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72화 곤륜 (1)
“사람이 더 늘어난 것 같지 않아?”
시후는 제갈려의 말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곧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선이 닿은 모든 곳에는 사람이 존재했다.
저 멀리 떨어진 비무대 위에도, 잠을 청하는 숙소 위에도, 얇디얇은 나뭇가지 위에도.
앞의 비무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사람이 있었다.
“뭐, 그럴 수밖에.”
시후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널찍한 비무대 위에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무당제일검 운허와 매화검자 주화수.
비무 대회 시작 전부터 관심을 모았던 두 사람이 준결승전에서 만났다.
사실상 결승전과 마찬가지였기에 사람이 득실득실했다.
하지만, 시후는 두 사람의 비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롯이 혁기오에게 쏠려 있었으니깐.
“아주 집중력이 대단하군.”
“응?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냐.”
시후의 혼잣말에 제갈려가 반응했지만, 대충 둘러대자 곧 관심을 거뒀다.
두 사람의 비무가 막 시작되었으니깐.
매화검자는 검을 들어 올렸고, 운허도 화답하듯 검집에서 검을 꺼낸 뒤 늘어트렸다.
서로 다른 기수식.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손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먼저 성공을 취한 건 매화검자였다.
“매화입봉(梅花入蜂).”
만개한 매화 속으로 날아드는 벌을 가두듯, 운허를 가두기 위해 그의 검이 허공에 한 떨기 매화를 그렸다.
화산의 수많은 검법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매화이십사수검법(梅花二十四手劍法)이었다.
그에 맞서기 위해, 운허의 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발제인(後發制人)의 묘를 살린 태극검이었다.
한쪽은 ‘환(幻)’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었고, 한쪽은 ‘유(流)’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의 검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내공은?”
두 사람의 검은 햇빛을 받아 본연의 거무튀튀한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즉, 검에 내공을 전혀 덧씌우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비무는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매화만개!”
꽃이 피고.
“태극진환!”
꽃을 꺾고.
“매화농향!”
코끝을 간지럽히는 매화향은.
“일파만리!”
사방으로 흩어졌다.
두 사람의 비무는 이전과 같이 화려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철저히 내공을 배제한 탓에 검식에 숨겨진 진의는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지켜보는 이들은 마른침을 삼키느라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십여 초를 더 주고받더니 뒤로 훌쩍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검에 은은한 빛무리가 맺혔다.
본격적인 시작일 것이다.
시후는 다시 고개를 돌려 혁기오를 찾았다.
따가운 시선을 느낄 법도 하지만, 두 사람의 비무를 머릿속에 집어넣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보고 있어.”
제갈려에게 말을 건넸지만, 그녀는 대답할 정신조차 없는지 손을 휘적거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시후는 넋을 잃고 바라보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혁기오에게 다가갔다.
그는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뒤에야 시후의 접근을 눈치챈 듯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 너무 집중해서 보느라 뒤늦게 알아챘습니다.”
“이해해. 눈을 떼기 힘든 수준이니깐.”
시후는 일단 비무를 보자는 듯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혁기오도 시후를 따라 비무대 위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전과 달리 집중을 이어 가지 못했다.
그 와중에 두 사람의 비무는 점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신 피어나는 매화는 태극을 뚫어내지 못했다.
끝까지 비무를 펼친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지만, 매화검자는 쉼 없이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뚫어내지 못하자 패배를 시인하고 내려갔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폭주했다.
사실상 결승전이라 불리던 두 사람의 비무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을 맺었으니깐.
하지만, 그 불만은 한 사람의 등장으로 단번에 사라졌다.
“생사투라면 결과를 내야겠지만, 마교라는 공동의 목표를 앞두고 무의미한 피를 흘릴 순 없는 법.”
검후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어디 가서 그만한 고수의 비무를 지켜보겠는가.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가자, 검후는 재차 입을 열었다.
“다만, 이렇게 끝나는 건 너무 흥이 떨어지니 한 가지 제안을 하지.”
