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76화 신뢰 (1)
서장은 저 북원과 마찬가지로, 현 황실의 지배력이 닿지 않는 곳이다.
즉, 힘이 있다면 황제 못지않은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힘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지만, 무법 지대라 불리는 서장에서 힘은 당연히 무력을 뜻했다.
물론, 힘으로 모든 것을 짓누른 만큼 그의 성향은 ‘정파’라고 보기 어려웠다.
자신에게 득이 되면 손을 잡고 옳은 일이라도 실이 된다면 언제든지 내칠 수 있는 자.
‘서장의 별’이라 불리는 적시걸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알아본 몇몇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썩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군.”
“에, 아무래도 엊그제 마교의 공격에 다들 날이 바짝 서 있어서 그럴 겁니다.”
“과연?”
적시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단순히 힘만으로 서장의 별이라 불리지 않았다.
무법 지대인 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력 못지않게 눈치도 중요하다.
그런 그가 경계 어린 눈빛과 적개심을 구분하지 못하겠는가.
더욱이.
“적시걸!”
대놓고 적의를 보이는 자가 있다면 말이다.
시후는 재빨리 적시걸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키게.”
소매에 수놓아진 여덟 개의 매화.
화산의 장로 중 한 명이다.
다만, 시후는 그와 말을 섞어 본 적도 없었기에 이름조차 몰랐다.
“제 손님입니다.”
“자네 손님이라면 화산이 양보해야 하나?”
그는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는 듯 화산을 들먹였다.
시후는 순간 주춤거렸지만, 끝내 자리를 지켰다.
그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안 그래도 화산과 관계가 썩 좋지 않았기에 한숨이 새어 나오려 했지만, 때마침 적시걸이 시후를 옆으로 밀쳐 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있다마다.”
적시걸을 어디 말을 꺼내 보라는 듯,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십 년 전, 염수라는 놈 기억하겠지?”
“염수······. 아, 그 고로묵수(枯老墨手) 쓰는 놈?”
“그래! 화산파 이대 제자 둘을 처참하게 죽이고 서장으로 달아나 네 밑으로 기어들어 간 그놈!”
“그런데?”
적시걸은 되레 그걸 왜 자신에게 따지냐는 듯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시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정도 성격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관계가 틀어진다면 과연 도움이 될까 싶었다.
“놈을 내어달라고 했을 때 네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할지 모르겠구나.”
“기억 안 나.”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이렇게 뻔뻔하게 중원에 발을 디뎠겠지.”
그는 눈을 번뜩이며 검병을 붙잡았다.
곤란했다.
정말 곤란했다.
두 사람의 무공 차이를 굳이 어떤 것에 빗대자면, 성인 남자와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차이가 난다.
즉, 적시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의 목을 날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적시걸의 자비를 바라야 했지만, 과연 그가 손속에 사정을 둘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시후는 재차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비켜.”
하지만, 비키지 않으면 베어 버릴 듯한 적시걸의 기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죽어 줄 순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가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안 나는군.”
“기억력이 안 좋은 건 자랑이 아니지.”
“쯧쯧, 비유도 못 알아먹다니······.”
백리은의 등장에 적시걸의 기세가 한풀 누그러졌다.
둘의 관계는 썩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적시걸이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친분이 있는 이를 꼽으라면, 백리은은 두 손가락에 들어갈 것이다.
두 손가락에 들어가는 이유는, 친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둘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서장을 벗어나진 않았을 텐데, 이 아이 때문이냐?”
“쓸데없이 이곳까지 오진 않았지.”
“그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가거라.”
“누가 들으면 내가 먼저 시비 건 줄 알겠군.”
적시걸은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그를 변호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러면 진짜 같잖아?”
“다 네놈의 업보지.”
두 사람이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 나가자, 적의를 보였던 화산의 이름 모를 장로는 검병을 잡지도 그렇다고 손을 내리지도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백리은이 도움을 주었다.
“대화가 끝나면 화산에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도 할 이야기가 있거든 찾아오거라.”
여지를 던져 주자 그는 곧장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어디론가 향했는데 화산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좋게 이야기가 끝나도 골치 아픈 상황이 일어나리라.
벌써 골이 지끈거렸다.
백리은은 그런 시후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방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난 잠시 볼일이 있어 어딜 다녀와야 하니, 내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라.”
시후는 그의 배려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화산파에서도 함부로 시비를 걸지 못할 테니까.
* * *
“마교의 사자를 만나셨죠?”
시후는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덕분에 당혹스러워서인지 몰라도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교라니? 본 적도 없네.”
반 박자 느린 대답.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시걸은 태연함이라는 가면으로 표정을 감췄지만, 마음의 창이라 불리는 눈에 이는 얕은 파랑은 확신을 주었다.
“우리 솔직해지죠.”
“마교와 손을 잡았다고 몰아가려고?”
“몰아가려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냈겠죠. 지금 이 자리는 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입에서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조금 전과 같다.”
그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부정했다.
하지만, 마교는 분명 서장에 접촉을 시도했을 것이다.
중원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패는 한정돼 있다.
북원마저 실패한 이상, 마교가 서장과 접촉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꽤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했겠죠.”
시후는 확신에 찬 듯 적시걸을 다그쳤지만, 그는 짖을 테면 짖어 보라는 듯 침묵을 지켰다.
침묵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인가.
시후는 그 답이 ‘침묵’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 가운데 정적이 이어졌다.
속으로 숫자를 셌다.
백을 넘겨 천을 향해 달렸지만, 시후는 유유자적한 태도를 보였다.
