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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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곤륜 (4)
아침 해가 밝아 오기 무섭게 다들 연무장에 모였다.
한바탕 지진이 휩쓸고 간 듯했던 어제와 달리, 땅을 다져 놨기에 보기 흉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특이했다.
마치 모닥불을 피워 놓고 빙 둘러앉듯,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그 주변을 에워쌌다.
마치 구경이라도 하듯 말이다.
그 중심에는 제갈마혁이 있었다.
그는 주먹만 한 돌멩이부터, 웬만한 성인 남성 몸통만 한 바위까지 이리저리 옮기며 분주히 움직였다.
“안 온 사람 있나?”
그는 질문과 동시에 어제 진법에서 구해 온(?) 마교인의 앞에 서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는 품에서 나뭇가지를 떠내더니 바닥에 하나씩 꽂기 시작했다.
정말 평범한 나뭇가지였다.
하지만, 제갈마혁의 표정은 그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하나둘 더해질 때마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굵어졌다.
거북이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들길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던 제갈마혁의 손이 멈췄다.
손에 들린 나뭇가지는 모두 소진되었으니깐.
“후······.”
제갈마혁은 소매로 얼굴을 닦아 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곧 그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닥에 엎어진 채로 누워 있는 마교인의 어깨에 지풍을 날렸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어깻죽지가 붉게 물들었다.
“큭.”
얕은 신음과 함께 놈의 몸이 들썩였다.
놈이 온전히 정신을 차리는 데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꿈틀거리던 놈이 피가 뭉클뭉클 뿜어져 나오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키다가, 곁에 있는 제갈마혁을 발견하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릿하던 그의 시선에 갑자기 생기가 맴돌았다.
“지, 지존!”
그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어깨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덕분에 지켜보는 이들은 죄다 멍청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실패했나 보군.”
“죽여 주십시오!”
“듣고 판단하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말해라.”
“예, 속하는 환마의 지시에 따라 최초에 세웠던 계획대로 곤륜산을 올랐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특이점은 없었으나, 변수는 곤륜파 정문을 넘으면서······.”
어깨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시며 얕은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제갈마혁이 다시 손을 튕기자, 지풍이 그의 어깨를 재차 강타했다.
하지만, 지금의 지풍은 이전과 달리, 상처를 입히긴커녕 지혈을 위함이었다.
그 순간, 바닥에 납작 엎드린 녀석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뭔가 잘못된 건가 싶은 찰나, 놈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것도 아주 미친 듯이.
순식간에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지존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 얼마나 미친놈인가.
제갈마혁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하지만, 당황하는 시간은 짧았다.
곧 발을 뻗어 놈의 뒤통수를 밟았다.
“다 말하기 전에 죽을 듯하여 목숨을 붙여 두려 했거늘, 네 목숨이 누구 것인지 생각하고 행동하라.”
“충!”
놈은 손을 바삐 움직여 흐르는 피를 멈췄다.
이후 제갈마혁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놈은 모든 걸 말했다.
제갈마혁은 물어볼 게 다 떨어졌는지, 다시 놈의 혈을 짚어 잠에 빠트렸다.
이후 바닥에 꽂아 둔 나뭇가지를 하나씩 뽑았다.
바닥에 놓인 자갈과 바위를 툭툭 걷어차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추나행이 그에게 달려갔다.
“어떻게 한 겁니까?”
“놈에게 내가 교주로 보였을 거다.”
그의 잘문에 잠시 고민하던 제갈마혁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덕분에 더욱 난리가 났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원리를 이해하려면, 적어도 이번 생에 알긴 힘들 텐데······.”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멸시하는 것에 가까운 제갈마혁의 발언이었지만, 추나행이 아는 건 고작 타구봉진이 전부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덕분에 추나행은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 * *
최초의 실험이 끝나고 난 뒤, 사로잡은 두 명을 추가로 심문했다.
아니, 심문이랄 것도 없었다.
물으면 내뱉기 바빴으니깐.
“되레 함정처럼 느껴질 정도군.”
목일자의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놈들의 반응은 의심마저 지우기에 충분했다.
“누굴 보내는 게 좋을지 말해 보아라.”
“어찌 제가······.”
“본좌의 입에서 두 번 말이 나오게 할 셈이더냐!?”
추나행의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아주 제대로 심취한 듯한 연기가 일품이었다.
놈을 들었다 놨다 하며 정보를 살살 긁었다.
교주 아래에 있는 십이마존(十二魔尊)의 존재를 알아냄은 물론이거니와, 마교 십이대의 무력에 대해서도 파악했다.
“세 놈을 잡았는데도 아직 아홉이나 남았다니······. 게다가 놈들을 부리는 교주의 무위는 가히 상상이 가지 않는군.”
“마교 십이대라는 놈들도 문제네. 천마대는 소림을 뭉갤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허튼소리지.”
“마냥 허튼소리라고 생각하기엔 당장 이번에 곤륜을 습격한 놈들의 면모만 살펴봐도······.”
들은바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마교의 전력은 중원 전체를 상대할 만하다.
독마와 환마, 권마를 처리했음에도 십이마존 중 아홉은 아직 건재했다.
게다가 환마와 독마는 십이마존 중에서 무공이 가장 약하다는 평이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번 공격으로 놈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교의 힘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번에 곤륜 습격에서 놈들이 입은 피해를 생각한다면, 손은 아니더라도 손가락 두세 개 정도는 잘라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오.”
초절정 이상의 고수 쉰 명에 십이마존 중 둘을 격살하였으니, 손가락이 아니라 왼손 정도는 날려 버린 것과 다르지 않으리.