기다란 손가락 세 개가 펼쳐졌다.
다들 그 손가락의 의미를 짐작해 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검후는 바로 의미를 알려 주었다.
“셋. 내가 세 번의 비무를 하겠다.”
찰나의 정적 뒤에 산이 무너질 듯한 함성이 터졌다.
팔황의 무공을 견식 할 기회를 어디서 얻겠는가.
이는 어설프게 끝난 운허와 매화검자의 비무를 단번에 머릿속에서 지울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겠다.”
광오하다.
하지만, 당연하다.
무려 팔황이다.
같은 팔황이 아닌 이상, 누가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번 비무 대회에 참가한 인원들로만 받겠다. 단, 최후의 64인에 오른 자들로 한해서. 자신 있는 자들은 올라와라.”
세 명씩 세 번 비무하겠다고 했으니, 기회는 아홉 명에게 주어진다.
곁에 있는 혁기오의 갈등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민하는 사이에 벌써 세 명이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시후를 바라봤다.
시후는 그런 그의 시선을 외면한 듯 슬쩍 고개를 돌렸다.
“검후는 영 껄끄러워서······.”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소검후와의 문제로 검후와 갈등을 빚었으니 당연하죠. 하지만, 이런 기회를 어디서 얻겠습니까? 팔황, 무려 팔황과의 비무입니다. 검을 견식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맞댈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오겠습니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라니까? 저것 봐, 구파나 팔대세가에서는 아무도 올라갈 생각 안 하잖아. 비무를 핑계로 얼마나 두들겨 팰지 상상조차 안 가.”
“소협, 그래도······.”
혁기오의 간절한 부탁에도 시후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이, 삼 대 일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검후는 딱 상대방의 수준에 맞춰서 내공을 운용했다.
“빈다. 여기도. 허점투성이로구나.”
“발이 느려. 보폭은 항상 일정하게.”
“균형이 엉망이군. 걸음마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더냐?”
검후의 쓴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검을 맞대는 이들에게는 세상 그 어떤 감로수보다도 달콤한 조언일 것이다.
검후의 검이 그들의 몸을 두들겼다.
날이 아니라 면으로 강타했기에 비무대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에 그쳤다.
비무는 지독히도 짧았다.
비록, 팔다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긴 했지만, 나가떨어진 세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개했다.
“다음.”
혁기오는 혼자라도 올라가겠다는 듯 몸을 날렸지만, 그보다 먼저 올라간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을 바라본 혁기오는, 어쩔 수 없이 내려와 다음을 기약했다.
검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독설을 내뱉으며 적당한 조언을 섞어 주었다.
마무리는 마찬가지로 검면으로 후려쳐서 아래로 내보냈다.
다들 퉁퉁 부은 뺨과 팔다리를 붙잡은 채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다음.”
검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혁기오는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더 올라가자 시후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검후와의 비무에 구파와 팔대세가의 인물은 단 한 명도 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절대 오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깐.
“64강에 오른 자 중에서 구파와 팔대세가를 제외하면 아홉 명이 남지.”
그리고 그중 세 명은 요주의 인물.
즉, 마교 놈들이었다.
검후는 무심한 표정으로 재차 검을 들었다.
“어디 들어와 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혹시라도 마공을 펼쳐 생채기라도 내려나 싶었지만, 세 사람은 여태까지 보여 준 수준만을 드러냈다.
“검 끝과 시선이 따로 노는군”
“호흡이 얕다.”
“눈으로만 보니깐 검을 놓치는 거다.”
각각 이어지는 조언.
그 뒤에는 당연히 검면으로 두들겨 패는 일만 남아 있었다.
“큭!”
“억!”
“윽!”
각기 다른 비명.
하지만, 세 사람은 비무대 아래서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각기 다리를 붙잡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후괴는 그런 세 사람을 잠시 살피더니 혀를 찼다.
“쯧쯧, 젊은 놈들이 뼈가 삭았나······. 들것 가져와!”
