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79화 변수 (1)
적시걸은 전력이 바뀌었으니 조건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을 꺼냈다.
도마는 얼굴을 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더는 말을 섞기 싫었는지 팔짱을 낀 채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서 나선 이는 ‘흑학(黑鶴)’이라는 자였다.
그에 적시걸도 자신이 나설 수 없다며 시후를 내세웠다.
무공 수위를 놓고 따진다면 급이 맞지 않았지만, 적시걸은 시후를 ‘서평회 내총관’이라 소개하였다.
그에 시후는 당황하지 않고 흑학과 설전을 펼쳤다.
“감숙? 아무리 못해도 호남은 약속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주라면 모를까, 호남은 절대 안 된다.”
“귀주라니, 누굴 호구로 보십니까?”
“아무튼, 호남은 절대 안 돼.”
개봉이 천하의 요회라 불리며 물류의 중심지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강을 포함하지 않았을 때 이야기였다.
장강은 사천을 시작으로 제법 비중 있게 지나는 성만 하여도 여덟 개였다.
괜히 장강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절강과 강소성이 그나마 무난한데, 호남을 포기하는 대가로 두 곳을 모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없구나.”
“도둑놈이라니요. 쓸모도 없는 감숙을 먼저 제안한 게 누군데요?”
“······ 감숙도 나름 비단길을 지나는 곳이니만큼, 적지 않은 이득을 취할 수 있다.”
흑학이 조금 주춤거리며 대답하자, 시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곁눈질로 서괴를 바라봤다.
시간을 제법 끌었으니 흑학에 대한 파악은 끝났을 것이다.
“대답이 느리시네요. 좌 호법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시후의 물음에 서괴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정의맹에 있을 때 동냥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신교의 상황을 들으면 하북, 하남, 호남 중 하나를 내어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절강과 강소 두 곳을 요구하는 건 그리 과한 욕심이 아니지.”
“그 말씀은?”
“나는 내총관의 제안이 제법 합당하다고 생각하네.”
서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을 만지면서 말이다.
신호다.
이길 수 있다는 신호.
시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후괴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 호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 우리가 두 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감당될지는 모르겠군. 기본적으로 인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네.”
후괴는 손끝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들기며 고개를 저었다.
시후는 그의 손끝을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중지와 검지가 겹치기 시작했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몸을 드러눕다시피 한 적시걸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적시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두 분의 의견이 나뉘니, 회주께 여쭤보지 않을 수 없겠군요.”
“아무리 내총관을 신임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대소사는 내가 정해 줌이 옳겠지?”
“물론입니다.”
마주한 적시걸의 눈빛에 담겨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눈빛에 살기가 맴돌기 직전, 눈을 감았다.
“내가 여태까지 서장에 머물렀던 이유는 내 역량을 잘 알아서지. 지금 우리 서평회의 역량으로는 신교에서 두 성을 내어준다고 해도 굴릴 기반이 없어.”
“그 말씀은?”
“두 성 대신 하나만 받아야지. 이것처럼!”
적시걸은 자리에서 튕겨 일어나며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 맺힌 새하얀 수강.
도마의 손은 발도를 위해 허리춤 아래로 내려가다가 멈췄다.
어차피 늦었다는 판단.
판단은 정확했다.
그가 팔을 들어 올려 막지 않았다면, 그의 왼팔은 떨어져 나갔을 테니깐.
“큭!”
콰아앙!!
그 사이, 흑학은 서괴의 기습에 밖으로 튕겨 나갔다.
다만, 청사(靑蛇)는 뒤로 굴러 후괴의 쌍장을 피했다.
시후는 재빨리 벽으로 다가가, 기대어 놓았던 자운유성창을 들어 올렸다.
그 사이, 적시걸의 수강에 어깨를 베인 도마는 그를 밀어낸 뒤 도를 뽑았다.
