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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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화 대화합 (7)
최태령 장로가 한 방 먹이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피우긴 했지만, 시후는 무사히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시후에겐 ‘기절한 비령을 신의에게 데려간다’라는 명분이 있었으니깐.
“어떤가요?”
“별 이상은 없지만, 내공을 한계치까지 사용한 뒤에 날아오는 파편까지 막아 내느라 단전이 텅텅 비었구나. 이 정도면 기절하지 않는 게 이상할 테지.”
“그것 빼고는 별 이상 없는 거죠?”
“이 녀석아, 무인에게 내공을 모두 쏟아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아느냐? 까딱하다가 선천진기(先天眞氣)라도 끌어다 썼으면······.”
신의는 뒷말은 하기도 싫은지 고개를 저었다.
‘선천진기’는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기운이다.
이를 사용하게 될 시 다시 채울 방도는 단 하나밖에 없다.
천고의 영약.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내단이나 공청석유 같은 지고지순한 영약을 먹을 것.
그것조차 조건이 붙었다.
‘즉시’라는 조건이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모된 선천진기를 온전히 회복할 수 없었다.
즉, 그만한 영약을 바로 복용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선천진기를 사용하지도 않을 테니, 선천진기를 한 번이라도 사용했다는 건 다신 채울 수 없음을 의미했다.
“까딱했다간 오늘 송장 하나 치울 뻔했군.”
신의의 말에, 시후에 등에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 송장은 비령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테니깐.
시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비령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왜냐면.
쾅!!
올 사람이 있었으니깐.
“비령아!”
검후는 방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비령을 찾았다.
곧 침대에 누워 있는 비령을 발견하곤 급히 다가오려 했지만, 신의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네 제자는 멀쩡하니깐 유난 떨지 말고 문 닫아. 아니, 새로 달아 놓으라고 해야 하나?”
조금 전까지는 ‘문’이라 불렸겠지만, 이제는 ‘땔감’이라 불리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검후는 그런 문의 잔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픽 돌렸다.
“애들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거든 그냥 돌아가.”
“······ 전후 사정은 들었다.”
“들었으면 문제없겠군. 현월문의 문주이자 당대의 검후께서, 쓸데없는 감정을 담아서 후학을 혼내진 않을 테니 말이야.”
신의의 말에 검후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시후는 신의가 좀 더 적극적으로 말려 주길 바랐지만, 그의 개입은 여기까지였다.
다만, 그 경고 덕분인지 몰라도 검후의 태도는 처음과 달리 다소 온화해졌다.
“무엇 때문에 이 아이를 이토록 몰아붙였나?”
시후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대로 말하면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답은 곧 내려졌다.
곧이곧대로 말하면, 신의가 말리고 자시고 분명 맞아 죽을 것이라고.
“무엇 때문에 아이를 이리 몰아붙였느냐고 물었다.”
검후로부터 재차 압박이 들어오자, 시후는 생각해 둔 여러 가지 대답을 떠올렸다.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기에, 최대한 느릿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제가 그냥 이길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 들어서 알고 있다. 중간에 네가 말을 건넨 것까지도.”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뜬금없는 시후의 질문에 검후는 눈을 찌푸렸다.
검후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시후를 노려봤지만, 시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저는 마음가짐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비무에서 저는 비령을 압도했습니다. 네, 말 그대로 압도했죠. 처음 선공을 취한 것을 제외하면 비령은 방어에 급급했고, 피하느라 정신없는 모습만을 보여 줬으니 말이죠.”
검후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순간적으로 선택이 틀렸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끊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비령의 무공에는 자만심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패배를 몰랐으니 당연하죠. 그렇기에, 그냥 이기기보다는 뼈저린 패배를 안겨 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본심을 거짓 속에 숨겼다.
그러나 자신의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다는 듯, 시후의 검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비령이 이 계기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하길 바랐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았지만, 시후에게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진위를 파악하려는 검후의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에 불과하지만, 환자는 환자인 법이니, 더 할 이야기가 있거든 나가서 하는 게 어떻겠느냐? 그리고 이왕 나가는 김에 사람을 불러와서 문 좀 달아 놓고.”
신의가 검후의 말을 끊으며 뻥 뚫린 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제야 검후도 산중의 서늘한 밤공기가 살랑살랑 뺨을 간지럽히는 게 느껴졌다.
