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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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시산혈해 (3)
시후는 바깥으로 튕겨 내며, 안으로 잡아끌며, 상대의 균형을 앗아갔다.
그리고 찰나의 빈틈을 발견하면 창을 찔러 넣었다.
허공에 자운유성창의 금빛 궤적이 그려질 때마다 붉디붉은 핏줄기가 그 뒤를 따랐다.
핏줄기는 모여서 조그만 냇가를 이루었고, 고인 핏물은 찰박이는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종횡무진(縱橫無盡)이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느새 시후의 손에 쓰러진 철혈대의 숫자가 두 자릿수에 달했다.
상황은 그때부터 달라졌다.
처음으로 시후의 자운유성창을 막는 이가 나타났다.
놈은 이전에 앞을 막았던 녀석들과 달리, 팔에 붉은색 완장을 차고 있었다.
아마 조장쯤 되는 듯했다.
놈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창을 밀어냈다.
“네 놈은 내 차지다!”
“그래?”
시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운유성창에 불어넣은 내공을 곱절로 늘렸다.
그리고 다음 일 합에 놈의 검을 박살 내며 가슴을 꿰뚫었다.
놈은 제 가슴을 꿰뚫은 자운유성창을 붙잡은 채,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떨궜다.
일반 철혈대원들에 이어 조장까지 손쉽게 처리하자, 시후에게로 자연스레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목주림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쯧.”
시후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 저었다.
여기까지다.
무리하더라도 그에게 다다를 순 없었다.
‘오십 악’이라 부르는 이들은 정파에서 정기신을 완성한 고수와 얼추 비슷한 수준에 다다른 놈들이었다.
정면으로 붙어도 버거운데, 포위당한 채로 습격받는다면 뒷일은 불 보듯 뻔했다.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나아갈 수 없다면 균형을 지킨다.
시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연신 뒤로 밀려나는 점창파 제자를 발견하곤 몸을 날렸다.
정의맹 고수들은 주로 시후와 같은 판단을 내렸다.
무공이 다소 떨어지는 이들을 보호하는 것.
그에 반해, 마교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약한 곳을 찾아 두드렸다.
시후는 자연스레 마교의 오십 악 중 하나와 마주했다.
우락부락한 근육과 그에 걸맞은 커다란 판부(板斧)가 인상적이었다.
판부를 걸친 그의 어깨 위로, 유형의 기가 아지랑이처럼 솟구쳤다.
“어린놈이 보통이 아니구나! 네놈은 이 용중탁이 상대해 주마!”
시후를 단숨에 때려죽일 듯 그의 기세는 매섭기 그지없었으나, 아쉽게도 그를 상대할 이는 따로 있었다.
“네 나이의 반 토막도 안 되는 아이와 손을 섞는 게 부끄럽지도 않으냐?”
쌍괴.
이제는 천지협로라 불리는 두 사람이 시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에 맞서 용중탁의 옆으로 누군가 내려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얇은 혈사편(血蛇鞭)이 살아 숨 쉬듯 꿈틀거렸다.
네 사람이 격돌하자, 자연스레 공간이 마련되었다.
호기롭게 나섰던 용중탁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괴의 재빠른 몸놀림에 헛손질을 몇 번 하였고, 둘은 지루한 대치를 이어 갔으니깐.
하지만, 문제는 후괴가 상대하던 혈사편을 든 여인이었다.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혈사편은 제아무리 후괴가 손발을 바삐 놀리더라도 잡을 재간이 없었다.
끼어드는 게 후괴의 자존심을 긁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애초에 후괴는 그런 자존심을 부릴 위인이 아니었다.
시후는 판단을 내리자마자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상대는 후괴를 압박하던 혈사편을 거두려 했지만, 그걸 용납할 만큼 후괴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후괴는 ‘혈사편을 거두면 바로 목을 물어뜯겠다’라고 공표하듯, 양손에 두른 수강을 키우며 그녀를 압박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왼손을 제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
빠져나온 그녀의 손에는 혈사편이 하나 더 들려 있었다.
당황은 짧았다.
어차피 이 대 일 상황이었다.
아무리 집중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두 명이 상대라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시후는 자운유성창을 으스러지도록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귓가를 파고드는 반가운 소리가 있었다.