그 모습에 적시걸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쌍겸(雙鎌)을 뽑아 들었다.
“쳇, 얕았군.”
“······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알다마다.”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는 넌 곱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천마의 뒤나 닦아 주는 놈이 시건방지게 거들먹거리기나 하고 말이야.”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을까.
도마의 기세가 한층 더 매서워졌다.
하지만, 이미 손해를 본 상황에서 쉽사리 움직이기 어려웠는지 움직임은 없었다.
그 사이, 후괴는 청사에게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어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건방 떨던 것만큼 실력이 되나 볼까?”
“변방에서 소꿉놀이나 하던 놈이 기습으로 이득을 취했다고 기고만장하는구나.”
도마의 어설픈 도발에 적시걸은 피식 웃었다.
그가 서장을 평정하며 겪은 일이 오죽 많았겠는가.
부모 욕이라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그에게 이런 도발은 너무나도 시답잖았다.
“변방은 누가 더 변방인지 모르겠네. 너희 저기 천산에 숨어 산다며? 차라리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 천마 놈보다는 내가 더 잘······.”
도마의 얇은 왜도(倭刀)에 그보다 족히 세 배는 두꺼운 도강이 씌워졌다.
적시걸의 입가엔 웃음이 맺혔다.
마치 도발은 이렇게 하는 거라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가 이토록 여유를 부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도마의 왼쪽 어깨를 잘라내지 못했지만, 양손으로 도를 쥐지 못할 정도의 피해는 주었다.
뭉클뭉클 솟구치는 피만 아니라면 어깨뼈가 보일 정도였으니, 도를 쥐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한 손으로 도를 휘두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잣거리 건달들도 한 손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하물며 이 정도 고수들에겐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이구, 그렇게 무식하게 내공을 끌어 올린다고 이길 것 같아? 그보다, 지혈부터 하지 그래? 내가 그 정도 시간은 할애해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새빨간 거짓말이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하물며 그는 이기는 싸움이 아니면 안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틈을 보이면 목을 물어뜯을 것이다.
도마의 상의가 피로 젖어 든 것도 모자라, 하의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신중했다.
덕분에 적시걸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젠장.”
도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이 자리에서 모두 폭사하자는 것처럼 미친 듯이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시후는 슬금슬금 움직이며 문을 찾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문으로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그만한 기운을 담아서 휘두르면 팔이 터져 나갈 텐데?”
걱정하듯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순백의 도강이었다.
적시걸은 이를 악물고 쌍겸을 휘둘렀다.
시후는 재빨리 적시걸의 뒤편으로 이동하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쩌어엉.
커다란 범종이 터져 나가면 이런 소리가 날까?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후에게 귀를 틀어막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무너지는 건물 잔해를 튕겨 내기 위해 창을 휘두르기 바빴으니깐.
쳐 내고, 쳐 내고, 또 쳐 냈다.
일장 반경 바깥쪽에 잔해가 수북이 쌓였다.
뿌연 먼지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기운은 여전히 느껴졌다.
저만한 충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멀쩡한 적시걸의 실력에 시후는 새삼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가 아무리 언행이 가볍다고는 한들, 역시 팔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수였다.
“후, 한쪽 팔만으로도 제법이야.”
적시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거센 바람이 불었다.
사방을 자욱이 채운 먼지는 한쪽으로 날아갔다.
걷힌 먼지 구덩이 속에서 손목을 까딱거리는 적시걸을 보니, 그가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걷어 낸 듯했다.
옷이 군데군데 찢어진 것을 제외하면 제법 멀쩡해 보였다.
그에 반해, 도마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깔끔하던 머리는 봉두난발로 변하였고, 오른손등은 당장에 터질 듯 불끈불끈했다.
그나마 그 와중에 지혈한 것인지, 왼쪽 어깨에서 흐르던 피는 멎어 있었다.
“그런데 좀 실망인데? 아무리 한쪽 팔로 휘둘렀다고 해도 초식의 정교함이 이렇게 떨어져서야, 원.”
