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56화 준비 (2)
시후는 몸을 풀며 화정을 바라봤다.
푸른 가사 아래로 시원시원하게 뻗은 팔다리는 검법을 펼치기에 가장 이상적인 신체 조건이었다.
그와 반대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짧았다.
일반적으로 검의 길이는 검신과 검병을 포함했을 때 3척이 가장 적합하다.
그에 반해 화정의 검은 아무리 잘 봐줘도 2척하고도 7촌 정도.
장병기인 창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길이다.
시후는 화정을 살피다가 혀를 찼다.
화정은 여전히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이대로는 비무를 해 봤자, 뻔한 결과가 나올 게 분명했다.
그때, 화정의 몸이 움찔했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다.
미약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확실치 않지만, 금정신니가 전음을 보낸 것으로 추측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정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맑다.
한없이 맑은 두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퐁당 빠질 것만 같았다.
시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자운유성창을 들어 올렸다.
“선공은 양보하겠습니다.”
‘굳이?’
시후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이 또한 금정신니의 지시가 분명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갑니다.”
선공권을 보장받은 이상 처음부터 강하게 나갈까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임무도 안 떴는데 승패에 연연해서 뭣하겠는가.
[돌발 임무 ‘꺾이지 않은 마음’이 발생합니다.]
“아, 젠장.”
시후는 자운유성창을 뻗으려다 말고, 발생한 임무에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뒤돌아 옷매무새를 다듬는 척하며 내용을 확인했다.
아니, 솔직히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예상한 내용이었다.
비무에서 승리할 것.
승리 시 주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패배 시 비령과 화정에 이어 금정신니와 검후의 격돌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막아야 했다.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테니까.
시후는 결의를 다지며 일원신공을 운용했다.
시후의 몸에서 은은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첫수에 전력을 다할 수 없으니, 자운유성창에 적당히 내공을 들이밀었다.
“월광침애!”
가벼운 휘두름에 쏜살처럼 날아가는 금빛 줄기.
화정은 그에 맞서 가볍게 발검했다.
단, 오른손만으로.
그렇다면 왼손은?
화정은 검을 잡은 오른손을 비스듬히 눕혀 창을 받아냄과 동시에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천불편기(千佛騙技), 견혼촉망(牽魂觸忘)!”
좌수우검(左手右劍).
화정은 동시에 두 개의 초식을 펼쳤다.
시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창을 거두기엔 늦었다.
판단이 서자마다 무릎을 굽히며 왼발로 땅을 박찼다.
그것으론 부족했기에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화정이 쏘아 낸 장법이 시후의 허리를 빗겨 나갔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인사차 날린 공격을 전력으로 받아쳐?
시후는 참월창으로 상대해 주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곧바로 집어치웠다.
순진해 보이는 겉모습에 잠시 마음이 풀어졌지만, 금정신니의 명령 때문인지 몰라도 화정은 초장부터 전력을 다했으니깐.
시후도 그에 맞서 내공을 한껏 끌어 올렸다.
‘후회하게 해 주마.’
“등룡적출!”
시후는 두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반격을 날렸다.
금빛의 용 한 마리가 단번에 화정을 삼킬 듯 날아들었다.
조금 전 날린 월광침애와 전혀 다른 기세 때문일까.
화정은 공수를 동시에 취하는 대신 방어를 선택했다.
“천라밀밀, 지주사망!”
왼손은 좌에서 우로, 오른손은 아래서 위로 교차하며 움직였다.
그 사이, 시후는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화정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손과 검에 맺혀 있는 백색 빛이 더욱 밝아졌다.
단숨에 등룡적출을 걷어 내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시후는 미소지었다.
“큭!”
화정은 내공을 끌어올렸음에도 두 걸음이나 물러나야 했다.
등룡적출을 막아내긴 했으나, 오른손이 크게 들렸다.
시후는 그 틈을 타서 거리를 좁혔다.