검후가 비령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지만, 신의는 손을 팔랑거리며 어서 나가라 손짓했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니깐 억지로 깨울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
신의의 말에 검후는 한 번 더 비령을 힐끔거리곤 밖으로 나갔다.
시후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했지만, 검후는 더 할 말이 없었는지 밖으로 나가자마자 모습을 감췄다.
“가는 길에 공동파에 가서 문 좀 고쳐 달라고 말하거라.”
“아, 예. 감사합니다.”
시후는 꾸벅 인사를 한 뒤 신의의 거처를 떠났다.
신의는 사라진 문 앞에 선 채로 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구나.”
잠시 후, 뒤에서 들려오는 천 스치는 소리에 신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 * *
시후는 이른 저녁부터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시후가 잔을 비우기 무섭게 혁기오는 잔을 채워 줬다.
“오늘 정말 대단했습니다.”
“별것 아니지.”
“하하, 소검후를 압도적인 무위로 제압하신 게 별것 아니라 말씀하시면, 오늘 탈락한 저는 정말 별것도 아닌 놈인가 봅니다.”
“오기환도(五欺幻刀)라고 했던가? 그자는 강서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무인이니, 박빙의 승부를 펼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
시후는 안주를 집으며 혁기오를 칭찬했다.
초절정의 초입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오기환도의 무공은 대단했다.
등급을 나누자면, ‘절대’와 ‘고금’ 사이에 자리할 정도.
혁기오는 오늘, 그런 오기환도와 정말 박진감 넘치는 싸움을 펼쳤다.
하지만, 그 박진감은 분명 혁기오 본인이 의도했을 것이다.
“쩝······. 솔직히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갑자기 도가 분열하는 바람에 너무 당황했습니다.”
혁기오가 분한 듯 말하자 시후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질 거라면 그때 지는 게 가장 적절했다.
“그보다, 소검후를 이겼으니 다음 상대는 무당제일검이군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상대는 운허다.
당대의 무당제일검.
비록 전대의 무당제일검인 공진이 은거를 선택하면서 받은 칭호라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진짜였다.
제아무리 시후의 조가창식이 ‘고금’ 단계로 올라섰다고 한들, 그 또한 공진에게 배운 태극혜검을 꺼낸다면 꿀릴 게 전혀 없을 것이다.
시후는 비무 이야기를 이어 가다가 슬슬 언질을 할 때가 됐음을 느꼈다.
“오늘 이기고도 검후한테 된통 깨진 걸 생각하면 차라리 이기지 말 걸 그랬어.”
“검후를 만났습니까?”
“소검후를 신의에게 데려다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오더군. 신의께서 말려 주지 않았더라면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겠지.”
“하하, 설마 그랬겠습니까?”
“검후를 못 봐서 그런 소릴 하는 거지. 팔황들이 얼마나 제멋대론데? 제멋대로 사라졌다가 다시 또 제멋대로 나타나기도 하고 말이야.”
혁기오가 관심을 보이자 시후는 모른 척 빈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술을 홀짝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혁기오는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팔황들이 모인 김에 뭔가를 할 것 같다던데······.”
“모인다고요?”
“마지막 날에 뭔가를 한다고 들었거든. 물론, 나한테는 정확히 이야기는 안 해 줬지만 말이야.”
시후는 말을 끊은 뒤 손을 펼쳤다.
앞에서 이글거리는 혁기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시후는 모른 척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어디 보자······. 거의 다 왔네?”
접힌 손가락은 총 일곱 개.
혁기오의 몸이 들썩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시후는 그득히 채워진 잔을 비웠다.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면 그분들 모습을 다 볼 수도 있을 거야.”
* * *
해가 뜨기 무섭게 추나행이 찾아왔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들을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온 듯했기에 시후는 잔뜩 기대감을 품었다.
“어젯밤, 삼호가 사라졌다.”
“삼호라면······. 그 못생긴 놈이요?”
“그래.”
삼호.
혁기오와 마찬가지로 이번 비무 대회에 스며들었던 참가자 중 하나였다.
다만, 혁기오와 달리 초반에 진작 탈락하여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통에, 개방에서 매우 귀찮아하던 녀석이었다.
