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
개발자의 클리어 공식
147화 정비 (2)
당추열에게 독각혈망의 부산물들을 전해 준 것까진 좋았다.
어차피 시후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지만, 당가엔 절실할 정도로 필요한 물건이었으니깐.
그를 통해서 독각혈망의 뿔에서 그 정수를 뽑아낼 수 있다면, 나쁜 교환은 아니었다.
다만, 당추열에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가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의 입이 가벼운 탓이 아니었다.
당추열은 가주인 당모준의 윽박에도 ‘귀인이 선물해 주었다’라고 말하며 신의를 지켰다.
물론, 당추열과의 자리를 마련해 준 당패철 또한 발설하지 않았었다.
범인은 당가 전체라 봐도 무방했다.
시후가 당패철의 방 앞에서 수상한 자루를 들고 기웃거릴 때 그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당패철이 시후를 으슥한 곳으로 안내한 뒤 당추열을 불러온 것 또한 누군가는 보았다.
당추열이 자루를 들고 헐레벌떡 구극전으로 달려간 것까지도.
소문이 퍼지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다.
다만,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은 거슬렸을 뿐이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맘에 드네.”
시후는 아무런 제제도 없이 구극전 안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당가의 직계만이 출입 가능하다는 구극전이지만, 당가에 전해 준 선물의 값어치는 그 규칙마저 허물었다.
시후는 고약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보랑(步廊)을 지나 구극전에서도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이건 맘에 안 들고······.”
보랑은 건물과 건물을 이어 주는 복도의 역할이지만, 구극전에서는 조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머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는 각종 혐오스러운 생물들과 그 신체 일부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자연스레 시후의 걸음이 빨라졌다.
“계세요?”
“······ 들어오게.”
힘없는 목소리.
분명 당추열의 목소리는 맞았지만, 그 목소리에서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시후는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당추열은 나흘 전 보았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입은 옷이 그러했다.
그리고, 번들거리는 기름진 머리도 나흘 전과 비슷한 것을 보니, 며칠째 감지 않은 듯했다.
하루 이틀 밤을 새운 정도로는 저렇게 되지 않는다.
그건 시후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일주일간 퇴근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급한 것도 아닌데······.”
“지금 이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렇네.”
당추열은 시후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시후는 천천히 그의 곁으로다가 그간의 경과를 눈으로 확인했다.
시후가 세 치를 부탁했음에도, 나흘 동안 반 치 밖에 깎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뿔의 정기가 가장 많이 담겨 있는 부위는 가장 끝 부위였다.
그리고 가장 단단하기도 했다.
반 치를 깎아 냈으니, 이제부터는 속도가 붙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깎아 내는 데 성공했으니, 내일 점심쯤에는 자네가 요구한 부근까지 깎을 수 있을 걸세.”
확언에 가까운 당추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상은 정확할 것이다.
작업하고 있는 그가 가장 잘 알 테니까.
시후는 당추열이 작업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말을 꺼낼 때를 기다렸다.
이곳에 찾은 이유는 경과를 확인하러 온 게 아니니깐.
“재촉하러 온 건 아니지 않은가?”
당추열 또한 그 낌새를 느꼈는지, 여전히 독각혈망의 뿔을 깎아 내며 물었다.
시후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생각해 보니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거기서 딱 한 치 분량만 더 부탁드릴게요.”
“같이? 아니면 따로?”
“따로 부탁드릴게요.”
당추열은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후는 조금씩 쌓여 가는 가루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 * *
“개방의 추혼 일조와 삼조에서 무사히 포획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적심당주의 말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행적이 드러났던 다섯 놈 중 호북으로 넘어간 놈을 비롯한 세 녀석은 죽었다.
둘이라도 붙잡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낌새가 보이면 개문을 열어,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고 했으니깐.
실제로, 이조와 사조의 경우에는 개문의 영향 때문에 죽었었다.
“하오문의 도움이 컸습니다.”
“사람을 보내게.”
“안 그래도 이조와 사조를 보냈습니다.”
적심당주의 말에 당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독을 사용하는 게 좋겠는가?”
“일전에 종패가 작령환을 먹였을 때 놈들이 정보를 실토했음에도 무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생각해 볼 때, 신경독이 저들의 머릿속에 있는 고독을 억제, 또는 죽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운남에서 작령환을 먹인 두 놈의 머리를 헤집어 봤다면, 어느 쪽인지 명확히 알 수 있을 텐데······.”
적심당주가 말끝을 흐리며 종패를 향해 넌지시 눈빛을 보냈다.
어느 쪽인지 짐작 가느냐고 물어보는 듯한 시선에 그는 고민했다.
“작령환은 고독을 억제하는 쪽이라기보단, 공격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과거 작령환을 먹였을 때 보인 반응보다 조금 더 격렬했으니 말이야.”
“그 말은, 작령환을 먹고도 고독이 살아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십중팔구는.”
“음······.”
종패의 말에 다들 신음을 흘렸다.
작령환은 당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독 중 하나였다.
들인 시간과 정성, 그리고 효과까지 따지고 본다면 당가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독이었다.
그런 독이 고독조차 죽이지 못했다는 건,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작령환이 고독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독이 아니니 그럴 수 있겠군. 하긴, 당숙께서 만드신 재료와 작령환에 들어가는 재료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지.”
당가에서 독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거론될 인물이, 바로 지금 말을 한 당추열이었다.
