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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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안휘 (2)
시후는 조금 더 유심히 분서를 살폈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별호를 참 잘 지었다.
손가락 또한 긴 팔과 황금 비율을 이루듯 길쭉길쭉했고, 그에 비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은 목과 뭉툭한 코와 강낭콩만 한 눈은, 정말이지 두더지가 사람으로 변하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말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평범하게 생겼다고 말하기 어려운 외모라는 뜻이다.
하지만, 남궁천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와 대화를 나눴고, 분서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던 분서는 잠시 양해를 구한 뒤 봇짐을 뒤졌다.
곧 그는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백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남궁천은 백자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천루장의 구자교(口子窖)로군요.”
“으허허허, 소 형제가 잘 아는구려? 내 안휘를 종종 찾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오.”
각 성에는 그 성을 대표하는 명주(名酒)가 있었다.
섬서에는 ‘서봉주’와 ‘분주’가 유명하고, 귀주에는 ‘모태주’가 유명하다.
그렇다면 안휘를 대표하는 명주는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분서가 꺼낸 구자교다.
백자 주둥이를 감싸고 있는 붉은 비단 포에 적힌 ‘루(淚)’라는 글자는, 안휘에서 가장 유명 양조장인 천루장의 물건임을 증명했다.
“내 석 달 전에 안휘를 찾은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오. 그때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분서가 삼키듯 말을 끊었다.
“석 달 전에 왜 내가 빈손으로 돌아간 줄 아시오?”
대답을 바란 듯한 질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분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백자 주둥이를 감싸고 있는 비단 포를 찢더니 나발을 불었다.
짧디짧은 그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그 모습은, 술을 마시기보다는 치솟아 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위해서 들이켜는 것만 같았다.
꽉 움켜쥔 백자를 부여잡은 손이 잘게 떨리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천루장의 구자교는 가격도 비싼 편이지만,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파는 객잔도 그리 많지 않소.”
남궁천이 모를 리 없다.
천루장은 남궁세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양조장이니깐.
“삼 개월 전에는 수중에 돈이 제법 들어왔기도 했고, 마침 합비를 지나는 길이었기에 천루장을 찾았소.”
분서가 푸념을 늘어놓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천루장을 찾아가서 구자교를 사고 싶다고 말하니, 개인과 거래하지 않는다고 그러더이다.”
그와 동시에 남궁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분서는 남궁천을 바라보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거짓말이었소. 보다시피 내가 좀 없이 생기지 않았소이까? 상대하기 싫었는지 그냥 쫓아낼 요량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었소. 당장 따지려 했지만, 천루장의 뒤에 있는 남궁세가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소. 그래서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오. 어차피 한 병이면 족하니 그냥 객잔에 들려서 마시자고.”
다시금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의 손에 들린 백자가 그리 작은 크기는 아니지만, 단 두 번 만에 동이 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천루장 앞에서 기다렸소.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길래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갔다오. 그의 뒤에 공손히 시립하고 있으니 노비인 줄 착각했는지 만류하지도 않더군. 나는 조용히 기다리다가 그자가 구자교를 사자마자 돈을 꺼내었소.”
그 뒤의 이야기는 뻔했다.
삼 개월 전 개인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거짓이었으니, 분서는 구자교를 살 수 있었다.
다만, 끝끝내 사과는 받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은 분서는 속이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다음에 천루장을 찾을 때는 그냥 당당히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으허허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오. 이미 얼굴도장을 단단히 찍었으니 기억 못 할 리도 없지 않소?”
“그것이 아니라······.”
남궁천은 하던 말을 끊고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분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몸을 돌려 봇짐에서 구자교 한 병을 더 꺼내었다.
“자, 거기 두 분도 이리 오시오. 한 병 더 있으니 목을 축이는 건 가능할게요.”
분서는 곧 봇짐에서 밋밋한 잔도 꺼내었다.
그는 남궁천에게 잔을 건네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보다 우리 통성명도 하지 않았구려. 나는 춘오라고 하오.”
그에 남궁천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본명을 밝힐지 아니면 가명을 쓸지 고민하는 듯했다.
