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63화 목가 (1)
사람은 다르다.
외형뿐만 아니라, 가진바 생각 또한 다르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에 한 가지 상황에 관한 의견을 내놓을 경우,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 사실은 이번 사태를 논하는 이들의 말에서도 드러났다.
“놈들의 숫자가 많긴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였소. 놈들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얻을 수 있다면, 그를 통하여 이득을 취할 방법이 있을 것이외다.”
“나 또한 적 장로의 말에 동의하오. 이번 일을 계기로 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최대한 천산산맥 주변에 인원을 배치하여 놈들의 움직임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한쪽에서는 적극적으로 마교를 감시할 것을 요청했으며.
“이번 난주의 일은 곧 놈들의 귀에도 들어가겠지요? 죽은 두 사람이 마교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낮은 직위는 아닐 테니 정말 다행입니다.”
“무시무시한 놈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검후를 상대로 백여 초를 버틴 것도 모자라서······.”
곤륜의 우송 진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팔황.
그들이 무(武)의 정점에 올라서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었다.
죽을 수도 있는 사람.
검후가 혈랑의 목을 날렸을 때, 독마는 승부수를 띄웠었다.
아니, 말이 좋아서 승부수였지, 동귀어진과 다름없었다.
독마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검후가 손을 보탠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깐.
문제는 백리은의 대처였다.
보통 상대가 동귀어진을 선택한다면 피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신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문제없겠지요.”
목일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독마는 최후의 순간, 백리은의 가슴에 깊은 자상을 입혔다.
단숨에 절명할 정도로 싶은 상처는 아니었다.
혈도 몇 군데를 누르는 것으로 출혈을 멈출 수 있을 정도의 상처.
문제는 독이었다.
동공의 고수에게 상처를 입는다는 건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하물며 가슴이라면 더더욱.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백리은의 내공은 소림의 명일과 더불어 천하제일을 다투었다.
심후한 내공이 있었기에, 소림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 낼 수 있었다.
남은 건 신의가 그의 몸에서 독을 몰아내느냐 몰아내지 못하느냐는 문제였지만, 그 또한 문제는 없었다.
신의에겐 여전히 독각혈망의 뿔을 정제한 가루가 남아 있었으니깐.
잠시 엄한 곳으로 흘러가던 이야기는 구양두가 나서자 금세 본래의 흐름을 찾았다.
“마교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건 모르지 않지만, 모든 걸 파악하고자 한다면 개방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도 역부족일 것이오. 일단, 신강으로 향하는 중요 길목을 중심으로······.”
마교가 정면으로 치고 들어온다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곤륜이다.
구양두는 그런 곤륜을 생각하여 신강에서 청해로 이어지는 길목에 많은 개방도를 배치할 것을 약속했다.
특히, 개방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천이단(天耳團)’을 배치할 것이라 말함으로써. 곤륜파를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에 소림은 사대금강 둘과 나한승 열여섯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
뒤를 이어 무당과 점창 등에서 사람을 보내겠다고 나섰다.
덕분에 이야기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시후는 다소 걱정 어린 마음에 좌측을 힐끔거렸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앉아 있는 게 불편해 보이는데, 이만 들어가는 게 어떻나?”
“흐흐, 살다 보니 네가 내 걱정도 해 주는구나.”
“걱정은 무슨.”
비걸개는 고개를 픽 돌리며 추나행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추나행의 안색을 살피지 않았다면 그가 불편해하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추나행은 손을 들어 비걸개의 어깨를 두드리고자 하던 중, 가슴을 움켜쥐었다.
비걸개가 흠칫 놀라며 기색을 보이자, 추나행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금세 손을 뗐다.
“크흠, 이야기에 진전이 없어 보이니 먼저 나가야겠군.”
추나행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지만, 자세히 보면 입매가 고통에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비걸개는 그런 그를 부축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시후가 한발 먼저 추나행의 팔을 붙잡았다.
“끙······.”
추나행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부축을 뿌리치진 못했다.
시후는 말없이 팔을 붙잡은 채 걸었다.