다만, 상대는 마교였다.
그간 숨어서 힘을 비축했던 만큼, 저들이 모르는 힘이 있을 것이다.
시후는 마교의 숨겨진 힘에 대해 떠드는 이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쪽도 없는 건 아니지.”
후대에 문파의 모든 일을 넘기고 뒷방에서 유유자적 지내는 이들이 있었다.
속칭 ‘뒷방 늙은이’라 불리는 그들은 금분세수(金盆洗手)를 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은거는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다.
강호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라면 말이다.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전한다면, 분명 그들은 움직일 것이다.
마교의 숨겨진 힘?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정파의 진정한 힘은 은거한 이들에게서 나온다’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팔황과 같은 항렬이다.
운허가 무당제일검이라 불리지만, 공진의 사형제 중 운허보다 못한 이가 누가 있을까.
소림도 마찬가지였다.
은거한 이들 중, 팔황 가운데 일인인 명일과 손을 섞을 수 있는 고수들도 발에 챌 만큼 넘쳤다.
“그들을 모두 끌어낼 수만 있다면······.”
당장 마교와 붙어도 꿀릴 게 없다.
* * *
각 문파로 연락을 취했다.
마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제법 상세하게.
아니, 조금 과장을 섞기도 했다.
그래야 조금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만, 귀찮은 일이 하나 생겼다.
바로 놈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싸우는 도중에 죽였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이 있으니깐.
하지만, 무력화된 적을 죽이는 건 명분이 떨어진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데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단 한 명.
하지만, 그 한 명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저들의 단전을 폐하여 참회동에 가두겠네. 최소한 저들에게 쌓아 올린 죄업을 참회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나?”
불살(不殺)을 주장하는 자는 명일이었다.
그런 그를 막아설 이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제갈마혁이 악역을 자처했다.
“놈들에게 물어보면 그냥 죽여 달라고 할 텐데?”
지켜보는 이들은 죄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공은 기본적으로 몸을 갉아 먹는다.
단전을 폐한다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룬 경지가 있으니, 반작용은 극심할 게 뻔했다.
차라리 고통 없이 죽음을 안겨 주는 게 자비로울 테지만, 명일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명일이 아무리 불살을 외치고 있더라도, 마교와의 싸움에서 사형제와 제자를 잃는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앞장서겠지.”
지닌 무공만 놓고 볼 때, 명일은 팔황 가운데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불살만 버린다면 검마와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을 정도.
시후는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곤 추나행을 찾기 위해 곤륜파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파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둘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기에 시후는 다소 멀찍이 떨어진 채 기다렸다.
만파견자는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시후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물러났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나눴어요?”
“마교 놈들 감시하는 일 때문이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군.”
추나행은 실제로도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그의 고뇌도 충분히 이해됐다.
하오문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이렇게 산중에 틀어박힌 마교를 지켜보는 건, 그들이 자신 있어 하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 말은 곧, 개방의 부담감이 커짐을 의미했다.
희생이 강요되는 것이다.
그의 고뇌도 충분히 이해됐다.
시후도 딱히 위로해 줄 말은 생각나지 않았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추나행은 그런 시후를 보고 피식 웃더니 물음을 던졌다.
“그보다 무슨 일인가?”
“뭐, 개방에서 어디까지 보내려나 여쭤보려고 왔죠.”
그에 추나행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선(死線)을 긋는다.
마교가 천산산맥을 벗어나면, 그가 그은 선에 있는 자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전보다 200리는 더 안쪽으로 보낼 생각이네.”
더 묻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보니 묻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시후는 그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준 뒤 곤륜파 정문으로 향했다.
홀로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서.
하지만, 정문을 지나기 무섭게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앳돼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와 어울리지 않게 제법 긴 세월을 지나온 듯한 눈.
시후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인물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연락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마중을 나왔지?”
“마중 나온 게 아니라, 산책하러 나왔던 거뿐입니다.”
시후는 공손히 대답했다.
웃는 낯과 달리, 전해지는 감정에서 깊은 짜증을 느낄 수 있었으니깐.
“몇 주면 될 줄 알았는데 참 오래도 걸렸어. 그치?”
“서장의 사정이 복잡했나 봅니다.”
서장으로 떠났던 불노괴가 돌아왔던 것이다.
“복잡하긴 더럽게 복잡하게 얽혔지. 개방에서 사고 치는 바람에 그 일까지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시후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몸에 새겨진 기억 때문이다.
불노괴는 그런 시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약은?”
“지금쯤이면 신의께서 다 만들었을 겁니다.”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곤 곧장 몸을 돌려 산에서 내려갈 듯했기에 급히 불러세웠다.
“신의는 안에 있습니다.”
불노괴는 달려가려던 몸을 덜컥 멈춰 세우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의가 여기에 있다고? 그 싸움 싫어하는 양반이 왜?”
“환자는 싫어하지 않으니깐요.”
“곤륜에 환자가 있나?”
연신 질문에 대답하던 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많이 생길 테죠.”
곤륜을 전초기지 삼아 마교와 싸우다 보면, 환자가 물밀 듯 밀려올 것이다.
그 대답에 불노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힐끔거렸다.
“알지?”
그녀의 물음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장으로 불노괴를 보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를 데려오기 위함이었으니깐.
“반갑습니다. 차시후라고 합니다.”
“적시걸이다.”
무뚝뚝한 그의 대답에도 시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의 별호는 많았다.
시후는 수많은 그의 별호 중 그가 가장 좋아하는 별호를 입에 담았다.
“서장의 별을 뵙습니다.”
- 176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