* * *
기다렸다.
다리가 부러진 세 사람이 움직일 순 없으니, 그들과 접촉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저자는요?”
“현중문의 둘째 제자로 무공보다 술을 좋아하는 놈이다. 신원이 확실한 놈 중 하나지.”
“젠장, 또 밤중에 움직이려나 보네.”
시후는 투덜거리며 혁기오의 방을 바라봤다.
여기저기 인맥을 쌓은 탓에 찾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놈의 연락책이 다녀간 뒤에 정보를 주는 편이 더 좋겠지만, 조금 더 깊은 신뢰를 쌓기에는 오늘이 적격이다.
잠시 뒤, 현중문의 둘째가 그의 방을 나오자 시후는 그의 방문을 두들겼다.
“누구시오?”
“나.”
“아, 들어오십시오.”
안으로 들어가자, 침상에 누워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혁기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워 있어. 환자가 어딜 움직여?”
시후의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몸을 뉘었다.
시후는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은 뒤 그의 옆에 앉았다.
“얻은 건 있고?”
그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검후가 쓸데없이 많은 걸 알려 줬나 싶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다행이네. 그보다, 내가 검후 성질 더럽다고 했지? 곱게 가르쳐 줄 수 있음에도 두들겨 패는 거 봐. 내가 그래서 안 올라가려고 했다는 거지. 게다가 나한테 악감정이 있는 걸 생각한다면······.”
시후는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은근슬쩍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 관심 가질 이야기가 아니었던 탓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띄었다.
“그보다, 오늘은 다들 안 보인단 말이야?”
“다들이라니요?”
“검후는 모습을 비췄잖아? 근데 나머지 분들은 본 적이 없단 말이지. 내가 백리 선배님과 제법 친분이 있어서 여쭤볼 게 있었는데······.”
“안 보인다고요?”
혁기오가 놀라서 되물었다.
시후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말을 이었다.
“어, 오늘 운허 도인과 매화검자의 비무를 보고 아리송한 게 있어서 하나 여쭤보려고 했단 말이야? 예전에 듣기로 태극혜검을 완성할 때 백리 선배님이 도움을 줬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 태극혜검에 대한 파훼법을 알고 있지 않으실까 싶어서······.”
시후는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혁기오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허리춤을 더듬거렸다.
그를 보고 깨달았다.
‘놈은 주변에 연락을 취할 방법이 있다.’
아직 놈을 찾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시후는 몇 마디 더 떠들다가 그의 안색을 살피는 척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내가 환자를 앞에 두고 너무 떠들었나?”
“아닙니다. 조금 피로하긴 하지만, 흥미로운 일화에 귀가 번쩍 뜨이는군요.”
“피곤하면 말하지 그랬어? 이만 가 볼 테니까 어서 잠이나 자.”
그 말과 함께 시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에, 놈도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어허, 또 몸을 일으키려고? 다리 부러졌을 때는 그냥 누워서 밥 잘 먹는 게 장땡이야. 내일 호골산을 구해다 줄 테니까 푹 쉬고 있어.”
시후는 일어나려는 혁기오의 가슴을 눌러 준 뒤 얼른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추나행에게 다가갔다.
“팔황들이 모습을 감췄다니깐 놈이 허리춤을 뒤적이더군요.”
“확실히 방수가 있었군.”
“잡을 건 아니죠?”
추나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가짜 정보를 쥐여 주기 위해서 이렇게 수를 썼는데, 여기서 방수를 잡아 버리면 여태까지 했던 행동이 무위로 돌아간다.
“새를 날리겠지.”
긴급한 정보인 만큼, 전서응이나 전서구를 날릴 터.
날아갈 방향은 뻔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면 못 잡을 수가 없었다.
모인 자들 가운데는 ‘천엽신궁(天獵神弓)’과 무음시(無音矢)로 유명한 ‘궁귀(弓鬼)’가 있었으니깐.
- 173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