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80화 변수 (2)
시후는 바깥 상황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직 쌍괴의 싸움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시후의 부탁을 아주 충실히 이행해 주었다.
변수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먼 곳에서 싸워 달라고 부탁한 바를 제대로 들어주었다.
쌍괴의 도움을 바라긴 요원할 듯했다.
시후는 슬금슬금 적시걸의 옆으로 다가갔다.
“자신 있죠?”
“당장이라도 무릎 꿇을 자신은 있지.”
입을 놀리는 꼴을 보아하니, 붙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적시걸이 달아난다면 도마를 잡을 방법은 전혀 없을 테니깐.
“그보다, 놈이 먹은 게 뭔지 아는 눈치던데?”
“제가 일전에 마교에 침투한 적이 있어서 조금 알고 있죠.”
“마교에? 직접?”
적시걸은 믿기 힘들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와중에 시후가 거짓말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독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독마가 남기고 간 유산이 온전하지 않다는 뜻이니깐.
게다가 약효가 도는 도중에 움직여서 그런지, 한층 피로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적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쪽은 버텨 내야 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적시걸 또한 조금 전 손을 섞으며 다소 위축되기도 했으니깐.
시후는 기막을 두른 뒤 재빨리 말을 내뱉었다.
“일단, 완성된 약은 아닐 테니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급속도로 힘이 빠질 겁니다.”
“얼마나?”
그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지만, 시후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독마가 몇 단계까지 완성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덕분에 적시걸은 얼굴을 잔뜩 구겼다.
“빌어먹을, 지금이라도 마교에 붙어먹어야 하나.”
“화해의 선물로 머리를 바쳐야 할 텐데요?”
“내 머리 하나론 부족하지 않을까?”
짧은 농담을 주고받던 시후는 도마의 기도가 점차 안정됨을 느꼈다.
적시걸 또한 쌍겸을 고쳐잡았다.
어차피 당장 이 자리를 피한다고 하더라도, 마교의 집요한 추격을 피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반 각.”
시후는 그런 그에게 희망을 던져주었다.
적시걸은 반 각은커녕 반각의 반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시후의 앞을 막아 주었다.
“기회를 엿보면서 그 꼬챙이라도 찔러 넣어.”
시후는 손에 들린 꼬챙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운유성창을 꼬챙이라 부르긴 미안하지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꼬챙이라 부르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이, 독마의 기도는 고요한 호수처럼 안정되었다.
감았던 눈이 서서히 뜨이기 시작했다.
시후는 펼쳐 두었던 기막을 거둬들인 뒤 내공을 끌어 올렸다.
티끌만 한 내공이라도 더 끌어모아야 한 방이라도 제대로 먹일 수 있을 테니깐.
도마는 반개한 눈으로 시후와 적시걸을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뭣······.”
적시걸이 입을 열기 무섭게, 도마는 팔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쏘아지듯 날아오는 새하얀 도강.
적시걸은 재빨리 쌍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가 흘려보낸 도강이 시후의 좌측을 비켜 지날 때쯤, 두 사람이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어딜!”
겸(鎌)은 단병에 속한다.
도마가 들고 있는 도(刀) 또한 단병이지만, 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손잡이를 포함하더라도 길이는 고작 두 자(60cm)에 불과하니깐.
모든 무기는 짧을수록 근접전에 강했다.
물론, 투척 무기는 예외지만.
즉.
“건방진!”
무기를 맞대는 시점에서는 적시걸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겸을 교차로 휘둘러 도를 쳐냄과 동시에 좌수에 들린 겸을 역수로 쥐었다.
목적은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좌수로는 방어하며, 우수는 공격 시 드러나는 허점을 노리겠다는 의지.
의도를 알아차린다면 상대하기 쉬운 법이다.
하지만, 지금 적시걸의 선택은 정답에 가까웠다.
우우웅.
도마의 도가 짧게 울었다.
“도명(刀鳴)?”
적시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도가 우는 게 아니라, 단순히 도강이 미친 듯이 결집하여 도가 미친 듯이 떨릴 뿐이었다.
