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74화 곤륜 (3)
터는 중요하다.
특히 무림 방파라면, 터가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무공은 기본적으로, 보고 느낀 바가 무공에 접목되니깐.
대표적으로 검악(劍岳)이라 불릴 정도로 험한 산세를 자랑하는 화산이 그러했다.
매화를 그리긴 하지만, 검식에 담겨 있는 날카로운 기세는 화산을 닮아 있었으니깐.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문파명(名).
무당산에 있으니깐 무당파, 아미산에 있으니깐 아미파다.
그렇다면 곤륜파는?
당연하게도 곤륜산에 있다.
곤륜산은 곤륜산맥의 주봉(主峯)이다.
거기에 더 나가면 곤륜산맥은 중원 서부의 크나큰 산맥들의 모계(母系)라고 할 수 있었다.
“신선이 된 것 같구나.”
시후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과연, 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곤륜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올 만한 곳이었다.
짙은 운무에 둘러싸인 봉오리들은 마치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신비함을 선사했다.
그리고 웅장한 산세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호연지기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후의 조는 사람 두 명이 간신히 지날 법한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풍광에 사람의 손길이 가미된 건물이 나타날 때쯤, 내공이 약한 이들은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특히, 정엽은 빠른 눈치와 영민한 머리와 달리 체력이 좋지 않았다.
“젠장, 여길 공격하겠다고 올라온 마교 놈들도 제정신은 아니군.”
정엽은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시후는 그런 정엽을 내버려 두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밑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곤륜파의 내부는 엉망이었다.
완전히 박살 난 전각과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뒤집힌 바닥은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말해 주었다.
게다가 습격이 있은 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맞이해 주는 곤륜파 도인의 얼굴에는 아직도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틀 전 마교 습격 때 있었던 일들을 설명코자 하니, 맹의 주요 직책에 계신 분들은 저를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주요 직책이라는 말에 단주 급은 모두 일어났고, 대주들은 눈치를 살폈다.
그 중 목일자는 거침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시후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는 빙긋 웃으며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난 대주 말고도, 다른 직책이 하나 더 있지 않은가?”
틀린 말은 아니다.
목일자도 더는 점창파의 허울뿐인 장로가 아니었다.
‘유운삼절기’를 복원함으로써 그는 점창파 내부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졌다.
그가 참가하는 건 당연했다.
잠시 고민하던 시후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일개 조장이 낄 자리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제지당했지만, 시후는 품에서 적룡 금 패를 꺼내 들었다.
시후를 막아선 곤륜파 도인이 묻는 듯한 눈짓을 주변에 보내자, 막 시후의 곁을 지나치던 운허가 등을 밀어주었다.
“차 소협은 들임이 옳네.”
운허의 말에 곤륜파 도인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검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에 자리한 인원이 마흔 명쯤 되었을 때 제갈마혁이 머리 위로 손을 들었다.
“간략하게 설명해도 제법 긴 이야기가 될 테니, 뒷간에 가려거든 지금 다녀오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열흘 전, 나는 곤륜에 도착하자마자 지기(地氣)를 이용하여 진법을 펼쳤다. 곤륜의 정기는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었기에, 꼬박 사흘 밤을 새우고 나서야 진법을 이어 붙일 수 있었지. 덕분에 진 일부를 해체하는 데도 꼬박 하루가 걸려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는데······.”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이번 일에 공이 큰지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자화자찬에 다들 의아해했지만, 백리은을 비롯한 팔황들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릴 기색은 없어 보였다.
제갈마혁은 기나긴 자랑 끝에, 본격적으로 마교의 습격에 대해 말을 꺼냈다.
“놈들의 숫자는 고작 오십에 불과했지만, 당가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초절정에 발을 디디지 못한 놈들이 없었다.”
최소 초절정.
그 말에 시후는 곤륜파 정문을 넘으며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마교의 습격은 며칠 전이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제법 손을 봤을 텐데도 그 모양이었다면, 생각보다 더욱 치열한 싸움을 펼쳤으리라.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생각보다 놈들의 전력이 강함에 곤륜의 이대 제자와 삼대 제자는 물론이고, 일대 제자 몇몇을 제외하곤 모조리 물려야 했지. 게다가 놈들을 이끄는 두 녀석은 우리로서도 쉬이 승부를 점치기 어려웠다.”
그 말에 시후는 더욱 집중했다.
분명 별호에 ‘마’가 붙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두 놈은 각기 ‘환마’와 ‘권마’라고 했다. 권마라는 놈은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환마는 내가 진법을 발동시키자마자 진을 부수기 위해 동분서주했기에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지.”
“그리 큰 위협이 아니라니. 내공이 조금만 달렸어도 주먹이 박살 나는 건 명일이었을 걸세.”
“그 와중에 불살을 지키려고 한 탓이지.”
공진이 그를 두둔하고 나섰지만, 제갈마혁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안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명일에게 쏠렸다.
그에, 명일은 말없이 합장을 취했다.
“덕분에 놈이 선천진기를 끌어다 썼고, 금정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좋아하는 열반에 들 뻔했지. 내 말이 틀렸는가?”
“아미타불.”
명일은 무표정한 표정과 달리, 머리가 다소 붉어져 있었다.