적시걸이 거들먹거리며 여유를 부리자, 시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궁지에 몰린 쥐는 사람을 무는 법이다.
그리고 도마는 쥐 따위가 아니었다.
“빨리 처리하시죠.”
“구경하기 싫으면 밖에 나가서 저 둘이나 돕던가.”
“제가 말했죠? 위기에 몰리면 선천진기를 끌어다 쓴다고.”
“어차피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늙은이들은 선천진기도 얼마 없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천진기는 수명을 의미했다.
즉, 한 살이라도 어릴수록 개문의 효과가 급증했다.
도마가 선천진기를 끌어다 쓴다고 해도, 아주 확 강해지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속 시간도 문제였다.
조금만 시간을 끌어도 도마는 픽 쓰러질 테니깐.
그렇기에 시후의 걱정과 달리, 도마도 선천진기를 끌어다 쓰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리 불안한 것일까.
“선천진기를 끌어다 쓸 생각은 없다.”
도마는 시후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에 적시걸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렴 그렇겠지. 그 나이쯤 되면 끌어쓰다가 죽을 테니깐.”
“네 놈이 차시후라는 놈이더냐?”
“오, 이 녀석을 알아? 아니, 그보다 얼굴을 바꿨는데도 용케 알아보네? 역용의 흔적을 알아차릴 수 없을 텐데 말이야.”
시후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적시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아본 거람? 방법이 있으면 나도 알려 줘 봐. 그럼 곱게 죽여 줄지도 모르잖아?”
시도 때도 없이 깐죽거리는 적시걸의 주둥이에 시후는 혀를 내둘렀다.
얼마나 도마에게 쌓인 게 많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되는군. 다 의도적으로 흘린 정보였어. 정의맹에서 있었던 일도, 그 여덟 연놈의 이야기도.”
도마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네가 상대했던 마교는 교가 지닌 힘 일부에 불과했다.”
“본신의 힘은 아직 발휘하지도 않았다!”
시후는 옆에서 추임새를 넣는 적시걸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기회에 이야기를 나누며 뭔가를 캐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깐.
“뭘 믿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통 당해 주는 모습을 보니 별걱정은 안되네요.”
“당해준다, 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물론, 실제로 당하기도 했으니, 자신감이 붙을 만하지.”
“허세를 부릴 거라면······.”
시후는 순간 움찔했다.
잠시나마 독마의 덩치가 커진 것처럼 보였다.
비단 그렇게 느낀 건 자신만이 아닌지, 적시걸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독마에 이어 환마와 권마까지 잃었는데, 우리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나?”
시후는 몸을 훑고 가는 기파를 느꼈다.
혹시나 해서 적시걸이 기파를 뿌려 주변을 살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말해 주었다.
“이 와중에 허세라고? 대단한데?”
적시걸은 쌍겸을 고쳐잡으며 빙긋 웃었다.
웃음 아래 감쳐진 감정은 분노였다.
잠시 움찔했던 자신을 향한 분노.
“그 쓸모없는 팔부터!”
그는 섬전처럼 달려들며 쌍겸을 휘둘렀다.
다만, 달려들었던 것보다 배는 빠르게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깊은 고랑을 만들어 냈다.
독마가 적시걸과의 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선천진기?”
합리적인 의심이다.
하지만, 시후는 보았다.
적시걸의 고개는 분명 좌우로 움직였음을.
“빌어먹을······. 시간을 끌었군?”
그의 말에 도마는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효가 도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
약?
머릿속을 빠르게 뒤졌다.
한 가지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이미 독마는 죽지 않았는가.
“독마?”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러자 도마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반응에, 시후는 확신했다.
앞당겨진 일련의 일들로 인해, 독마 또한 ‘천력관문(天力關門)’의 개발에 박차를 가했었다는 것을.
- 180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