적시걸도 그에 질세라 내공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강의 밀집도에서 차이가 극명했다.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한 손으로 공격을 받아 냈다간 겸이 박살 날 테니까.
시후는 연신 뒤로 밀려나는 그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이동했다.
그 움직임을 눈치챈 적시걸이 처음으로 공세를 취했다.
우수로 하단을 노리며 좌수로 그를 막으려는 도의 옆면을 후려쳤다.
미미하게 바뀐 궤적.
적시걸은 그 찰나의 틈을 이용해 도마의 발목을 노렸다.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면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너무나도 얕은수였다.
도마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겸의 옆면을 밟았다.
바닥에 틀어박히는 적시걸의 겸.
급히 당겨보았지만, 도마는 천근추를 사용한 듯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적시걸이 우수를 휘둘러 그를 위협했지만, 그보단 도마의 도가 다다르는 게 먼저였다.
적시걸은 과감히 겸을 포기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 겸을 분지를 수 없도록, 겸에 강을 실어 그의 발을 향해 날렸다.
힘을 주려던 도마는 재차 허공으로 뛰어올랐고, 적시걸은 그를 뒤로 날려 보내기 위해 왼손으로 낙화염라장(落火閻羅掌)을 날렸다.
휘두르던 도를 가슴 앞으로 끌어당겨 막았지만, 허공에 뜬 채로 막았기에 뒤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시후가 서 있었다.
시후는 자운유성창이 으스러지도록 움켜쥔 채로 허리를 뒤틀었다.
그리고 끌어모았던 내공을 일순간에 발출시켰다.
“붕악굴천!!!”
순간적으로 탈력감이 몰려와 그대로 땅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도마를 주시했다.
무당의 제운종이나 곤륜의 운룡대구식이 아닌 이상 피할 재간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도를 휘두를 듯 오른쪽 어깨를 뒤로 젖혔다.
시후는 마른 헝겊 짜내듯 남은 내력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도마의 도가 휘둘러진 궤적을 보곤 재빨리 몸을 굴렸다.
제아무리 이 갑자가 넘는 내공을 쏟아부었다고 한들, 기(氣)와 강(姜)의 차이는 천지 차이였다.
아니나 다를까, 시후가 쏘아 보낸 붕악굴천의 기운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하지만, 시후는 빙긋 웃음 짓고 있었다.
“모든 싸움은 수(數) 싸움이지.”
도마는 시후의 공격을 받아 내며 수를 낭비했다.
그에 반해, 적시걸은 아직 수를 놓지 않았다.
“장군이다.”
적시걸의 말과 함께, 도마의 가슴에 은빛 날붙이가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바닥에 내려선 도마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적시걸이 바닥에 떨어진 겸을 주워들고 있었다.
“약에 취하면 판단이 흐려지는 건가? 어딜 날 두고 한눈을 팔아?”
단 한 번.
시후의 공세를 막아 내기 위해 단 한 번 도를 휘둘렀을 뿐이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설계되어 있었다.
적시걸이 하단을 노린 것부터 시작이었다.
그 뒤로 수많은 선택의 실수가 있었지만, 가장 큰 실책은 적시걸의 낙화염라장을 허공에서 막으면서 생긴 순간이었다.
도마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도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가슴이 꿰뚫리고도 검을 휘두를 수 있다면 그건 강시지, 사람이 아니다.
도마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오른쪽 어깨를 뒤로 젖혔지만, 그의 팔이 앞으로 휘둘러지진 못했다.
“어딜.”
적시걸의 손에서 벗어난 겸은 도마의 이마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도마의 몸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시후는 그런 도마의 시체를 바라보며 낯빛을 굳혔다.
“웬 똥 씹은 표정이야?”
“기습으로 이득을 못 취했다면 어땠을까요?”
“흥, 그래 봤자 내 상대는 아니었지.”
“진지하게요.”
“농으로 들려?”
