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70화 대화합 (6)
“푹 잤나 봐?”
비무대로 향하던 도중, 비무대 근처에서 마주친 제갈려가 뜬금없이 물었다.
시후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의아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제 그렇게 전전긍긍하더니?”
그제야 제갈려의 입가에 맺힌 묘한 미소가 눈에 띄었다.
분명 오늘 있을 비령과의 비무에서 패배할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
“누가 전전긍긍해? 아, 다음 경기는 좀 신경 쓰고 있지. 아무래도 무당은 조금 껄끄럽잖아?”
“다음 경기? 무당?”
되묻되 물음이 아니었다.
그 안에 담긴 비아냥은 못 느끼려야 못 느낄 수 없었으니깐.
어제라면 제갈려의 비아냥거림에 화가 났을 것이다.
명백한 사실이니깐.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보면 알겠지.”
“뭐야, 너무 여유만만한데?”
“여유만만까지는 아니고.”
“수상해······.”
제갈려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시후는 그런 제갈려를 뒤로한 채 비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뒤편에는 쌍괴는 자리에 앉아 대진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처음과 달리, 이젠 아주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시후의 인기척에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더니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오늘 첫 경기였지? 시간이 제법 남았을 텐데 일찍 왔구나.”
“빈둥거려서 뭐하겠어요? 비령은 아직 안 왔나 보네요.”
“그 아이는 항상 시간대에 맞춰서 오는 편이었지. 그보다······.”
후괴는 시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간밤에 무슨 기연이라도 얻었더냐?”
시후는 대답 대신 씩 웃음 지었다.
후괴는 그런 시후를 채근하려 했지만, 서괴는 뭔가를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은 그 늙은이가 어젯밤 돌아왔다던데, 그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로군?”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르다.
하지만, 백리은이 비밀에 부친 만큼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후는 침묵을 지켰다.
물론, 침묵을 지킴으로서 시인한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그 늙은이가 제 목숨값으로 내놓은 만큼 제법 값진 심득을 안겨 줬을 테니, 오늘 비무는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겠구나.”
서괴의 말에 시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심기를 매우 거스르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깐.
“예상과 다르게?”
시후의 물음에 서괴는 눈을 굴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차, 문 장문인한테 볼일이 있었지! 철가야, 혼자 자리 좀 지키고 있거라.”
서괴는 마땅한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냅다 앞으로 달려갔다.
덕분에 남겨진 후괴만 어정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비무라는 조건이 붙는다면 비령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네.”
“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어제까지는요.”
“나 또한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후괴가 시후를 보며 씩 웃었다.
시후도 분명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등급 : 고금]
[무공 : 조가창식]
[종류 : 창법]
백리은의 심득으로 조가창식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했다.
‘고작 한 단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등급의 격차는 생각보다 더욱 크다.
일원신공과 같은 신화 등급으로 올라섰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상위 등급에서 두 단계 상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자운유성창과의 상승효과를 생각한다면, 이미 신화 등급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후가 자운유성창을 잡았다가 놓길 반복하며 감각을 끌어올리는 사이, 군중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왔나 보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퉁이 너머로 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마주친 비령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지만, 이내 거침없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손을 맞잡은 비령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시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알쏭달쏭한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시후의 달라진 점을 알아차린 듯하기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때처럼 누가 말려 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질 거 같으면 바로바로 내려가.”
제갈세가에서 있었던 일을 들먹이자 시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할 소리.”
“내가 할 소리라는 건 확실하지.”
“글쎄, 그때랑은 전혀 다르잖아?”
“그때와는 달라도 결과는 같을 테니깐.”
끝을 모르는 자신감.
오만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시후는 그런 비령의 손을 꽉 움켜쥐며 웃었다.
“두고 봐.”
* * *
“강호의 동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로 대화합이 엿새째를 맞이한 가운데······.”
시후는 비무대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 하루 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나면 비무가 시작된다.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보이진 않지만, 반대편에서 비령 또한 몸을 풀고 있을 것이다.
“오늘 첫 번째 비무인 섬전창과 소검후의 비무가 있겠습니다! 두 분께서는 비무대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장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쏟아지는 함성에 귀가 아려 왔다.
시후는 다소 인상을 찌푸린 채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섬전창! 낭인의 희망!”
“너한테 스무 냥 걸었다!”
“지더라도 최선을 다하라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응원에 시후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허리를 펴자 비무대 반대편에 비령이 올라왔다.
거대한 함성.
차마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격한 반응에 시후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쁘다!!”
“이번에도 멋지게 상대를 제압할 거라 믿소!”
“배당도 얼마 안 되던데 화끈하게 이겨 주시오!”
주위를 둘러보자, 열에 아홉은 비령을 응원하는 듯했다.
곧 눈이 마주친 비령이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젖혔다.
시후는 혀를 볼 안에서 굴리며 고민했다.
어떻게 이길 것인지를.
공동파 최태령 장로가 두 사람을 가까이 불렀다.
“살초를 쓰는 걸 금하오. 이를 어길 시 개입이 있을 것이며, 비무 결과는 패배로 처리될 수 있소.”
“벌써 다섯 번째 듣는데······.”
비령이 잠시 투덜거렸지만, 그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기계처럼 재차 주의점을 읊을 뿐이었다.
“또한, 독을 제외한 모든 무기는 사용할 수 있으나, 비도 등이 있음을 사전에 알려야 할 것이고, 상대방이 패배를 시인할 시 위해를 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말을 마친 그는 두 사람에게 뒤로 물러나라 말한 뒤, 주머니에서 은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튕겨 나온 은전이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튕겨 냈다.