정론각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무렵, 추나행은 시후의 손등을 두들겼다.
“이제 좀 괜찮아졌으니 돌아가거라.”
“혼자 눕지도 못하면서 뭘 돌아가요?”
추나행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오는 건 가능하지만, 반대로 눕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혈랑이 공격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걱정되면 호골산(虎骨散) 좀 구해 오거라. 나이가 있어서 뼈가 붙으면 몇 달은 걸릴 거 같다고 하던데······.”
“이미 부탁해 놨으니, 내일이면 도착할 거예요.”
시후는 신의에게 추나행의 상태를 듣자마자 하오문에 호골산을 부탁했다.
어차피 호골산은 그리 비싼 것도 아니었다.
대환단에 비한다면 말이다.
아깝긴 해도, 틀어질 뻔한 계획을 바로잡아 준 보답이라 생각한다면 오히려 거저 먹는장사였다.
내공이야 어차피 독각혈망의 내단을 먹음으로써 한계치에 도달했으니깐.
시후는 추나행을 방에 데려다준 뒤, 백리은의 상태를 보기 위해 신의를 찾았다.
저녁 식사 시간대가 한참을 지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있는 건물 방향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이제야 저녁을 먹는 건가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약을 달이는 신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론각에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듯하던데, 벌써 나왔는가?”
“힘들어하셔서요.”
“하긴, 그 상태로는 앉아 있는 것도 힘들 테지. 그보다, 무슨 일인가? 상태는 점심에도 보고 가지 않았나?”
“혹시 부족하지 않은가 싶어서요.”
“부족하면 구해 주기라도 할 텐가?”
시후가 잠시 우물쭈물하자 신의는 손사래를 쳤다.
“치료할 정도는 충분하네. 물론, 자네가 일전에 부탁했던 것까지 생각한다면 아슬아슬하지만.”
“제가 부탁한 거요?”
“기억 안 나는가?”
신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후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장.”
“서장······. 아!!”
“이제 기억나는가?”
잠시 잊고 있었다.
불노괴를 서장으로 보낸 이유를.
* * *
잠시 무강에 다녀온 사이, 반가운 소식이 연신 들려왔다.
서장에서 불노괴의 연락이 왔고.
개방에서도 섬전도를 찾아냈다.
하오문에 먼저 의뢰했었기에 이 점은 다소 의외였다.
하지만, 그중 가장 반가운 소식은 백리은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무려 사흘 만에.
“와공(臥功)으로 체내에 남은 잔독을 몰아내고 있으니, 내일이면 훌훌 털고 일어날 걸세.”
잠시 고민했다.
그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섬전도를 만나러 갈 것인지.
결정은 빠르게 내렸다.
“쾌차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얼굴도 안 보고 갈 텐가? 그리고······.”
“저기 안휘에 있는 운봉산에 다녀올 건데 며칠 안 걸릴 거예요.”
신의에게 섬전도를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를 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최소한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려 줘야 했다.
그래야 돌발 사태가 발생하면, 개방이나 하오문을 통해서 연락을 줄 테니까.
* * *
운봉산은 안휘와 하남의 경계에 있는 자리한 산이다.
험준하기보다는 완만한 쪽에 가까운 쪽이지만, 지나치게 우거진 산림은 야생동물이 살기에 적합하다.
물론, 사람이 살고자 하면 못살 환경은 아니다.
텃밭을 일구고 야생동물을 잡으면 될 테니까.
하지만, 간간이 출몰하는 산군(山君)이 안겨 주는 호환(虎患)은 운봉산을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 지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섬전도는 그런 운봉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텃밭을 일구는 대신 사냥꾼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운봉산을 오르는 약초꾼에게 물으니, 섬전도는 인근에서 ‘호렵수사(虎獵搜射)’로 불린다고 말했다.
“도를 버리고 활을 들어서 오래 걸렸나?”
모를 일이다.
하긴, 시후도 그의 도가 필요해서 찾은 건 아니니 상관없었다.
길 없는 산을 오르다 보니 짐승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호랑이로 짐작되는 것도 있었기에 잠시 고민했다.
