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48화 정비 (3)
성도에서 장강을 따라 삼천리쯤 가면 의창(宜昌)이 나온다.
의창은 흔히들 알고 있길, 촉한의 흥망성쇠 중 망(亡)에 해당하는 이릉대전(夷陵大戰)이 일어난 곳이며, 험준한 호북의 서쪽 산지를 지나며 거칠어진 장강의 물결이 잔잔해지는 시발점이었다.
시후는 그곳에서 비령과 헤어졌다.
구천종주의 다음 목적지인 형문산은 의창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으니깐.
“그럼 다음에 봐.”
비령은 못내 아쉬워하는 기색을 비쳤지만, 뺨을 짝짝 두들기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시후는 근처에 숨어 있을 검후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건 남궁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영문을 모르는 제갈려만 두 사람을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다시 배를 타겠는가?”
제갈세가로 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이대로 장강을 타고 안휘로 들어간 뒤에 제남까지 올라가는 것.
둘째, 하남까지 올라간 뒤 황하를 통하여 제남으로 들어가는 것.
남궁천은 전자를 바랄 것이다.
안휘에 들린다면 필연적으로 합비를 지나야 하니, 잠시 가족들에게 건강히 지내고 있노라 얼굴이라도 비출 수 있을 테니깐.
“무강과 소림에 잠시 들려야 하니 하남으로 가시죠.”
순간적으로 남궁천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하지만, 시후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얘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며칠간 신세를 좀 지고 싶은데, 가능하죠?”
남궁천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 * *
무강에 들른 뒤 찾은 소림사는 일전과 달라져 있었다.
천년을 지켜 온 소림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사람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이 느낌을 받은 건 산문에서부터였다.
지키는 두 소림승의 기도가 일전과 눈에 띌 정도로 달라졌으니깐.
그리고 지나는 소림승들도 마찬가지였다.
“흐음······.”
남궁천 또한 느끼는 바가 있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분인가?”
“그분이라뇨?”
“일전에 스님 한 분께 붙들려서 설법을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의 말에 시후는 기억의 조각을 헤집었다.
뭔가 생각날 듯 말 듯 간질간질한 느낌.
절로 아련한 표정이 지어졌다.
“흘려넘긴 듯한 이야기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네. 나와 강 소협이 미아와 함께 소림을 구경했을 때 만난 스님······.”
“아!”
기억났다.
남궁천이 말하는 인물은 초오 대사가 분명했다.
그의 능력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납득할 수 있었다.
초오 대사는 탈각(脫殼)을 도와준다.
특히나 그의 능력은 같은 불문(佛門)에 더욱 효과적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변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음? 차 아우도 그분을 만나 뵌 적 있는가?”
“여러 번 만났죠.”
“말하는 모양새가 소림에서만 뵌 건 아닌 듯한데?”
“그에 관한 이야기는 차차 해드릴 테니, 일단 볼일부터 보죠.”
초오 대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대화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시후는 우선 말을 끊었다.
시후는 궁금해하는 남궁천을 데리고 익숙한 경내를 따라 신의가 머무르는 곳으로 향했다.
신의는 마침 건물 밖 그늘에서 뭔가를 말리고 있다가, 시후를 발견하곤 얼굴에 화색을 띠며 다가왔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당가를 도와줬다지?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당가가 무사할 수 있었어.”
신의는 남궁천과 시후의 손을 붙잡은 채 연신 흔들어 댔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신의의 본명은 당화준.
그 또한 당가의 일원이다.
시후는 연신 고맙노라 말하는 그를 진정시킨 뒤 본론을 꺼내기 위해 슬쩍 눈치를 살폈다.
다만, 신의에게 독각혈망의 부산물들은 건네주면, 필연적으로 운남에서의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는지라······.”
그렇기에 시후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남궁천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갈려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시후를 노려봤다.
시후는 뒤통수에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차라도 한잔 들겠나?”
“아뇨, 이것만 드리고 바로 갈 생각이라서요.”
시후는 곧장 탁자 위에 두 물건을 놓았다.
독각혈망의 뿔을 정제한 가루와 최종 탈피를 마친 비늘.
“냄새가······. 뱀인가?”
신의는 주머니를 열어 보지도 않았지만, 코를 킁킁거리는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걸 알아차렸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어 보라고 손짓했다.
