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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의 클리어 공식-178화 (160/201)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78화 신뢰 (3)

한때 서장은 중원 못지않게 치안이 훌륭했다.

서장을 오가는 승려들에게 두려운 대상은 오로지 산짐승밖에 없었다.

그토록 평온한 서장이 만들어진 건 오롯이 ‘포달랍궁’ 덕분이었다.

서장의 하늘.

그들을 칭송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소림과 같은 불문의 뿌리에서 나온 그들은 서장의 치안을 책임졌다.

다만, 소림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기본적으로 불의에 분노한다는 점은 같았으나, 악을 증오하는 정도가 전혀 달랐다.

십계(十戒) 중 가장 첫 번째에 올라와 있는 불살(不殺)을 어기는 일이 매우 잦았다.

하지만, 그건 삼십 년도 더 전의 이야기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포달랍궁이 칩거에 들어간 기간은 그 세 배에 달했다.

처음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두려웠으니깐.

칩거에 들어갔다고 한들, 언제 다시 밖으로 나올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자, 다들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칩거가 안 깨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포달랍궁이 두려워 서장을 떠났던 이들은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포달랍궁이 두려워 숨죽였던 이들은 조금씩 꿈틀거렸다.

하지만, 포달랍궁은 반응하지 않았다.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그래도 포달랍궁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랍살(拉薩)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계기로, 서장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랍살은 포달랍궁이 자리한 곳이었다.

그때 자신을 서장의 별이라 부르는 이가 나타났다.

“따지고 보면, 내가 포달랍궁을 대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니깐.”

쌍괴는 적시걸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지만, 시후는 어느 정도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적시걸이 만든 서평회(西平會)는 기본적으로 수탈을 일삼았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켰다.

물론, 그 선의 기준은 제법 높았지만 말이다.

적시걸의 의미 없는 자랑을 흘려넘기며 산을 넘다 보니, 굽이굽이 흐르는 강을 끼고 자리한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 하나하나 중원과 다른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겼다.

“흐흐흐, 보이는가?”

적시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한곳을 가리켰다.

도시 속 솟아오른 홍산과 그 위에 지어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포달랍궁이었다.

만 개에 달하는 방이 있다는 자금성에 비하면 그 규모가 십 분지 일에 불과하지만, 산과 함께 어울린 덕분이지 웅장함은 그에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눈길을 잡아끄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서평궁이었다.

포달랍궁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지어진 서평궁을 보던 서괴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정말이지,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없다.

적시걸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서평궁은 포달랍궁과 똑 닮아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기에, 네 사람은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길 기다렸다.

그리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어차피 늦은 오후이기도 했으니깐.

어둠이 깔리자, 시후와 쌍괴는 적시걸의 뒤를 따라 서평궁으로 들어섰다.

궁 안에는 시후와 얼추 비슷한 이들도 보였다.

물론, 쌍괴와 비견될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적시걸은 쌍괴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원한다면 적당한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는데?”

“필요 없어.”

“에이, 변방이라서 그래? 그래도 있을 건 다 있고, 두 사람이 더해지면 중원으로 진출하지 못할 것도 없는데 말이야.”

“우리는 도마를 상대하러 온 거로 알고 있는데?”

서괴는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다만, 적시걸은 거절당했음에도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차피 거절하리란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둘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혜아에게 원하는 걸 안겨 줘야 하지만, 그가 줄 수 있는 건 돈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으니깐.

게다가 제갈마혁이 진법에 관해 가르쳐 주기로 한 이상, 두 사람을 끌어들일 방법은 영영 날아갔다고 보는 게 옳았다.

“방문하기로 약속된 날은 닷새 뒤지만, 일찍 올 수도 있으니 긴장 늦추지 말고 지내.”

적시걸은 시비를 시켜 쌍괴를 구석진 방으로 보낸 뒤, 시후에겐 따라오라 손짓했다.

그의 뒤를 따라 북서쪽 구석에 자리한 건물에 다다랐다.

“여기서 지내라.”

그의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곳에서 나오지 말라는 듯했으니깐.

적시걸은 그런 시후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인질이 어딜 돌아다니려고?”

“제가 달아날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런데요?”

시후의 물음에 그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팠다.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이.

하지만, 시후는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집요하게 그를 노려봤다.

“귀찮아.”

“아니, 대답해 주는 게 뭐가 귀찮다는······.”

“그게 아니라, 네 녀석이 돌아다니면 아이들이 계속 보고할 테니, 그냥 조용히 여기에 있으란 소리다.”

잠시 잊고 있었다.

적시걸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가장 중시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운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머리를 바삐 굴렸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방법은 없었다.

시후는 조금이나마 동정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갈 곳도 없는 놈이 왜 똥 씹은 표정이야?”

“갈 곳은 없어도, 갇혀 있는 건 좀 그렇죠.”

그가 관심을 보이자, 시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층 더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적시걸은 관심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가 문 너머로 사라지자 시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이 조금 틀어졌다.

아이들이 계속 보고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지켜보는 눈을 거둘 것 같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끝난 다음에 갈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곤란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몰랐다.

일원신공을 유일 단계로 끌어올리는 건, 절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테니까.

* * *

적시걸의 예상대로, 마교는 약속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이 빗나간 것도 있었다.

“세 명?”

“예, 그와 비슷해 보이는 연배의 인물이 둘 있었습니다.”

비슷한 연배.

그 말에 적시걸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그가 뭔가 고민할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를 잘 안다고 자부하긴 어려웠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읽기 쉬웠다.