화정의 손에 들린 검은 짧았다.
그 말은, 힘이 제대로 실리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에 반해, 창은 어디를 잡아도 몇 배의 힘을 실을 수 있는 무기다.
시후는 가장 많은 힘을 실을 수 있는 오 분의 삼 지점을 중심으로 창을 휘둘렀다.
“비룡붕요!”
‘붕악굴천’이나 ‘파천도래’ 같은 큼직큼직한 초식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큰 초식은 그만한 틈이 생기기 마련.
차라리 힘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게 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후의 창을 받아 낸 화정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 짧은 검으로 받아 냈으니 손목이 부러지는 기분일 것이다.
“현천풍장!”
노리는 곳은 허벅지.
시후는 반걸음 옆으로 물러나는 것으로 가볍게 피함과 동시에, 계속 공격을 이어 갔다.
일수만리에서 용적출해로 이어지는 연환 공격에 화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결국, 화정은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힘을 나누는 행위는 균형이 맞을 때나 성립할 수 있었으니깐.
하지만, 그마저도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짧다.
수비가 조금 견고해졌을지 몰라도 병자기의 이점이 불러오는 힘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했다.
이 사실을 시후가 알고 있었지만, 화정도 알고 있었다.
하물며, 그보다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다다른 금정신니가 모를 리 없었다.
그건 금정신니의 표정에도 여실 없이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고도 말릴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금정신니가 입술을 달싹이려 하자 시후는 급히 공격을 날렸다.
‘어디서 도와주려고.’
“월광귀곡! 와룡등천! 붕악굴천!”
시후는 연신 강맹한 공격을 쏟아 내며, 전음을 보내지 못하도록 기의 흐름을 엉망으로 꼬았다.
이렇게 되면 전음은 전할 수 없다.
금정신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의도를 간파당한 것이 부끄러운 것일까.
그도 아니면 하려고 했던 행동이 부끄러움을 아는 것일까.
의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금정신니의 몸에서 짜릿할 정도로 강렬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시후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금정신니를 바라봤다.
“더 손을 섞는 건 무의미하니 검을 거두거라.”
“스승님, 저는······.”
“되었다!”
금정신니는 버럭 화를 내며 돌아섰다.
시후는 속으로 고소를 지었지만, 이대로 돌려보내면 나중에 귀찮아질 것이다.
“저와 상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금정신니의 걸음이 멈췄다.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비령과 붙어본다면 결과가 어떨지는 쉬이 짐작하기 힘들겠습니다. 소림의 견적 스님과 비무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면, 지근거리에 붙은 상태에서 약한 모습을 자주 보였으니 말이죠.”
금정신니의 귀가 쫑긋거리는 게 아주 선명히 보였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아직 몸을 돌리진 않았다.
“대응에 기민하지 못했던 초식이······ 이랬던가?”
그와 동시에 금정신니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모습에 시후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서, 허벅지가 멍이 들 정도로 세차게 꼬집어야만 했다.
* * *
구파의 전력은 소림과 무당, 그리고 곤륜을 제외하면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세 곳의 문파야, 워낙 뛰어난 절기를 보유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각기 팔황이라 불리는 이들이 하나씩 있었으니깐.
하지만, 팔대세가는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특히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남궁세가와 가장 말석에 자리한 세가와의 격차는 실로 비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이번에 새로 합류한 서문세가의 경우는 뛰어난 재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기존의 말석을 차지했던 백리세가는 정말 팔대세가라 어찌 불리는지 의아할 정도로 형편없는 세를 자랑했다.
최근 합류한 서문세가보다 나을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물론, 그 하나 덕분에 모든 부족한 점을 짓누르며 서문세가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백리은.
백리세가에서 낳은 불세출의 천재이며, 팔황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그 덕분이었다.
“자네 왔는가!”
전대 무당제일검이자 ‘태극검황’이라 불리는 공진이 그를 격하게 반겨 주었다.