“일호와 접촉은 했겠죠?”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자 새벽에 몰래 나와서 만나더군.”
어제 나왔던 대화 중 그들이 솔깃할 정보는 두 개였을 것이다.
비무 대회는 앞으로 삼 일은 더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때까지 팔황은 이곳에 머무르리라는 것.
그 말인즉슨, 곤륜이 비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흘 만에 곤륜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걸까요?”
“아니지. 우리가 가는 거리까지 생각한다면 닷새라고 봐야지. 그래도 터무니없이 가까운 거리가 아닐 수 없군.”
“지금 역으로 수색한다면요?”
“반경이 족히 수백 리를 뒤져야 하는데, 개방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도 무리지. 차라리 사흘이나 이틀 거리에 눈을 쫙 깔아 두는 편이 나을 걸세.”
정의맹의 계획은 간단했다.
마교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올 수밖에 없는 먹이를 던져 준다는 것이다.
그들이 곤륜을 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곤륜파를 상대할 때 가장 껄끄러운 건 팔황의 일인인 ‘천태’.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게 확실하다면, 곤륜을 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대화합의 참가를 위해 적지 않은 문도들이 빠지지 않았겠는가.
“눈으로 확인시켜 줘야겠죠?”
“안 그래도 그분들께 모습을 비춰 달라고 말할 걸세.”
추나행과 시후의 의견이 일치했다.
시후가 아무리 맛깔나는 정보를 던져 줬다고 한들, 지금은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본다면 어떨까?
무리해서라도 공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빈집만큼 노리기 쉬운 건 없을 테니깐.
“일단 오늘 비무부터 치러야겠네요.”
* * *
“검후다!”
“맙소사, 천수비우를 보게 될 줄이야. 평생을 못 볼 줄 알았는데!”
다음날 비무를 치루기 직전, 검후를 필두로 팔황 중 일곱이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배분으로 따지면 다들 비슷하지만, 거기서 나이로 줄을 세운다면 가장 앞에 있는 건 제갈마혁이다.
그렇기에 그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본인은 제갈세가의 마혁이라고 하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깊은 울림.
제갈마혁이 입을 열자 다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대화합을 통하여, 우리 중원 무림이 하나로 뭉쳐서 마교를 물리칠 것을 기원하며······.”
시후는 비무대에서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생히 들렸다.
“과연 팔황입니다. 천변기황의 내공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곁에 있던 혁기오가 감탄하듯 말했다.
시후가 힐끔 쳐다보자, 입을 쩍 벌린 채 비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감동한 듯한 표정과 달리 혁기오의 눈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제대로 알려 주는 게 하나 없군.”
“뭔가 일정이 앞당겨진 건 아닙니까?”
“그건 아닐걸? 마지막 날에 잡혀 있는 행사 중에는 우승자가 팔황 중 한 명을 지목해서 비무를 하는 것도 계획되어 있거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혁기오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정말입니까?”
“내가 거짓말해서 뭐해? 그리고 떠도는 소문에는, 준결승까지 올라가면 무공을 한번 손봐 준다고 했던 것 같았는데 말이야.”
시후는 말을 하다말고 아쉬운 듯 탄식을 터트렸다.
“내가 오늘 운허 도인만 꺾었어도 기회가 있었을 텐데 말이야.”
“정말 아쉬웠습니다. 한 끗 차이로······.”
“한 끗은 무슨, 세 끗 정도 차이 났지.”
시후가 투덜거리는 사이, 제갈마혁을 비롯한 팔황은 비무대 아래로 사라졌다.
“젠장, 술이나 한잔할까?”
“아, 오늘은 제 의형제의 기일이라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할 거 같습니다.”
“그거 안타깝군.”
시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인사를 건넨 뒤 재빨리 군중들 틈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중, 뒤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후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추나행이 멀어지는 혁기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후는 그를 바라보다가 비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남는다고 했어요?”
“이럴 땐 보통 막내지.”
그의 말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추나행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막내라면 막내다.
검후는 팔황 중 가장 어렸으니깐.
“내일?”
“내일.”
둘 사이에 암호와도 같은 짧은 말이 오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가엔 동시에 미소가 맺혔다.
내일 이후로 마교는 발칵 뒤집힐 것이다.
- 17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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