그가 먼저 열어 본 건 돌돌 말려 있던 독각혈망의 비늘이었다.
워낙 덩치가 컸던 탓에, 무강 객잔의 주인이 쓸데없이 너무 많다고 하여 돌려준 일부였다.
물론, 일부라고 한들 엄청난 양이지만.
“······ 이건?”
“운남에 갔을 때 잡은 독각혈망의 비늘이죠.”
“몇 차 탈피······ 아니지. 그걸 알아차리긴 어렵지.”
신의는 잠시 고개를 젓더니 다른 주머니를 바라보곤 혹시나 하는 눈빛을 보냈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는 재빨리 주머니를 풀어헤쳤다.
신음이 흘러나왔다.
“뿔을 갈아 낸 가루예요. 쓴 곳이 있어서 위에서 세 분량은 제하고 그 아래 한 치 분량이니, 조금 효과가 미미할지도 몰라요.”
“이게?!”
신의는 경악했다.
아무리 가장 윗부분이 아니라고 한들, 고작 한 치 분량이 어린아이 주먹만 한 양이다.
이 정도면 갓 뿔이 자란 독각혈망이 아니라 최종 탈피를 마치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이니깐.
신의가 왼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의 손이 푸르게 빛났다.
수강(手强)이다.
그는 내려놓았던 비늘을 집어 들더니 양해를 구했다.
“잠시 실례하겠네.”
그의 손이 휘둘러졌다.
수강은 검강과 마찬가지로 초절정 고수의 끝자락에서나 펼칠 수 있는 지고지순한 경지였다.
그러나, 비늘을 단번에 뚫진 못했다.
겉에 얇은 실선이 새겨졌을 뿐.
“으음······. 최종 탈피를 마친 녀석이었군. 이 녀석을 어떻게 잡았나?”
신의의 눈빛에는 짙은 의혹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의 녀석이라면, 시후의 수준으로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별호에 ‘칠’이며 ‘팔’이며, 숫자가 붙는 사람들이나 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시후 또한 수강에도 비늘이 잘리지 않자 적잖이 당황했다.
비늘을 죽이자마자 벗기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지고 오지 못했을 것이다.
수강에도 잘려나가지 않는 비늘이라니.
“막 탈피를 마친 뒤라서 그런지 기진맥진하던데요? 게다가 그때는 비늘이 굳지 않아서 검기에도 상처를 입었어요.”
“천만다행일세. 그보다 조금 더 늦었으면 분명 죽었을 걸세.”
시후의 생각도 같았다.
한 시진은커녕, 반 시진이라도 늦게 들어갔다면 독각혈망이 몸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공격에도 죽었을 것이다.
“이걸로 뭘 해 주면 되겠나?”
“딱히 뭔가를 해 주십사 하고 들고 온 건 아니라서······. 그냥 사용하고 싶은 곳에 사용하세요.”
시후가 욕심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다.
신의가 알아서 만들어 줄 것을 확신했으니깐.
그건 신의의 표정에서도 알 수 있었다.
“알겠네. 내가 사용하고 싶은데 사용하지.”
* * *
시후는 제남에 도착하자마자 하오문을 통해 서찰 한 통을 받았다.
서찰에는 쌍괴의 근황이 적혀 있었다.
“음······.”
소림에서 나와 배를 탈 겸 들른 낙양에 쌍괴는 없었다.
그들은 서문세가에서 접촉하자 혜아를 데리고 나와서, 금전적인 지원을 하겠노라 말한 서문주옥을 보기 위해 광동으로 간 것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서찰에 적힌 내용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두들겨 팬 건 좀······.”
서찰에는 쌍괴는 혜아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던 서문주옥을 두들겨 팼다고 적혀 있었다.
쌍괴의 심정은 이해한다.
아비 된 자가 제 자식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니, 혜아를 애지중지 키워 온 둘로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것이다.
게다가 혜아는 절맥으로 고통받으며 크지 않았는가.
어찌 보면, 두들겨 팬 건 다행이었다.
죽이진 않았으니깐.
쌍괴가 예전 성질대로 행동했다면, 서문주옥은 분명 죽었을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네.”
서문주옥은 쌍괴와 있었던 일을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하긴, 어디 말할 수도 없다.
