도의 집중력에 대한 보상일까.
이전과 달리 손가락을 까딱이는 데 성공했다.
손가락을 움직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던 눈꺼풀 또한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뜨길 반복했지만, 보이는 광경은 변함이 없었다.
좌우를 살폈다.
일전에 사망했을 때 보았던 무한히 펼쳐진 새하얀 공간은 절대 아니다.
이곳은······.
“병원.”
의외였다.
천마를 죽이는 데 실패했다면 일전의 새하얀 공간이었을 테고, 성공했다면 블랙 모아이 캡슐 안일 것으로 예상했으니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바람에 다시 누울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뒤늦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나왔구나.”
여러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물러나길 반복했다.
복잡한 마음을 홀로 다독이는 사이, 갑작스레 문이 열렸다.
목에 안간힘을 주어 고개를 들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당장이라도 긴 한숨을 토해낼 듯 숨을 들이켜다가 눈이 마주친 채로 굳어 버렸다.
그리곤 제 뺨을 찰싹찰싹 두들겼다.
하지만, 곧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팔을 쫙 벌리더니.
짜악!!
자학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 뺨을 쳐올렸다.
순식간에 그의 볼엔 손바닥 자국이 깊이 새겨졌지만, 그는 고통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환하게 웃었다.
“차 대리······.”
백창현 부장은 시후를 부르며 재빨리 다가왔다.
그리곤 힘없이 늘어트린 손을 붙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백 부장님이시죠.”
대답은 반 박자도 아니고 두어 박자는 늦었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안에서 보낸 시간이 무려 2년하고도 9개월이었다.
처음에야 몇 번 그를 떠올리긴 했어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에는 그의 존재 자체를 잊고 지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죠?”
“어제가 출시 예정일이었지.”
어제.
그리고 출시 예정일.
시후는 두 가지 단어로 조심스럽게 현 상황을 추측했다.
망할.
* * *
시후는 온갖 검진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순한 채혈부터 시작해서 MRI는 물론이고, 정신 상담까지 받으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후는 근 3년이라는 시간을 게임 속에서 보냈다.
그 시간이 가져다주는 괴리감은 쉽사리 떨쳐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는 저번 주에 있었던 일들이었지만, 시후에게는 몇 년 전 이야기였으니깐.
“이딴 검진이 의미가 있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검진은 너무나 복잡했다.
단순한 그림을 그리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회사 동료를 불러와 대화를 나누게 하는 건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시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어제 만난 정신과 의사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입사 동기인 태영이었다.
시후는 의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태영의 앞에 앉았다.
태영과 시후는 서로 마주 보고 있었고, 의사는 그런 두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구도였다.
“편하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의사의 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편하게는 개뿔.’
시후는 인상을 구기며 한마디 쏘아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그런 시후의 표정을 보더니 태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병원 밥이 입에 안 맞아도 좀 먹지 그래?”
분명 살이 쏙 빠지긴 했다.
하지만, 그건 병원 밥이 맛이 없어서가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검사를 해 대는 통에 입원한 뒤로 쌀 한 톨도 입에 못 댔는데, 밥은 무슨.”
“금식?”
“어, 뭐 먹을 때마다 퇴원이 하루 늦어진다고 겁을 주는데, 뭘 먹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시후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태영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지 자세히 살피자, 그가 앉은 의자 옆엔 과일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임원진들 올 때마다 과일 바구니 투척하고 가서 환장하겠는데 너까지 그러기냐?”
“나야 몰랐지.”
태영은 시후의 투정을 가볍게 받아 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의사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라고 했지만, 완전한 타인을 옆에 두고 그게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회사 이야기로 흘러갔다.
“문제점은 잡았고?”
“아직이지. 가장 문제 되는 게 캡슐인데 쉽게 건드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 말에 시후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개발부 쪽에 라꾸라꾸 가져다줘야겠네.”
“이미 싹 다 구비했다고 하더라.”
“······빠르네.”
그 뒤로 개발부 홍 과장에 대한 험담을 이어 가던 찰나, 태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리고 네가 하던 데이터는 보관해 뒀어.”
그 말에 시후의 몸이 움찔거렸다.
사라졌을 줄 알았다.
초기화하는 게 당연했을 테니깐.
태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증거 자료이기도 하고, 네 플레이 방식을 참고해서 임무도 생각해 두고 있나 봐. 그렇게 되면 1인 미궁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텐데, 이게 조금 난해한 게······.”
장황한 말이 이어졌지만, 시후는 그의 뒷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데이터가 남아 있다.
그 말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천무에 갇혔을 당시, 시후의 목표는 당연히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기뻤다.