시후는 자신만만한 적시걸의 눈을 빤히 바라봤지만, 그는 뻔뻔하게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십이마존 중 도마와 비슷한 수준의 이들이 둘 정도 더 있는데, 그럼 놈들을 상대할 때 부탁드려도 됩니까?”
순간 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크흠, 그건 정의맹에서 처리해야지! 이 몸이 이 정도 역할만 해 준 것도 감지덕지 여겨야 하거늘! 아, 저 둘은 아직도 싸우고 있군.”
적시걸은 아직 싸움을 이어 가는 쌍괴를 향해 달려갔다.
시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 없다는 말을 저렇게 돌려 말하는 것도 재주다.
하지만 시후는 곧 적시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당장 이 싸움은 이겼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독마가 죽었으니, 천력관문을 더 만들지는 못 할 터.
그렇다면 얼마나 만들어 놨는지가 중요했다.
“많지는 않을 텐데······.”
사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누가 가지고 있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만약, 도마가 팔이 멀쩡한 상태에서 천력관문을 먹었다면?
반 각이란 시간은 적시걸은 물론이고, 흩어져 있는 쌍괴를 처리하기에도 충분했을 시간이었다.
시후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비천보어검을 활용하면······.”
분명 크게 한 방 정도는 먹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개화하지 않은 능력까지 깨어낼 수 있다면 더욱이.
시후는 싸움 소리가 잦아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천보어검도 중요하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건 휴식이었다.
다만.
“어디서 쉬지?”
시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여섯 초인의 싸움으로 서평궁은 박살이 났다.
아주 제대로 말이다.
* * *
쌍괴는 돌아갔다.
하지만, 시후는 남았다.
마교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연락망이 제대로 구축되기 전까지는 인질이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자유로웠다.
시후는 그 자유를 이용해 포달랍궁을 찾았다.
“또 왔네, 또 왔어.”
“스님도 아닌 놈이 왜 저러는 거람?”
“그보다, 저 무식한 창은 왜 등에 메고 저런데?”
그리고 뒤에서 떠드는 이들을 무시하며 어제와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쯧쯧쯧.”
시후를 지켜보던 이들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야 신기하게 지켜봤지만, 며칠째 똑같은 시간에 나타나 똑같은 일을 반복했으니, 관심이 시들해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일도 아니었다.
시후는 포달랍궁을 올랐다.
그냥 오르는 게 아니라, 일보일배(一步一拜)를 하면서 말이다.
포달랍궁은 홍산 위에 지어져 있었다.
즉, 계단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계단은 갈지(之)자로 만들어져 있기에, 오르는 데 시간이 적잖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시후가 포달랍궁의 문을 두드리는 데까지는 반 시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문 너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시후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몸을 돌렸다.
내려오는 데는 반 각이면 충분했다.
“벌써 반 시진이 지났나?”
“그런가 본데?”
시후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또다시 절을 올렸다.
그리고 한 걸음 앞으로.
정상적인 방법으론 포달랍궁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물론 담을 넘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가 변명이고 나발이고 즉살일 것이다.
게다가 행여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호감도가 바닥을 내리꽂을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돌아가더라도 이렇게 하는 수밖에.
어차피 정의맹이 마교를 압박하며 적잖은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이후 시후는 산을 올랐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정수리에 떠 올랐던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질 때쯤, 사람들은 홍산을 내려오는 시후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꽉꽉 채웠군.”
“신경 쓰지 말고 가세. 어차피 저자도······. 어?”
남자의 예상과 달리 시후는 다시 산을 올랐다.
“아주 작정했나 본데?”
“어차피 며칠 못 가겠지.”
며칠동안 기행을 보였기 때문일까.
지켜보는 이들은 금방 관심을 거뒀다.
그렇게 시후는 달이 뜰 때까지 홍산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제아무리 내공으로 육신을 지탱한다고 해도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시후는 내공을 단 한 푼도 사용하지 않았다.
툭, 툭.
시후는 높다란 포달랍궁 문을 손등으로 두들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려갈 힘은커녕 기절할 것만 같았다.
“안 돌아가면 난리가 날 텐데······.”
시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깊은 수마에 빠졌다.
- 18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