그런 그가 적령환이 고독을 죽이진 못했을 것이라 말하자, 다들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그의 지식에 비빌 사람은 없었기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당추열은 조용해진 틈을 타서 재차 말을 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나, 지속해서 공급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임시방편에 불과한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소. 가주께서는 이 점을 조속히 해결해야 할 것이오.”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시후에게 쏠렸고, 이내 당모준에게 옮겨 갔다.
문제를 해결해 준 건 시후였지만, 확실히 언제까지 독각혈망의 독에 기댈 수만은 없었다.
양은 무한정하지 않으니깐.
때문에, 다시 수군수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당장에 정리도 끝나지 않았는데 운남에 신경 쓸 여력이 없지 않으냐는 의견부터, 어차피 독왕문을 와해한 것과 마찬가진데 추혼대를 보내서 확실히 운남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전자의 의견은 당장은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말이었고, 후자는 이 기회에 당가의 손길을 운남에 확실히 뻗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두 의견 다 일리는 있었다.
흑련회에서 당가를 노리고 있는 게 포착되었으니, 밖으로 인원을 내돌리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운남에 마땅한 문파가 없으니 적당히 인원을 보낸다면 애뢰산 인근을 먹을 수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채집꾼들도 당가의 보호 아래 들어올 것이고, 채집량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날 것이다.
고민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당모준의 표정에서도 드러났다.
그가 침묵할수록 의견이 더욱 극명하게 나뉘었다.
“당가가 언제부터 눈치를 살폈소!”
“어허, 눈치라니? 시국을 살피는 눈이 이리도 어두워서야······. 쯔쯔.”
“두렵다면 두렵다고 할 것이지.”
“뭐? 겁이 많기로 따지면 네놈만 한 사람이 당가에 있는 줄 알더냐? 열 살 때까지······.”
“그 이야기는 왜 꺼내오!?”
방치가 길어질수록 내부는 시장통 못지않게 시끄러워졌다.
다만, 당모준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지 입을 열지 못했다.
부담감이 상당할 것이다.
혹여라도 운남에 사람을 보낸다는 결정을 내렸다가 목숨이 위험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가주,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면 다수결로 결정하는 게 어떻소?”
“그거 좋은 생각이오. 이번 일은 사안이 막중하니, 가주 혼자만의 생각으로 판단하기 어렵지 않소이까?”
여기저기서 그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다수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당모준은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결정을 다수결로 한다면 서로 싸울 뿐이오. 추혼대가 돌아오면 추혼 이조와 삼조를 운남으로 보내겠소. 그리고 장로분들 중에 몇몇을 뽑아 함께 보낼 것이고, 운남에도 구극전과 비슷한 역할을 할 인원을 뽑겠소. 추열, 추천할 만한 인물이 있는가?”
“현 구극전의 부전주로 있는 명종과 그 아래 있는 중벽이 꽤 해박하오.”
“그렇다고 부전주를 보낼 순 없으니 다른 사람을 추천해 보시오.”
“음······. 그럼 추양이 적당할 것 같소. 최근 몇 년간 운남을 오가며 많은 독을 만져 봤으니, 조금만 가르치면 중벽만큼은 할 것이외다.”
당추열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기 아들을 추천했다.
덕분에 내부는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운남은 사지가 될지도 모른다.
당추열은 그런 자리에 제 아들을 보내겠노라 말하는 것이다.
철저히 능력만을 생각하겠다는 태도.
당모준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말을 내뱉진 못했다.
* * *
시후는 손에 들린 주머니 두 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는 어른 주먹만 했고, 하나는 아이 주먹만 했다.
“자네가 먼저 요구한 주머니가 큰 것이네.”
“아, 고맙습니다.”
“아닐세. 나로서도 매우 뜻깊은 작업이었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확실히 독각혈망의 뿔을 다뤄 보는 경험은 쉬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아직 독니와 독낭까지 남아 있으니, 그의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시후는 그의 미소에서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당패철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가 자기 아들을 운남으로 보내려 한다는 것을.
“별일 없을 거예요.”
시후는 주머니를 품에 넣으며 흘려지나가 듯 말을 던졌다.
막 돌아서려던 당추열의 몸이 멈칫했다.
“독왕문을 정리하면서 운남에 어중간한 문파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들로는 일을 꾸미기가 쉽지 않죠. 그렇다면 직접 개입해야 할 텐데, 이번에 당가의 지독한 모습을 보고도 다시 달려들진 않을 테죠.”
“······ 모르지. 더욱 불같이 날뛰며 달려들 수도 있지 않은가.”
“에이, 여태까지 행보가 그랬는걸요?”
자금성의 일이 그러하였고, 녹림과 수로채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수틀리면 다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시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태연할 수 있지만, 당추열은 자기 아들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었다.
아무리 공명정대한 사람이라고 한들, 자기 아들을 추천하고 싶었겠는가.
다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내린 결과가 그러했을 것이다.
시후도 그의 도움을 받았기에 모든 걸 말해 줄 순 없지만, 최소한의 희망을 안겨 줄 순 있었다.
“놈들의 행보를 생각해 보시면 간단해요.”
시후의 말을 흘려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조금 안심이 되는군.”
“흐흐,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제가 드린 놈으로 이것저것 만들어 보세요.”
“가려는가?”
시후의 음색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당추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가야죠. 어차피 놈들을 데리고 온다고 해서 제가 정보를 토해내게 할 것도 아니니깐요.”
“새로운 독을 만들면 자네에게 보내 주겠네.”
“제가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준다는 데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작별의 인사를 나눈 뒤, 휴심각으로 돌아가 짐을 쌌다.
이제 제갈세가로 돌아갈 때였다.
제갈려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아니, 자운유성창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 14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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