어차피 급할 건 없다.
이곳까지 찾아온 것만 보아도, 그가 마교와 손을 잡는 걸 꺼린다는 건 알 수 있었으니깐.
“만나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먼저 백기를 든 건 적시걸이었다.
“하지만, 마교와 협력하기로 한 건 아니······.”
“아니니깐 이렇게 찾아오셨겠죠. 말씀 안 하셔도 압니다.”
시후는 그가 구태여 변명하지 않을 수 있도록 먼저 선수를 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파를 도울 수도 없다.”
“그 점도 이해합니다.”
마교는 가깝고 정파는 멀다.
그리고 서장에서 돕는다고 해도, 정파에서 이번 곤륜파와 같은 수준의 지원이 있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당장에 화산파만 보더라도 그에게 이를 갈고 있지 않은가.
시후가 그에게 바라는 건 단 하나.
마교와 손을 잡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이대로만 있어 주시면 됩니다.”
“곧 답을 내놓아야 한다.”
“어차피 마교에서도 압박을 거세게는 넣지 못할 겁니다. 이번에 입은 피해가 상당하거든요.”
적시걸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덕분에 시후도 의아했다.
“불노괴가 아무 말도 안 했습니까?”
“아무런 이야기도 못 들었다.”
아마도, 시후가 대화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말을 아낀 듯했다.
시후는 불노괴의 세심한 배려에 살짝 감동했다.
“녹림과 수로채의 일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변방 중의 변방이라 부를만한 서장이다 보니, 소식이 느려도 터무니없이 느렸다.
시후는 마교에서 ‘흑련회’라는 이름을 앞세워 녹림과 수로채를 조종하고, 나아가 황실 전복도 노렸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해 갔다.
“놈들의 손을 잡았다면, 우리가 그와 같은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군.”
“십중팔구는 그랬겠죠. 그리고 버려졌을 겁니다.”
“흠······.”
그가 고민하기 시작하자, 시후는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를 마저 이어 갔다.
배교, 북원, 운남, 당가, 그리고 곤륜파에서 있었던 이야기까지.
뒤로 갈수록 관심을 보이던 그는 ‘십이마존’이라는 말에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나를 보았다.”
“누굴 보았다는 말씀이신지······.”
“사자로 왔던 놈은 자신을 도마(刀魔)라고 소개했지.”
왜 적시걸이 마교와 손을 잡는 걸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도마.
검마와 더불어 십이마존 중 수위를 다투는 인물이었다.
십이마존 중 가장 살기가 강하다는 그는 정말 위험했다.
‘남자가 칼을 뽑으면 무라도 썬다’라는 말이 있지만, 도마는 ‘칼을 뽑으면 피를 보기 전까지 집어넣지 않는다’였다.
“찾아오기로 했나요?”
시후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매우 좋았다.
도마를 처리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그럼 도마를 처리하면······.”
“그럴 순 없다.”
적시걸은 시후의 말을 칼같이 잘라냈다.
“서장에서 그가 죽는다? 마교가 잘도 우릴 내버려 두겠군.”
“서장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와 대치하기도 힘든 판국에······.”
“소수의 병력을 동원할 수도 있지 않은가?”
없진 않다.
천마대와 십이마존 중 몇몇만 보내더라도, 서장은 쑥대밭이 될 테니까.
하지만, 정파의 병력이 곤륜파로 모이고 있는 시점에서 그런 무리수를 감행할 리 없다.
“그럴 확률은 희박합니다.”
“확률에 기대는 건 도박꾼이나 하는 짓이지.”
완고한 태도였다.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면, 당연한 태도였다.
무엇을 믿고 도마를 죽인단 말인가.
그와 정파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결심이었다.
“도마가 도착하기로 한 날짜를 알려 주면, 그때 맞춰 마교에 압박을 넣겠습니다. 그렇다면 놈들도 쉽사리 서장으로 병력을 보내지 못할 테고······.”
“한쪽의 편을 들어주느니, 지금처럼 가만히 관망하는 게 현명하다.”
“이 싸움에서 마교가 이긴다면 서장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
“정파라고 다를까.”
“다르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까지 온 것 아닙니까?”
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정곡을 찔렀다.
그는 분명 정파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정파와 마교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싸움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뉠 수밖에 없었다.
정파가 이긴다면?
그가 마교를 돕지 않은 이상,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교가 이긴다면?
마교를 돕지 않은 것 자체로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당장에야 지나갈지 몰라도, 훗날 분명 보복이 돌아올 것이다.
“······ 말뿐인 약속은 믿을 수 없다.”
“계약서라도 쓸까요? 마음만 굳힌다면 자리를 마련해서 약조를 받아 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깟 종이 쪼가리로 이어진 약속은 믿을 수 없다.”
계속해서 투덜대긴 했지만, 이미 반 이상 넘어왔다고 봄이 옳았다.
시후는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다가 넌지시 물었다.
“종이 쪼가리를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요?”
솔직히 시후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적시걸이 무슨 답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아마도 인질이 필요할 것이다.
정파에서 발을 빼기 어려운 수준의 인질이.
“사람.”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었다.
시후는 냅다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나중에 된통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인질······ 이 아니라 신뢰의 증표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신뢰의 증표라······. 그렇지. 우린 아직 신뢰가 부족하지 않은가?”
“좋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없을 듯하니, 높으신 분들을 불러 이야기함이 좋을 듯하군요. 여기서 조금 기다리십시오.”
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서려 했지만, 이어지는 적시걸의 말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뢰의 증표에는 너도 포함이다.”
- 177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