[금탄천율보보(琴灘天律保譜)의 영향으로 내공 소모가 3할 감소하며 집중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시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달라졌다.
어지러이 허공을 휘젓던 혈사편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시후는 읽어 낸 편의 틈바구니로 자운유성창을 찔러 넣었다.
상대가 혈사편으로 휘감으려고 했으나, 시후가 펼친 용적출해의 움직임을 쫓기엔 역부족이었다.
상대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지만, 시후는 이대로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시후는 왼발을 앞으로 디디며 무릎을 굽혔다.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던 오른발은 땅을 쓸었고, 자운유성창 또한 낮게 휘둘러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다 말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흔히들 하는 실수였다.
시후는 재빨리 붕악굴천으로 허공에 뜬 그녀를 노렸고, 후괴 또한 쌍장을 뻗었다.
“요화!”
양쪽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그녀는 혈사편을 용중탁에게 휘둘렀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가 도끼를 든 팔을 들어 올렸고, 혈사편이 그의 판부를 감았다.
그와 동시에 서로를 힘껏 당겼다.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던 용중탁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허공에 몸을 띄운 요화는 그를 향해 날아갔다.
그녀는 단순히 회피에 그치지 않고 남은 손에 들린 혈사편을 휘둘러 서괴를 공격했다.
놀란 서괴가 옆으로 물러나자, 요화는 안전하게 땅에 내려설 수 있었다.
덕분에 닭 쫓던 개가 된 후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물러났던 서괴가 곁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저었다.
“곡예단이 따로 없군.”
“헛소리 말고 저 나무꾼 좀 멀리 끌고 가 봐.”
“젠장, 저 덩치를 나보고 끌고 가라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서괴가 끌려가면 끌려갔지, 끌고 갈 만한 덩치는 아니었다.
그의 대답에 후괴는 손가락을 뻗어 요화를 가리켰다.
“아니면 네가 저 곡예단원을 상대하든가.”
“어디까지 끌고 갈까?”
“저승까지.”
시후는 두 사람의 장난스러운 대화에 피식 웃으며 자운유성창을 들어 올렸다.
“저는 어떻게 하죠?”
“조금 전처럼 허점을 조금씩 만들어 보아라. 다만, 이전과 달리 공격을 네게 집중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고.”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공격도, 후괴를 묶어 두며 휘두른 공격을 뚫어냈을 뿐이었다.
그녀가 시후에게 전력을 다한다면 거미줄에 묶인 하루살이 신세가 될 것이다.
요화를 양쪽에서 압박하기 위해 후괴와 천천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뿌우우우우. 뿌우우우우.
나팔소리가 두 번 길게 울려 퍼졌다.
시후는 인상을 찌푸리며 쌍괴에게 가까이 갔다.
쌍괴도 시후와 마찬가지로, 공세를 받아 내며 정의맹이 모여 있는 뒤로 물러났다.
마교도 무슨 꿍꿍이가 있으리라 확신하듯 섣불리 몰아치진 않았다.
굳이 승기를 붙잡은 쪽을 논하자면, 홍설의 금탄천율보보로 인해 몰아치고 있었던 정의맹 쪽에 있었으니깐.
그렇기에 홍설의 연주가 끊어지자마자 마교는 잔뜩 흥분했다.
“음공이 끝났다!”
“혈풍대는 놈들을 몰아쳐라!”
힘의 균형이 비슷하다면 물러나는 쪽이 밀리기 마련이었다.
격정적으로 달려드는 놈들을 막기엔 다들 버거워 보였다.
“갈(喝)!”
명일이 호통과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소림이 자랑하는 백보신권이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놈들의 기세가 한층 꺾였다.
이어 공진과 검후가 검을 휘두르자,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나섰음에도 여덟 마존들은 앞으로 나설 기미가 없었다.
오십 악을 상대할 쌍괴와 각 문파의 전대 고수들도 전면에서 마교의 추격을 저지했다.
그들이 내공을 쏟아부으면 부을수록, 여덟 마존의 입가에는 미소가 짙어졌다.
“응? 뭐야?”
그러는 와중 마교의 졸개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쥐었다 폈다.
그 행동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공이 늘어난 느낌인데?”
“늘어나기보다는 질이 향상된 것 같지 않아?”