“절대 그와 같은 급의 인물이 오진 않았을 겁니다. 그건 자존심상 용납하지 않았을 테니깐요.”

“······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시후는 ‘그럼 그 뒤늦은 반응은 뭐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구태여 그를 도발해 봤자 의미가 없었기에 속으로 꾹 삼켰다.

지금은 그 둘이 누군지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계획을 바꾸시죠.”

“어떻게?”

“이쪽도 숫자를 맞춰야죠.”

시후는 그렇게 말하며 쌍괴를 바라봤다.

혈랑을 떠올렸다.

그 정도라면 쌍괴가 이길 수 있을까?

고개를 끄덕이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가로저을 정도는 아니다.

얼추 비슷하리라.

팔황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긴 하지만, 저쪽도 도마와 같은 급이 아니라면 승산은 이쪽에 있다.

“버틸 수는 있죠?”

“버티는 게 아니라, 이길······.”

시후의 질문에 적시걸은 발끈하며 외쳤지만, 곧 말끝을 흐렸다.

반반에 가까운 싸움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닐 테니까.

“버티실 수는 있다는 거로 받아들일게요. 그리고, 두 분은 상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제게 신호를 주세요.”

“목을 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똑같이 행동하면 수상히 여길 테니 나는 검지와 중지를 꼬겠네.”

두 사람의 대답에 적시걸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못 이길 것 같으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에 시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밑으로 들어간다고 해야죠.”

물론 거짓으로 말이다.

이어 네 사람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마침 좋군. 우리가 대화합에서 온갖 잡일을 돕지 않았나? 잡일을 떠맡기는 게 화가 나서 돌아섰다고 하면 될 것 같네.”

“고작 그 정도 이유로?”

“본래 알려진 우리 성격이라면 충분히 먹히지 않을까?”

충분하다.

대화합에 숨어든 마교의 끄나풀들이 보내는 연락을 끊은 건 막바지쯤이었으니, 쌍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했을 터.

두 사람이 화를 못 이기고 서장으로 넘어왔다고 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자리는 내 바로 밑으로 줬다고 하지.”

“도울 만한 다른 이들은 없나?”

“도착한 첫날 봤잖아? 없어.”

“몇몇은 쓸 만하긴 하던데······.”

후괴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지만, 적시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끽해야 저 녀석과 비등비등할까 말까 하는 수준이지. 그리고 놈들은 마교와 척을 진다고 하면 당장에 등을 돌릴 놈들이야.”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적시걸은 말끝을 흐리며 시후를 한차례 훑었다.

너는 왜 가만히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그에 시후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왜 두 분한테 신호를 보내라고 했겠어요?”

* * *

꾹 다문 얇은 입술과 가느다란 눈매는 그의 날카로운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생각은 해 봤나?”

목소리는 외견보다 더욱 냉랭했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싸늘한 한기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렇지만, 적시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제법 깊이 있는 다도를 즐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손놀림이었지만, 자연스러움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앗 뜨거워!”

그는 찻물을 가득 머금었다가 입을 데곤 그대로 뱉어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음에도, 질문을 던진 이는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본좌는 같은 말을 세 번 하지 않는다. 생각은 해 봤나?”

지금이 두 번째 질문이니 대답하라는 강요였다.

적시걸은 강요받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하지만, 적시걸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상대는 도마였으니깐.

“크흠, 도마께서는 협상의 기본을 모르시는군. 아직 이야기를 못 들으셨나 보오?”

“무슨 이야기?”

순간적으로 도마의 어깨가 움찔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옆에 앉아 있던 이가 선수를 쳤다.

적시걸에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도마는 갑자기 끼어든 이를 한번 흘겨보긴 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덕분에 적시걸을 한결 여유를 찾았다.

“당시 제안을 할 때는 회에 고수라 불릴 이가 얼마 없었지만, 요 며칠 사이에 어마어마한 전력이 추가되었단 말이지.”

두 사람이 관심을 보였지만, 도마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적시걸은 씩 웃으며 종을 흔들었다.

곧 이쁘장한 시비가 안으로 들어섰다.

“두 분을 모시고 오거라.”

이번엔 도마까지 반응을 보였다.

적시걸이 아무리 서장이라는 구석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다지만, 그의 무공은 진짜였다.

그런 그가 ‘분’이라 칭하자, 세 사람은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발소리가 다가올수록 세 사람의 표정은 굳어졌다.

각자 병장기에 손을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

이윽고, 문을 열고 쌍괴가 들어오자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은연중에 병기를 빼기 쉽도록 자세를 잡았다.

“강호에서 쌍괴라 불리는 분들이오. 정의맹의 치졸한 행태에 염증을 느껴 이쪽으로 왔지.”

쌍괴는 적의가 없다는 듯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 뒤 포권을 취했다.

“서괴 추비룡이오.”

“후괴라 불리는 철지탁이오.”

쌍괴의 소개에도 도마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좌측에 있던 자는 뭔가 들을 바 이야기가 있었는지, 입가를 가린 채 도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잠시 뒤,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소만.”

이번에는 분이라 높여 말하지 않았음에도 다들 관심을 보였다.

재차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전과 달리 세 사람의 표정엔 한결 여유가 넘쳤다.

느껴지는 기세는 명백히 그들보다 한 단계 아래였으니깐.

곧 문을 열고 시후가 들어왔다.

“젊군.”

시후의 용모파기는 이미 마교에 널리 퍼졌다.

하지만, 세 사람 중 시후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천태만변의 영향으로 얼굴이 변형되었습니다.]

곤륜을 떠나기 전, 백리은에게 배운 천태만변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 179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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