잔을 내미는 분서의 얼굴에 의문이 들 때쯤, 남궁천은 그의 손에서 잔을 건네받았다.
“저는······.”
* * *
시후의 예상과 달리, 남궁천은 천루장이 아니라 남궁세가로 향했다.
어제 속으로 화를 삼키던 모습을 생각한다면, 바로 천루장으로 쳐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의외네요.”
시후의 말에 앞에서 걷고 있던 남궁천이 뒤를 돌아봤다.
“무슨 말인가?”
“천루장으로 바로 갈 줄 알았거든요.”
곁에서 걷고 있던 제갈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반응에 남궁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닌데 천루장으로 가서 뭣 하겠는가? 근본을 뜯어고쳐야 할 일이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시후는 남궁천이 뭔가를 저지를 것만 같았기에 기대감 어린 마음으로 뒤따랐고, 제갈려 또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를 뵈러 갈 생각이니 세가 구경이라도 하고 있게나.”
세가 구경보다는 남궁선유와 무슨 대화를 나눌지 궁금했지만, 남궁천의 단호한 표정을 보아하니 데려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시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아쉬워하는 제갈려를 데리고, 기억을 더듬어 남궁미의 거처로 향했다.
긴가민가하던 기억이었지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담벼락을 돌아 도착한 연무장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낯선 뒷모습과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 하면 안 돼요?”
“어허!”
“어차피 제가 검 휘두를 일이 얼마나 있다고요······.”
“최후의 순간에 네 목숨을 지켜 줄 수 있는 건, 네 손에 들린 검뿐이다.”
“아니, 그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도록 조심히 다니면 되잖아요.”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낯선 뒷모습의 인물은 시후의 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휙 돌렸다.
시후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얼핏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남궁천과 꼭 닮은 외모를 가졌으니, 아마도 남궁세가의 둘째인 남궁반일 것이다.
물론, 서글서글한 눈매의 남궁천과 달리, 남궁반의 눈매는 다소 치켜 올라가 있었다.
남궁천이 온순한 대형견이라면, 남궁반은 사나운 늑대와 같았다.
“누구······.”
“시후 오라버니!!”
남궁반이 묻기도 전에 남궁미가 후다닥 달려왔다.
마치 당장이라도 품에 안길 듯한 기세였기에, 시후는 급히 제갈려를 방패로 삼았다.
달려오던 남궁미는 입술을 삐죽이며 속도를 줄였다.
“몇 개월 만에 보는데 감격의 포옹을······.”
“뒤에 계신 분에게 소개부터 해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만.”
“쳇, 눈치채셨으면서 그러기예요?”
남궁미의 투정에 시후는 한차례 눈을 부라렸다.
“흥! 이쪽은······.”
“남궁세가의 차남 남궁반이라 하네. 누군가 했더니 미아가 그토록 이야기하던 차시후 소협인가 보군.”
“처음 뵙겠습니다.”
마주친 남궁반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천이는 아버지께 갔는가? 물어볼 필요가 없겠군. 천이 성격에 어디로 세진 않았을 테니 말이야.”
몇 개월 만에 돌아왔으니 아버지를 먼저 보러 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시후는 남궁천이 ‘근본을 뜯어고쳐야 할 일’이라 말하며 남궁선유를 찾아갔기에, 순전히 그간의 안부만 묻고자 찾았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보다 시후 오라버니. 운남까지 가셨다면서요?”
“얘도 같이 갔어.”
“가긴 갔지만, 나는 그냥 이리저리 끌려다닌 거지.”
제갈려를 끌어들이려 했으나, 제갈려 또한 귀찮은 일이 질색이라는 듯 선을 그었다.
“무공부터 수련해야지. 조금 전까지도 하고 있었잖아.”
“끝났어요.”
“누구 마음대로 끝내?”
남궁반이 다소 화난 듯 목소리를 높이자, 남궁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오후에 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점심시간도 다가오는데······. 맞아, 점심 먹으러 가요. 귀한 손님이 왔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건 아니죠?”
“끄응······.”