복건에 자리한 백리세가와 호북에 위치한 무당의 접점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들의 젊은 날의 인연은 실로 가볍지 않았다.
그가 태극검황이라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백리은의 도움이 컸으니깐.
백리은은 공진의 손을 붙잡으며 말을 건넸다.
“또 연구할 무공은 없는가?”
“없네. 하지만, 연구할 무공이 없다면 같이 창안하면 될 것이 아닌가?”
공진의 시선에 백리은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사양하겠네. 손 보는 정도는 돕겠지만, 그 이상 하는 건 귀찮단 말이지.”
“어허,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세상에 살다 온 흔적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나?”
“난 내 새끼들을 남겼으니 괜찮네. 아, 자네는······. 지금이라도 장가가겠나?”
백리은이 말을 돌리자 공진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공진이 ‘태극검황’이라 불린 데는 ‘태극혜검’을 새로이 정립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도움의 결정적인 역할을 백리은이 제공했다.
백리은의 가장 큰 재능은 무공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무공을 만들거나 그 허점을 보완할 수 있는 일대종사(一代宗師)의 능력에 있었다.
다만, 재능은 있으나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손보는 정도라면 도와줄 수 있으니, 나중에 생각해 놓은 게 있거든 불러 주게.”
“고맙네. 역시 자네밖에 없으이.”
두 사람은 제법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하나둘 튀어나왔다.
“검후가 제자를 내놓았다지?”
“먼발치서 본 적이 있네.”
“어떻던가?”
“제 스승이랑 똑 닮았더군.”
“무림의 재앙이 또 나타났구나.”
백리은의 말에 공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검후 또한 젊은 시절의 백리은에게 무공을 봐달라며 귀찮게 매달린 적이 있었으니깐.
“그보다 금정도 늘그막에 제자를 들였다고 하던데 얼추 나이가 비슷하겠군?”
“안 그래도 데리고 왔네.”
“에잉, 제 감정을 제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금정은 다 좋은데 유독 검후와 관련되면 정신을 못 차린단 말이지.”
그건 다 백리은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검후와 금정은 정말 백중지세였다.
하지만, 백리은은 검후가 귀찮게 매달리자 무공과 검후의 습관 몇 군데를 지적해 주었다.
그 덕분에 검후가 아주 큰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지만, 아주 근소한 차이로 검후가 앞섰다.
금정은 제법 시일이 지난 뒤에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금정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의 첫째가 백리은이었고, 검후는 그다음이었다.
“혹여라도 금정 앞에선 그 말을 꺼내지 말게.”
“내가 아무렴 그 정도도 생각이 없을까 봐? 그보다 저 아이는······.”
백리은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두 사람이 열심히 병장기를 부딪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맨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봉이었다.
“저건 봉법이 아닌데?”
“봉만 들고 있을 뿐이지 그 아이가 익힌 건 창일세.”
“그래서 이상했군. 자네의 제자인가?”
“내가 태극검을 내버려 두고 창을 가르칠 리 없지 않은가?”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건 견적과 시후의 비무였다.
시후는 창 대신 연성(延性)이 뛰어난 철심목으로 만든 봉으로 조가창식을 펼치고 있었다.
백리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둘의 비무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 사람이 한 걸음을 나아가면 곧 다른 사람이 한 걸음을 물러나고, 두 걸음 물러서면 두 걸음을 나아갔다.
이질적인 광경이다.
아무리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겨루더라도 완벽한 균형을 이룰 순 없었다.
즉, 누군가 의도적으로 맞춰 주고 있다는 말이었다.
“저 녀석이군.”
백리은의 시선은 시후의 등에 내리꽂혔다.
그는 시후가 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한참 동안 눈에 담았다.
처음은 대견함이라는 감정으로 바라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리은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재밌는 무공이구나.”
그 말에 공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정립하기 전의 태극혜검을 봤을 때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 157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