그리고 무사히 나왔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에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근 3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내며 많은 일을 겪었으나,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요약하면 ‘일장춘몽’이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클릭 몇 번으로 사라질 0과 1로 이뤄진 데이터 조각들이었으니깐.
그렇기에 시후는 자기 최면을 걸고 있었다.
그 안에서 있었던 이들을 최대한 담담하게 기억하기 위해, 하룻밤 꿈을 꾸었노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했노라며 말이다.
하지만, 자기 최면은 한없이 얕았다.
데이터가 남아 있다는 말에 정신을 못 차릴 만큼.
* * *
이런 적이 있었을까.
첫 출근 이후로, 회사로 가는 길에 가슴이 설레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떠올려 보면 몇 번 있긴 했다.
퇴근 직전 부서장에게 보낸 메일에 첨부 파일이 누락됐다는 사실을 다음날 출근길에 알았다든지, 회식 때 필름이 끊겼는데 일어나 보니 백 부장의 구두 한 짝을 챙겨 왔다든지.
물론, 그때 느낀 감정은 설렘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떨림에 가까웠다.
“어? 괜찮으세요?”
“퇴원하셨나 봐요.”
“회사에 나와도 괜찮은 거야?”
이미 회사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얼굴만 알던 사람들조차 인사를 건네는 통에 도통 앞으로 가기가 힘들었다.
시후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최대한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내부는 뜨거웠다.
단순히 온도를 말하자면 시원했지만, 게임을 재출시하기 위해선 이전보다 더욱 꼼꼼한 검수가 필요했다.
다들 시뻘게진 눈으로 이전에 보고 지나친 것도 다시 확인하며 완벽에 완벽을 더했다.
시후는 최대한 그들에게 폐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제 자리로 이동했다.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걸 보면 태영이 청소를 해 준 게 분명했다.
고개를 돌리자 씩 웃어 주는 태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후는 다음에 시간이 나면 술이나 한잔 사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거려 중앙 컴퓨터에 접속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로그를 읽어 나갔다.
쭉쭉 넘기던 시후의 손이 갑작스레 멈췄다.
-천마 유중원 사망.
그 뒤로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이 몇몇 죽긴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남궁천과 천비령 등은 무사했다.
그리고 조금 더 읽어 나가자 정의맹이 승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달아나는 마교를 좇느라 정의맹의 피해도 제법 컸다.
수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재정비하고 찾은 사이, 마교는 성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상황에 마교의 소교주 또한 모습을 감추는 데 성공했다.
녀석 또한 북명신공을 완성하여 구파와 팔대세가를 괴롭힐 테지만, 교주가 온전한 심득을 전하지 못하고 죽은 이상 마교의 재등장은 제법 늦춰질 것이다.
“천이 형님은······.”
남궁천은 시후가 사라진 곳에 제법 커다란 사당을 세웠다.
정의맹과 마교의 싸움으로 죽은 이들을 기리는 것도 있겠지만, 시후는 저 사당의 진짜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남궁천이 매년 찾아와 하루를 머물다 갈 리가 없을 테니깐.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천비령과 홍설도 함께 찾았다.
중원에서 천산산맥까지는 수천 리 길이다.
매년 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테지만, 세 사람은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천산산맥을 찾았다.
시후는 로그를 읽다 말고, 가슴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목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후우······ 후우······.”
시후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심호흡하며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하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오 분이 지나도록 숨만 고르고 있자, 뒤에서 지켜보던 백창현 부장이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잠시 밖으로.”
시후는 그의 뒤를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백창현 부장은 옥상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 없었다.
아니, 옥상에 도착해서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지만, 불을 붙이진 않았다.
“처음에는 큰일이 터졌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멀쩡한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네.”
과거형이었다.
시후는 백창현 부장이 더 할 말이 있어 보였기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자네 처지에서 생각해 봤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겪은 일들이 허상처럼 스러지는 게 어떻게 와닿을까.”
백 부장은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꺼내 들었지만, 가스가 다했는지 칙칙거리는 부싯깃 소리만 들릴 뿐 불은 붙지 않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타인의 고통을 생각해 본다는 건 불가능하지. 무엇으로 포장해 봤자 지레짐작일 뿐, 당사자의 마음을 알긴 어려우니 말이야.”
맞는 말이다.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저 노력할 뿐이다.
백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시후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만, 내 오랜 경험상 그런 감정은 오래 묵히면 묵힐수록 독이 되더군. 아, 어제 받은 라이터가 있는데······.”
백 부장은 주머니 이곳저곳을 뒤지더니 기어코 가스가 꽉 찬 라이터를 꺼내었다.
그는 불을 붙이더니 숨 들이마시기 직전, 넌지시 물었다.
“독은 태워야 하지 않겠나?”
- 200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