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84화 시산혈해 (1)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폐부를 가득 채우는 차가운 새벽 공기 덕분에 허리춤이 간질거렸다.
시후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봤지만, 아직 해님이 등반하기에 이른 시간이었기에 하늘은 여전히 어둑어둑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거대한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북녘에서 보았던 거대한 게르와 비교한다면 크기와 견고함에서 한없이 부족했지만, 북방 토벌 때 사용했던 군용 회의용 천막과는 얼추 비슷한 크기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개를 이어 붙인 탁자와 그 주변으로 놓인 수많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가장 끝자락에는 추나행이 앉아 있었다.
그는 시후가 들어오자 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방금 애들을 보냈던 것 같은데? 생각이 그리 길었다고?”
시후는 그의 혼잣말에 씩 웃으며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오는 길에 마주쳤죠.”
“어찌 알고?”
“제 막사가 서쪽 끝자락에 있잖아요. 이 시간에 중앙으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면 뻔하죠.”
“······경지를 완성했다더니 대단하구나.”
추나행의 감탄에 시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 ‘정’을 완성하지 못했기에 온전한 완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시후는 화제를 돌렸다.
“마교가 움직였나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추나행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해결되었다.
몇 명이나 나왔는지, 십이대가 모두 나온 것인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모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의자에 등을 기대어 편히 앉아 있자, 자리가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팔황은 다른 이들을 배려한 것인지 몰라도 다들 마지막에 엇비슷하게 들어왔다.
모두 자리에 앉자 추나행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시선을 모았다.
“놈들이 드디어 무거운 궁둥이를 옮겼습니다. 십이대라 불리는 무력대 전부가 동원된 듯, 들고 있는 깃발의 개수 또한 열두 개로 확인되었습니다. 거기에 남은 여덟 마존 또한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평소 추나행이 즐겨 사용하는 하오체가 아니라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이 자리는 추나행보다 배분이 높은 이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배분이 높은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발언권이 강한 자는 당연히 제갈마혁이었다.
“숫자는?”
“삼만입니다. 물론, 새벽에 문을 열고 나온 터라 조금의 오차는 있을 수 있습니다.”
“많군.”
“일전에 백리 선배님과 마교를 지켜봤을 때를 생각한다면, 최소한의 인원을 남겨 두고 죄다 끌고 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추나행은 과거의 일을 언급하며 시후 쪽을 힐끔거렸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시후는 재빨리 머릿속을 헤집었다.
“마교는 외성과 내성으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는데, 외성에 지내는 이들은 별 볼 일 없습니다. 마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도 있을뿐더러, 익혔다고 하더라도 고작 이류에 불과한 이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깐요. 즉,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내성에 머무르던 인원이 죄다 나왔을 텐데, 내성 규모를 떠올려볼 때 마교 전력의 9할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9할.
뭔가 결여되었다는 말이었다.
확신을 가진 듯한 시후의 말에, 다들 나머지 1할에 관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럼 1할은?”
아니나 다를까, 제갈마혁이 나머지 1할에 관해 물었다.
그에 시후는 손가락을 위로 가리켰다.
몇몇이 고개를 들어 천막 위를 바라봤지만, 대다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가 나왔을 수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 물었다.
하지만, 시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천마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십이마존 중 절반이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즉, 십이마존을 죽이는 것도 전략적 선택이 필요했다.
우선 검마는 무조건 죽어야 했다.
그는 십이마존 중 가장 껄끄러운 상대이니깐.
“마교가 중원을 침공한 역사를 돌이켜보면, 항상 천마는 가장 마지막에나 등장하긴 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조금 다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지. 하물며 우리가 토끼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방심해서는 안 되겠죠.”
시후는 천마가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없었기에 빠르게 수긍했다.
이어 일전에 심문으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놈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여기저기서 의견이 나왔다.
“혈풍대는 우리 화산이 맡겠습니다.”
“화산만으로는 조금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놈들은 크게 열두 갈래라고 보면 되고, 우리는 그보다 조금 더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두 문파나 세가가 달라붙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게다가 팔대세가라고 한들, 백리세가와 서문세가의 전력은 다른 곳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산동악가와 광동진가 또한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두 곳보다는 더 강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며 대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소림이 천마대를 맡고, 무당이 진마대를 상대하며······.”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천마대’와 ‘진마대’는 소림과 무당이 각각 상대하기로 했다.
그 아래로 평가받는 ‘혈풍대’와 ‘혈마대’는 조금 논쟁이 있었지만, 화산과 곤륜이 상대하기로 했다.
다만, 화산의 경우는 가장 약세라고 평가받는 서문세가와 함께 상대하기로 했다.
“여덟 마존이 남았군요.”
간단히 생각하면 정말 간단하다.
팔황 중 여전히 실종 상태인 부종검 적풍을 제외하면 일곱이 모였다.
게다가 검후의 사저인 연설련 또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서장의 별이라 불리는 적시걸까지.
여덟 마존을 상대할 이를 나눠도 최소한 한 명은 남았다.
하지만, 제갈마혁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조율.
그는 모든 것을 조율해야 했다.
정의맹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의 지시가 꼭 필요했다.
지금은 팔황이라는 그의 무력보다도 지력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검마는 내가 맡지.”
그렇기에 여덟 마존 중 최강으로 평가받는 검마는 공진이 맡게 되었다.
문제없다.
그의 태극혜검이라면 최소한 검마에게 뚫리지 않을 테니깐.
“광마는 제가 맡겠습니다.”
