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77화 신뢰 (2)
적시걸의 요구 사항은 단출했다.
사람을 보낼 것.
그리고, 사람을 보낼 것.
원하는 종류는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을 요구했다.
첫 번째로 요구한 사람은 그와 같이 도마를 상대할 고수였다.
“흥, 서장의 별이니 뭐니 하더니, 고작 하나를 상대하지 못해서 도와달라는 건가?”
이름 모를 화산의 장로가 비아냥거렸지만, 놀랍게도 적시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말을 꺼낸 화산 장로의 낯빛이 굳었다.
적시걸은 서장에 있어서 그렇지, 그의 무공 수위는 팔황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런 그가 홀로 상대하기 힘들다는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적시걸은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확실히 이길 것 같은 싸움만 해.”
그의 말에 다들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즉, 혼자서도 상대할 만하지만, 안전을 위해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대부분 그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적시걸을 부끄러울 게 없다는 듯 되려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후의 생각도 그와 같았다.
도마의 무공은 십이마존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만큼, 그를 홀로 상대하는 건 대단히 위험했다.
작정하고 동귀어진을 노린다면 그 누가 버틸 수 있겠는가.
위험을 감수할 바에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최소한 그 한 수를 받아넘길 수 있는 인물이어야겠군.”
백리은의 말에 다들 인상을 찌푸렸다.
팔황급 고수의 동귀어진을 받아넘길 수 있는 인물.
물론, 완전히 받아치는 게 아니라 흘려넘길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하다.
문제는 그만한 고수도 극히 드물다.
“그렇다고······.”
백리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좌우를 힐끔거렸다.
검후와 공진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명일도 곤란한 표정이었으며, 천태는 일말의 고민도 없다는 듯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제갈마혁은 절대 보낼 수 없다.
그의 진법은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지 모르니깐.
마지막 남은 금정신니는 시선을 피했다.
그에 백리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가야 하나?”
“절대 안 됩니다.”
또 그랬다.
화산의 이름 모를 장로는 백리은을 만류하고 나섰다.
그에 적시걸의 표정이 구겨졌다.
계속해서 끼어드니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듯 보였다.
“버러지 같은 놈이 주제도 모르고 여기저기 끼어드는구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서늘한 눈빛은 당장이라도 도를 빼 들 것만 같았다.
덕분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만, 그의 말대로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제갈마혁이 적시걸의 편을 들자, 방안을 가득히 채운 살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매화검자를 비롯한 화산파 인원들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과거의 은원은 ‘마교’라는 적 앞에 잠시 접어 둠이 옳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제갈마혁의 주도하에 이뤄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둔 사람이 있나?”
“딱히. 그냥 놈의 신경을 긁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해.”
“기준이 모호하군.”
적시걸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매화검자를 가리켰다.
“적어도 저 수준보다는 강해야지.”
이번엔 화산파에서 단체로 발끈했다.
제갈마혁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곧이어 그가 붙잡은 책상 끝부분이 파스슥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그쯤 해라.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흥.”
아직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동맹도 아니다.
적시걸도 그 사실을 인지했기에 더 이상의 도발은 하지 않았다.
“저 아이를 대놓고 지목한 걸 보아하니, 생각해 둔 사람이 있나 본데, 내 말이 맞나?”
그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이 안에 있는 이들 중 팔황을 제외하면, 운허를 비롯한 사단 대주들이 가장 강했다.
그런데 사단 대주 중 한 사람인 매화검자를 지목하며, 그보다 더 강해야 한다고 하는 건 생각해 둔 사람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서장에서 그 도마라는 놈을 처리하면 그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만, 우리가 빠진다면······.”
“내가 원하는 건 여기에 없는 사람이야.”
“없는 사람?”
그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있을 사람은 여기에 다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없는 사람이라니.
다들 그가 누굴 염두에 두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시후는 그의 말에 누군가 머릿속을 스쳤다.
눈이 마주친 적시걸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한 명은 아는 듯하군.”
* * *
서장과 손을 잡는 일은 꽤 중요하다.
도마를 처리하는 건, 단순히 마교의 전력을 감소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서장의 협력은 마교에 심대한 압박을 선사할 것이다.
당장에 정파를 상대하기도 쉽지 않은데, 서장에서 언제 옆구리를 치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건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다가갈 테니깐.
그렇기에 화산파도 과거의 은원을 잠시 묻어 두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도 있었다.
“싫어.”
바로 불노괴.
그녀는 재차 권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단호히 거절했다.
덕분에 난감해진 건 만파견자였다.
그는 통안파파를 대신해서 이 자리에 참석했기에, 문주 대행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불노괴는 매우 어려운 상대였다.
주변의 쏟아지는 눈치에도 그는 불노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런 그를 대신해서 제갈마혁이 나섰다.
“싫다면 강요할 순 없지.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자세한 이유를 들었으면 하는데, 말해 줄 수 있겠나?”
“뭐, 어려울 건 없지. 첫째, 난 이미 개방의 똥을 닦아 주러 서장에 다녀왔으니 또 다녀오기 싫어.”
그에 추나행을 비롯한 개방 인원들이 얕은 신음을 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
분명 개방은 서장에서 곤욕을 치를 뻔했고, 불노괴가 돕지 않았으면 서장과의 관계도 크게 틀어졌을 테니깐.