사냥해서 선물로 주면 대화가 조금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하지만, 바로 포기했다.
할 줄도 모르는 사냥을 시도하다가 시간을 날릴 바에, 그냥 부딪혀 보는 게 나을 것이다.
시후는 개방에서 알려 준 그의 다섯 개의 안가 중, 세 번째 장소에 다다라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첫인상은 강렬했다.
일단, 매우 덥수룩한 수염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
도 대신 화를 잡아서 찾는 게 늦어진 게 아니라, 저렇게 털북숭이처럼 지내니 늦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무슨 일이오? 보아하니 길을 잘못 들은 것 같진 않소만.”
생각보다 대화가 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시후는 웃으며 봇짐에서 백자 하나를 꺼냈다.
“술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하나 가져왔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섬전도는 퉁명스레 말했지만, 아니라 부정하진 않았다.
시후는 가죽을 다듬고 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자기를 건네주었다.
“일하는 중에는 먹지 않소.”
“어떤 술을 구해 왔는지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텐데요?”
시후의 자신만만한 대답에도 섬전도는 묵묵히 가죽을 다듬었다.
하지만, 그의 목울대가 몇 번 꿀렁이더니 고개를 힐끔 돌렸다.
“모태주(茅台酒)라도 되오?”
“그보다 좋은 술이지요.”
주도를 즐기는 애주가에게 천하제일의 명주가 무엇이냐 물으면, 열에 다섯은 모태주를 꼽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은 모태주를 먹어 보지 못했을 것이기에 다른 술을 꼽을 것이다.
원수가 권해도 받아먹음을 고민해 봄 직한 술이 바로 모태주였다.
그런 모태주보다 좋은 술이라는 말은, 섬전도의 손을 멈추기에 충분했다.
“술을 아시오?”
“잘 모릅니다.”
시후의 대답에 섬전도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긁개를 움직였다.
주둥이는 움직이면서 말이다.
“잘 모르니 그런 소리 할 테지. 모름지기 모태주는······.”
그가 술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드러냈다.
수염 때문에 한없이 과묵해 보이던 인상과 달리, 섬전도는 말이 많았다.
물론, 사람과의 대화를 즐기는 게 아니라, 술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었지만.
“······ 그리하여 숙성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에, 쉽게 만들 수도 구할 수도 없는 술이오. 그런 모태주보다 좋은 술이 있을 턱이······.”
“있습니다.”
시후는 그의 말을 끊을 겸 다시 백자를 내밀었다.
섬전도는 긁개를 내려놓곤 백자를 빤히 바라봤다.
유명 명주에는 조그맣게라도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었다.
하지만, 시후가 내민 백자는 정말 수수하기 짝이 없는 민무늬 백자였다.
섬전도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스치는 순간, 시후는 재빨리 그의 품에 백자를 안겨 주었다.
“이 술이 모태주보다 못하다고 느끼신다면 금 열 냥을 드리죠. 단, 그보다 뛰어나다고 하시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는 거로. 어때요?”
시후의 뜬금없는 제안을 들은 섬전도의 눈에 의심이 어렸다.
그로선 전혀 나쁠 게 없는 제안이다.
그냥 맛없다고 말하기만 해도 금 열 냥을 얻을 테니깐.
섬전도는 시후의 속내를 짐작하듯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무슨 장난을 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려 주지.”
그는 곧장 주둥이를 단단히 막은 마개를 열었다.
곧 그윽한 주향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섬전도는 대차게 마개를 열었던 것과 달리 그대로 굳어 버렸다.
초점을 잃은 동공,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는 하염없이 백자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마개를 닫았다.
시후는 넋이 나간 듯한 그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술이 모태주보다 못한가요?”
섬전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
시후는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몸을 돌려 산길을 내려갔다.
섬전도는 그런 시후의 뒤를 조용히 따라 걸었다.
섬전도.
그의 이름은 천추이며, 성은 목.
그리고 그는 마교로 투신한 구주신협, 이제는 철혈대주라 불러야 할 목주림과 같은 뿌리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다.
- 164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