덕분에 제갈마혁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시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불살을 버리는 계기를 안겨 주지 않는다면, 생각보다 명일의 쓸모는 없을지도 몰랐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몇 배는 더 어려우니깐.
제갈마혁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더는 명일을 탓하지 않았다.
“뭐, 결과적으로. 권마의 목이 달아나자 놈들은 동요하기 시작했지.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놈이 자리에서 없어졌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그러는 도중에 놈들은 하나둘 목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다발적으로 달아났네.”
제갈마혁이 진법에 관해 주저리주저리 떠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곤륜산은 하나의 거대한 그물이었다.
마교에서 가장 진식에 조예가 깊은 환마조차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튼튼했다.
놈들이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그물 속으로 뛰어든 물고기나 다름없었다.
시후의 머릿속으로 이후의 싸움이 그려졌다.
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놈들을 하나씩 상대하는 건 식은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말이다.
“환마라는 놈이 진 이곳저곳을 건드리고 다닌 통에 다소 불안정해지긴 했지만, 아까도 말했듯 곤륜의 정기는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진은 지기(地氣)의 힘을 빌려 그대로 유지되었고, 놈들은 진에 갇혀 옴짝달싹을 못 했지.”
“혹시, 환마라는 놈은 사로잡으셨습니까?”
“아니, 놈이 뭔가 수상한 낌새를 보여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들어 보니, 권마라는 놈이 선천진기를 끌어다 쓸 때와 행동이 비슷했는데,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죽은 건 놈이 아니라 나였겠지.”
제갈마혁의 말에 운허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스쳤다.
“그리고 진 속에 갇힌 놈들을 사로잡으려 했지만, 지독할 정도로 반항하는 덕분에 아직 성과가 없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갸웃거렸다.
한 단어가 신경을 묘하게 긁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비슷한 반응이었다.
제갈마혁은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시후는 그 미소를 보며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직이라고요?”
“아직 진 속에 가둬 둔 놈들이 있다는 말이다.”
* * *
길을 벗어난 곤륜산은 험지 그 자체였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기보다는 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제갈마혁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그 누구 하나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시후는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분명 반 각 전에도 저 소리를 했으니깐.
하지만, 이번에는 사실인 듯 저 멀리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윽, 냄새.”
풀숲 사이로 인영이 아른거렸다.
그와 동시에 바람에 실려 오는 악취는 제법 강렬했다.
시큼함을 넘어선 땀 냄새는 약과였다.
“지렸네.”
시후는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는 그의 발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축축이 젖은 하의는 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분비물의 영향이 더욱 커 보였다.
다행히 검은색 무복이라서 티가 덜 났지만, 유난히 짙은 얼룩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흠, 쓰러져 있을 줄 알았는데······.”
제갈마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돌렸다.
다음 장소에도 그와 비슷한 이가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병장기를 쥘 힘조차 없었는지, 바닥에 금강월도(金剛鉞刀)가 떨어져 있었다.
제갈마혁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척거리는 놈의 걸음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군. 아, 시간을 조금 더 단축해 볼까?”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바닥에 돌멩이 몇 개를 주워들어 휙휙 던졌다.
그러자, 땀으로 얼룩진 남자의 얼굴에 깊은 절망감이 어렸다.
바닥에 떨어진 금강월도를 주워들더니 미친 듯이 사방으로 휘둘렀다.
다들 제갈마혁을 바라봤다.
“지금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겠지. 이를테면······.”
“교주님! 아닙니다. 달아난 게 아니라 연락을 취하고자 물러났을 뿐입니다!”
그의 외침에 제갈마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그의 곁에서 한걸음 물러났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를 알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깐.
금강월도를 휘두르는 남자의 팔에 치솟은 핏줄은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며칠 동안 진 속에 갇혀 있던 그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금강월도는 곧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또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제갈마혁은 남자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을 걷어차고 바닥에 꽂혀 있는 나뭇가지를 뽑았다.
그리곤 그의 곁으로 다가가 완맥을 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가.”
“알겠습니다. 곤명, 곤태 혈을 점하고 포박하여······.”
“팔다리를 잘라내도 안 일어날 테니깐 그냥 옮겨.”
제갈마혁은 섬뜩한 말을 남기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이후 하나둘 마교도를 주워(?) 담았다.
“굳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나요?
시후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제갈마혁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냥 꺼내서 제압하려 했는데, 하나같이 반항도 대단하고, 동귀어진이라도 할 각오로 덤비더군. 실제로는 달아나려고 한 게 아니라 마교에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 커 보였네. 이만한 고수들의 광적일 정도의 충성심이라는 건 정말 위험하지.”
그게 쓰러질 때까지 기다린 거랑 무슨 연관인가 싶어, 시후는 제갈마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자네가 전해 준 선물로 경계를 허물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지.”
“경계를 허문다고요?”
“놈들에게 환상을 보여 줄 걸세. 실존하는 현실 수준의 환상을. 그러기 위해서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다음에 진 속에서 다시 깨어나도록 해야 하네.”
시후는 제갈마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갈마혁은 그런 시후의 어깨를 두들기며 낮게 속삭였다.
“팔진도를 완성했네.”
- 17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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