그녀의 말에 제갈마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이유는?”
“둘째, 그로 인해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어. 내 제자들을 못 본 지 벌써 두 달이 다 돼 가는 것 같은데, 지금 막 가닥을 잡아 가는 시기라서 내가 필요해.”
첫 번째 이유가 나름 합리적이었다면, 두 번째 이유는 다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다들 후인을 키워 본 전력이 있었다.
초반에 올바른 방향을 잡아 주는 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긋난 길을 돌아오는 건 시간을 배로 잡아먹는 법이니깐.
“셋째, 난 당분간 신의에게서 못 떨어져.”
그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와중에 시후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하자마자 약을 먹은 게 분명했다.
경과를 지켜봐야 할 테니, 족히 이 주 정도는 신의에게 붙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지만, 불노괴는 아직 할 말이 더 있는지 입을 뗐다.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적시걸을 노려보더니 내뱉듯 말을 뱉었다.
“저놈과 더 얽히는 건 사양이야.”
“전매, 저놈이라니.”
“닥쳐.”
시후가 불노괴를 서장으로 보낸 가장 큰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와 적시걸의 관계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자 관심을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누군가 나서서 불노괴 제자들의 무공을 손봐 주겠노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음공’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누구 하나 의견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다들 말없이 불노괴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강요에 가까운 시선에 짜증이 나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굳이 내가 갈 필요가 없잖아?”
“마땅한 적임자가 없으니······.”
“없긴? 두 명이나 있는데! 아니, 정확히는 세 명이지.”
“세 명?”
무슨 헛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그녀는 문을 가리켰다.
“신의와 쌍괴!”
그 말에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앞에 말한 신의는 논외다.
그가 무공을 사용할 때는 귀찮은 상황을 피해 달아날 때밖에 없었으니깐.
하지만, 쌍괴는 다르다.
이야기를 꺼낼 볼 만했다.
시후는 자신의 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에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그 두 사람과 가장 친분이 가장 깊은 사람은 단연 시후였으니깐.
* * *
“다녀오지 못할 건 없지.”
후괴의 대답과 동시에,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분명 한 수를 받아넘길 수 있는 인물이라는 조건에 부합했다.
여기저기서 ‘쌍괴가 정말 달라진 것 아니냐’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개문을 사용한 파양도를 처리해 준 것부터 시작해서, 최근 대화합을 위해 여러모로 힘써 준 것까지.
미담이 흘러나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고맙네. 그 도마라는 놈의 무공이 상당하다고 하니 조심해야 할 걸세.”
“고맙긴. 다만, 서장으로 가는 대신 부탁이 하나 있는데······.”
몇몇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바라는 게 있어서 이렇게 돕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후괴는 그런 질타 어린 목소리에 뺨을 붉혔다.
“터무니없는 부탁만 아니라면 못 들어줄 리 있겠는가. 말해 보게.”
제갈마혁은 은연중에 벽을 쌓았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면 꺼내지 말라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그에 후괴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혜아가 최근 진법에 관심이 많은 거 같던데, 조금 가르침을 줄 수 있겠는가? 아! 제갈세가의 절진을 가르쳐 달라는 말은 아닐세. 그냥 그 오행진 같은 거 있지 않은가? 그런 간단한 거라도 아이의 눈에 맞춰서 가르쳐 주면 좋겠네. 내가 익힌 뒤 가르쳐 주려 했지만, 도통 모를 이야기라서······.”
그의 말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를 욕하던 자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제갈마혁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 번졌다.
후괴는 눈치를 살피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곤란한가?”
“으하하하하! 아닐세, 아니야. 그게 무엇이 어렵다고 안 가르쳐 주겠나. 좋아, 그 아이에게 진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쳐 주지. 다만, 지금은 그 아이를 여기로 데려올 수도, 자리를 비울 수도 없음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의 대답에 후괴는 목이 빠지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서괴는 그런 후괴를 바라보다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우리 둘이 자리를 비워도 문제없겠는가?”
쌍괴가 근 오십 년간 붙어 다녔다는 걸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후괴가 간다고 했으니, 그도 당연히 따라가리라 생각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대부분 두 사람을 이쪽 전력으로 취급하지 않기도 했으니깐.
“제기랄, 데려가는 건 난데, 왜 내 허락은 안 받는 거야?”
적시걸이 짧게 투덜거렸지만, 다들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에 뿔이 났는지, 적시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후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 녀석도 데리고 갈 거야.”
“무슨? 처음 이야기와 다르지 않나?”
“다르긴. 난 돌아갈 준비할 테니깐 네가 설명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방을 빼져 나갔다.
시후는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신뢰하지 않으니 신뢰의 징표로 누군가가 필요했죠.”
“그런······. 그건 너무······.”
“이 자리에 앉히기 전부터 이야기한 거고, 제가 먼저 제안한 겁니다.”
말이 좋아 ‘신뢰의 증표’지, 실상 ‘인질’이었다.
수틀리면 언제든지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인질.
다들 안타까운 시선으로 시후를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시후는 자신을 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교를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선 서장에 들려야 했다.
일원신공을 유일 단계로 끌어 올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서장에 있으니깐.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응? 뭐라고 했나?”
“그냥 혼잣말이에요.”
시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일원신공을 유일 단계롤 끌어올리는 건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아직은 말이지.’
- 178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