보타문의 무공은 소림과 마찬가지로 마를 상대할 때 위력이 배가되었다.
불살을 외치는 명일과 반대로, 금정신니는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좋은 상대가 될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씩 상대를 정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한 사람씩을 찍었다.
각기 익힌바 무공과 상성을 생각해서 상대하기 편한 이들을 골랐다.
다만, 적시걸은 흉마를 상대할 수 있음에도 초마를 고르며 눈총을 받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평가받는 오십 악들은 전대 선배님들과 최근 합류해 주신 천지협로 등 많이 분들이 도와주시기로 했습니다.”
추나행의 말에 저 구석에 있던 쌍괴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천지협로(天地俠老).
정의맹에서 쌍괴라는 별호를 대신해서 새로이 그들에게 붙여 준 별호였다.
‘괴’를 벗어던질 것이라 말했던 그들이었기에, 이제는 당당히 가슴을 펼 수 있었다.
시후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보다, 놈들이 어디로 향할지가 문제겠군요. 최소한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텐데······.”
“막 성을 빠져나온 것이라 확정지어 말할 순 없지만, 나아가는 방향을 보면 토로번(吐魯蕃)으로 오지 않을까 예측됩니다.”
추나행의 말에 서장의 지리를 모르는 대다수 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다만, 엄청난 방랑벽으로 천하를 주유했던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백리은이 그러했다.
“토로번을 지나면 어디로 향해도 이상하지 않으니, 우리도 그곳으로 가야겠군.”
“맞습니다. 길도 길이지만, 토로번을 지나면 사방이 확 트여 사람을 붙이기도 힘들지요.”
“그렇다면 토로번이 우리의 싸움터로군.”
그의 말에 추나행과 제갈마혁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마교와의 일대 혈전이 펼쳐질 장소가 정해졌다.
* * *
토로번은 천산산맥 동쪽 끝자락에 있는 지형이었다.
특수한 경우는 그곳에 자리한 도시를 가리키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특정 지형 전체를 가리켰다.
시후는 토로번 끝자락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시후의 곁으로 제갈마혁이 쓱 다가와 주변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잖이 흡족한 미소였기에 시후는 슬쩍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음기가 느껴지는데 괜찮아요?”
“제법이구나. 확실히 반푼이라도 완성하긴 했어.”
“그놈의 반푼이.”
“그럼 반푼이를 뭐라고 부를까? 아직 정기신도 완성하지 못한 녀석이 요렇게 개별 행동을 한다니. 말세다, 말세야.”
대다수는 시후가 이룩한 경지를 보고 감탄했지만, 팔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시후를 반푼이라고 놀려 댔다.
물론, 놀리고자 하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각성하길 바라는 어조가 강했다.
아직은 오십 악을 상대하기에 부족하니 말이다.
시후가 입술을 삐죽이자, 제갈마혁은 놀림을 멈추고 손가락을 앞으로 뻗었다.
“음기가 강한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저 앞이 보이느냐?”
“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토로번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평지에서 깊숙한 곳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명 토로번에선 가장 깊숙한 곳은 존재했다.
“천산산맥과 카라코람산맥, 곤륜산맥은 타림분지를 빙 두른 듯한 용의 형상을 하고 있지. 그 형태는, 곤륜파 아이들이 들으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곤륜산맥은 꼬리이고 천산산맥이 머리라고 할 수 있지.”
마교가 자리한 천산산맥이 머리라니, 길길이 날뛰는 정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후가 살짝 주변을 둘러보자, 제갈마혁은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용이 입을 벌린 형국인데 그 입에 꼭 물린 여의주의 위치를 짚자면 저곳이 된다.”
여의주.
흔히들 비유하길 용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물건이었다.
다만, 여의주는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해야 할 테지만, 분명 이곳에 느껴지는 기운은 미약해도 음기였다.
“음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이곳의 지형 자체가 평지보다 낮아서 그렇다.”
“평지인데요?”
“눈으로 보기엔 평지이지만, 하늘과 거리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먼 곳이다.”
시후는 그의 설명이 무슨 의미인지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해수면보다 낮았다.
즉, 음기가 모일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시후의 표정을 읽은 제갈마혁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입에 물린 여의주 형상을 띈 곳에 자연적인 음기가 뭉친다는 말은, 음기가 빠져나가지 못함을 의미하지.”
“그런 것치고는 음기가 상당히 약한 것 같은데요?”
“용의 여의주가 정화하고 있으니깐,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의 말에 시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최소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저곳을 등지고 싸워야겠네요.”
다만, 제갈마혁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을 저곳에 가둘 것이다.”
마공은 기본적으로 역천(逆天)이다.
천(天)은 양이니, 역천은 음과 비슷한 성질을 띠고 있었다.
즉, 저 자리를 내어주어선 안 된다.
그랬다간 저 음기를 받아 마교가 더욱 힘을 발휘할 것이다.
“거꾸로 말씀하신 것 아니에요?”
“전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왜 놈들에게 유리한 자리를 내주려는 건지······.”
“누가 유리하다고 그러더냐?”
제갈마혁의 물음에, 시후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듯한 지금의 심정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되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냐는 듯 빤히 바라봤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지 싶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시후는 이런 진법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극히 없었기에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갈마혁이 짧게 혀를 찼다.
“저기로 모여드는 지기(地氣)를 끊으면 어찌 되겠느냐?”
“지기를 끊으면?”
시후는 그의 말을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용이 입을 벌린 형국.
즉.
“놈들을 용의 아가리에 집어넣을 것이다.”
- 18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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