말했다간 혜아가 그의 자식이라는 게 알려질 테니까.
“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보는 거야?”
“별거 아냐.”
“흐응······.”
별거 아닌 반응이 아니었지만, 제갈려는 피식 웃으며 다시 앞장섰다.
제아무리 방랑벽이 있다고 해도, 근 여섯 달 만에 돌아온 집이 반갑지 않을 리는 없었으니깐.
“엇!”
제갈세가 정문을 지키는 위사 중 한 명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오는 제갈려를 발견하곤, 놀라서 손가락으로 제갈려를 가리켰다.
곧 자신의 실례를 깨달은 듯 황급히 손가락의 거뒀지만, 제갈려는 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말 기한을 꽉꽉 채워 돌아오셨군요.”
“사실 조금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었는데, 사천에서 일이 생겨서요.”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난리였습니다.”
위사는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제갈려는 피식 웃으며 문을 넘었다.
그녀는 곧장 청심당으로 향했다.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
제갈세가의 가주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제갈중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갈마혁을 달래는 건 그보다 더 중요했다.
저 멀리 제갈세가의 심처이자 제갈마혁이 머무르는 청심당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보다 더욱 눈에 띄는 건 높은 담장 위로 날다시피 움직이는 제갈마혁의 모습이었다.
“어쩌자고 이곳저곳 안 끼는 일이 없던 게냐!!”
그의 노성(怒聲)에 제갈려의 시선이 시후를 향했다.
시후는 두 손을 좌우로 흔들며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모든 일을 따지고 보면 시후 탓으로 보는 게 정답이었다.
황궁의 일에 끼어든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건 시후 때문에 휩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그러했다.
측천무후의 황릉을 제외하면 제갈려는 시후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아니, 측천무후의 황릉조차도 시후가 데리고 간 것이니, 제갈려의 입장에선 시후가 원흉이고 범인이었다.
제갈마혁의 눈빛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분명 ‘생채기 나는 정도는 신경 안 쓸 테니, 팔다리만 온전하게 데리고 오너라’라고 말씀하셨죠?”
시후는 제갈마혁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생기기 마련이죠.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은 건 인정하지만, 그 많은 일을 겪음으로써 경험이 쌓이는 것 아닐까요? 경험이란 녀석은 돈을 주고도 못 구하는 법이니······.”
시후는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황한 변명 탓에, 제갈마혁은 화를 낼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제갈마혁은 곧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내곤, 세 사람을 향해 뒤따라오란 손짓을 보냈다.
시후는 남궁천과 함께 엉거주춤 그 뒤를 따랐다.
그가 세 사람을 데리고 간 곳은 일전에 비령과의 비무 문제로 끌려왔던 그곳이었다.
제갈마혁은 세 사람이 앉은 뒤에도 한참이나 침묵을 고수했다.
그의 침묵이 깨어진 건 정확히 반 각이 지나서다.
“그래, 살아만 있다면 뭐든지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지. 많은 경험을 했더냐?”
“네!”
제갈려의 활기찬 대답에 그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는 앞에 놓인 차를 홀짝이며 두 눈을 감았다.
“지난 네 행적을 돌이켜 보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더구나. 구주가 좁다고 돌아다녔지만, 실제로 구주 밖으로도 돌아다녔으니, 천하를 다 누빈 것과 진배없구나.”
“에이, 아직 서장이나 청해 쪽은 가지도 못했는걸요.”
능청스러운 제갈려의 대답에 시후는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건 남궁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갈마혁은 그 대답이 맘에 드는지 크게 웃었다.
“으헐헐헐, 그도 그렇구나. 언제 기회가 되거든 서장에 이 할아비와 같이 가자꾸나.”
그 뒤로 제갈려는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요약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최근 있었던 사천에서의 일까지.
제갈마혁이 가장 크게 관심을 보인 건, 당연히 사천에서 겪었던 팔진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천이라······. 어차피 옥정 사태에게 향을 올리기 위해서도 사천에 가야 했는데, 이 기회에 직접 가 봐야겠구나.”
제갈마혁의 말에 제갈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어······. 그 진이 있잖아요.”
제갈려는 잠시 주저하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부서졌어요. 흔적도 없이.”
- 14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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