남궁반은 얕은 신음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남궁미를 한 대 쥐어 박고 싶은 얼굴이었다.
“오후 수련도 빼먹는다면 오늘 자정까지 굴릴 테니 알아서 해라.”
남궁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남궁미는 밝게 웃으며 시후의 팔을 잡아당겼다.
“밖에 나가요! 요 앞에 진미객잔이라는 곳이 새로 문을 열었는데, 새로 지은 가게라서 그런지 내부도 깔끔하고 맛도 괜찮아요. 나오면 바로 옆에 다관도 있으니······.”
남궁미는 그간 떨어져 있었던 만큼 붙어 있겠다는 듯, 시후에게 아주 찰싹 달라붙었다.
남궁반이 한소리 하려는 듯 입술을 떼려는 찰나, 저 멀리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복장을 보아하니 남궁선유의 곁을 지키는 제왕검군이 분명했다.
그는 곧바로 남궁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기 계셨군요. 둘째 도련님, 가주님이 찾으십니다.”
“뭐 때문인가?”
“찾으셨습니다.”
제왕검군은 남궁선유의 의중대로 움직인다.
그들은 남궁세가 가주의 검 그 자체였다.
남궁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사라졌다.
* * *
시후는 남궁미를 제어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움 일인지 깨달았다.
귀에선 피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시후는 제갈려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제갈려는 철저히 외면했다.
“다음 주에 ‘무면’이라는 극단이 찾아오는데, 그때까지 세가에 머무르면 보러 가지 않을래요? 이번에 패왕별희(覇王別姬)를 선보인다는데, 강서에서는 대호평이었데요. 보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고, 오죽하면 강서성 지부 대인이 재공연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겠어요?”
시후도 남궁미에게 그 조잘대는 입을 다물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최대한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남궁세가로 돌아왔는데, 언제나 곧은 자세로 정문을 지키는 위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궁미가 아무리 남궁세가의 망종이라고는 하지만, 저런 기강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넘어갈 리 없었다.
하물며 시후의 앞이 아니던가.
남궁미는 표정을 굳힌 채, 뭐라 한소리를 쏘아 내기 위해 다가갔다.
“지금 뭐 하는······.”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남궁미를 보고도 여전히 뭉쳐 있는 것이, 제법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했다.
“무슨 말?”
“그게······. 아, 가주님께 찾아가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남궁미가 채근했으나, 위사는 오가는 사람들 때문인지 말을 아꼈다.
“가 보면 알겠지.”
시후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위사들을 위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미가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왔다.
가주실로 가는 길의 사람들은 정문의 위사들처럼, 두 사람 이상만 되어도 뭔가를 이야기하느라 정신없는 것처럼 보였다.
“뭐지?”
남궁미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저 멀리 가주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을 지키는 제왕검군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들어갈게요.”
남궁미의 말에 제왕검군들은 시후를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렸다.
그들도 시후가 남궁세가에 무엇을 안겨 줬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제갈려도 있지 않은가.
“난 조금 피곤하네. 먼저 방에 가 있을게.”
제갈려는 그들의 고민을 알아채고는 주저 없이 걸음을 돌렸다.
제왕검군은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듯 즉각 옆으로 비켜섰다.
남궁미가 가주실 문을 두들겼다.
세 번을 두들겼지만, 안에서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돌아가야 하나 싶은 찰나, 남궁미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너머로 의자에 몸을 기대어 있는 남궁선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막 정신을 차린 듯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누구······. 미아로구나. 차 소협도 왔군.”
이전에 보았던 것과 달리 그의 얼굴은 족히 십 년은 늙어 보였다.
남궁무의 죽음은 제법 떨쳐 냈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너무나도 짙어 보였다.
“밖이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이에요? 어머, 얼굴은 또 왜 그래요?”
남궁미는 호들갑을 떨며 남궁선유의 뺨을 매만졌다.
그 손길에 남궁선유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띠었다.
그는 잠시 시후의 눈치를 살폈지만,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천이가······ 차기 소가주를 자신으로 지목해 달라고 하더구나.”
- 151화에 계속 -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