날개가 없는 물체는 언젠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법.
은전과 바닥이 닿은 순간.
비령이 자리를 박차며 달려들었다.
“월광강세!”
제갈세가에서 본 적 있는 초식이다.
물론,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력(巨力)이 담겨 있었다.
시후는 쏟아져 오는 묵빛의 강기를 막아 내기 위해 창을 뻗었다.
“비룡붕요!”
시후의 창에서 금빛 용이 발톱을 세우고, 봉황이 날개를 펼쳤다.
날아오는 묵빛 강기를 먹어치우곤, 아직 배가 고프다는 듯 비령을 향해 날아들었다.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비령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월녀천벽!”
묵빛 강기는 용의 발톱을 박살 내고 봉황을 날개를 찢어발겼다.
하지만, 손해다.
그것도 엄청난 손해.
일대일로 맞바꿀 때는 교환이지만, 이처럼 한 초식을 막아 내기 위해 초식 두 개를 낭비한다면 다음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용적출해!”
비령이 옆으로 몸을 날렸고, 시후가 쏘아 낸 강기가 관중석으로 날아들었다.
다들 놀라서 사방으로 몸을 날리려 했지만, 누군가 겁도 없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성성한 백발에 길쭉한 팔다리가 인상적인 자였다.
일부는 혹시나 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건 풀 한 포기조차 없었다.
다들 그의 죽음을 확실시하는 듯했지만, 그는 태연하게 손을 휘둘렀다.
“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터무니없는 기교.
길쭉한 팔을 채찍처럼 휘둘러 강기를 튕겨 냈다.
막은 것도 아니고, 튕겨 내다니.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할 광경을 만들어 낸 인물은 관중들도 제법 낯이 익은 자였다.
“저, 저 사람! 비무대 뒤편에서 번호표 받는 사람 아니었어?”
“과연 정의맹! 저만한 고수가 고작 번호표나 받다니······.”
관중 대다수는 후괴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후괴를 알더라도, 지금 막아선 인물이 그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간 알려진 후괴를 생각한다면 이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니깐.
하지만, 의구심이 많은 자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저 사람 후괴 아냐?”
“에이, 후괴가 왜 여기에 있어?”
“그냥 닮은 사람인가 보지 싶었는데, 찬찬히 뜯어보니깐 맞는 거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비무나 보게.”
그나마 비무가 진행 중이라 관심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비령은 연신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시후가 창을 한 번 휘두를 때, 그녀는 검을 두 번 휘둘러야 했으니깐.
처음을 제외하면 잔뜩 웅크린 채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만 있었다.
“현월만리!”
‘현월창세’도 그렇지만, ‘현월’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무공은 죄다 후반부 초식이었다.
비령은 일반 초식으로는 버티기 급급하다는 판단에 후반부 초식으로 상대했지만, 내공이 급속도로 줄어들었기에 점차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그럼에도 아직 반격의 실마리를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비령은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늘어트렸다.
마치, 시후에게 더 해보라는 듯.
공격이 강해질수록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니깐.
하지만, 시후는 그런 비령을 보며 똑같이 창을 늘어트렸다.
비령이 무슨 짓인지 싶어 경계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시후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렸다.
“힘들지 않아? 여기까지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이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비령을 응원하는 목소리는 사그라진 지 오래다.
그녀의 승리를 점치던 자들은 이미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비령이 분한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시후는 그런 비령을 바라보며 창끝으로 바닥을 콩콩 찍었다.
“시원하게 쏟아부어 봐.”
시후는 애초에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뒤 패배를 안겨 주려 했지만, 비무를 진행하며 생각을 바꾸었다.
차라리 한 번 확실한 기회를 준 다음, 스스로 패배를 시인하는 쪽이 더 보기 좋지 않겠는가?
비령은 시후의 말에 자존심의 상처를 입은 듯했지만,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한 채 내려가는 것보단 낫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말해 놓고 피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피할 생각이었다면 시후가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 비령의 몸 주위로 내공의 물결이 일렁였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최태령 장로가 비무대 끝으로 올라와 주의를 시키려 했지만, 시후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둘이 합의한 상황이니, 장로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다만, 시후가 막아 내지 못할 것을 대비해서 관중석 주변으로 쌍괴가 자리를 잡았다.
비령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내공을 끌어 올린 듯, 비령의 검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요동쳤다.
비령이 시후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가슴께 높이로 들어 올리자, 굳게 닫혀 있던 비령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현월창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었다.
이윽고, 쌓였던 검격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몰려 왔다.
시후는 밀려오는 검의 해일에 맞서 가볍게 창을 찔러 넣었다.
“붕악굴천!”
비령의 ‘현월창세’와 비교하면 화려함이 적었지만, 흉흉한 기운은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그 기운을 느낀 정의맹 고수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비무대를 감쌌다.
“뒤로 물러나시오!”
“충격을 막아라!”
그들이 비무대 주변을 감싸기 무섭게 두 기운이 부딪혔다.
콰과과광!!!
그와 동시에 거대한 먼지구름이 만들어졌다.
비무대 위에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기에, 쌍괴는 얼른 쌍장을 휘둘러 먼지를 걷어 냈다.
붕악굴천.
산을 무너트리고 하늘을 뚫어 버리겠다는 광오한 초식이 만들어 낸 결과는 굉장했다.
비무대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으니깐.
다음 경기는 꿈도 못 꿀 정도로.
시후는 최태령 장로의 죽일 듯한 시선을 외면하며, 바닥에 쓰러진 비령을 둘러업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더욱 뻔뻔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승자 발표하시죠.”
- 17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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