“놈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어 보이지?”
“이 정도면 저들을 뚫을 만하지 않을까?”
“뒈지려면 혼자가. 팔황이 어디 동네 건달인 줄 아냐?”
“좋아, 간다!”
절대다수는 갑자기 늘어난 힘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물론, 그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여덟 마존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다들 이곳에 음기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의심하게 만들어 물러나게 하려는 꿍꿍이가 아닐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이곳으로 데려올 이유가 없잖아?”
초마와 전마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검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마른 놈들이 건네주는 물은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놈들이 건네준 것도 아니잖아?”
초마의 대답에 검마는 그를 벌레 보듯 바라봤다.
어찌할지 고민하는 사이, 정의맹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멀리 가 버리면 음기가 응축된 지형을 지나게 된다.
“빌어먹을 환마가 있어야 했는데.”
“뒈진 놈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그보다, 이제는 슬슬 나서야 하지 않겠어? 애들 사기도 엉망인 거 같은데 말이야.”
이제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놈들은 없었다.
오십 악에 들어가는 이들이라고 한들, 팔황에 비하면 부족했다.
아무리 이 지형에서 음기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다.
“소림의 땡중은 내가 맡지.”
“좋을 대로.”
“좋아, 그럼 난 검후라는 건방진 계집을 맡겠어.”
검마는 그들이 상대를 다 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중 언급되지 않은 인물은 하나였다.
“그럼 무당 말코는 내 몫이군.”
검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 자리에서 사라졌다.
검마 또한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공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삼백 장이 훌쩍 넘는 거리를 좁히는 데는 서른 걸음이면 족했다.
검마는 공진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올 줄 알았다는 표정이군.”
“검수는 같은 검수에게 끌리는 법이지 않은가?”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럼 정식으로 소개하겠네. 본도는 무당의 18대 제자 공진이라고 하네.”
공진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검마는 아무 대답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공진은 불쾌한 기색은커녕, 되레 빙긋 웃었다.
“검으로 보여 주겠다는 것인가? 좋군. 본래 비무라면 여러 검식으로 상대하겠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나도 전력을 다함이 옳겠지. 태극혜검과 공진검으로 상대하겠네.”
“탈명검법.”
쾅!!
좌측에서 들려온 굉음에 두 사람이 느긋이 고개를 돌렸다.
금정신니와 광마가 격돌한 것이다.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듯, 사방에서 기의 해일이 몰아쳤다.
말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앞으로 달려들었으니깐.
검마는 목숨을 앗아가기 위한 극한의 살검(殺劍)을 펼쳤다.
심약한 이라면 검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공진의 검은 형체가 없었다.
공허(空虛)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검은 비어 있었다.
그렇기에 검마의 살검이 잠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검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형체가 없는 공진의 검을 찾아내기 위해 끝없이 몰아쳤다.
누군가 형체가 없는 것을 벨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다들 미친놈 취급하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나는 다르다!”
그러나 검마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해냈다.
끼끼끼끽!!
검마는 공허했던 공진의 검을 빼내어 검을 맞대었다.
“공진검을 파훼하다니 정말 대단하군.”
“이제 태극혜검이 남았나?”
공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검마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태극마저 부숴 주마.”
“아쉽군.”
검을 맞댄 공진이 정말 아쉽다는 듯 검마를 바라봤다.
진실된 그의 표정에 검마의 얼굴에 의문이 어리는 찰나, 그가 공진의 검을 뒤로 밀어내며 사방을 둘러봤다.
“정말 아쉬워. 이런 자리가 아니라면,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닥쳐라! 이런다고 이길 것 같으냐?”
“적어도 지진 않겠지.”
“주제를 아는······.”
“하지만, 다른 이들은 어떨까?”
공진은 검 끝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사방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다만, 비명은 오롯이 마교 무인의 것이었다.
“시작하지.”
검마와 공진이 격돌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혼전이 이어졌다.
피아식별이 어려운 혼전이었다.
그렇기에 시후 또한 원하는 상대와 드디어 마주할 수 있었다.
“목주림.”
시후의 부름에 목주림이 피에 절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뒤를 돌아봤다.
녀석의 눈은 여전히 붉었다.
피를 잔뜩 머금은 듯이.
- 187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